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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플레
애슬리 페커 지음, 박산호 옮김 / 박하 / 2016년 5월
평점 :
절판
인생이 항상 달콤하기만 하면 얼마나 좋을까요. 하지만 순탄한 평지만 걷는다면 지루해서 견디기 힘들 겁니다. 오르막과 내리막, 웅덩이에 빠지기도 하고 극복해 나가기게 우리들의 삶이겠죠. 소설 《수플레》는 세 나라에 살고 있는 세 사람의 인생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제목처럼 달콤하고 보드라운 프랑스 디저트 '수플레'를 만나면서 고난을 극복하는 과정을 옴니버스 식으로 풀어나가고 있는데요. 읽는 내내 세 사람의 삶에 감정이입을 하기도 하고, 터키와 미국, 프랑스의 음식들을 만나보게 되는 호사도 누렸답니다.
수플레는 변덕스러운 미인과 같다. 아무도 그녀의 기분이 어떻게 변할지는 예측할 수 없다. 그 어떤 책에도 수플레를 완벽하게 만들 수 있는 비결이 없다. 그 어떤 사람도 수플레를 완벽하게 만드는 법을 말할 수 없다. (중략) 그릇과 오븐이 닳도록 만들어보고 마침내 아주 긴 전쟁 끝에 생긴 자제력을 얻고서야 그런 수플레를 만들 수 있는 것이다.
P 15
파리에 사는 '마크'는 세상의 모든 것이었던 아내 클라라를 잃고 깊은 슬픔에 빠졌습니다. 아내 바보로 살아오며, 삶의 이유가 아내였던 마크는 갑자기 혼자가 되어 버렸고 절망을 극복하는 방법으로 '요리'를 택합니다. 아내가 해주던 일상을 스스로 해나가야 하는 마크는 조리 도구들과 식기들을 사기 시작하면서 요리법도 익히게 되죠.
오늘이야말로 그의 세계를 바꿀 날이었다. 용감해져야 했다. 먼저 자신과 싸워야 했고, 그다음엔 이 도시와, 나아가 그의 모든 기억과 싸워야 했다. 그는 침대에서 나오기 전에 오늘이 지나가면 만신창이가 될 거라는 걸 알고 있었지만 마찬가지로 더 이상 인생으로부터 도망칠 수 없다는 뼈저리게 느끼고 있었다.
P 122
마르셰 백화점 주방용품 코너의 직원 '사비나'를 만나며 클라라 없이 처음 누군가를 우정도 나눕니다. 익숙하지 않은 조리기구를 다루며 베이고, 데이고, 상처투성이지만 혼자서 무엇인가를 만들어 먹을 때의 희열 느끼며 상처를 스스로 치유하고자 하죠.
뉴욕에 사는 필리핀 계 '릴리아'는 갑자기 찾아온 남편 병간호로 꼼짝도 할 수 없게 됩니다. 원래 말하기를 즐겨 하지 않았던 남편 아니는 하나부터 열까지 아내의 도움을 받아야 하는 처지가 되었습니다. 게다가 입양한 남매 '장'과 '덩'은 양부모에게 비난과 멸시를 퍼붓기 일쑤였고, 공허한 삶을 채워주는 주방에서 나갈 수 없는 처지가 되어버린 릴리아.
'잊지 마라. 모든 재료에는 대용품이란 게 있단다. 가장 중요한 점은 당황하지 않는 거야.' 릴리아는 항상 그 충고를 마음 한구석에 간직하고 요리했다. 아무래도 이제는 엄마의 충고를 인생에도 적용해야 할 것 같았다.
(중략) 릴리아는 요리 하나도 구할 수 없는 것처럼 자신의 인생도 구할 수 없었다. 인생에서 빠진 재료에 대한 대용품은 없었다. 아무리 전분을 많이 써도 그녀가 원하는 만족을 맛볼 수 없었다. 인생의 맛들은 섞여들지 않았다. 릴리아의 인생은 궁극적인 하나의 진미를 만들어낼 수 없었다. 인생의 양념은 항상 너무 많거나 적었다. 우주는 한 자밤이 얼마나 되는 양인지 전혀 감을 잡지 못 했다.
P 290
가장 이해가 가지 않았고 분노가 치밀어 오르는 릴리아의 삶. 예전 한국 어머니들도 아닌데 왜 이런 대접을 받으면서 사는 걸까요. 한국 어머니들이 잘 걸리는 화병이 걸린 게 분명합니다. 남편에게 아내 대접도 아이들에게 부모 대접도 받지 못하지만 누구에게 호소하거나 화내지 않고 그냥 참는 게 미덕이라고 생각하는 걸까요. 어느 날 남편의 유언장의 진실을 알게 된 후 탈출을 위해 꾸미는 소심한(?) 계획을 따라가며 응원하는 마음도 들었습니다. 제발 릴리아가 자신만을 위해 살아가길 간절히 원하게 되더라고요.
마지막으로 '이스탄불'에 살고 있는 '페르다'는 치매에 걸린 엄마 때문에 생고생입니다. 엄마보다도 아늑한 주방에서 마음껏 요리하는 것이 페르다의 최대의 낙! 그러나 엉덩이뼈가 다치고 치매까지 온 엄마는 집으로 모셔오면서 모든 것이 뒤죽박죽이 되었습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딸의 임신 소식에 결혼까지 더해져 신경 쓸 일이 많아진 페르다에게 엄마는 더욱 어리광을 피우며 아기가 되어갑니다. 치매 환자를 돌보는 일은 가족도 등돌리게 한다는 말을 이해합니다. 지친 페르다는 급기야 해서는 안될 생각까지 하게 되죠. 그러나 누가 페르다를 비난할 수 있을까요.
매일매일이 페르다에게는 또 다른 전쟁이었다. 그녀 자신과, 그녀의 어머니와, 어머니가 누워 있는 시트와 기저귀들과의 전쟁. 그것은 결코 끈나지 않는 전쟁이었다. (중략) 페르다가 요리에 변화를 주고 싶은 것은 실제로 다른 맛을 보고 싶어서가 아니라 단지 지금 이 현실에서 빠져나올 다른 방법이 없어서였다.
P 119
'수플레'는 달걀과 버터 등으로 만든 디저트입니다. 능숙한 셰프도 매번 수플레의 봉긋한 부풀림을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기원한다 할 정도로 성공하기 어려운 디저트라고 합니다. 달달한 제목과는 달리 소설 속의 상처를 가지고 있는 세 사람은 《수플레》 요리 책을 접하면서 완성하고자 고군분투합니다. 수플레가 봉긋하게 부풀어 오르는 그 찰나의 기쁨을 만끽하기 위해 매번 폭삭 꺼져버리는 좌절을 수도 없이 맛봅니다. 어쩌면 우리도 수플레처럼 부풀어 올랐다가 꺼졌다가를 반복하지만 솟아오를 날을 기대하며 살아가는 방식은 비슷할 것입니다. 세 나라의 전통 음식부터 다양한 디저트와 음료, 차까지. 음식은 타인과 말이 필요 없어도 교감하기에 가장 좋은 매개체입니다. 요리를 통해 무너진 삶을 다시 세우고자 하는 세 사람의 뒷 남은 여정이 궁금합니다. 그리고 응원하겠습니다. 오늘 보다 더 나은 삶을 위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