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친 포로원정대
펠리체 베누치 지음, 윤석영 옮김 / 박하 / 2015년 4월
평점 :
절판


무식하면 용감하다더니, 이 말이 딱 맞아떨어지는 세 사람이 있습니다. 바로 주인공과 그 친구들인데요. 전쟁 포로로 수용소에 갇힌 세 사람이 펼치는 좌충우돌 케냐 산 정복기. 무지했기에 가능했고, 무모했기 행복했던 그들만의 원정기, 한번 들어보실래요?


위키디피아는 이들의 무모한 도전을 이렇게 정의하고 있습니다.


케냐 산 레나나 봉은 제2차 세계 대전 중 세 명의 이탈리아인에 의해 등정되었다. 영국군 포로였던 그들은 포로수용소에서 케냐 산을 바라보던 중 등반하고 싶은 꿈이 생겼다. 이들은 반년에 걸쳐 식료품을 비축하고 등반 장비를 손수 제작한 후 수용소를 탈출, 등정에 성공했다. 세 명은 하산 후 수용소로 돌아와 탈출에 대한 벌로 28일 감방형을 선고받았다.


이 황당무계한 일이 바로 《미친 포로원정대》 원동력입니다. 정말 살짝 미쳐야 아니, 대놓고 미쳐야 가능한 이들의 원정기는 어느 날  철조망 사이에 보이는 케냐 산을 보기 전과 후로 나뉘게 됩니다. 



일렁이는 운해를 뚫고 우뚝 솟은, 천상에서나 있을 법한 산이 칙칙한 두 막사 건물 사이에 그 모습을 드러내었다. 거대한 치아 모양을 한 검푸른 색의 깎아지른 암벽. 지평선 위로 두둥실 떠 있는 푸른빛 빙하를 몸에 두른 5,200미터 높이의 거대한 산을, 이때 처음 보았다. 낮게 깔린 구름이 이동하며 급기야 그 위용을 숨길 때까지, 나는 멍하니 서 있기만 했었다. 이후 몇 시간이 지나는 동안 여전히 그 장면에 정신을 빼앗기고 말았다.

나는 완전히 사랑에 빠져버렸다.



지옥 같은 포로수용소에서 식량을 모으고, 몰래 장비를 만들고, 원정대원을 모아  1월 24일부터 2월 10일까지의 여정을 시작하기에 이르죠. 어떻게 이런 생각을 할 수 있었을까요? 지긋지긋하고, 비참한 수용소 생활이 가져다준 무력함이 기폭제였을까요? 아닙니다. 그냥 세 사람은  케냐 산과 사랑에 빠졌기 때문입니다. 사랑에 빠지면 아무것도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고, 오로지 사랑하는 사람만을 생각한다고들 하죠. 그 사랑의 호르몬이 이성이 아닌, 산을 통해 뿜어져 나왔으니 문제죠. 아마도 앞이 보이지 않는 지루한 생활 속에서 자유가 그리웠을 그들에게 산은 어서 내게 오라며 손짓하고 있었을지도 몰라요.


개인적으로 기를 쓰고 위험천만한 산을 오르고, 내려오는 과정을 즐기는 사람들이 이해가 가지 않았어요. 산을 왜 오르냐는 질문에 아무개는 이렇게 말했죠. '그냥 산이 거기 있었기 때문이다'. 아직도 산에 오르는 사람들을 다 이해한 것은 아니지만요. 대자연과 함께 자신과 마주하고 한계치를 시험해 보고 싶은  인간의 정복 욕구 때문에 미친 포로원정대도 케냐 산을 올랐던 게 아닐까 짐작해 봅니다.


저자 '펠리체 베누치'는 훗날 자신들의 도전이 얼마나 정신 나간 짓이었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8년이나 실제 등반을 하지 못한 상태였고, 2년 동안 전쟁 포로로 지내며 몸이 쇠약해져 있었으며, 준비한 식량이라고 해봤자 허기를 면할 만큼이지, 충분한 공급이 되지 않는 상태였습니다. 게다가 짐꾼 없이 혼자 배낭의 무게를 감내해야만 했고, 정보도 부족했기에 베이스캠프는 등반코스와는 멀리 떨어져 꾸려지거나, 탁월한 등반가도 '여름에조차 가망이 없다'라고 말한 산을 겨울이라는 계절에 다녀왔다는 사실. 해발 5,200미터 고도의 산을 악조건 속에서 다녀왔다는 것은 꿈과도 같은 일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원정대는 끝내 최고 봉우리인 바티안까지 가는 데는 실패했지만, 대신 레나나에서 깃발을 꽂고 돌아옵니다. 하지만  세 친구는 산 정상을 정복했다는 것보다 더한 것을 성취했습니다. 바로 '자유인의 의지'를 말이죠. 게다가 다시는 볼 수 없을 자연이 주는 장관을 일생일대의 선물로 기억할 것입니다. 에메랄드 빛깔을 닮은 초록 호수, 무한대로 펼쳐진 지평선, 끊임없이 변모하는 구름 덮인 산, 믿을 수 없을 만큼 깜깜한 밤하늘과 어마어마하게 큰 북동면의 암벽들, 얼음 구멍에서 마신 차디찬 물 기묘한 하프 연주 소리와 안개 속에서 들여오는 종소리, 기묘한 모양의 로벨리아와 자이언트 그라운드셀, 헬리크리섬의 풍만한 매력, 전설적인 형태의 '플라잉 더치맨', 코끼리의 신비스러운 서식지, 바티안과 빛이 연출하던 그림자놀이, 밤이면 숲에서 들려오던 원인 모를 이상한 소리들, 야영지에서 맡던 모닥불과 히스의 냄새, 한 조각의 비스킷과 달콤 쌉싸름한 블렌디.



마치 그들은 꿈을 꾼 것과도 같았습니다. 무의미하게 흘러가는 수용소 생활에서 노력하면 얻을 수 있는 성취감은 일종의 마약과도 같은 유혹이었겠죠. 이름이 아닌, 한낱 번호로 불렸던 그들에게 자신의 정체성을 찾는 일. 살아있음을 확인 시켜준 산행은 삶은 여전히 도전할만하고, 흘러간다는 충만한 기쁨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앞으로 포기하고 싶고, 무기력한 삶이 이어질 때면 다시금 책장을 펼쳐 읽어보면 좋을 거란 생각을 했어요. 고난을 유머로 승화시킨, 펠리체 베누치, 귀안, 엔초의 이야기는 영원히 기억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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