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통은 상대적이라 타인의 삶을 감히 판단하기 어렵다. 때문에 이해한다는 말도 공감한다는 말도 섣불리 하지 못할 때가 있다. '모든 사람에게는 저마다의 아우슈비츠가 있다'는 말은 타인의 고통은 비교할 수 없다는 말과 같다. 특히 아우슈비츠 생존자 같은 형용할 수 없는 시련을 겪은 사람에게는 더욱 어떠한 위로도 하지 못한다.
다만 곁에 있어주는 것만으로도 그 마음과 무게를 나눌 수 있길 바랄 뿐이다. 이런 생각을 하게 된 이유는 삶이 힘들다고 느낄 때쯤 만난 책이었기 때문이다. 나보다 더 힘든 사람을 떠올리며 삶의 의미와 자유를 떠올려 본 숭고한 시간을 보냈던 까닭이다.
서문이 특별해서 소개해 볼까 한다. 할아버지의 과거를 전혀 몰랐던 손자 '알렉산더 베설리프랭클'이 19세 때 누나와 할아버지 대신 학회에서 환영사를 낭독하러 가던 중 할아버지의 정체를 처음 알게 된다. 비행기에서 홀로코스터의 경험을 기록한 《죽음의 수용소에서》을 읽고 지옥에서 살아 돌아왔다는 걸 자각한다.
여느 손자와도 잘 놀아주고 가끔 신경질적이긴 했지만 대체로 온화하고 다정했던 할아버지의 인생에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가늠하기 어려웠다. 집으로 돌아왔을 때 아무도 남아 있지 않은 절망 속에서 삶을 계속 이어갈 수 있었던 이유가 궁금해졌다.
빅터 프랭클이 택한 방식은 고통에 잠식되지 않고 헤어 나오는 것이었다. 그는 1905년 빈에서 태어나 빈 대학교에서 의학 박사학위와 철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제2차 세계대전 때 테레지엔슈타트, 아우슈비츠, 다항 등 강제수용소를 번갈아 다니며 3년간 내일은 죽을 거란 두려움 속에서 살아갔다.
그는 끝내 살아남았지만 여동생을 제외한 부모, 남동생, 아내가 죽었으며, 수용소에서 나온 이후 40년간 평생 동안, 집필과 상연 의미치료(로고테라피)를 체계화하며 인류애 충전에 이바지했다. 수많은 나라에서 그의 책이 출간되었으며 1997년 92세로 생을 마감했다.
그는 삶의 의미를 인간이 살아가는 데 가장 중요한 것이라고 봤다. 즉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인데, 다분히 의미지향적인 존재라는 말이며 그럴 때라야 행복해진다고 말한다. 의미를 발견한 인간은 행복해질 뿐 아니라 고통을 견디는 능력도 증가한다고 말한다. 삶의 목적을 잃으면 우울증에 빠지고 그런 사람은 살아가기 쉽지 않다.
또한 죽음이 정해져 있기 때문에 지금 삶을 가치있게 살아가려 애쓰고 일분일초라도 의미 있게 보내려고 노력한다는 점이다. 오늘 할 일을 내일, 혹은 그 이틀 뒤로 무한정 미루게 된다면 어떨까. 유한성의 압박으로 인류는 발전하고 용감해진다. 빅터 프랭클의 삶은 아우슈비츠에서 한번 죽었지만 생존자로서 두 번째 삶을 가치있게 보냈다.
꼭 무언가가 되려고 노력해도 무언가가 되지 않을 수 있다. 실망하거나 자책하지 말고 태어났으니까 산다는 것도 인생의 목적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혐오와 대립, 팍팍한 물가로 힘들 날이 지속되고 있지만 어느 때보다 자유를 사랑하고 책임지고자 할 때 아름다운 것은 바로 '나'라는 사실을 알게 해준 고마운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