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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에서 남편들이 내려와
홀리 그라마치오 지음, 김은영 옮김 / 북폴리오 / 2024년 9월
평점 :
![](https://image.aladin.co.kr/Community/paper/2024/0929/pimg_7650201494446858.jpg)
제목 참 잘 지었다. 원제는 맹숭맹숭한 제목 'THE HUSBAND' 자고 일어나니 미혼인 로렌의 다락방에서 남편이란 작가가 끝도 없이 생겨난다니. 이게 무슨 황당하고도 감사한(?) 일인가. 매일 아니, 몇 시간, 몇 분에 한 번이라도 원하는 남편을 갈아치울 수 있다면? 이 기발한 발상은 호주 출신의 소설가 '홀리 그라마치오'의 데뷔작이다. 게임 디자이너 출신인 작가는 게임 속에서 다양한 캐릭터로 바뀌는 것처럼 판타지 설정으로 페이지터너 기능을 충실히 수행하고 있다.
평범한 토요일 밤 친구의 결혼 축하 모임에 다녀온 로렌은 처음 보는 남성이 집에서 남편 행세를 하고 있다. 낯선자의 침입을 경찰에 신고하려던 순간, 손가락의 결혼반지, 휴대폰 배경화면, 친구와 가족의 자연스러운 반응을 보고 생각을 고쳐먹는다. 갑자기 유부녀가 되었다.
놀랍고 당황스러운 것도 잠시 로렌을 저 남편, 이 남편과 함께 하며 연애와 결혼 생활을 경험한다. 현실 속에서는 연애와 결혼, 이혼이 쉽지 않지만 게임, 상상, 꿈속에서는 자유자재로 가능한 상황이 소설 속에서 펼쳐져 짜릿한 쾌감을 전해준다. 독자는 다음 남편이 내려옴에 따라 달라지는 상황을 기대하고, 실망과 흥분을 오고 가며 다채로운 감정을 느낄 수 있다. 과연 내가 '로렌이라면'하고 주인공의 감정에 이입하기까지 얼마 걸리지 않는다.
남편이 바뀔 때마다 가족, 친구의 상황도 세트로 변하는 게 신기했다. 여러 남편을 만났지만 쉽게 만족하지 못했다. 외모, 피지컬, 성격, 직업, 인종, 국적이 달라져도 말이다. 과연 언제까지 남편을 화수분처럼 만들어 낼까? 남편이 바뀔 때마다 가족, 친구와 시간도 지워버리는 짓을 언제까지 반복하게 될까? 진정한 반려자를 찾아가는 여정은 쉽게 끝나지 않고 수백 가지의 인간 군상을 맞으며 성장한다.
결혼은 싫지만 남편을 갖고 싶은 요즘 MZ 세대의 마음을 취향 저격한 소설은 마치 영화 <뷰티 인사이드>처럼 원하지 않는 모습과 상황으로 살아가는 설정이다. 다락방에 블랙홀이 있나? 슈뢰딩거의 고양이? 양자역학? SF적인 물음이 머릿속에 떠다닌다.
이야기는 흥미롭고 재미있다. 결혼을 해봤다면 공감할 만한 내용이 웃음을 유발한다. 지긋지긋한 남편과 평생을 함께 해야 한다는 고정관념을 탈피해 200여 명의 남편과 살아 볼 수 있다면 어떨지 궁금해진다. 다양한 형태의 결혼이 소개되고 19금의 자극적인 설정도 거침없이 등장한다.
한 번 잡으면 끝낼 수 없는 몰입감 높은 필력은 다소 두께감이 있지만 금세 읽어갈 수 있었다. 벌써 판권이 팔렸을 것 같은데 (역시 출간 전 전 세계 12개국 판권이 계약되었다고..) 넷플릭스 시리즈나 영화로 만들어질 스토리다. 남편이 바뀜에 따라 주인공의 인생도 세트로 바뀌는 설정은 21세기 연애, 결혼관에 묵직한 질문을 던진다.
다만 아쉬웠던 건 로렌의 1인칭 시점으로 진행되면 좋았을 거 같다. 3인칭 전지적 작가 시점이라 로렌과 로렌의 지인, 친구, 가족, 남편을 관찰하는 기법이 대체로 산만하다. 로렌의 시점과 감정으로 흘러간다면 좋았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