맡겨진 소녀
클레어 키건 지음, 허진 옮김 / 다산책방 / 202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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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맡겨진 소녀》는 영화 <말 없는 소녀>의 원작이다. 영화 보기 전 긴 단편 소설인 원작을 읽어봤다. 책도 영화도 길다고 좋은 게 아니다. 시, 단편이 주는 짧지만 강렬한 여운이 아일랜드 소설가 '클레어 키건'의 손에서 탄생했다. 100P가 채 안 되는 소설은 가난하고 형제 많은 집안에서 자란 소녀가 먼 친척 집에 며칠 머물게 되는 이야기다.

1981년 여름, 아일랜드 시골에 사는 가족은 다섯째 아이의 출산을 앞두고 있다. 그중 위로 둘 언니와 밑에 남동생, 곧 태어날 남동생 사이에 끼인 셋째 소녀는 킨셀라 부부네 집에 맡겨진다. 소녀의 집은 가난해 제대로 먹이지도 입히지도 가르치지도 못하는 형편이다. 늘 피곤에 지친 엄마 곁에서 일찍 철들어 버린 아이들은 말이 없다. 남들 눈에는 조용하고 조숙한 아이로 보일 거다. 손도 많이 가지 않으니까 키우기 쉽겠다지만, 주눅 든 모습이 안쓰럽기만 하다.

거친 아빠는 부유하지만 자식이 없는 노부부 집에 며칠 소녀를 부탁한다. 처음으로 남의 집에 가보는 소녀는 따뜻한 환대를 경험한다. 첫날 환경이 바뀌어서인지 시트에 실례를 한 소녀를 나무라지 않고 축축한 매트리스 때문이라고 자신을 탓하는 성정을 가졌다.


함께 식사 준비를 하고 구두도 길들여주며, 우편함까지 달리기를 시키며 시간을 재주는 자상한 '존 아저씨'는 무심하고 거친 아버지와는 달랐다. 책 읽는 법, 대답하는 법, 따스하고 맛있는 음식을 내어주는 포근한 '에드나 아주머니'. 집에 있던 남자아이 옷만 입다가 시내에서 예쁜 옷을 사주던 날 우연히 장례식에 갔다가 엄청난 사실을 알게 된다.

비밀스러운 부부는 어릴 적 개를 따라 거름 구덩에서 빠져 죽은 아들이 이었고 가슴에 묻은 채 살아가던 안타까운 사연의 주인공이었다. 마을 사람들은 부부의 딱한 사정을 동정하면서도 멋대로 안줏거리로 삼아 부부와 소녀에게 상처를 준다.

"우리 둘 다 말이 없다,

가끔 사람들이 행복하면 말을 안 하는 것처럼.

하지만 이 생각을 떠올리자마자

그 반대도 마찬가지임을 깨닫는다."

P28


소녀의 이름은 끝까지 나오지 않는다. 이름 없는 소녀, 다섯 형제 중 셋째. 단식투쟁(영화 <헝거>속 상황) 등 정치적인 상황과 마름 병이 번진 흉작 등 1981년 아일랜드 상황의 어려운 상황이 전개된다. 하지만 소녀는 먼 친척 집에서 생의 가장 아름답고 찬란한 여름을 보냈다. 그리고 '조용한 아이'는 결코 흠이 아닌 칭찬임을 알게 된다. 말 한마디로 천 냥 빚을 갚기도 하지만, 한 번 엎지르면 주워 담을 수 없는 말의 위험성을 소녀의 진중하고 사려 깊은 행동으로 보여준다.

영화도 그렇다 구구절절 설명하거나, 명확하게 이야기해 주지 않아도 전달되는 정서. 이 암시와 열린 결말을 자기 것으로 만들어가는 상상력을 믿는다는 거다. 소설의 전반적인 분위기는 목가적이며 느슨하고 아름답다. 고요하고 신비롭기까지 하며, 부부는 <빨간 머리 앤>에서의 커스버트 아주머니, 아저씨가 떠올랐다. 마지막에 "아빠"라고 부르는 두 아빠를 향한 소녀의 이중적 마음이 꽤나 먹먹하게 아파왔다. 원제 'foster'는 위탁으로 해석할 수 있는데 '맡겨진 소녀'에서 영화 'The Quiet Girl'로 바꾼 제목도 잘 어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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