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르케
매들린 밀러 지음, 이은선 옮김 / 이봄 / 202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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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잡한 그리스 신화를 정통하기란 쉽지 않다. 그리스와 로마식 이름이 다르기도 하고많은 등장인물들 사이에도 엮이고 엮이는 에피소드가 무궁무진하기 때문이다. 그리스 신화 중 '키르케'라는 마녀가 있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님프 중 하나이고, 많은 에피소드가 없어서일까? 아니었다. 바다의 님페 페르세이스(페르세)와 티탄이자 태양의 신 헬리오스 사이에서 태어난 딸로 매라는 이름의 뜻을 갖는다. 동기간으로는 여동생 파시파에(훗날 미노스의 아내가 되며 황소와 동침해 괴물 미노타우로스를 낳음), 남동생 페르세스(훗날 페르시아 왕가의 조상이 됨). 독수리란 이름의 아이에테스(훗날 콜키스의 왕), 아이에테스의 딸인 메데이아(조카)의 고모, 삼촌으로는 인간에게 불을 가져다준 프로메테우스다.

 

《키르케》는 1978년 생 매들린 밀러의 손에서 새롭게 여성 신화로 거듭났다. 그동안 남성 중심 서사에서 천대받고 미움받는 팜므파탈 키르케의 전사(캐릭터 히스토리)를 새롭게 각색했다. 튼튼한 서사와 주변 인물들이 조화롭게 얽히며 한층 풍부한 캐릭터를 완성했다.

 

키르케는 엄청난 능력의 부모님의 자식으로 태어났으나 형제자매들과 다르게 아무 능력 없는 신이었다. 존재감도 없고 미천한 신분이었다. 그러다 어부 글라우코스를 만나 사랑에 빠져 그를 신으로 만들게 된다. 그 과정에서 쓰지 말라는 약초를 써 파란 피부와 지느러미가 달린 신으로 글라우코스를 창조하게 된다. 드디어 태어나 처음으로 쓸모를 찾은 키르케의 정체성 찾기는 글라우코스의 마음이 변하며 한 번의 각성을 맞는다.

 

자신과 사랑을 맹세 할 것이란 착각에 빠졌던 순진한 키르케. 글라우코스는 인간이었을 때 비추었던 순수함을 잃고 전지전능한 신놀이에 흠뻑 빠져 있었다. 이에 키르케는 글라우코스와 결혼하겠다는 님프 스킬라는 괴물로 만들어 버려 아버지의 노여움을 사고 무인도로 추방 당한다. "너 같은 애"라며 깔보고 무시하던 아버지를 향해 "아버지의 생각이 틀렸다"라고 반박하는 키르케.

 

이때, 누구도 알아주지 않던 키르케의 존재감이 발현되는 것을 물론, 신과 인간 모두에게 대항할 능력인 독약을 제조능력을 발견한다. 독약을 의미하는 파르마콘(pharmakon)은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 약이 되기도 독이 되기도 하는데, 그런 술수를 파르마키아라하고 이런 능력을 갖춘 마녀는 파르아키스라 한다.

 

동생 아이에테스가 항상 말하던 독립심과 자립심을 획득한 키르케는 신과 인간계 사이에서 무시무시한 능력자가 된다. 흔히 사람의 마법에 빠진다는 말이 키르케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키르케가 유배되어 있는 섬 아이아이에에 들어온 사람들 동물(돼지)로 만들어 버리는 것처럼 고대인들은 사랑이란 여성이 남성에게 거는 마법이라고 생각한 것 같다. 그도 그럴진대. 글라우코스의 사랑에서 쓴맛을 보았을 키르케의 뒤끝이 남아 있는 건 아닐지 상상해 봤다.

 

훗날 키르케는 오디세우스 사이에서 텔레고노스를 낳는다. 아버지를 미처 알아보지 못하고 오디세우스를 죽인 후 그의 그의 아내 페넬로페(의붓 어머니)와 결혼하는 참극도 벌어진다. 오이디푸스 신화가 떠오르는 대목이다. 종종 신화에서 벌어지는 근친상간, 존속살해는 지금으로써는 뜨악할 일이나 왕위를 계승하기 위한 한 형태로 볼 수 있다. (당황스럽지만 그러려니 하고 넘어가야 신화를 읽는 데 도움이 됨)

 

드라마틱 한 과거를 알고 나니 훨씬 입체적이고 매력적으로 보이는 키르케의 매력에 빠진다. 키르케는 오디세우스의 모험과 아르고스 원정대와도 얽힌다. 아르고스 원정대에서는 또 다른 마녀인 메데이아(조카)가 등장한다. 소설 속에서는 주목받지 않았던 미노타우로스와 다이달로스의 일화도 전개되는데 여동생 파시파에와 얽혀 있다. 어쩌면 하나같이 한 배에서 나온 형제자매들이 키르케를 이용하려고만 드는지 무섭기도 했다. 때문에 부모도 형제자매도 없이 홀로 우뚝 마녀가 될 수 있는 기반이 만들어진다. 삼촌 프로메테우스가 인간을 사랑한 마음도 본받았다 할 수 있다.

 

소설 《키르케》를 통해 현대 여성이 감동받는 이유는 인간은 공포로 몰아넣지 않고 도움을 주려 하려는 선의라고 생각한다. 신들이 흔히 갖고 있는 권위, 전지전능함, 어느 땅도 바다도 다스리지 않는 물욕, 신전도 없는 키르케가 자아와 능력하고 발견하고 성장하는 스토리가 짜릿하게 펼쳐진다.

 

교사로 일하다가 데뷔작 《아킬레우스의 노래》로 전업 작가의 길을 걸은 매들린 밀러는 기원전 8세기에 호메로스가 쓴 《오디세이아》에서 영감받아 《키르케》를 썼다고 한다. 때문에 오디세우스가 고향을 그리워하고 돌아가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마음을 투영되어 있기도 하다. 그러나 정작 돌아갈 고향이 없는 서글픈 마음도 반영되어 있다.

 

무엇보다도 남성 중심 서사로 알던 신화를 새롭게 여성 서사로 쓴 패기가 돋보인다. 호메로스의 방대한 대서사시 《오디세이아》에서 발톱만큼도 중요하게 등장하지 못한 채 지나가는 키르케를 전면에 내세워 새롭게 주조했다. 서양 문학에서 처음 등장한 마녀 캐릭터답게 남성보다 더 큰 힘이 키르케에게 느껴진다. 서양 중세 시대 여성의 힘을 두려워하던 남성들이 마녀로 몰아간 것처럼 능력자 여성을 두려워 한 마음을 지금도 계속된다. 나아지고 있는 중이지만 앞으로 더 나아가야 한다.

 

최근 종영을 마친 드라마 '부부의 세계' 속 지현우 캐릭터는 원작 '닥터 포스터'에서 키르케의 조카이자 또 다른 마녀 메데이아를 모델로 삼았다. 역사는 과거와 현재와의 대화다. 21세기에 다시 읽히는 신화 소 여성들의 등장이 반갑다. 방대한 분량과 캐릭터에도 불구하고 흥미롭게 읽어갈 수 있었던 건 작가의 필력과 키르케를 향한 애정, 촘촘한 이야기가 아닐까 한다. 혹 휴가지에서 읽을 만한 책을 찾는다면 《키르케》를 추천한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빠져드는 키르케의 마력에서 취하고 말지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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