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강빵과 진저브레드 - 소설과 음식 그리고 번역 이야기
김지현 지음, 최연호 감수 / 비채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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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거나 잘 먹는 나는 셜록 홈스의 식탐처럼 제때 끼니를 챙겨 먹지 못하고 놓치면 꽤나 신경질적으로 변한다. 그런 탓에 잘 먹고 잘 자고 잘 싸고 잘 살려고 노력한다. 어제 코로나19에 걸렸다가 퇴원한 104세 최고령 할머니를 뉴스에서 보면서 생각했다. 역시 사람은 긍정적인 사고와 웃음, 삼시 세끼가 중요하다는 것을 말이다. 할머니는 꽃님이란 이름처럼 활짝 웃고 무엇보다 삼시 세끼를 건강히 잘 드셨다고 한다. 역시 먹는 게 중요하다.

 

 

 

 

영화를 볼 때도 유독 먹는 것에 집착한다. 영화에서 주인공들이 먹었거나 주요 소재가 되었던 음식, 그냥 이름만 나왔어도 한 번 꽂히면 그날 꼭 먹어야 직성이 풀린다. 최근 본 영화 <나는보리>에서 가족들이 둘러앉아 짜장면을 먹는 장면이 세 번 정도 나놨는데 영화의 좋은 영향뿐만 아니라 영화가 끝나고 중국집을 찾아다녔다. 영화에서처럼 짜장 세트(탕수육 포함)가 만원인 곳은 어디에도 없었다. 아마도 보리네가 단골이기에 중국집 사장님의 특별 메뉴가 아니었을까 추측한다.

 

 

 

결국 다음날 짜장면과 탕수육(영화에서 이 조합은 중요!)을 먹었고, 금단 현상을 해소되었다. 가장 곤욕스러운 것은 일본 영화다. 일본 영화는 아예 대놓고 음식, 요리, 요리사, 장인에 관한 소재가 많고 나 또한 그때마다 마른침을 꼴깍 삼키며 저 맛은 어떨까 상상하고 괴로워했다.

 

 

때문에 번역가 김지현 씨의 책을 보면서 엄청난 공감을 했다. 그녀는 어릴 적 세계 명작 소설이나 소녀 소설을 읽으면서 낯선 음식, 재료 등에 열광했다고 한다. 현재는 번역가로 일하면서 우리말로 어떻게 옮길까 행복하고도 괴로운 작업을 하고 있다고 털어놓았다. 그리고 음식은 당시 그나라의 문화를 보여주는 척도기도 하기에 덤으로 세계사 공부까지 할 수 있어 좋다.

 

 

문학이 하는 일도 딱 이런 것 같다. 문학은 지극히 익숙한 것들을 새로운 시선으로 바라보게 한다. 반복되는 일상에 묻혀 있던 사물들이 본연의 맥락에서 떨어져 나오고, 평생 한 가지 용도로 써온 물건에서 갑자기 전혀 몰랐던 용도를 발견한다. 콜라를 마시기 위해 따야 하는 캔 뚜껑이, 로맨스 소설 속 가난한 연인의 손가락에서는 백금 반지가 된다. 냉동실 속 양다리 고기가, 추리소설에서는 살인 흉기로 둔갑한다. 불교도들이 교리를 깨우치기 위해 읽는 불경이, "나는 불경처럼 서러워졌다"라고 말하는 시 속에서는 서러움이라는 감정의 대명사가 된다.

P100

 

 

 

 

흔히 좋은 글에서 향기나 맛이 난다고들 한다. 맛깔스러운 문체, 향기로운 필체는 독자에게 상상 그 이상을 제공한다. 빨간 머리 앤과 다이애나가 먹었던 산딸기 주스, 《하이디》에서 나온 검은빵이 실제는 호밀빵이었다는 것, 《셜록 홈스의 모험》에 수록된 <독신 귀족> 중 셜록 홈스와 왓슨이 먹었던 차가운 멧도요 요리, 유럽 민담에서 흔히 등장하는 단추 수프(돌멩이 도끼, 손톱, 나무 등으로 치환), 젤리, 잼, 설탕 절임의 오묘한 차이점, 메리 포핀스 속 생강빵 에피소드는 맛을 상상하느라 더욱 흥미롭게 다가온다.

 

특히 이 책의 제목이기도 한 생강빵과 진저브레드는 《우산 타고 날아온 메리 포핀스》에 등장하는 음식이다. "거무스름한 색깔, 건조한 질감, 넓적하고 반듯한 형태"라고 묘사되어 있는데, 쿠키인지 케이크인지 알 수 없지만 진저브레드인 거다. 이 에피소드에서는 생강빵 보다 빵을 싸고 있는 금종이 별이 중요한데, 금종이 별을 영원히 간직하겠다는 제인과 마이클이 서서히 기억을 잃어가는 게 포인트다.

 

 

소울 푸드라는 말에 슬픈 의미도 알게 되었다. 옥수수가 전 세계적으로 가난과 연결되어 있는 재료라 슬프다. 우리나라에서는 톡톡 터지는 식감과 단짠단짠의 옥수수는 여름철 간식으로 자주 먹었는데 말이다. 노예제 시대의 남부를 배경으로 하는 미국 소설에는 소울 푸드로 자주 등장한다. 옥수수빵, 옥수수 케이크, 옥수수떡, 옥수수 팬케이크가 단골 메뉴다. 흑인 노예들에게 옥수수빵은 일상을 함께 하는 음식이었고, 주인들이 기본으로 제공하는 값싼 식재료가 옥수수였던 탓이다.

 

 

《톰 아저씨의 오두막》에서는 부부 톰 아저씨와 클로이 아줌마가 각자 다른 곳으로 팔려가던 날 아침. 클로이 아줌마는 정성을 다해 요리한다. 우리나라의 소울 푸드라 불리는 프라이드치킨이 여기에도 등장한다. 가장 살진 닭을 잡아 튀기고, 옥수숫가루를 반죽해 팬케이크를 구워 낸다.

 

 

소울 푸드(Soul food)는 한국에서 영혼을 위로하는 음식 정도로 쓰이고 있지만 아프리카에서 미국으로 끌어와 노예생활을 할 때 먹던 음식들이다. 한국인에게는 전쟁의 애환을 상기하게 만드는 부산 밀면, 돼지국밥, 부대찌개 등등이 비슷한 음식이라 할 수 있겠다.

 

 

소울 푸드라는 단어가 처음 생긴 것은 노예제가 폐지되고도 한참 뒤인 1960년 대의 일이다. 흑인들의 노래나 재즈에서 파생된 '소울 뮤직'과 흑인 인권 운동이 활발한 상황에서 '소울'이란 말이 미국 흑인들의 정체성을 반영하는 말로 부상했다. 남부에서 북부로 올라와 어엿한 미국 시민이 되었음에도 계속되는 멸시와 차별에서 버틸 수 있는 힘은 고향의 맛이었을 것이다. 어제 먹었어도 오늘 또 먹을 수 있고, 힘들 때 더욱 생각나는 소울 푸드의 정의 알고 먹으면 더 각별해질 것이다.

 

생강빵과 진저브레드는 같은 빵이지만 어떻게 번역하느냐에 따라 문맥과 해당 나라의 식문화에 충동을 낳지 않는다. 따라서 한 단어의 의미를 다른 나라 언어로 번역하면서 원래의 의미는 반감하기도 한다. 책을 통해 번역사의 단어 선택이 그 나라의 말을 모르는 독자(관객)에게 평생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 생각하게 되었다.

 

 

 

 

우리나라에는 영화 장르와 문화권에 따라 찰떡같은 번역으로 사랑받는 황석희 번역가가 있다. 또한 마블 마니아들의 광분을 산 오역 번역가도 있다. 타문화를 이해하는데 디테일한 부분도 놓치지 않는 번역가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가. 그대로 직역하지 않고 의역하고 윤색하는 것. 음식 고유의 맛과 풍미를 살리고 원재료를 손상하지 않는 일류 요리사와 비견될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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