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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도 하지 못한 말 - 최영미 산문집
최영미 지음 / 해냄 / 2020년 4월
평점 :
최영미 시인을 따라다니는 꼬리표는 많다. 투쟁하는 시인, 도발적인, 문단의 왕따, 미투, 서울대 출신, 《서른 잔치는 끝났다》 등등. 나는 《시를 읽는 오후》로 처음 알게 되었고(정말 죄송;;) 최근 미투로 다시 주목을 받으며 각인되었다. 그리스의 사포, 셰익스피어의 소네트, 벼룩을 통해 사랑을 고백한 존 던 등 영시의 즐거움을 알게 해준 고마운 책이었다. 그때 쓴 리뷰를 읽어보니 '한낮의 작열하는 태양이 조금은 누그러진 오후 4시 같은 시'라고 썼다. 가을날에 꽤나 감성적으로 다가왔던 책이었던 것 같다.
그런 최영미 시인이 동생의 권유로 2016년부터 페이스북에 짧은 글을 써왔다. 찰나의 모멘트와 잊어버리기 쉬운 문장을 버벅거리며 쓴 글, 하루하루 쓴 기록과 기고한 글들을 모아 9년 만의 산문집을 펴냈다. 2015년 7월부터 2019년 12월까지 122꼭지를 시간순으로 배열하고 편집해 5부로 나누었다. 80년대 민주화 운동, 촛불시위, 시 [괴물] 발표 후 미투 운둥의 산증이 되기까지 개인적인 이야기가 담겨있다.
기억에 남는 것은 이미 온라인에서 회자되었던 '근로 장려금 대상자'에피소드다. 강연을 마치고 백화점 식품매장에서 장을 보던 찰나, 백화점 같은 데서 장 봐도 되냐는 물음에 씁쓸한 웃음이 났다. 페이스북에 올린 탓에 어딜 가나 최영미 시인의 새로운 꼬리표가 된 것 같다.
일요일 오전 11시
유럽인들이 버린 신(神)을
아시아의 어느 뭉툭한 손이 주워
확성기에 쑤셔 넣는다
약간의 부작용도 있었지만 페이스북 시작한 건 잘한 일 같습니다. 작년보다 원고 청탁과 강의 요청이 많이 들어와서 살 만합니다. 강의료로 월세를 낼 수 있어 행복합니다. 페이스북 하라고 꼬드긴 동생, 근로장려금 받는 사실을 페북에 올리라고 격려해 준 B 씨! 장려금 나온 걸로 내가 우아한 밥 살 테니, 신촌 사무실 나오는 날 내게 연락 주세요.
건강을 돌보기 위해 수영을 하고 스트레치막대 봉체조를 하며 무화과를 사놓고 다 먹기 못해 얼려 먹는 노하우. 더운 여름날이면 하루 종일 수박 주스로 버티는 모습을 상상해 본다. 한 여름에도 에어컨을 켜지 않는 지혜가 올해도 발휘될지 사뭇 궁금하다.
이사가 지긋지긋해서 도로시 파커처럼 호텔에 살 수 있을지 관계자에게 메일을 보낸다든지, 자매들과 아픈 어머니를 교대로 간호하기도 하고, 잘못 갈아타 뱅뱅 돌아 목적지에 도착하는, 페이스북 프로필 사진 바꾸기를 하루 종일 시도하는 일. 최영미 시인에 대한 편견과 오해가 해소되는 글이다. 솔직하고 무모하고 다정하고 귀여우며 의외다.
1인 출판사를 차리고 책을 펴내고 사업자로 살았던 날들, 미투로 사회의 주목과 강의 취소, 재판 승소하는 날까지. 아스라이 지나간 날들이 기록되어 있다.
인상적인 것은 시와 시를 해석하던 글을 읽어온 나에게 '최영미 시인은 이런 사람이구나'라고 생각하게 한 책이라는 거다. 으레 에세이가 그렇듯 솔직 담백하게 일상을 전하는 문체는 나와 가까운 사람이라는 친밀감을 지울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