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 지음, 박은정 옮김 / 문학동네 / 2015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최근 본 영화 <빈폴>이 이 책에 영감받아 제작되었다고 해 도서관에서 빌려 읽었다. 저자는 벨라루스의 저널리스트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가 쓴 르포르타주다. 일명 목소리 소리라고 일컫는 독특한 장르를 개척한 사례기도 한데 다년간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사람들은 인터뷰했지만 단순한 Q&A 형식이 아닌 생생한 목소리가 전해지는 형태였다. 인간이 벌인 가장 잔인하고 추악한 전쟁의 얼굴은 여성의 얼굴도 인간의 얼굴도 하고 있지 않았다. 다만 짐승만도 못한 악마의 얼굴이었다.

 

 

 

 

전쟁에 참여하고 살아있는 여성들이 들여주는 생생한 증언이지만 실제 있었던 일이 아니라 지어낸 이야기라고 믿고 싶을 정도의 힘든 이야기가 담겨 있다. 마치 내가 그 전쟁터에 함께 있는 듯한 느낌이 드는 이야기다. 소설 보다 더 소설 같은 이야기에 책장을 넘기가 버겁고 힘든 적은 처음이었다. 또한 이 책의 이야기는 철저히 승자와 남성의 편에서 서술되지 않고 이름 없이 사라져갔던 전쟁의 목격자나 참전인을 이야기를 통해 살려내는 과정이다. 경이로운 점은 다시는 생각하고 싶지 않았을 고통을 오랫동안 삶 속에서 짜내 뽑아낸 경험이라는 것이다. 도려낼 수 있다면 살을 파서라도 하고 싶었을 경험을 들려준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을 거다. 때문에 인터뷰에 응한 200여 명의 여성들에게 심심한 위로를 보낸다.

 

 

제2차 세계대전 중에 전 세계는 여성들의 능력을 똑똑히 지켜보았다. 영국군 22만 5천 명, 미국군 45만~50만 명, 독일군 50만 명 등, 여자들은 이미 서계 여러 나라의 군대에서 병종을 가리지 않고 활약하고 있었다.

p7

기록에 의하면 제2차 세계대전은 여성들이 가장 많이 참전한 전쟁으로 알려져 있다. 심지어 10대 소녀들까지 전쟁으로 내몰았다. 책을 읽어보면 알겠지만 놀라지 않을 수밖에 없는 일들이 너무 많아 가슴 아프다. 남성들과 동등하게 싸운 여성, 간호사, 성폭행, 생리, 여성의 몸으로 무슨 전쟁이냐는 비아냥을 감수하면서도 국가에 보탬이 되고자 전쟁터로 향했던 여성들의 비화를 들을 수 있다.

 

 

책에는 남성들이 전쟁에서 돌아왔을 때 들려주는 이야기와는 사뭇 다르다. 내가 어떤 전투에 참여했고, 무엇을 했냐는 영웅담화를 꺼내드는 주류에서 살아온 이야기를 담담히 때로는 격분하는 어조는 숭고하기까지 하다. 같은 여성으로서 중간지대의 출산을 앞둔 여성을 도운 이야기, 다리 사이로 흘러 내려오는 피를 아무렇지도 않게 참아 내야 하는 이야기, 여성 화장실이 없이 바다에 뛰어든 여성, 여성들에게 보급되지 않는 속옷, 생리대 없이 남성의 발싸개를 만들어 입거나 대충 때워버리는 상황, 사람을 처음 죽이고 울음을 터트릴 수밖에 없어떤 소녀, 전장에서도 예뻐 보이고 싶은 철없는 아가씨, 두고 온 자식을 걱정하는 엄마, 전쟁이 끝났지만 붉은색이라면 치가 떨려 차마 정육점이나 장 보러 다니지 못한 여인, 달의 전사 소식을 믿지 않고 하염없이 기다리는 어머니, 살아 돌아온 딸을 몰라보고 손님 대하듯 하는 어머니. 그런 딸을 다른 딸들 장례 때문에 떠미는 어머니 등. 이루 말할 수 없는 여성의 고통이 전쟁과 함께였다. 그 고통은 다른 가족에게 전염되고, 자식들에게 대물림되었다.

 

 

저녁에 다들 둘러 앉아 차를 마시는데 시어머님이 내 남편을 부엌으로 데려가더니 우시는 거야. '지금 누구랑 결혼하겠다는 거냐? 전쟁터에서 데려온 여자라니..... 너는 여동생이 둘이나 되잖아. 이제 누가 네 여동생들하고 결혼하겠니?' 지금도 그때 일을 생각하면 눈물이 나.

p549

1983년 이 책의 집필을 끝냈으나 2년 동안 출판되지 못했고 1985년 세상에 나오게 되었다. 힘든 시간을 이겨내고 35개국 언어로 번역돼 읽혔으며 전 세계적으로 200만 부 이상 팔렸다. 그동안 영화 소설, 르포르타주 등에서 다뤄온 여성은 조력자, 희생자였다. 하지만 이 책 속에 등장하는 여성들은 당당한 전쟁의 참전자로 기록되지 못해 아우성치는 에코 같은 존재였다.

 

 

천만다행인 것은 저자의 끈질긴 자료조사와 인터뷰 끝에 그녀들의 경험이 문서화될 수 있었다는 거다. 그동안 남성의 목소리로 기록된 역사를 여성의 목소리로 듣는다는 색다르고 아픈 경험을 기꺼이 분담하길 바란다. 이 책은 추천을 떠나 무조건 읽어봐야 하는 필독서라 하겠다. 여성은 참전했지만 전쟁은 여성의 얼굴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게 현실이고 앞으로도 전쟁을 멈추지 않을 사람들의 추악한 욕망이다.

 

전쟁터에서 무슨 생각을 했는지 알아, 우리가? 우리는 그랬어. '아, 끝까지 살아남디만 한다면..... 전쟁이 끝나면 사람들은 얼마나 행복할까! 아, 얼마나 멋지고 아름다운 인생이 펼쳐질까! 이처럼 철저한 고통을 이겨냈으니 이제 사람들도 서로 가엾게 여기겠지. 서로 사랑할 거야. 달라질 거야.' 정말 그렇게 생각했다니까. 철석같이 믿었지. 하지만 사람들은 여전히 서로 미워해, 다시 서로를 죽이고, 나는 그게 제일 이해가 안 돼..... 어떻게 그럴 수가 있지? 우리는....... 우리는 도저히 그게....

p553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