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베첸토 비채 모던 앤 클래식 문학 Modern & Classic
알레산드로 바리코 지음, 최정윤 옮김 / 비채 / 201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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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배에 대한 여러 생각이 겹친다. 세월호부터 코로나19 다이아몬드 프린세스호까지. 얼마 전 케이블에서 영화 <타이타닉>을 다시 보았다. 개봉 당시 미성년자라 극장에서 보지 못하고 비디오로 빌려봤던 것 같은데 시간이 흘러 지금 보니 너무 슬프고 무서웠다. 아마도 세월 동안 겪었던 트라우마 덕분이리라.

 

현대 이탈리아 문학을 대표하는 소설가이자 음악학자, 극작가, 영화감독, 문예창작 교수로도 활약하고 있는 '알렉산드로 바리코'의 《노베첸토》를 읽었다. 작가는 《이런 이야기》로 처음 알게 되었는데 얼마 전 디지털 리마스터링한 영화 <피아니스트의 전설> 때문에 원작 소설을 읽은 케이스다.

 

영화 <시네마 천국>으로 잘 알려진 '주세페 토르나토레'감독이 1998년 영화로 만들었고, 디지털 리마스터링 되면서 극장 상영을 하게 된 것이다. 배에서 태어나 배에서 생을 마감한 남자. 19세기에 태어나 20세기를 살다간 사람, 태어났으나 어디에도 기록되어 있지 않은 무명씨. 그의 이름은 'T.D.레몬 노베첸토'다. 19세기 유럽을 오가던 버지아 호의 1등석 피아노 위에서 발견되었기에 얻은 이름이다. 노베첸토는 이탈리아어로 20세기다. 영화에서는 '나인틴 헌드레드'로 불린다.

 

아름다운 피아노 선율과 배우들의 섬세한 표정연기 때문에 영화로 꼭 관람하길 권한다. 책은 모놀로그 형식의 연극 대본으로 쓰여 수동적이고 제한적이다. 절제된 문장에서 장면들을 상상하는 것도 좋지만 ‘엔니오 모리꼬네’의 음악으로 살아난 텍스트를 만끽하길 추천한다. 영화를 보지 않는다는 것을 예술에 대한 모독이다.

 

소설의 줄거리는 대략 이러하다. 이제는 전설이 되어버린 한 남자의 일생을 친구의 입을 빌려 풀어낸다. 이 배에는 천재 피아니스트로 정평 나 있는 나인틴 헌드레드가 살고 있다. 그는 무슨 일인지 배에서 절대 내리지 않는 사람으로 유명하다. 한 번도 음악을 배워본 적 없지만 태어남과 동시에 연주해야만 하는 운명, 절대음감을 가진 천재다.

 

친구는 노베첸토를 바라보는 관찰자이자 유일한 친구, 세상으로 통하는 통로, 유능한 스토리텔러다. 전쟁도 끝나도 더 이상 쓸모 없어진 배에서 내리지 않는 친구를 찾아가 설득하지만 배와 함께 일생을 마감한다는 이야기다.

 

난 이 배에서 태어났어. 여기에도 세상은 지나가. 단, 매번 2000명 만큼의 세상이지. 여기에도 욕망이 있어. 뱃머리와 선미 사이에서나 가능한 것, 그 이상은 아니지만. 유한한 건반으로 행복을 연주했어. 난 이렇게 사는 법을 배웠어. 내게 육지는 너무나 큰 배야. 어마어마하게 긴 여행이야. 눈부시게 아름다운 여자야. 너무나 강렬한 향기야. 내가 연주할 수 없는 음악이야. 날 용서해. 난 내려가지 않을 거야. 다시 돌아갈게 날 내버려 둬. 제발/

p73

 

지금 생각하면 비겁하고 멍청하다. 아마 광장공포증이 아니었을까? 꿈을 더 크게 키울 수 있었을 텐데 포기하다니 답답하다. 어쩌면 예술을 빌미로 두려움을 숨긴 건 아닐까? 그냥 한 발자국만 내디디면 되는 것을 포기한다. 세상을 다 돌아다녔지만 어디에도 없었던 남자. 그는 용기를 내어 딱 한 번 육지를 밟으려 했지만 끝내 배로 돌아온다. 이 장면은 꽤나 잔인하다.

 

배에서 태어났지만 출생신고도 되어 있지 않았다. 영화 <타이타닉>의 잭(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같은 사람이다. 잭 또한 타이타닉에 우연치 않게 오르게 되어 명단에 이름이 없어 기록되지 아니했다.

 

배에서는 늘 혼자라는 외로움도 잠시만 참으면 된다. 물밀듯이 승선하던 사람들이 썰물처럼 빠져나가 공허하다가도 이내 사람들로 채워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육지는 스스로 행동하지 않으면 아무도 찾아오지 않고 고립될 수 있다. 선수에서 선미까지만이 세상이라 믿고 살아갔던 노베첸토에게 세상은 어쩌면 감당하기 힘든 그 무엇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더 안타깝고 잊히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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