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브리나
닉 드르나소 지음, 박산호 옮김 / arte(아르테) / 201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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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때로 과장하지 않은 단순함과 여백이 주는 공허함이 공포로 다가올 때가 있다. 아무것도 쓰여 있지 않은 백지에 무엇을 채워야 할 때의 공포, 사위가 보이지 않는 깜깜한 어둠 속의 두려움을 느껴 본 적 있는가. 인간의 탄성 회복력은 제각각이라 감당할 수 없는 우울의 늪에서 쉽게 빠져나올 수 없기도 하다.

 

맨부커상 그래픽 노블 최초 후보작인 《사브리나》는 사람이 어떻게 미디어와 SNS로 서서히 미쳐가는지를 체험할 수 있다. 되도록이면 기분이 좋을 때 읽기 바란다. 마지막 페이지를 만나 책장을 덮고 나면 멋모를 찝찝함이 당신을 잠식할지 모른다.

 

 

사브리나는 한 달 전에 실종되었다. 남자친구인 테리는 친구 캘빈을 찾아간다. 실은 둘 사이가 동창이긴 하지만 친한 사이는 아니다. 아무렴 어떤가 아내와 이혼하고 혼자 살고 있었는걸. 누가 온다고 해서 크게 달라지지 않을 테니 말이다. 어쩌면 테리는 전혀 연고가 없는 친구를 통해 사브리나 실종의 아픔을 극복하고 싶었을지 누가 알까.

 

 

 

 

군인인 캘빈은 힘든 시기를 겪고 있는 친구를 위해 최대한 따스한 보살핌을 준다. 하지만 출근을 해야 하는 통에 제대로 끼니를 챙겨주지 못해 안타깝다. 캘빈도 나름대로의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아내와 딸 씨씨와 재결합을 원하지만 아내는 자신의 무관심에 몸서리치며 떠났다. 직장에서는 위험한 임무에 1순위 추천서가 들어와 있는 상태다. 캘빈 또한 누구를 위로해줄 처지가 아님을 알 수 있다.

 

 

 

 

그렇게 무력한 나날들을 보내던 중 사브리나의 소식을 전해 듣는다. 뜻밖에도 언론사의 기자들에게 말이다. 그들은 수상한 비디오를 보고 신고한 것이다. 차마 눈뜨고는 볼 수 없는 잔인한 살해 과정이 담겨 있다. 그렇다. 사브리나는 잔혹하게 죽었다. 범인은 다른 곳에서 이 영상을 보냈고, 삽시간에 영상은 퍼진다. 

 

 

 

 

 

 

이 책에서 가장 무서운 것은 조용히 잠식하는 분위기에 있다. 사실 확인도 되지 않은 가짜 뉴스가 SNS를 통해 퍼진다. 시청률 올리기에 급급한 언론은 최소한의 윤리조차 지키지 않는다. 왜곡된 사실, 루머, 음모론, 카더라 통신은 사람들의 호기심을 타고 급속도로 커진다. 이러한 사건 하나하나가 켜켜이 쌓여 확증편향으로 번진다.

 

우리는 얼마나 진실에 가까운지 되묻고 있다. 믿음을 빌미로 누군가를 상처 내고, 자신도 상처받고 있는지를 모른 채 살아가는 현대 정신병의 실체를 낱낱이 고발하고 있다.

 

 

 

 

이는 미국 내 뿌리 깊은 불신과 합세하여 마녀사냥에 나서기도 한다. 집요하고 괴팍한 행동들이 어떻게 평범한 사람들에게 발현될 수 있는지. 악의 평범성도 들여다보게 한다. 익명성이란 커다란 가면은 평범한 사람도 악마로 만들어주는 힘센 존재다.

 

 

 

 

 

《사브리나》는 등장인물들의 무표정, 말을 아끼는 적막, 단순한 그림체, 모노톤, 여백이 주는 무한함을 보여주며 독자 스스로 판단하게 한다. 단순히 사브리나를 해친 범인을 찾는 일차적인 방법보다 이를 통해 주변인인 사브리나의 동생 산드라, 애인 테디, 테디의 친구 캘빈까지. 그들의 삶이 서서히 파괴되고 있는 상황을 역설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어쩌면 과장하지 않는 것이 가장 큰 과장일 수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고 할 수 있겠다. 서서히 상대방의 잠식하는 가운데 고요한 불친절이 기분 나쁘다.

 

 

 

 

예술은 모두 행복하고 즐거운 것만이 아니다. 불편한 일을 굳이 입에 올려 공론화하는 일이 예술이 가진 힘이요. 궁극적인 목적일 수 있다. 때문에 그래픽 노블 최초로 맨부커상 후보에 오를 정도의 통찰력을 그림이라는 매체로 만나볼 수 있는 것이다. 영상이나 텍스트가 주는 울림과도 또 다른 상태의 자극을 《사브리나》를 통해 느껴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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