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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론을 시작하겠습니다 - 국선변호사 세상과 사람을 보다
정혜진 지음 / 미래의창 / 2019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조금 독특하다고 생각했던 국선변호인과 피고인의 관계도 서로가 함께 만들어가는 관계라는 점에서 세상의 다른 모든 관계와 다를 바가 없다. 그러니 재판받는 사람 입장에서 한 번 더 생각해보고 말하고 행동해야 하는 게 답일 것이다. 그 단순한 진리가 현실에서는 왜 그렇게 어려운지 모르겠다.
법을 잘 모른다. 때문에 크고 작은 사건에 휘말리면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안 봐도 뻔하다. 우왕좌왕하다가 어떻게 합의를 보거나 벌금을 물거나 여러 일이 겪을지도 모른다. 때문에 법을 잘 알고 있으면 좋지만 일반인은 어렵고 딱딱한 법률용어와 다양한 사례를 공부하기란 쉽지 않다. 그래서 자신이 피해자가 되든, 피의자가 되든 불리하지 않기 위해 변호사를 선임한다.
변호사 수임비도 만만치 않아서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은 그림에 떡이다. 형사 재판에서 변호인이 꼭 필요한 사건(피고인이 구속돼 있거나, 미성년자 혹은 70세 이상, 농아 또는 심신장애 의심이 있는 등의 경우), 혹은 변호인 있어야 방어권을 충분히 행사할 수 있는 사건에서 피고인이 변호인을 스스로 못 구하면 '국선변호인'을 나라에서 붙여준다. 그중 국선만 전담하는 '국선전담변호사'가 있다.
저자는 2004년부터 시작 2006년 전국적으로 시행되며 2014년 국선전담변호사가 된다. 독특한 것은 국선변호사면 다 같은 줄 알았는데 국선전담변호사는 피고인을 위해 일하지만 당사자로부터 돈을 받지 않아 독립성을 유지했고, 훨씬 객관적인 변론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이를 '이중적 독립성'이라 부른다. 하지만 이 부분이 독이 되기도 했다. 매월 할당된 사건 외에 서비스 업무나 좀 더 세심하게 신경 써야 할 부분이 놓치고 있어 정체성 혼란이 가중되었다.
전직 기자라는 출신이 발목을 잡은 걸까? 놓친 것을 써야 한다는 생각이 들어 이 책을 펴냈다. 저자가 맡은 사건들의 숨겨진 이야기, 다 하지 못한 변론, 아쉬움, 조각난 조각들을 모아 책을 펴냈다.
첫 이야기부터 코끝이 찡해온다. 스무 살 때 뺑소니를 당해 정신연령이 7살 정도밖에 되지 않는 40대 중반의 남자의 시간, 부모의 시간을 다루는 이야기다. 그가 시계도 보지 못하면서 형편이 어려운 부모가 넣어준 영치금으로 시계를 산 이유. 뺑소니 때문에 둔부에 손상을 입어 분노조절이 어려운 탓에 정신병원에서 사람을 죽였고, 실형을 받았다. 이런 아들을 위해 기다리는 부모 마음, 정해진 약속 시간 보다 2시간 반이나 일찍 찾아와 기다리는 마음. 그 부모가 고맙다면 이것 밖에 줄 게 없다면 주고 간 푹 익은 과일의 시간. 시간의 상대성이 느껴지는 글이다.
책은 일반인도 쉽게 접근할 수 있는 법 사례를 마치 영화 보듯 써 내려갔다. 딱딱한 법에서 따스한 온기가 느껴진다. 정의감도 폼도 생각했던 것과 달랐던 국선전담변호사의 최전선을 함께 할 수 있다. 장발장법 위헌 결정을 받아낸 국선전담변호사의 기막히고 가슴 아픈 이야기가 마음을 움직인다. 성범죄 및 마약범죄 전담 재판부에 배정된 탓에 상대적으로 센 사연이 주를 이룬다.
법 앞에 평등하다지만 평등하지 못한 사람들과 국선변호사의 일, 삶에 대한 한 부분이다. 조각조각 흩어져 있지만 조각이 모여 큰 산이 될 수도 누군가의 버팀목이 될 수 있음을 배웠다. 우리가 잘 모르던 법의 이면에 사람이 있었다. 연말과 크리스마스로 분주하고 들뜬 분위기 속에서 나만 챙기던 자신을 반성한다.
우리 주변에는 당연히 생각했던 가족과 친구와 연인과 함께 할 수 없는 사람들이 많고, 너무나 가혹한 처사에 높은 법 앞에서 무너지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을. 올해도 얼마 남지 않았다. 작은 마음이지만 함께 할 수 있는 사람과 온기를 나누었으면 좋겠다. 그 온기에 이 책이 함께 하길 간절히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