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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여름, 그 섬에서
다이애나 마컴 지음, 김보람 옮김 / 흐름출판 / 2019년 8월
평점 :
"열 번째 섬이 어떤 장소나 특정 무리인 줄 알았던 거요? 열 번째 섬은 마음속에 지니고 다니는
것이라오. 모든 게 떨어져 나간 뒤어도 남아 있는 것이죠. 두 세상을 오가며 산 우리 같은 사람들은 열 번째 섬을 조금 더 잘 이해한다오.
어디에 살든 우리는 우리 섬을 떠난 적이 단 한 번도 없고. "
살다 보면 마음이 복잡하고 상처받아 잠시 쉬고 싶을 때가 있다. 아직은 세상을 안다고 자부할 수 있는
나이가 아니지만 여전히 삶은 고통이다. 그럴때면 위로받을 만한 장소가 필요하다. 이 글을 읽는 당신에게 묻고 싶다. 당신을 온전히 위로해 줄 수
있는 마음 둘 곳이 있나?
'다이애나 마컴'은 퓰리처상 수상자이자 기자다. 다이애나는 기자로서의 힘든 시기를 보낼 때 우연히
캘리포니아 외곽에 거주하는 이민자 집단과 만난다. 이들은 대서양 한복판의 아홉 개의 섬으로 이루어진 '아조레스 제도'에서 온 디아스포라다.
천천히 소와 교감하며 오늘의 일을 내일로 미뤄도 웃고 마는 인심 좋은 농부였다. 지금은 기계로 경작하는 농사도 그는 선조들이 하던 방식을
고수하며 천천히 삶을 즐기고 있었다.
이들은 고향 아조레스를 떠나왔지만 매년 그곳에 가기 위해 일한다. 깊은 그리움을 딛고 여름 연어가
고향을 거슬러 올라가듯 회귀한다. 과연 그곳은 어떤 낙원이란 말인가. 다이애나는 이민자들의 초대를 받은 어느 여름 날 아조레스를 방문한다.
"내가 간직하고 싶은 것들로만 이루어진 나만의 '열 번째 섬'이라는 개념이 마음에 들었다. 여자 혼자
산책하기에 어디가 안전하냐고 묻는 사람을 보고 당황하는 기색을 감추지 못하는 안내데스크 직원이 사는 이곳. 이곳을 내 안에 간직하는 것으로
나만의 열 번째 섬을 간직하는 일을 시작하기로 했다. "
포르투갈의 특별 자치구이자 화산 군도 '아조레스'는 심란한 다이애나의 마음이 쉴 수 있는 열 번째
섬이었다. 매일매일이 축제같이 행복한 곳, 밧줄 투우를 거리에서 즐기고 여름이면 푸른 초원과 연보랏빛 수국이 지천으로 피어나는 섬. 푸른 바다가
앞마당처럼 펼쳐진 소박하고 정겨운 사람들이 사는 지상낙원이었다.
하지만 항상 편안한 일상이 이어지지는 않았다. 화산 폭발과 지진으로 고난을 겪기도 했으며 항해시대에는
무역풍과 해류를 따라 결정된 뱃길에서 지날 수밖에 없는 정착지 중 하나였다.
캘리포니아에 있을 때는 항상 범죄에 노출될 위험 때문에 경계심을 한껏 장착하고 다녀야 했다. 새벽
2시 잠깐 바람 쐬고 싶을 때 어느 곳이나 천천히 걸어도 안전한 곳이 바로 아조레스다. 무장해재 시킬 수 있는 단 하나의 공간이 있다는 것은
얼마나 기쁜 일인가를 실감한다.
포르투갈어에는 '사우다지(saudade)'라는 단어가 있다. 우리나라만의 고유한 감정 '정(精)'이나
'한(恨)'과 비슷 하다고 하면 이해가 좀 될까. 이 단어는 향수병이나 누군가를 그리워하는 마음보다 더 큰 의미를 담고 있다고 한다. 다른
언어로는 치환해 번역할 수도 정확히 알 수도 없는 깊은 그리움이다.
이에 아조레스 사람들은 '사우라지'라는 표현을 이렇게 말한다. '죽은 이를 그리워할 때도 사용하지만
대개 삶, 그리고 바다, 혹은 지난 시절 같은 것들을 그리워할 때 주고 쓰인다'라고. 우리나라의 '아리랑' 같은 포르투갈 민요
'파두(fado)'를 들어보면 더 구체적으로 알 수 있다. 고향을 떠나서 사우라지에 걸린 사람들이 세계 곳곳에서 아조레스 문화를 이어가고 있는
이유기도 하다.
저자는 갑자기 시련을 극복하는 방법을 생각지도 못한 데서 찾았다. 우연한 기회에 난생처음 알게된 낯선
문화에서 깊은 위로받았기 때문이다. 사실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마음 둘 곳 없었던 때가 있었다. 그때부터였던 것 같다. 이민자의 이야기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 말이다. 장소, 분리, 정체성, 몸은 떨어져 있지만 함께 있는 듯한 연결의 힘이 무엇인지 궁금했다. 다이애나는 아조레스
사람들로부터 해답을 찾아가고 있었다.
복잡하고 바쁜 생활에 찌든 현대인은 제대로 된 휴식을 취하기 힘들다. 독서나 영화, 수면으로 쉰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몸과 마음까지 충분히 쉰다고 보기 어렵다. 그래서 복잡한 머릿속을 정리하고 싶을 때는 제3의 공간이
필요하다.
온전한 나만의 케렌시아를 펼쳐도 될 공간이 있는가. '케렌시아(querencia)'는 스페인어로
투우장의 소가 마지막 일전을 앞두고 홀로 잠시 숨을 고를 수 있는 자기만의 공간이다. 자기만의 공간에서 얻는 힘은 내 안에 무엇을 다독여
주거나, 이끌어 주기도 한다. 삶을 떠나온 자들에게서 삶을 시작할 용기를 얻는 아이러니가 아직 살만한 세상임을 느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