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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닷가 작업실에서는 전혀 다른 시간이 흐른다 - 슈필라움의 심리학
김정운 지음 / 21세기북스 / 2019년 5월
평점 :
문화심리학자이자, 화가, 작가, 그리고 이번엔 배 주인. 반백 살을 살며 앞으로의 50년을 내다보는 전환점을 찾고자 유학길에 올랐고, 돌아와 정착한 곳은 서울이 아닌 여수였습니다. 책은 그가 여자만 끝자락에서 살며 오리가즘이란 배 주인이자, 낚시를 즐기고, 더 많은 책을 읽고 사유하기 위해 노력한 흔적을 담았습니다.
차원이 다른 '물대'라는 시간이 흐르는 여수. 누구에게도 방해받지 않고 자신만의 공간 '슈필라움(SPIELRAUM)'을 짓는 아저씨. 고독을 만끽하며 쓴 에세이는 슈필라움을 만들어 볼 것을 권유하고 있습니다. 책은 지난 몇 년간 바닷가 작업실 및 서재 '미역창고(美力創考 아름다움의 힘으로 창조적인 생각을 한다)' 짓기와 슈필라움 형성 과정을 담고 있습니다.
몇 년 전부터 한국인도 일과 여가를 분리한 삶을 추구하고자합니다. 이에 욜로, 소확행, 워라밸 등 젊은 층을 중심으로 나 자신을 먼저 생각하는 라이프 스타일이 각광받고 있죠. 연장선상에서 안정적이고 편안함을 느끼는 장소 '케렌시아'에 대한 관심도 높아지고 있습니다.
케렌시아(Querencia)란 안식처, 귀소본능 등으로 해석할 수 있는 스페인어로 투우 경기에서 투우사와의 격렬한 싸움 중에 소가 잠시 쉬는 영역을 말합니다. 현대인에게 케렌시아는 지친 몸과 마음을 쉬고 충전할 수 있는 나만의 공간을 의미합니다. 케렌시아를 확보하는 것은 무엇보다 선행되어야 하는 일입니다. 적어도 책상 하나 뿐 일지라도.
김정운 박사는 독일어가 어원인 '슈필라움'을 통해 자신의 실존을 확인하고자 합니다. 슈필라움이란 '놀이(Spiel)과 '공간(Paum)'의 합성어인데 우리말로 '여유 공간'정도로 번역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주로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공간이자, 물리적 공간, 심리적 여유까지 포함하는 케렌시아와 비슷한 단어입니다.
그는 아우슈비츠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은 사람을 빗대며, 최소한의 공간조차 보장받지 못했기 때문이라 말합니다. 인간에게 존엄을 포기한다는 것은 죽음을 의미하며, 살아남기 위해서는 대단한 용기는 물론, 정체성을 기꺼이 버려야 함을 이야기합니다.
현대적으로 해석하자면 잘 노는 사람이 일도 사랑도 삶도 잘 꾸릴 수 있고, 노는 만큼 성공한다는 50년 내공을 책에서 배워 보는 시간입니다.
"책은 앞으로 읽으려고 책장에 꽂아두는 겁니다!"
서가란 본디 읽은 책은 보관하는 장소가 아닌, 읽어야 할 책을 수집하는 곳이라는 말. 매우 공감합니다. 책을 끊임없이 사지만 읽지 않는 사람을 '쓴도쿠 (つんどく,Tsundoku)'하거나 '비블리오 마니아(bibliomania)라고도 말하는데요. 쓴도쿠가 본질적으로 책을 읽고 싶지만 일단은 수집하자는 마음이 강하다면, 비블리오 마니아는 책 컬렉션을 소유하려는 개념이 크다는 거죠. 서로 비슷하지만 다른 책을 향한 집념으로 해석해도 좋습니다.
김정운 작가는 빈 책장을 채우며 늙어가기로 결심합니다. 책을 소화해 또 다른 책으로 재창조하고 싶기 때문이죠. '가끔은 격하게 외로워야 한다'라는 생각이 여자만의 미역 창고를 만들었고, 슈필리아에서 읽고 쓴 책이 '에디톨로지'되는 삶을 살고 있습니다. 책장에 꽂힌 책을 필요할 때 마다, 내 것으로 소화하는 일. 그야말로 지식의 편집, 언행일치를 실천하는 모습입니다.
그리고 책을 무조건 처음부터 끝까지 완독하는 게 아니라는 말도 공감합니다. 책을 끝까지 읽어야 한다는 강박이 독서문화 정착에 걸림돌이 된다는 거죠. 물론 소설이나 문학작품은 뚜렷한 서사를 따라 주인공과 다른 캐릭터와의 관계, 결말 등을 알아야 하니 끝까지 읽는 게 맞습니다만. 목차를 통해 본인이 원하는 정보부터 찾아 읽는 단순함을 발휘해 보세요. 그러다 보면 읽지 말라고 해도 끝까지 다 읽고 있는 자신을 발견할 겁니다.
기대수명 100세 시대, 이제 인류는 은퇴 후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고민해야 합니다. 긴 수명을 얻는 대신 건강관리 멘탈관리도 선행되어야 하고요. 끊임없이 사유하고 배워야만 사라지지 않고 나를 지킬 수 있습니다. 김정운이 예찬하는 독서의 즐거움, 그리고 철학적 사유의 깊이를 느껴보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