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의 호기심을 충족시켜준 이야기는 4개의 에피소드로 구성된 '마른 꽃잎의 추억'이었습니다. 강북에 집을 장만하고 착하고 성실한 남편과 아이를 낳고 평범하게 살아가고 있는 주부의 에피소드였습니다. 어느 날 화랑을 지나다 전시 화가의 이름이 낯설지 않아 찾아갔지요. 이름의 실체는 썸남이었습니다. 자기 상황을 직시한 것도 잠시, 옛 추억에 빠져 로맨틱한 상황을 상상합니다. 하지만 화랑에 차려진 음식만 포식하고 그림 한 점 보지 않았다는 웃픈이야기인데요. 그 후 그녀를 스쳐간 남정네들과의 사연이 구구절절 재미있게 펼쳐집니다. 항상 연애이야기는 듣고도 또 듣고 싶은 이야기입니다.
아무래도 여성지 사보에 연재되는 콩트였기 때문에 당시 여성들의 관심 주제가 대부분입니다. 하지만 그것도 낭만! 지금과 비교해 보면 많이 달라진 여성관, 결혼관, 연애관, 자식 교육관, 내 집 장만 스토리를 엿볼 수 있어 흥미로운 독서였습니다. 물질적인 풍요를 이뤘으나 마음속 공허함을 채우지 못했던 여성, 노인, 사회적 약자를 소설 속 주인공으로 삼아 무심함 속에 깃든 온기를 다룹니다.
당시 결혼관을 생각해 볼 때 주체적인 여성의 삶이 파격적으로 다가왔을 겁니다. 막 아파트들이 들어서고, 강남이 개발되던 70년 대, 성공을 위해 서울로 올라온 소시민들의 다양한 생활상이 드러나 있을뿐더러, '지금 옛날'이란 말로 유행하는 뉴트로 감성이 가득한 글들입니다.
짧은 글 속에 들어가 있는 기승전결 혹은 반전이 아껴먹고 싶은 과자처럼 특별합니다. 특유의 위트와 해학이 그야말로 제대로 된 글맛을 살려주고 있고요. 오랜만에 박완서 선생님의 글을 읽다 보니, 그때 그 시절을 살아온 것 만 같은 생생함이 느껴집니다. 그리고 지금은 사라진 이웃 간의 간의 정, 부모님의 악착같았던 자식 사랑, 진실과 거짓 등 인생의 가치를 되돌아보게 하는 미학을 엿볼 수 있었습니다.
풍자와 유머가 가득 찬 48편의 짧은 이야기와 함께 명절을 보냈습니다. 킥킥거리고 읽다 보니 어느새 꼴딱 읽어버렸지 뭐예요. 짧은 호흡으로 치고 나가는 단발성이 오히려 페이지터너의 기본조건을 충족하고 있습니다. 굉장히 빠르게 읽힙니다.
이 책은 오랜만에 박완서 선생님을 추억하는 사람들, 긴 글 보다 짧은 글에 매력을 느끼는 사람들, 레트로풍의 소설 뉴트로의 진수를 느끼고 싶은 분들에게 추천합니다. 지금 다시, 박완서 문학을 읽는다는 것은 우리들의 인생과 대한민국의 살아온 발자취를 탐구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될지도 모르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