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아름다운 이웃 - 박완서 짧은 소설
박완서 지음 / 작가정신 / 201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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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타계한 박완서 선생님의 콩트 모음집 《나의 아름다운 이웃》이 예쁜 표지로 갈아입고 나왔습니다.

소개된 단편들을 읽다 보니 자연스럽게 70년 대 가풍과 결혼관을 들여다볼 수 있었는데요. 주부이면서 신인 작가로 등단했던 당시를 회고하는 글로 포문을 엽니다. 짭짤한 원고료 때문에 사보에 연재하기 시작했지만, 이내 순수문학을 해야 한다는 계기로 그만두었다는 짧은 소회와 글로 먹고사는 작가의 심정이 담겨있는 서문이었습니다.

지금 읽어본다고 해도 전혀 어색하지 않은 글의 힘과 울림, 메시지가 느껴지는 글입니다. 제한된 분량의 글쓰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창작을 해본 분들은 아실 텐데요. 이런 제약이 오히려 짧은 글과 이미지에 익숙해져 있는 지금 사람들에게 부담 없이 읽을 수 있는 형식이 매력적으로 보이기도 합니다. 호흡이 짧아서 금방 읽을 수 있지만 함의된 메시지를 해석하기 어려울 때도 있었습니다.

나는 왜 낭만을 찾는답시고

간직하고 있는 낭만이나마

하나하나 조각 내려 드는 것일까?

이 낭만이 귀한 시대에.

p71 마른 꽃잎의 시대

저의 호기심을 충족시켜준 이야기는 4개의 에피소드로 구성된 '마른 꽃잎의 추억'이었습니다. 강북에 집을 장만하고 착하고 성실한 남편과 아이를 낳고 평범하게 살아가고 있는 주부의 에피소드였습니다. 어느 날 화랑을 지나다 전시 화가의 이름이 낯설지 않아 찾아갔지요. 이름의 실체는 썸남이었습니다. 자기 상황을 직시한 것도 잠시, 옛 추억에 빠져 로맨틱한 상황을 상상합니다. 하지만 화랑에 차려진 음식만 포식하고 그림 한 점 보지 않았다는 웃픈이야기인데요. 그 후 그녀를 스쳐간 남정네들과의 사연이 구구절절 재미있게 펼쳐집니다. 항상 연애이야기는 듣고도 또 듣고 싶은 이야기입니다.

아무래도 여성지 사보에 연재되는 콩트였기 때문에 당시 여성들의 관심 주제가 대부분입니다. 하지만 그것도 낭만! 지금과 비교해 보면 많이 달라진 여성관, 결혼관, 연애관, 자식 교육관, 내 집 장만 스토리를 엿볼 수 있어 흥미로운 독서였습니다. 물질적인 풍요를 이뤘으나 마음속 공허함을 채우지 못했던 여성, 노인, 사회적 약자를 소설 속 주인공으로 삼아 무심함 속에 깃든 온기를 다룹니다.

당시 결혼관을 생각해 볼 때 주체적인 여성의 삶이 파격적으로 다가왔을 겁니다. 막 아파트들이 들어서고, 강남이 개발되던 70년 대, 성공을 위해 서울로 올라온 소시민들의 다양한 생활상이 드러나 있을뿐더러, '지금 옛날'이란 말로 유행하는 뉴트로 감성이 가득한 글들입니다.

짧은 글 속에 들어가 있는 기승전결 혹은 반전이 아껴먹고 싶은 과자처럼 특별합니다. 특유의 위트와 해학이 그야말로 제대로 된 글맛을 살려주고 있고요. 오랜만에 박완서 선생님의 글을 읽다 보니, 그때 그 시절을 살아온 것 만 같은 생생함이 느껴집니다. 그리고 지금은 사라진 이웃 간의 간의 정, 부모님의 악착같았던 자식 사랑, 진실과 거짓 등 인생의 가치를 되돌아보게 하는 미학을 엿볼 수 있었습니다.

풍자와 유머가 가득 찬 48편의 짧은 이야기와 함께 명절을 보냈습니다. 킥킥거리고 읽다 보니 어느새 꼴딱 읽어버렸지 뭐예요. 짧은 호흡으로 치고 나가는 단발성이 오히려 페이지터너의 기본조건을 충족하고 있습니다. 굉장히 빠르게 읽힙니다.

이 책은 오랜만에 박완서 선생님을 추억하는 사람들, 긴 글 보다 짧은 글에 매력을 느끼는 사람들, 레트로풍의 소설 뉴트로의 진수를 느끼고 싶은 분들에게 추천합니다. 지금 다시, 박완서 문학을 읽는다는 것은 우리들의 인생과 대한민국의 살아온 발자취를 탐구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될지도 모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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