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락 아르테 한국 소설선 작은책 시리즈
은모든 지음 / arte(아르테) / 201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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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책장을 덮고 가시지 않는 여운으로 힘든 감정을 겪을 때가 있습니다. 작은 책 시리즈가 그러한데, 작은 핸드백, 에코백, 심지어 겉옷 주머니에도 들어가는 가볍고 실용적인 사이즈라 언제 어디서든 독서를 즐기기에 충분했습니다.

은모든의 《안락》은 제목이 주는 이중성에 매료된 이야기입니다. 처음에는 '안락한 우리 집' 할 때 안락이라 생각했지만, 이내 안락사의 안락임을 깨닫게 됩니다. 때는 안락사법이 국회를 통과한 가까운 미래. 오 남매 중 셋째로 태어나 집안일을 돕고, 동생들을 건사하느라 바쁜 유년 시절을 보내고, 열아홉에 시집가 세 자매를 남부럽지 않게 키우느라 식당 일에 여념이 없던 할머니. 할아버지도 돌아가시고 팔순이 넘은 할머니는 결연한 의지로 선전포고를 합니다.

'5년 이내 죽음은 내 스스로 결정하겠다'라는 이야기. 당연히 가족들은 반대했고, 사이가 서먹해졌으며, 하루에도 몇 십 개의 알약으로 버티다시피한 고장 난 몸을 가진 당신은 피곤한 나날을 보내고 있으셨죠. 가족들은 무책임할 뿐더러 가족을 생각하지 않는 일이라며 할머니를 각자의 방식을 해석합니다. 혼란한 가운데 손녀인 나는 할머니의 자두주 비법을 배우며 소중한 추억을 남기게 되죠.

안락사. 스스로 죽음을 선택하는 자살과 또 다른 존엄의 가치입니다. 종교계에서는 있을 수도 없는 죄악이겠지만 구순을 바라보는 나이에 잠결에 물 한 모금 마시는 일도 진이 빠질 정도라면 삶이 고난이겠다 싶었습니다.

침대에 누워 기계에 의존하는 말년보다, 갑자기 의식을 잃고 가족들과 인사조차 할 수 없는 죽음을 맞이하는 것보다 훨씬 존중받는 죽음. 존엄하게 죽을 권리, 스스로 선택할 수 있다고 봅니까? 어떻게 살 것인가 고민하는 것에서 어떻게 죽을 것인가를 고민해 보긴 처음이었습니다.

충분한 시간을 들여 고마움과 추억을 나누는 일이, 무엇보다 당신의 선택이라는 것에 존중과 배려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소설 중 손녀 지혜는 할머니와 마지막 자두주를 만듭니다. 익을수록 오묘한 맛을 낸다는 자두주가 할머니의 마지막 가는 길을 함께 하는 축하주처럼 느껴졌죠. 아마 저세상에서 할머니는 편히 쉴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세상의 짐이 버거웠던 만큼 분명 깃털보다 가벼운 삶을 살고 있을 것처럼 말이죠.

원고지 300매 분량, 한 손에 들어오는 작은 판형, 젊은 작가라는 공통점이 매력적인 책입니다. 한국소설을 읽는 재미는 한글이 주는 힘과 어딘지 모를 감정의 무한함이 있는 것 같습니다. 무겁고 어렵다는 한국소설의 편견을 없애기에 더할 나위 없는 책이기도 했습니다. 이별은 또 다른 만남이라는 사고방식의 전환을 책을 통해 배워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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