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에도 속하지 않은 폴의 하루
임재희 지음 / 작가정신 / 2018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특히 집에 대한 트라우마가 강한 한국인에게 집, 고향, 자리는 각별한 의미입니다. 내 집 장만이 꿈이던 시대를 지나, 몸 하나 뉠 곳이면 되는 유일한 안식처가 돼버린 집. 임재희의 소설집 어디에도 속하지 않은 폴의 하루는 한국인도 외국인도 아닌, 경계에 놓인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았습니다.

어학연수생, 유학생, 관광객, 교포, 동포, 이민자, 입양아, 귀화한 시민권자, 오래 산 영주권자 등 집도 절도 없이 떠도는 유목민에 관한 아홉 가지 단편을 엮었는데요. 오랜 시간 외국에 살며 버리지 못한 모국어와 외국어의 간극을 고스란히 소설 속 인물로 녹여낸 듯합니다.

어쩐지 짠하고, 슬프고, 자꾸만 눈에 밟히는 캐릭터들은 한번 내뱉으면 휘발되는 말의 속성과도 닮았습니다.

낡고 오래되고 찢기고 퇴색되고 뒤처지고 이리저리 치이다 마지막
장소에 모여든 것들. 소수자에서 더 소수자로 전락한 것만 같아.


한국에 살다 미국에 간 사람들, 한국인으로 미국에 살다 한국에 온 사람들, 한국인으로서 한국에 사는 사람들을 통해 고향에 대한 그리움, 떠나고 싶은 마음, 애증, 뜻 모를 감정을 이입해 봅니다.

양아버지에게 자신의 이름 '압시드'의 뜻을 알았을 때 울컥하고 올라오는 알 수 없는 감정. 이혼한 남편을 그리워하며 외국에서 꽃집을 하는 여자 세레나의 복잡 미묘한 분홍과 핑크의 어감 차이. 둥지를 떠난 아기 새처럼 엄마 집을 찾아가는 길에서 배우는 삼 남매의 로드무비. 늘 큰집으로 이사사는 것을 열망한 한 부부가 마련한 집의 허울뿐인 행복. 엄마의 집도 서울도 아닌 낯선 도시의 1박이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소수자의 정체성을 확인하는 시간이었던 것. 유일하게 <동국>이란 단편만이 외국에 곁을 두지 않고 우뚝 솟아있지만 전혀 이질감은 느껴지지 않습니다.

 

 

 

다양한 소수자의 정체성과 감정을 단편으로 만나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디지털 노마드를 자처하는 요즘의 사람들에게 이질감 없이 느껴질 것 같은데요. 마치 낯선 여행 중 만난 한국인, 한국어를 만나는 기쁨처럼,  행위를 같이 하지 않아도 정서를 확인하는 끈끈한 무엇을 공감하기에 충분합니다.

명절의 의미가 예전만 하지 못한 추석 연휴, 가족과 민족, 국가에 대한 의미를 생각해 보기 좋은 소설들이었습니다. 어쩌면 '우리'라는 단어는 생각보다 따스한 말이 아닐지도 모릅니다.  우리란 테두리에 속하지 못한 사람들에게 보내는 배타적 의미일 수도 있고, 차별의 말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우리'라는 말을 쓰기 전에 한 번쯤 관용의 참뜻을 생각해 보는 건 어떨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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