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가 두돌이 지나고 28개월쯤 되었던 봄날. 나를 중증 우울증으로 빠지게 했던 아이의 아토피가 확실히 나아져서 병원도 한의원도 발길을 멈추고 내 우울증의 흔적도 많이 사라지고 있었지만 여전히 겁이 났던 나는 아이와 거의 늘 집안에만 머물렀다. 그사이 걷고 제법 말도 잘하게 된 아이는 내 책을 탐내며 옆에 끼고 다녔는데 그 첫 권이 <살인자들과의 인터뷰>였고 다음이 <랩걸>이었다. 연쇄살인범 사진이 담긴 표지가 맘에 든다고 해서--;; 당황시키더니 그다음엔 초록색이 좋다고 바뀐 것이다. 그러고는 책을 거꾸로 들고 읽는 흉내를 내곤 하여 나를 웃게 만들었다. 그러던 어느 날 책을 들고 소파에 앉은 아이가 랩걸을 거꾸로 들고서 나는 내 책을 읽을 테니 엄마는 엄마 책을 읽으라고 했다. 그동안 내가 책만 보면 하지 말라고 하더니 이게 왠일이냐 하면서 대충 손에 들어온 걸 펼쳤는데 바로 이 책이었다. 완벽한 날들. 임신했을 때 사서 읽은 기억은 있는데 이제는 전혀 기억나지 않는 책이었다. 당장 하루를 버티는 게 가장 어려운 일이었던 내게 거의 모든 책들이 그렇게 지워져있었다. 완벽한 적은 없지만 그럭저럭 괜찮다 느낀 삶이 급격히 무너진 뒤로 겨우 다시 찾은 듯한 일상 속에서 그 제목이 너무도 슬프고 아련하게 느껴져서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아이에게 우는 모습을 더 보이고 싶지 않아 나도 모르게 책을 낭독하기 시작했고 한 페이지를 다 읽고서야 아이가 곁에 있다는 걸 깨달았다. 나도 모르게 큰소리로 읽었네 하고 웃으며 말하자 뜻밖에 아이가 이렇게 대답하는 거다.그거 좋아요.그러고는 씩 웃으며 더 읽어달라는 그 순간은 여전히 내 기억 속에 생생하다. 무슨 소린지 알고 좋다는 걸까 궁금했지만 아름다움을 느끼는 데 끌리는 무언가가 생기는 데 그게 뭐가 중요할까 싶어 몇쪽을 더 읽었고 예상 밖으로 아이는 꽤 오래 집중하여 들었다. 다른 언어로 쓰인 시인의 말이 우리말로 번역되고 그 글자들이 내 입을 통해 소리로 흩어지는 순간을 아이는 느끼고 있었다. 임신한 뒤로 롤러코스터처럼 이어졌던 많은 일들로 무너졌던 그 모든 순간의 내가 위로받는 느낌이었다. 오래전 세상을 떠난 시인의 글과 이제 막 자라나는 아이가 함께 빚어낸 그 날은 어떤 완벽한 순간으로 남아 있다. 다음날 메리 선생님 책 읽어달라는 아이에게 나흘 동안 낭독을 해주었고 그 뒤로 아이는 다시 이 책을 찾지 않았지만 언젠가 우리가 다시 함께 읽을 날을 기다린다. 서두르지 않고 차분히. 나의 삶은 결코 완벽한 날들이 아니었지만 그럼에도 완벽한 순간이 있었고 있을 것이라 믿게 해준 고마운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