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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믐, 또는 당신이 세계를 기억하는 방식 - 제20회 문학동네작가상 수상작
장강명 지음 / 문학동네 / 2015년 8월
평점 :
남자는, 여자와의 기억을 소설로 써내려갔다. 그 기억들은 뒤섞인 채로 여자에게 건네진다. 어쩌면 그것은 불쑥 목을 턱 막히게 하는, 우리가 누군가를 기억하는 방식처럼, 애초에 순서 따윈 없었는지도 모른다.
여자는, 마치 약속이나 한 듯 다시 뒤섞여진 이 소설을 통해, 지난 시간을 더듬기 시작한다. 실수처럼 순서가 헝클어진 ‘우주 알 이야기’ 처럼, 이제는 우리 또한 시공간을 초월해 이야기를 넘겨간다.
소설이 된 남자의 기억은 곧, 우리의 기억마저 현재로 불러 온다. 소설 안의 남자와 소설 밖의 남자. 실제 공간을 에둘러 설명하지 않기에, 작가가 세계를 기억하는 방식이 곧 이 소설의 시작이다.
어떤 창작이든 결국은 수용자가 자신의 삶 이라는 필터를 통해 받아들이겠지만, 이 소설은 좀 더 적극적으로 기억을 촉발시킨다. 그것은 ‘남자’ 와 ‘여자’라는 명명. 그리고 공간에서 연결되는 이야기로 두드러진다. 3인칭의 인물이 거쳐가는 실제의 공간들은, 우리를 소설 안과 밖의 경계에 머물게 한다. 문득 예전에 보았던 한 미술작품이 떠올랐는데 (사실 그것이 만들어진 작품인지, 만들어지기 전의 작품인지 지금도 모호하지만) 프레임 안이 텅 비어서 흰 벽이 훤히 보이는, 작은 액자였다. 모든 작품들이 저마다의 의미를 부여하고자, 혹은 부여받고자 애쓰는 틈에서 나는 그 작품이 주었던 작은 파문을 떠올렸다. 하나의 세계를 기억함은 곧 한 사람을 기억하는 일. 그러니 곧, 사람을 기억하는 일은 세계를 기억하는 일. 각자 뛰어들었던, ‘남자’ 와 ‘여자’를 벗어나면 우리는, 각각의 이름으로 명명된 하나의 세계가 된다. 그 세계는 어떻게 우리에게 기억되야 할 것인가. 작가는 그렇게 묻고 있었다.
우리는,
그믐을 애써 기억하지 않아도 된다. 하나의 세계의 마지막 모습만을 간직하지 않아도 된다. 왜냐하면, 끝이란 것은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으니깐. 단지 우리 스스로 마지막을 정의할 뿐이니깐. 그렇게 우리의 패턴은 파괴되어야만 한다. 우리는 규정된 시간의 마지막이 아니라, 우리 스스로가 기억하는, 기억해야만 하는 순간이 마지막이어야만 한다. 우리의 기억의 패턴은 그래야만 한다.
자신의 아들이 죽고 남은 생을 남자를 쫓아다니고 망가뜨리는데 할애했던 아주머니에게 아들의 마지막은 피해자 였고, 남자는 가해자였다. 아주머니가 기억했던 영훈의 마지막이 아주머니의 삶을 스러지게 했고, 점차 무너뜨렸다. 결국 하나의 세계를 파괴하고나서야, 이윽고 알게된 것이다. 자신의 삶도 거기서 끝이 아니었음을. 끝났다고 생각하는 순간, 삶은 다시금 이어지며, 그렇게 끝이란 스스로 규정할 수 없다는 것을 너무 늦게 알아버렸다.
여자가 볼 수 없게 사라진, 남자의 마지막. 결코 볼 수 없는 그믐 달 처럼 사라져, 여자가 기억하는 남자의 마지막이, 만남의 마지막이 아니길. 아니, 마지막이란 것 자체가 끝내 존재하지 않길. 헝클어진 둘만의 모든 기억들이, 모든 순간들이, 기억의 시작이자, 중간이고, 끝이 되길. 세계의 마지막이, 세계의 파괴로 기억되지 않길.
‘너를 만나기 위해 이 모든 일을 다시 겪으라면, 나는 그렇게 할 거야.’
군대, 수능, 혹은 그 사이에 모든 아픈 삶의 순간들 따위, 너를 만나기 위해서라면, 하고선 생각했던 때. 우스꽝스러운 그 각오가, 목에 차오르는 뜨거운 진심의 각오였을 때, 아마 나는 알고 있었던 것 같다. 나의 의지와 소망 따위에 상관없이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 되리란 것을. 그래서 더 간절했음을. 그 덧없는 다짐과 각오에는 거짓이 더해지지 않았었음을.
그럼에도 불구하고 끝끝내 맞닥뜨린 이야기가, 꿀 없는 꽃과 같을지라도, 우리의 바라본 풍경은 여전히 그곳에 있으리라. 그믐 이전의 모든 순간들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