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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Q84 3 - 10月-12月 1Q84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양윤옥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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멈추지는 말되, 조금 느긋하게 다가가보자.
 판매량과 시간이 알려주듯 1Q84는 독자에게 가속도를 내게끔 하는 흡입력을 가진 소설이다. 뒤늦게 접하게 되었지만, 다소 두꺼운 페이지가 무색할 정도로 빠르게 페이지를 넘기게 된다. 물론 곳곳에 커브가 있기에 속도가 줄 때도 있었지만, 그 분량에 비한다면 분명 고속도로를 달렸다는 것은 확실하다. 허나 지금까지 직선도로를 달려왔다면 이제는 종점에 다다른 것을 알 수 있다. 모든 운동이 사고없이 멈추기 위해서는 속력을 줄여야 한다. 그것을 위해 3권에는 방지턱이 존재한다. 다만 그 방지턱은 그대로 통과한다고 하여도 사고가 날 일은 없다. 3권은 독자가 쏜살같이 직선으로 끝으로 가는것을 살짝 주춤하게끔 상징적인 속도제한표지판같은 방지턱이 있을 뿐이다. 왜냐하면, 끝만보고 달려가기에 1Q84의 세계에서는 짚고 넘어가야 할 것들이 너무나 많다.

1,2권을 통해서 독자는 나름 1Q84에 대해서 인식했다. 그럼에도, 시간은 객관적이지만 개인에게 주관적인 것임을 상징이나 하듯, 1Q84에 대한 본격적인 인식은 아오마메와 덴고가 그 때를 달리하며, 만남을 위한 부산한 움직임또한 그 각각의 속도를 내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들의 움직임은 전편들보다 표면적으로 다소 둔화된 것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분명 좀더 간절한 마음을 담아 움직이며, 그 자신들이 처한 현실에 대한 성찰이 깊이를 더해간다.


현실을 인지한다.
 덴고와 아오마메는 각기 다른 방식으로 세상을 살고 있었다. 다만 제각기 공백같은 결핍을 안고있기 때문인지 생에 총체적인 열정이 느껴지지 않았다(그것은 어떻게든 살아가는 것과는 다르다). 하지만 그들은 곧 의도치 않은 자신들의 행동을 통해서, 달이 두개 떠있는 현실에 대해서 인지하게 된다. (혹은 몽롱하게 알고 있던것이, 표면으로 드러난다.) 그리고 그것을 통해 자신에게 존재했던 공백을 발견하고, 그것을 메우기 위해서 앞으로 향한다. 물론 우시카와 또한 세계가 현실적이지 않음을 인지한다. 하지만 그것에는 덴고&아오마메와는 다소 차이를 갖는다. 이 이상한 현실을 넘은곳에 더 나은 세계가 있다고 생각하는지, 그리고 그곳으로 넘어갈만한 필연적인 의지가 있는지 하는 것이다. 언뜻 잊은 듯 보이면서도 덴고와 아오마메는 서로를 기억하며(혹은 1984에서는 잠시 잊고 있던), 20년전의 따뜻한 온기를 다시 느끼고 싶어하지만 우시카와는 애석하게도 그럴만한 기억이 채 없다.


‘어떻게’ 현실을 인지하는가?
덴고와 아오마메는 각자의 방식과 명칭으로 1984년을 받아들인다. 거절도 환영도 아니다. 인정하지만, 더 나은곳으로 가기위해서 그들은 각자의 손을 서로에게 뻗는다. 즉 서로를 필요로 한다. 그래서 그들이 맞닥뜨린 1Q84라는 현실을 뛰어넘을 수 있다. 하지만 우시카와는 다르다. 그는 일단 현실을 인정하고 거기에 맞춰서 행동한다. 그에겐 더 나은곳에 대한 기대도, 노력도 없다. 현실을 인정하는것과 동시에 그 자체에 만족함으로써 더 나은 세계로 향하는 것이 멈춰지는 것이다. 우시카와는 더 나은 세계를 상상할 수 없다. 더 맛있는 음식을 먹어보지 못했다면, 감히 더 맛있는 맛을 상상할 수조차 없는 것이라고나 할까.
더불어서, 하루키는 리시버와 퍼시버의 개념을 대입한다. ‘선구’내에서 목소리를 듣고, 그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 ‘증인회’라는 종교에 속한 사람들, 그 외에 언급되지 않는 종교, 혹은 아무도 믿지 않고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 또한 목소리의 존재를 인정하는지, 그리고 그것을 어떻게 듣는지 마는지에 따라서 삶의 무대와 행동이 결정된다. 이것은, 모티브가 됐다는 일본의 옴진리교 사건과 더불어 현실에 대한 개개인의 ‘받아들이는’ 방식의 문제와도 연결된다. 비록 덴고와 아오마메는 그들 각자 나름의 무미건조한 삶을 살았어도, 돌아가고 싶은 ‘그때’가 있었고 앞으로 그것을 다시 재현하려는 의지가 있었다. 그런 의지는 아오마메에게 리더라는 이가, 덴고에게는 후카에리라는 인물들이 그들을 스쳐지나가고, 이들을 통해 그들은 목소리를 자신의 방식으로 듣고, 해석하고, 행동한다. (그래서 그 리더와 후카에리라는 존재는 마치 신과 같은 예언을 늘어놓는다) 그렇듯 우리 모두는 각자의 도터 - 즉 퍼시버(누구에게는 사람, 누구에게는 문학, 그리고 누군가에게는 돈, 그리고 그 어떤 무엇이든 간에)를 통해서 리시버가 된다. 교단 ‘선구’의 비극은 어쩌면 그 도터를 받아들이는 과정에서부터 일그러졌다고 할 수 있다. 어떤 목소리가 들리느냐 뿐만 아니라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해석하느냐는 뗄 수 없는 문제라는 것이다. 종교적인것, 종교적이지 않은것에 대해 우리는 세상에서 많은 현실을 자기 나름대로 받아들이며 살고 있기 때문이다.

다마루가 언급했던 카를 융의 말을 빌리자면 ‘차가워도, 차갑지 않아도 신은 그곳에 있다’ 라는 말처럼 신의 존재는 시공의 제약을 받지 않는다. 한결같이 어디서도 볼 수 없지만, 어디에도 존재한다. 다만 인간이 그것에 대해 무언가의 형태를 띄게끔 만들었기 때문에 그 신은 우리가 상상하는 어느 형태를 띄어 버리고 어딘가 특정한곳에 한정되어 버린다. 그렇다면 그것은 과연 그 본래의 신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일까. 리틀피플은 선인지 악인지(혹은 신인지) 구분할 수 없지만 확실히 그의 존재를 세상에 드러냄에 대해 좋지 않은 분노의 방법을 표출한다. 그리고 교단 ‘선구’가 도터와 리더를 통해 그 목소리를 듣는 방법또한 우리가 상식적으로 ‘선’이라고 생각하는 범주에서 벗어난다. 이것들은 굉장히 중요한 요소가 될 수 있다. 목적과 방법이 ‘선’을 거스른다면, 그 신이라는 실체또한 충분히 일그러진 모습을 띌 수 있다는 것이다. 어떤 목소리냐도 중요하지만 그것을 어떤 의도로, 제대로된 방식으로 받아들이느냐도 간과할 수 없거나 혹은 더 중요한 문제일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후카에리의 아버지가 어떻게 그런 존재가 되어버렸는지 정확한 설명은 나와있지 않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그것은 일반적으로 ‘도덕’이라고 하는 선을 넘었고, 환영받지 못하는 방법이다. 그리고 그것이 이 1Q84의 본론의 시작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니 그것은 곧 이야기를 여는 질문이 된다.

삶에는 많은 현상이 있고 그것을 받아들이는 우리의 감각기관이 있다. 그리고 그것을 통해서 우리는 뇌로(혹은 마음으로) 그것을 받아들인다. 선구에서 보여지는 이 목소리, 그리고 리시버와 퍼시버의 관계는 한 인간이라는 우주에서 펼쳐지는 감각, 현실반응과 다름이 없다고 나는 확신을 굳혔다. 신을 그리고 사람(자신과 타인을 모두 포괄한)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반응하느냐에 따라 삶이, 이야기가 진행되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리고 아오마메 자신또한 신을 향해서 마음속에서 우러나오는 기도를 올리며 자신의 왕국의 도래를 기다리는 것과 마찬가지로 신은 다름아닌 듣는 자신 목소리의 형태을 띄고 우리에게 들려올지 모른다. 그리고 곧 그것은 그 자기자신 스스로가 신이, 또는 목소리가 되기도 함을 나타내는 것은 아닐까
현실에서 달이 한 개라고 본다면, 분명 달이 두 개인 1Q84의 세계는 분명 불가능한 세계이다. 하지만 불가능의 세계에서 덴고와 아오마메의 만남은 가능했다. 그리고 그외에도 여러 가지 불가능한 것들이 가능했다. 1Q84에서는, 1984라는 세계에서 불가능했던 일들이 가능해지는 것이다. 그러니 그 불가능의 세계는 간절한 자들이 만든 세계일지도 모른다. 마치 덴고와 아오마메가 직선처럼 보이는 시간의 틈에 곡선인지 굴곡인지 모를 1Q84라는 시간을 끼워넣어 그들의 만남을 가능하게 한것처럼 말이다.


그리고 그 현실에 대응한다.
아오마메와 덴고는 앞으로 뻗어가기 위해, 비현실적으로 보이는 상황을 벗어나기 위해, 자신들 내부의 공백을 채우기 위해 끊임없이 질문을 던진다. 그리고 서로를 갈구한다. 물론 우시카와 또한 제 나름의 질문을 던진다. 단지 자신에게. 하지만 그 질문이 더 나은 세계를 향해 나아가기 위한 질문인지, 이 현실의 문제를 타계하고, 그 문제만을 위한 질문을 던지는지의 차이로 인해 이들의 운명이 엇갈리게 된다고 본다. 아오마메는 리더를 제거하기에 앞서 1Q84의 중요한 단서들을 리더에게 들을 수 있었다. 그것은 덴고를 위해 20년동안 만날수도 없었던 덴고를 자신의 목숨과 맞바꾸려는 상황까지 이르게 하지만, 결국은 아오마메는 스스로 판단한다. 물론 거기에는 당연 덴고의 목소리가 닿았기 때문이다. 덴고 또한 아오마메와 함께할 더 나은 세계에 대한 희망을 버리지 않았음을 공기 번데기에 쌓인 열살의 아오마메를 향해 상징적으로 확인시켰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시카와는 설령 자신이 맞닥뜨린 문제를 해결한다 하더라도 그것이 더 나은세계로 나갈만한 동력이 되지 못했을 터이다. 우시카와는 분명 다마루의 말대로 심부름꾼으로 쓰기에 아까운 존재이지만, 살아남을 수 있을 정도의 희망이 없었던 것이다.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것은, 앞으로 나아가기 위한 질문을 던지고 거기에서 저마다의 해답을 찾은 이들이다.

물론 행동력으로 따진다면 어쩌면 덴고는 우시카와보다 뒤쳐질지도 모른다. 특히나 덴고는 아오마메와 비교하자면 스스로가 그렇게 느낄만큼 그녀에게 빚졌다는 생각을 갖게 된다. 마치 그녀의 팔은 그를 향해 손을 쭉 뻗었지만, 그는 팔꿈치를 접고서 손을 내민것 처럼 보인다. 처음에는 그저 ‘인간은 자신의 재량에 맞는 몫을 하면된다. 게으름피지 않으면서’ 라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그저 그것뿐일까? 덴고는 ‘수학’에 능통했다. 허나 인생에는 ‘수학’이라는 학문을 포함하고는 있지만 수학 그 자체는 아니다. 답이 하나로 떨어지질 않는다. 각자의 답을 떠안고 살아가는 세계다. 더욱이 달이 두 개 떠있는 세상이라니, 답이 나올 리가 없다. 아오마메의 말처럼, 논리적이지 않은 것을 논리적으로 설명하긴 무척이나 힘든 일이다. 즉, 세계는 논리적이지 않다. 좀더 정확히 말한다면 논리적인 부분과 그렇지 않은 부분이 긴밀하게 섞이고 연관되어 있다. 직접적인 성관계가 없음에도 수태라고 부를만한것을 할 수 있는 1Q84에만 논리가 없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지금도 논리로 설명될 수 없는 많은 일들이 일어나고 있음은 두말할 필요도 없지 않는가. 이것이 덴고와 아오마메가 어떻게 1Q84를 나올 수 있었는지 설명된다. 그들은 끊임없이 존재에 대해, 세계에 대해 Q(Question)를 멈추지 않았다. 그리고 스스로의 해답을 내리고, 거기에 따라 행동했다. 다만 ‘수학’적이지 않은 현상으로 인해 덴고가 조금 천천히 걸었을 뿐이다. 상관없다. 아무리 불편한 사다리라도 아오마메의 의지가 그를 이끌었으니. 그리고 의도적이지 않더라도, 필연적으로, 아오마메와의 거리가 가까울수록 그는 더이상 수학강의를 하지 못하고 결국은 자신 존재에 대한 흔적과 집필중인 소설만을 가지고 떠나게 되니깐 말이다.


하지만 모든것에는 저마다의 대가또한 필요하다.
덴고의 집에도, 아오마메와 우시카와가 잠시 머무는 집에도 NHK 수금원이 문을 두드린다. 그렇다. 어느 삶에도 대가가 필요하다. 다만, 공정한몫이 공정하게 집행되지 않는다. 비록 평균적인 몫이 계산될지라도, 그렇지 않을때가 만연하다. 나는, 덴고가 없는 덴고의 집에, 전에 살던 집주인의 명패를 걸어놓은 아오마메와 우시카와의 집에 수금원이 문을 두드리는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지않나 하는 생각을 한다. 누군가 그동안 얼마나 불행한 인생을 살아왔는지, 어떤형태를 띄는지는 중요치 않다. 1Q84에도 실체로서의 시간은 동등하게 흐르지만, 그것이 얼마만큼을 의미하는지는 제각각이다. 덴고와 아오마메처럼 누군가와, 혹은 혼자서 충만한 시간을 보낸자와 그렇지 않은자가 느끼는 시간성에 대한 대가는 분명 실체적으로는 동등한 시간임에도 다르게 느낄 수 밖에 없다. 그리고 그것으로 인해, 개개인의 시간에 대한 개념에 차이가 생기는지도 모른다. 어쩌면 열심히 살아가는가 아닌가는 부차적인 문제일 수도 있다. 그것이 선을 향해 가느냐 아니냐에 따라서 그 열심의 결과와 대가는 하늘과 땅의 차이이기 때문이다. 우시카와 자체가 그것을 증명한다. 물론 그 누구도 그 문을 열길 원치 않으며, 그 대가의 출처또한 불분명하다. 어쩌면 그 대가를 말하는 수금원에 덴고와 아오마메가 침식되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그 둘이 그들 서로의 대가를 짊어질정도로 강한 힘을 형성하고 있는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어쩌면 대가란 것은 모두에게 동등하게 주어지는 시간을 말하는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한해를 넘기지 않아야한다는 시간성이 그들을 재촉했던 것일까? 그들이 알던 모르던 말이다. 어쨌든 결과적으로 그 수금원에게 문을 열지는 않았어도 아오마메와 덴고는 스스로 그 문을 열고 나갔지만 우시카와는 그러지 못했다. 그는 때를 기다렸지만, 때는 그가 살아 숨쉬는 순간에 오지 않았다. 결국 ‘선구’에 의해서 그는 밖으로 나갈 수 있었다.  


그렇지만 우리는 우시카와를 배제할 수 없다.
으레 선과 악이라는 이분법속에서 악은 배제되어야 할 존재이다. 다만, 우시카와를 악으로만 치부하기엔 다소 망설여진다.(물론 그가 나름의 목표를 달성했다면 이야기는 다소 달라질 수도 있겠지만) 왜냐하면 그도 확실히 달이 두 개인 세상속에서 살고 있던 존재이자, 고독의 심연속에서 낑낑대며 살아가는 수많은 인간군상중에 하나이기 때문이다. 환경은 우월했으나, 다만 거기까지였다. 그 환경은 그의 기이한 모습을 더욱 웅크러지게 만들었다. 그런 자신을 누구보다 잘 알기에 그는 스스로(그 자신이 가능한 곳까지) 자신을 숨기고, 외로움을 받아들였다. 그렇기에 그의 모습은 더 서글퍼 보였다. 그는 오로지 자신만을 믿고 묵묵히 자신에게 주어진 일을 했을 뿐이었다. 어쩌면 우시카와는 단지 마치 자신이 잘 할수 있는 일을, 어떤 대가라는 것을 받아내기위해 끊임없이 문을 두드리던 덴고의 아버지, 즉 NHK 수금원과도 맥을 같이 한다고 보여진다. 다만 그렇다고 그 잘하는 것이 반드시 환영받는 것은 아닐뿐더러, 또한 거기에는 고민이 존재하지 않았다. 자신의 행동이 선인지 악인지보다, 문제를 어떤식으로 해결하는지에 초점이 맞춰졌기 때문이다. 그것도 오로지 자신의 인내와 감을 믿고서 말이다. 희망이 없는 삶은 앞으로 나아갈 수 없다. 다른세계로 건너갈 수도 없다. 혹은 나아간다해도 온전하지 못하다. 어쩌면 우시카와의 기이한 외형은 그것을 상징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는 곧 살아있음에도 죽은자와 다름없이 타인과의 이타적인 ‘사랑’에 대해서 무감각해 있던 것이다. 오로지 자신의 힘만으로 자신의 뒤를 볼 수 없다. 그래서 그는 자신도 느꼈다시피 결정적인 것을 놓치고, 자신의 뒤에서 숨죽여오는 다마루의 기척을 느낄 수 없었다. 덴고와 아오마메와는 다르게 말이다. 그리고 우시카와의 올가미가 결국 그들을 한데 묶어 버렸으니 우시카와라는 존재는 어쩌면 그들에게 장애물이 아닌 점프대였을지도 모르는 법이고 말이다. 하여간 그에게 유일하게 차별하지 않았을, 자신이 키우던 개를 죽음 앞의 주마등에서 발견할 수 있는것은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다시한번 우시카와를 보며 서글퍼진다. 세상에는 너무나 많은 우시카와와 같은 이들이 존재할 테니깐..


스스로에게 던지는 질문이 답을 만들고 그것이 간절한 바램을 거쳐 ‘현실’을 만들어간다.
 누군가 믿을만한 이가 답을 내어준다. 그것은 세계의 정답일 수 있다. 그들은 정말로 그런 것 ‘같은’ 모습을 취하고 있다. 작가(하루키)는 후카에리도, 리더도 될 수 있다. 아니, 개인적으로 보자면 난 ‘리더’쪽에 가깝다고 본다. 리더는 세계에 대해서, 진실에 대해서 설명한다. 그것은 논리적이기도, 그렇지 않기도 하지만(대체로 그 자체로 받아들이기엔 비논리적이겠다.) 강한 설득력을 가지게 된다. 리더의 모습을 띈 하루키라고 설명하자면, 그는 도터(문학)라는 통로를 통해서 우리에게 ‘목소리’를 전해준다. 하지만 그것을 ‘모두’ 받아들일 필요는 없다. 리더는 아오마메는 살아남을 수 없고, 대신 덴고는 살아남을 수 있게 된다고 했지만 결과적으로(정확히는 3권의 결과적으로) 그들은 둘다 살아남았다. 내가 내리는 답은 나의 대답이다. 왜냐하면 내가 던진 질문의 답이 당신의 답이 될리 만무하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참고용’ 이다. 그러니 우리가 누군가의 답을 맹목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과도한 게으름과 안일함이다. 그리고 우리는 항상 그 질문을 통해 더 나은 곳으로 나아갈 것을 상상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우시카와처럼 현실을 받아들였지만, 그 현실에서 끝이 나고 만다. 부인과 딸과 함께살지 못하고, 죽음앞에서 자신이 키우던 멍청한 개를 떠올려야만 하는 지독히 쓴 현실말이다.

덴고와 아오마메가 건너온 1984는 어쩌면 또 하나의 1Q84는 아닐까. 질문은 어느세계에서나 계속 되어야 한다. 물론 달은 한 개다. 덴고와 아오마메도 상징적인 하나이다. 하지만 태양이 두 개일 수도 있다. (말하자면 그렇다는 것이다) 나름의 1984이지만, 곧 그것은 또하나의 1Q84라고 부르는것도 가능하리란 것이다. 그렇다면 그 이후에도, 또 그 이후에도. 그 내용과 농도는 다를지언정 질문이 멈춰서는 안될일이 아니겠는가
 또한 그들이 1Q84에 대해서 인지할 수 있었던 것은 분명 1984에 대한 끊임없는 의심과 질문이 있기에 가능했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현실도피와는 다르다. 내가 딛고 있는곳이 땅이라는 것은 알지만, 그것이 ‘왜’ 땅인지 질문하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가 사는 시간에 Q(Question)를 넣어야만 한다. 그리고 아오마메처럼, 덴고처럼, 혹은 우시카와처럼 각자의 해답(다마루의 말처럼, '그것이 존재한다면')을 통해 삶을 살아가야 한다. 삶에서 더욱 중요한 것은, 답장(혹 그것이 존재한다면) 으로 페이지를 휙 넘기려는 태도가 아니라, 질문하는 것이다. 질문해서 얻은 자신의 해답이야 말로 세계를 향해 더욱 뻗어나가게 해주는 것이다. 사실상 질문하는 것 자체가 1Q84처럼, 세계에서 이탈된것처럼 느껴질 수도 있겠지만, 그 의심과 질문이야말로 우리가 지금에 머물러야 하는지, 출구를 찾아야 하는지에 대한 답을 내려줄 것이기 때문이다. (그로인해 1Q84에서 나갈 수 있는자와, 영영 머물러여 하는 자가 나눠지지 않았는가!)  


‘하지만 한번 정해진 마음에는 그게 너무 길다고 할 일은 없다.’ 3권 701p
이러니 단순히 러브스토리라고 부르기엔, 너무나 많은 것들을 담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물론 많은 문학작품이 주제적인것 외에도 관심을 기울여야 할 것은 많다) 하지만 결국은 덴고와 아오마메의 사랑의 서사라는것은 부정할 수 없다. 다만 그것을 통해 이야기되는것의 존재감이 꽤나 클 뿐이다. 20년이란 시간은 누구에게나 어마어마한 시간이다. 하지만 시간은 지극히 상대적이면서도, 지극히 주관적이다. 현실에 대해서 끊임없이 질문하는 와중에도 우리가 그것을 멈추어야 할 대상 愛人과 함께, 우리는 삶 여기저기서 다양한 형태의 도터를 만나고, 서로에게 도터이자 듣는자가 되어야 한다. 그것은 곧 바램이라는 형태를 띄어서 진정으로 사랑하는 이들과 함께 할 수 있는 현실을 만들어간다.
물론 아오마메의 뱃속에 있는 작은 무언가에 대해서 ‘도터’라 명명했긴 하지만, 그것은 아오마메 에게 간절한 ‘희망’의 역할을 하였고, 어쩌면 그 희망을 통해 덴고를 찾아냈으니, 떨어져있는 두 마음이 서로를 향해 불가능해 보였던 ‘희망’을 만들었다고 볼 수도 있지 않을까, 서로가 강하게 연결되어 있다면 그 ‘희망’이 실체가 되고 ‘진짜’로 이루어지는게 아닐까.

‘진짜’ 세계에서 사랑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사랑’ 하는 곳에 진짜 세계가 열리는 것 아닐까.


4권이 나온다해도, 질문은 계속된다.
개인적으로 3권의 결말이 좋다. 하지만 3권의 끝이 하루키 이야기의 끝은 아닐것이다. 1Q84 3권의 마지막장을 장식하는 ‘BOOK3 끝’, 그리고 하루키의 인터뷰, 남아있는 너무도 많은 궁금증들. 덴고와 아오마메에게 미안하지만 그것들은 하루키의 해답이 필요할지도 모른다. 물론 속편이 등장한다면 많은 사람들의 많은 해석들이 조금 더 명확해지거나, 지금까지의 추측을 모두 뒤엎을 만큼 가공할만한 진실이 등장할지 모른다. 하지만 그런들 완벽해질 수 있을까? 나로 말하자면 3권이든 4권이든 만족한다. 어쨌든 3권이든 4권이든 우리는 언젠가 책장을 덮을 것이고, 하루키가 우리에게 던져준 그 자신의 답과 또다른 질문이, 우리가 우리 스스로에게 던지는 질문은 분명 남을 것이기 때문이다.

과연 그것(혹은 이것, 저것, 그 무엇이라도)이 ‘진짜’인가. 그렇다면 당신에게도 그것이 ‘진짜’인가?  만약 그것에 조금이라도 의문이 든다면 우리는 그것을 '진짜'로 만들기 위해서 간절히 바라고, 행동해야 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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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선가 나를 찾는 전화벨이 울리고
신경숙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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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경숙의 소설은 '바이올렛' 이후 세번째로 접하게 됐다. 그녀의 이름이 기억에 확실히 각인되있었음에도 공백이 꽤 큰 셈이다. 그럼에도 과거의 언젠가 ‘풍금이 있던 자리’를 읽고서 접했던, 그전까지 다른 책에선 느낄 수 없었던 밑도 끝도 찾을 수 없는 절망과 고독은 아직까지 고스란히 기억 한켠에 남아있다.

그 과거의 기억, 그때 느꼈던 작가로서의 믿음이 현재의 내 상황과 맞물려 다시 그녀의 책을 들게 했다. 그리고 이 ‘어디선가 나를 찾는 전화벨이 울리고’(이하 어.나.벨) 에는, 작가가 희망했듯이 현재 한국에서 일본문학으로 대표되는 청춘, 성장소설의 (언급하진 않았지만 곧 ‘하루키’로 대표될) 자리에 신경숙이 당당하게 자리를 내어달라고 할 수 있을 만큼의 진정성과 순수 우리말이 보듬어줄 수 있는 (그 어떤 잘된 번역일지라도 비교될 수 없을, 우리말이 우리에게 주는 감성. 그리고 그녀이기에 가능한) 한국적인 정서가 가득 담겨 있었다. 또한, 작가가 통과해왔을 청춘이란 시기의 개인적 감성과 공감, 그리고 그것들을 토대로 이뤄진 이야기를 읽는 내내, 나 자신의 상실에 대해서 스스로에게 끈임없이 파헤쳐진다.


 
엄마를 상실한 정윤에서부터, 미루, 명서, 단이, 윤교수..
그리고 어떻게 소설에서 나타났던간에 그들 각자의 상실을 짊어져야만 하고, 더러는 그 상실을 감당하지 못했던, 정윤의 아버지를 비롯한 미래언니, 단이와 미루의 가족들, 그리고 윤교수의 집에 찾아갔다가 발길을 돌린 이름모를 등장인물에도 느낄수 있듯이, 소설 가장자리에 있는 사람들까지도 표현되지 않는 그들 나름의 상실을 안고 살아간다. 그것은 우리 삶에서 나와 너를 벗어난 수많은 사람들이 갖는 흔하디 흔한, 하지만 각각 개인적으로는 인생의 무게를 가늠하게 하는 상실을 갖고 있음의 재현. 또한, 거기엔 ‘그때 조금 다르게 행동했더라면’ 이라는 강한 후회와 미련을 갖게끔 하는 상실이 있는가 하면, 누구에게 물어봐도 아무대답도 찾을 수 없었을, 시간만이 그것을 인정할 수 있게하는 상실이 있다.

정윤을 비롯한 소설속의 이들은 각기 저마다의 상실을 겪고, 통과한다.
그러나 누군가는 안타깝게도 영영 그 시간을 지나가지 못하고 그 시간속에서 박제된다.  

누굴 탓 할 겨를도 없이 그들은 상실의 대상을 갖게 되고, 누군가의 상실의 대상 자체가 되기도 한다.

개인적으로 이 ‘어.나.벨’ 에는 상실에 대한 여러 층이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단이와 미루가 끝내 자신들을 구원할 수 없었던, 윤과 미래언니를 향한 상실,
/윤과 명서가 끝내 이 둘을 구원할 수 없었던 상실,
/윤과 명서 또한 서로를 온전히 구원할 수 없었던 상실.
/그리고 모두 기록될 수 없었겠지만, 우리 삶에선 분명 존재할 주변인들이 받아들여야 할 상실...

단이의 의문사 이후 정윤의 삶 전반에 걸쳐서 그에 대한 그리움과 절망감이 드러남에도 불구하고, 여러 상실중에서 나에게 단이의 죽음이 가장 안타까웠던 이유는 누구보다 많은 시간을 함께 공유해 왔음에도 사랑으로서 받아들여지지 못했던 안타까움과, 결국은 명서에게 기댈 수 밖에 없는 정윤의 모습. 그리고 ‘기억속에서만 남아있는 존재에서 과연 무슨 의미를 찾을 수 있나.’ 라는 스스로에 대한 회의적인 질문의 영향이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결국 나또한, 사라진 존재에 대해서 해줄 수 있는 유일한 추모가 ‘기억하는 일’ 이라는 것을 인정할 수 밖에. 씁쓸하지만.. )

그리고 그것은 윤교수를 통해 구원의 희망을 보여줬지만, 끝끝내 자신의 과거에 대한 치유를 하지 못한 채 쓸쓸하게 사라져갔던 미루에 대한 안타까움과도 이어진다.
언니와 함께했던 그 집이 타인의 것이 되는 순간, 미루는 어쩌면 그 자신을 치유할 수도 있었을 유일한 공간을 빼앗기게 된 것이다. 상실의 공간에서 필 수 있었던 백합은 그렇게 채 피지도 못한 채로 져버렸다. 그것을 미루의 부모를 탓했어야 하나, 아니면 그 집을 산 사람을 탓했어야 하나, 아니면 미루를 방치했던 윤과 명서를 탓했어야 하나.


그 누구에게도 책임이 있기에, 그 누구에게도 책임을 탓 할 수 없는걸까. 미루는 마치 제노비스와 같은 처지가 되어버렸다. 조금 억지스럽게 이어가자면, 그 누구도 의도하지 않았지만, 미루의 엄마, 윤과 명서, 그리고 그 집을 산 사람까지.. 불을 켰던 사람들과 같은 존재가 되버린 것이다. 미루 그 자신의 말처럼, 얼마나 두렵고 무서웠을까. 죽는다는 두려움보다는 그 자신이 결국 상실속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잊혀져 갈지도 모른다는 절망감.. 소멸을 맞닥뜨린 존재가 간절히 바랄 수 밖에 없는지도 모를, 기억에라도 남겨지는 일. 그의 부치지 않은 편지들은 그런 잊혀지고 싶지않은 마지막 바람 또한 내포하고 있지 않았을까.
이렇듯 미루는 치유에 관한 마지막 희망적 공간마저 또한번 '상실'한 채, 단이는 도저히 그것을 나눌 수 없었던 공간에서... 누구도 원하지 않았던 방치속에서 그들은 힘겹게 홀로 싸워야만 했던 것이다.

하지만 윤과 명서는, (마치 일본영화 ‘러브레터’에서 남자친구를 잃은 산에 가서 그의 이름을 부르며 안부를 묻는 여주인공의 심정처럼) 노송의 가지에 쌓인 눈을 털어내며 이 눈사태같은 상실을 통과한다. 이 상실에 대한 치유의 과정을 통해서 결국은 윤과 명서처럼 상실을 딛고 살아갈 수 있는 수많은 사람들과, 단이와 미루처럼 그렇지 못한 사람으로 나눠질 수 밖에 없게 되었던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서로에게 크리스토프와 같은 존재로써 정윤과 명서는 어떤식으로든 그것을 통과해냈지만, 단이와 미루는 자신에게 쌓인 상실을 털어내지 못하고 결국 쓰러지고 만 것이다.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서 자신의 상실을 인정하고, 그것에 자신이 가능한 정도까지 힘들어하며 스스로 멈출 때 까지 목놓아 울었어야만 했던 시간을 갖지 못한 것이다.


다시한번 나 스스로에게 물어볼 수 밖에 없었다. 이 치유의 과정이 부재된 단이와 미루에 대해서 누구에게 책임을 물을 수 있을까. 단이를 사랑하지 못하고, 그가 원하는 만큼의 존재가, 출구가 되지 못했던 정윤에게 물을 것인가, 미루가 아무것도 먹지 않고 메말라가는 순간에 사회적 정의를 성취하기 위해 시위현장에 있었던 명서를 탓 할 것인가. 우리가 윤과 명서를 탓할 수 없는 것은 그들을 동정하기 때문만이 아니다. 그것 또한 우리들의 모습이기 때문이다. 그것들은, 그때는 알 수 없었던 것임을 지금의 우리가 알고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상실의 존재에 대해서 아파하고 몸부림치지만, 결국 우리 또한 누군가의 상실의 대상이었지 않았겠는가.   

   
  함께 있으면 너와 나는 아플거다. 흉측하게 될거다. (p375)  
   
 

하지만 덩그러니 남게된, 서로가 서로의 크리스토프와 같았던 윤과 명서는 결국 서로에게 기댈 수 없었다. 작품에서 명서의 말을 빌리기도 하지만, 그것은 그들이 홀로 설 수 있는 힘이 없음을 명서 스스로가 깨달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비록 사랑은 아니더라도, 각자의 삶에 오래도록 함께해온 단이와 미루를 온전하게 떠나보내지 못한 채 무의식중에 그들의 이름을 찾는, 그 상실감을 서로에게 채우려 하는 것은 결국 서로의 존재조차도 그 상실을 온전히 채울 수 없음을 인정하는 순간엔 더 큰 고통이 따르리란 것을 그들도 알고 있었기 때문은 아닐까. 
  
   
 

새벽바람 속을 뛰어 그를 데리러 갔을 때 그가 나를 보고 미루야…라고 불렀다. 기억하지 못해도 아마 나도 언젠가 그를 두고 단아, 라고 불렀을 것이다. 그와 내가 더이상 약속을 하지 않기 시작한 것은 혹시 그 새벽 이후부터였을까? 우리가 더이상 서로를 향해 그쪽으로 갈게, 라고 말하지 않게 된 때가? (p363)

 
   


자신도 감당하기 벅찬 상실과 고독을 안고 서로에게 기대는 것은 언뜻보기엔 슬프도록 아름답고 이상적인 모습으로 비칠 수 있지만, 두발이 아닌 외발로 서서 상대방에게 지탱하고 있는것은 종국에는 누군가 힘이 풀려버리면 그 둘다 쓰러지게 되고 마는 것이다. 나또한 타인과 상실의 고통을 나눌 수 없다는 말을 하고싶은 것은 아니다. 다만, 끝끝내 타인과 나눌 수 없는 상실의 고통은 자신이 받아들여야 할 몫이라는 것을 인정해야 하는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보는 것. 
상실의 대한 고통은 타인과 신뢰로써 나눌 수 있을지언정, 그것을 전부 덜어낼 순 없다는 것. 분명 자신혼자서 짊어져야 할 몫이 존재할 것이다. 그렇게 누군가, 자신에게 아무말도 해줄 수 없는 먹먹한 순간을 거쳐가면서 우리는 청춘을 통과하는 것이 아닐까. 그리고 자신이 됐다 싶을 때, 그 이후에도 그 자신을 떠날 수 없지만 그 시기의 모습이 아닐 상실과 고독에 대해서 타인에게 기댈 수 있는 것이 아닐까.
그렇기 때문에 윤과 명서가 8년이라는 긴 시간동안 스스로를 견뎌낸 후 서로에게,
“내.가.그.쪽.으.로.갈.까?” “내.가.그.쪽.으.로.갈.게”... 라고 할 수 있게 된 것은 아닐까.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그들이 서로 존재하지 않았다면, 그렇게 안타까운 서로에 대해 신뢰하지 않았다면 그들 또한 무너지지 않았으리란 보장이 있었을까? 하는 물음이 든다.

이론적으로 존재하지 않음에도 실제로 존재하는 길잡이 개의 이야기처럼, 결국 우리는 기대면서도 기대지 않는다고 말하고, 기대지 못하는 것을 알면서도 기대려고 하는 것은 아닐까? 그렇게 언어로, 이론으로 설명될 순 없지만, 우리는 그렇게 서로에게 적절한 시기에 길잡이 역할을 해주며 살아가는게 아닐까. 이미 지나간 찬란한 시기에 우리는 때로는 길잡이 개를 따라가는 역할을 하기도 하고, 그 길잡이 개 스스로가 되기도 하지 않았겠는가. 그리고 어쩌면 지금도. 아니, 분명 앞으로도...

어쩌면 모순적이게도 그들은 함께하지 않음에도 서로를 의지했을지도 모를 일.
그렇다면 결국 실체는 기대지 않아도, 영혼은 믿음으로써 기대고 있었다고 봐야할까.

이렇게 생각하고 나니, 문득 윤과 명서를 떠올리면서 그들에게 이 노래를 들려주고 싶다.

               “누가 뭐래도 사람이 꽃보다 아름다워. 이 모든 외로움 이겨낸 바로 그사람” 
                                                                               '안치환 - 사람이 꽃보다 아름다워 中'

지독하게 안타까우면서도 아름다운 그것. ‘사람’. 그도 그녀도 다시 한번 잊지 말아야 할 진리를 일깨워준다. 

 

   
  지금은 기억조차 나지 않는 잊혀진약속들, 지키지 못한 채 사라져버린 약속들 (p269)  
   


우리의 청춘은, 아니 인생이 상실과 떨어질 수 없는 것은, 그 누가됐든 하나하나 일일이 나열할 수 없는 각자의 이유들로, 그 인생의 한 시기를 통과하면서 버려야 할 수 밖에 없었던, 버려질 수 밖에 없었던 이야기들을 하나씩 가지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하는 생각을 해본다. 이성이든 동성이든 관계란것은 항상 파도처럼 밀려왔다 떠나가곤 하니깐. 다만 그 시간의 길이에 차이가 있을뿐. 상실은 삶 여기저기에서 청춘이라 불리는 시기를 지나서도 끈덕지게 연결된다. 진부하지만, 상실의 연속이 삶이 되는 것이다.

그렇지만 다행스럽게도 대부분의 사람은 그 힘든 시기를 통과하면서 살아나가게 된다. 대부분이 거치지만 결코 만만치 않은 청춘의 시간. 그리고 그것을 견뎌낼 수 있었던 기성세대가 되서야 비로소, 이땅의 현재진행형 청춘들에게 따뜻한 격려의 한마디를 건낼 수 있는것인지 모른다. 그리고 기꺼이 그 역할을 해준 신경숙이라는 작가 덕분에, 우리는 이 끝이 보이지 않는 긴 터널같은 청춘의 방황속에서도, 언젠가 이 끝에 빛이 보일것이라는 막연한 희망을 가질 수 있는 것 아니겠는가.

   
 

시간은 언제나 밀려오지만 똑같은 날은 다시 오지 않는다는 것을 젊은날에 인식하고 있었다면 뭔가 달라졌을 거란 생각이 든다. 그랬다면 누구는 작별하지 않고 누군가는 살아남았을지도, 모든 것이 끝났다고 생각되는 그 순간에 또다른 일이 시작되기도 한다는것을 그때 알았더라면. (p11)

 
   


그때 알았라면... 그때는 알 수 없었던, 알지 못했던 것에 대한 안타까움.
청춘이 지나고나서야 그때가 청춘이었음을 알게 되듯, 그때 미처 알지 못했던 것들은, 그 순간에 우리에게서 숨어있던 것이 아니라, 오랜 시간이 지나서 비로소 우리가 그것으로부터 거리를 두었을 때 알 수 있는 것이니깐.

예기치 않은 곳에서, 어떻게 이것을 예견하고 만들었을지 추측하기도 힘든 고대의 나스카 유적지에서 거미형상의 모습을 쫓으며 단이를 떠올리면서 ‘두려워하지마, 너를 잊지 않을게’ 라고 말할 수 있게 되는 것은 오래전이라고 부를 수 있는 시간이 지난 후에야, 그것을 멀찌감치 떨어져서 볼 수 있을 때 비로소 그것에 대해서 조금 더 이해할 수 있게된 모습이 아닌가 싶다. 
 

   
 

오래전, 이라고 쓸 수 있을 만큼 시간이 흐른 후에야 알게 되는 것들,  

어쩌면 우리는 그런 것들로 이루어져 있는지도 모른다. (p358)

 
   


결국 지금 우리가 서있는 ‘현재’란 곳은 그렇게 해서 알게된 것들의 (지금까지의) 총체,
그리고 앞으로 언젠가 또 안타까워할지 모르는 ‘과거의 그때’의 순간인게 아닐까.

청춘이라 함은 [작가의 말]에서 ‘이십년 후에도 이 작품을 쓰고 있을 것 같다’는 신경숙의 말처럼 오래전이라고 부를 수 있을만한 시간이 지난후에, 비록 그때와 같은 절망은 없을지라도, 여전히 그 빛바랜 먹먹함이 우리 가슴 한켠에 자리잡으며 잊혀지지 않는 슬프도록 찬란한 생의 한 순간인가 보다.  

 
   
 

언젠가 우리에게 생긴 일들을 고통 없이 받아들이는 순간이 올거라고  

누군가 말해주길 간절히 바랐던 시간들. (p362)

 
   


 
때론 아주 가끔, 어떤 것을 표현할 때 ‘언어로는 표현할 수 없는것’ 이라고 이야기 할 때 가 있다. 
그것은 나의 미천한 언어적 한계를 솔직하게 인정하는 것과 동시에 나에게는 그것에 대한 최고의 예우이다.
떠나간 그 사람에게, 나는 신경숙의 소설에 대해서 이렇게 얘기해줬던 적이 있다.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막막한 우울함과 외로움, 고통이 있다...’ ..라고
그리고 그 사람은 ‘엄마를 부탁해’ 를 읽고 그것이 무엇인지 알 것 같다고 이야기 했었다.
그때를 떠올려서인지, 처음 ‘어.나.벨’ 을 읽었을때도 다른 그 무엇보다 강렬히 기억됐던 그 말.  

 
   
 

이렇게 아무말도 할 수 없는 순간들이 살아가는 동안 얼마나 많이 다가올까.   

한 인간이 성장한다는것은 아무 말도 할 수 없는 순간들을 하나씩 통과해나가는 일인지도 모른다. (p210)

 
   



결국 뼛속까지 스며드는 아픔 앞에서 우린 그 어떤 위로도 찾지 못하고 입을 다물 수 밖에 없지 않겠는가. 그렇다면 그 아무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서글픈 청춘의 순간들을 언어로 풀어내기 위해 작가는 얼마나 많은 고민을 거치고, 자신을 들여다보았을까.

신경숙의 이 소설은 독자의 내면 깊숙한 곳으로 천천히, 조심스럽게 이끈다. 번역된 것이 아닌, 태생부터 순수하게 우리말로 이루어져, 감성의 끝을 끈질기게 추척해 나아가 결국에는 우리가 그 언어를 통해 자신의 내면에 다다를 수 있게 해준다.  

문득, (끝없이 반복될 것 같은, 시대에 대한 아픔을 잊지 않았으면서도) 결국 내가 바라보는 세상의 면은 내가 만들어놓은 내면을 통해서 보여지는 것이란걸 다시금 체감할 수 있을만큼, 나의 이 감상이, 개인과 개인의 상실에만 집중되는 것은 스스로도 아쉽긴 하지만, 대신 이 책을 두번째로 읽으면서 그만큼 나는 더 가까이 내 심연 깊숙이 다가갈 수 있었다. 그리고 그들 각자의 상실을 읽어내는 내내 나의 상실이 어루만져저서 괴로웠다. 하지만 어느샌가 인정할 수 밖에 없게 된다. 그렇게 힘든 시간을 버텨왔던 동안, 이 책을 읽는 동안, 그리고 이것을 쓰는 순간순간에도 나는 그렇게 상실을 인정하고 감당하고 있다는 것.

앞으로 어디서 무엇을 하던간에 그 상실이란 녀석은 불쑥 나를 찾겠지만, 그때도 그 무엇인가를 하면서 그것을 인정하고 견뎌내리란 것. 그때에는 아마 지금과 같은 쓰디쓴 모습은 아닐 것이란 것. 상실은 계절과 같아서 나의 어깨에 다시 또 쌓이겠지만, 그 언젠가도 나는 그것을 털어내고 또 다시 앞으로 나아갈 수 있지 않을까. 그 슬픔을 잊지 않고, 가슴에 품은 채로..
그리고... 그때 쯤 되면, 그 상실의 존재가 다시한번 나의 전화벨을 울리진 않을까 하는
기약없고, 염치없는, 어쩌면 바보같은 기대도 해가면서..  

 
   
 

혹, 이른 새벽에 깨어나거든 이 세상 어딘가에 쓰는 나도 깨어 있다는 것을 한번쯤 생각해주세요.  

그러면 그 순간에 우리는 함께 꺠어 있는 셈이 되겠지요. (작가의말 p375)

 
   



신경숙의 전화벨은 나에게 다다랐다. 그녀는 마치, 잘못 걸려온 전화에서 누군가를 애타게 찾는 목소리를 묵묵히 놔둔 그때의 정윤의 모습이다. 그칠 때 까지 울게 놔두고, 지칠 때까지 노송위에 쌓인 눈을 털게 놔뒀던 윤교수의 모습이기도 하다. 그 어떤 이별과 상실에 관한 책보다도 더, 이 소설이 더 힘있다고 말할 수 있는것은, 이야기 전반에 걸친 절망과 외로움의 한켠에서, 그럼에도 항상 우리에게 살아있으라는 이야기를 해주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한땀 한땀 정성스럽게 풀어놓여진 언어에, 그녀의 진심어린 이해와 응원이 담겨있기 때문에.

그래서 난 신경숙의 이 '어.나.벨'이 '언어로 만들어진, 우리의 내면을 향한 튼튼한 계단' 과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치 미루의 집에 가기 위해 내려가야만 했던 긴 계단을 참을성 있게 따라 내려가듯이.
그리고 그 끝엔, 슬프도록 생생한 백합이 우리를 맞이했던 것처럼. 
 

그리고 누군가 그랬을 것처럼, 나 또한 어렵게 어렵게 책장을 덮고난 후, 많은 생각과 다짐을 했다.

과거의 ‘언젠가’ 우리가 누군가에게 그런 존재였는지는 온전하게 기억하지 못할지라도,
앞으로의 ‘언젠가’ 우리 또한 누군가에게 그런 전화벨을 울리는 사람이 되자.
그리고 꼭 “내가 거기로 갈게”라고 말해줄 수 있는 사람이 되자.
혹시 또 알겠는가. 그렇게 살아가다보면,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멀어진 사람에게서 전화벨이 울리게 될지.

그러니까 우리는 ‘오.늘.을.잊.지.말.고’ 살아가자. 그렇게 살기위해서 노력하자.
윤교수의 말처럼,하늘의 별은 우리가 죽은 후에도 그 자리에서 빛나고 있겠지만,
오늘 우리가 볼 수 있는 별은, 오직 오늘이란 순간속에서만 존재할 테니.
기쁨의 순간이 영원하지 않았듯, 슬픔 또한 영원하지 않을테니깐. 
꺼지지 않겠다는 스스로의 몸부림이 곧, 누군가에게 강한 별빛으로 비춰질지도 모를테니.

당분간은 '이 아무말도 할 수 없는 순간들을 얼마나 더 통과해야 하는걸까’ 라는,
그 누구에게도 대답을 찾을 수 없는 질문이 내 머릿속을 맴돌 것 같다.
어쩌면 먼훗날에도 나는 같은 질문을 던지고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그리고 이 내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청춘을 통과하는 시기에,
그녀의 진심이 담긴 이 책이 함께하는 것이 정말 고맙고, 다행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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