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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선가 나를 찾는 전화벨이 울리고
신경숙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5월
평점 :
신경숙의 소설은 '바이올렛' 이후 세번째로 접하게 됐다. 그녀의 이름이 기억에 확실히 각인되있었음에도 공백이 꽤 큰 셈이다. 그럼에도 과거의 언젠가 ‘풍금이 있던 자리’를 읽고서 접했던, 그전까지 다른 책에선 느낄 수 없었던 밑도 끝도 찾을 수 없는 절망과 고독은 아직까지 고스란히 기억 한켠에 남아있다.
그 과거의 기억, 그때 느꼈던 작가로서의 믿음이 현재의 내 상황과 맞물려 다시 그녀의 책을 들게 했다. 그리고 이 ‘어디선가 나를 찾는 전화벨이 울리고’(이하 어.나.벨) 에는, 작가가 희망했듯이 현재 한국에서 일본문학으로 대표되는 청춘, 성장소설의 (언급하진 않았지만 곧 ‘하루키’로 대표될) 자리에 신경숙이 당당하게 자리를 내어달라고 할 수 있을 만큼의 진정성과 순수 우리말이 보듬어줄 수 있는 (그 어떤 잘된 번역일지라도 비교될 수 없을, 우리말이 우리에게 주는 감성. 그리고 그녀이기에 가능한) 한국적인 정서가 가득 담겨 있었다. 또한, 작가가 통과해왔을 청춘이란 시기의 개인적 감성과 공감, 그리고 그것들을 토대로 이뤄진 이야기를 읽는 내내, 나 자신의 상실에 대해서 스스로에게 끈임없이 파헤쳐진다.
엄마를 상실한 정윤에서부터, 미루, 명서, 단이, 윤교수..
그리고 어떻게 소설에서 나타났던간에 그들 각자의 상실을 짊어져야만 하고, 더러는 그 상실을 감당하지 못했던, 정윤의 아버지를 비롯한 미래언니, 단이와 미루의 가족들, 그리고 윤교수의 집에 찾아갔다가 발길을 돌린 이름모를 등장인물에도 느낄수 있듯이, 소설 가장자리에 있는 사람들까지도 표현되지 않는 그들 나름의 상실을 안고 살아간다. 그것은 우리 삶에서 나와 너를 벗어난 수많은 사람들이 갖는 흔하디 흔한, 하지만 각각 개인적으로는 인생의 무게를 가늠하게 하는 상실을 갖고 있음의 재현. 또한, 거기엔 ‘그때 조금 다르게 행동했더라면’ 이라는 강한 후회와 미련을 갖게끔 하는 상실이 있는가 하면, 누구에게 물어봐도 아무대답도 찾을 수 없었을, 시간만이 그것을 인정할 수 있게하는 상실이 있다.
정윤을 비롯한 소설속의 이들은 각기 저마다의 상실을 겪고, 통과한다.
그러나 누군가는 안타깝게도 영영 그 시간을 지나가지 못하고 그 시간속에서 박제된다.
누굴 탓 할 겨를도 없이 그들은 상실의 대상을 갖게 되고, 누군가의 상실의 대상 자체가 되기도 한다.
개인적으로 이 ‘어.나.벨’ 에는 상실에 대한 여러 층이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단이와 미루가 끝내 자신들을 구원할 수 없었던, 윤과 미래언니를 향한 상실,
/윤과 명서가 끝내 이 둘을 구원할 수 없었던 상실,
/윤과 명서 또한 서로를 온전히 구원할 수 없었던 상실.
/그리고 모두 기록될 수 없었겠지만, 우리 삶에선 분명 존재할 주변인들이 받아들여야 할 상실...
단이의 의문사 이후 정윤의 삶 전반에 걸쳐서 그에 대한 그리움과 절망감이 드러남에도 불구하고, 여러 상실중에서 나에게 단이의 죽음이 가장 안타까웠던 이유는 누구보다 많은 시간을 함께 공유해 왔음에도 사랑으로서 받아들여지지 못했던 안타까움과, 결국은 명서에게 기댈 수 밖에 없는 정윤의 모습. 그리고 ‘기억속에서만 남아있는 존재에서 과연 무슨 의미를 찾을 수 있나.’ 라는 스스로에 대한 회의적인 질문의 영향이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결국 나또한, 사라진 존재에 대해서 해줄 수 있는 유일한 추모가 ‘기억하는 일’ 이라는 것을 인정할 수 밖에. 씁쓸하지만.. )
그리고 그것은 윤교수를 통해 구원의 희망을 보여줬지만, 끝끝내 자신의 과거에 대한 치유를 하지 못한 채 쓸쓸하게 사라져갔던 미루에 대한 안타까움과도 이어진다.
언니와 함께했던 그 집이 타인의 것이 되는 순간, 미루는 어쩌면 그 자신을 치유할 수도 있었을 유일한 공간을 빼앗기게 된 것이다. 상실의 공간에서 필 수 있었던 백합은 그렇게 채 피지도 못한 채로 져버렸다. 그것을 미루의 부모를 탓했어야 하나, 아니면 그 집을 산 사람을 탓했어야 하나, 아니면 미루를 방치했던 윤과 명서를 탓했어야 하나.
그 누구에게도 책임이 있기에, 그 누구에게도 책임을 탓 할 수 없는걸까. 미루는 마치 제노비스와 같은 처지가 되어버렸다. 조금 억지스럽게 이어가자면, 그 누구도 의도하지 않았지만, 미루의 엄마, 윤과 명서, 그리고 그 집을 산 사람까지.. 불을 켰던 사람들과 같은 존재가 되버린 것이다. 미루 그 자신의 말처럼, 얼마나 두렵고 무서웠을까. 죽는다는 두려움보다는 그 자신이 결국 상실속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잊혀져 갈지도 모른다는 절망감.. 소멸을 맞닥뜨린 존재가 간절히 바랄 수 밖에 없는지도 모를, 기억에라도 남겨지는 일. 그의 부치지 않은 편지들은 그런 잊혀지고 싶지않은 마지막 바람 또한 내포하고 있지 않았을까.
이렇듯 미루는 치유에 관한 마지막 희망적 공간마저 또한번 '상실'한 채, 단이는 도저히 그것을 나눌 수 없었던 공간에서... 누구도 원하지 않았던 방치속에서 그들은 힘겹게 홀로 싸워야만 했던 것이다.
하지만 윤과 명서는, (마치 일본영화 ‘러브레터’에서 남자친구를 잃은 산에 가서 그의 이름을 부르며 안부를 묻는 여주인공의 심정처럼) 노송의 가지에 쌓인 눈을 털어내며 이 눈사태같은 상실을 통과한다. 이 상실에 대한 치유의 과정을 통해서 결국은 윤과 명서처럼 상실을 딛고 살아갈 수 있는 수많은 사람들과, 단이와 미루처럼 그렇지 못한 사람으로 나눠질 수 밖에 없게 되었던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서로에게 크리스토프와 같은 존재로써 정윤과 명서는 어떤식으로든 그것을 통과해냈지만, 단이와 미루는 자신에게 쌓인 상실을 털어내지 못하고 결국 쓰러지고 만 것이다.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서 자신의 상실을 인정하고, 그것에 자신이 가능한 정도까지 힘들어하며 스스로 멈출 때 까지 목놓아 울었어야만 했던 시간을 갖지 못한 것이다.
다시한번 나 스스로에게 물어볼 수 밖에 없었다. 이 치유의 과정이 부재된 단이와 미루에 대해서 누구에게 책임을 물을 수 있을까. 단이를 사랑하지 못하고, 그가 원하는 만큼의 존재가, 출구가 되지 못했던 정윤에게 물을 것인가, 미루가 아무것도 먹지 않고 메말라가는 순간에 사회적 정의를 성취하기 위해 시위현장에 있었던 명서를 탓 할 것인가. 우리가 윤과 명서를 탓할 수 없는 것은 그들을 동정하기 때문만이 아니다. 그것 또한 우리들의 모습이기 때문이다. 그것들은, 그때는 알 수 없었던 것임을 지금의 우리가 알고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상실의 존재에 대해서 아파하고 몸부림치지만, 결국 우리 또한 누군가의 상실의 대상이었지 않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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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있으면 너와 나는 아플거다. 흉측하게 될거다. (p37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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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덩그러니 남게된, 서로가 서로의 크리스토프와 같았던 윤과 명서는 결국 서로에게 기댈 수 없었다. 작품에서 명서의 말을 빌리기도 하지만, 그것은 그들이 홀로 설 수 있는 힘이 없음을 명서 스스로가 깨달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비록 사랑은 아니더라도, 각자의 삶에 오래도록 함께해온 단이와 미루를 온전하게 떠나보내지 못한 채 무의식중에 그들의 이름을 찾는, 그 상실감을 서로에게 채우려 하는 것은 결국 서로의 존재조차도 그 상실을 온전히 채울 수 없음을 인정하는 순간엔 더 큰 고통이 따르리란 것을 그들도 알고 있었기 때문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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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바람 속을 뛰어 그를 데리러 갔을 때 그가 나를 보고 미루야…라고 불렀다. 기억하지 못해도 아마 나도 언젠가 그를 두고 단아, 라고 불렀을 것이다. 그와 내가 더이상 약속을 하지 않기 시작한 것은 혹시 그 새벽 이후부터였을까? 우리가 더이상 서로를 향해 그쪽으로 갈게, 라고 말하지 않게 된 때가? (p36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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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도 감당하기 벅찬 상실과 고독을 안고 서로에게 기대는 것은 언뜻보기엔 슬프도록 아름답고 이상적인 모습으로 비칠 수 있지만, 두발이 아닌 외발로 서서 상대방에게 지탱하고 있는것은 종국에는 누군가 힘이 풀려버리면 그 둘다 쓰러지게 되고 마는 것이다. 나또한 타인과 상실의 고통을 나눌 수 없다는 말을 하고싶은 것은 아니다. 다만, 끝끝내 타인과 나눌 수 없는 상실의 고통은 자신이 받아들여야 할 몫이라는 것을 인정해야 하는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보는 것.
상실의 대한 고통은 타인과 신뢰로써 나눌 수 있을지언정, 그것을 전부 덜어낼 순 없다는 것. 분명 자신혼자서 짊어져야 할 몫이 존재할 것이다. 그렇게 누군가, 자신에게 아무말도 해줄 수 없는 먹먹한 순간을 거쳐가면서 우리는 청춘을 통과하는 것이 아닐까. 그리고 자신이 됐다 싶을 때, 그 이후에도 그 자신을 떠날 수 없지만 그 시기의 모습이 아닐 상실과 고독에 대해서 타인에게 기댈 수 있는 것이 아닐까.
그렇기 때문에 윤과 명서가 8년이라는 긴 시간동안 스스로를 견뎌낸 후 서로에게,
“내.가.그.쪽.으.로.갈.까?” “내.가.그.쪽.으.로.갈.게”... 라고 할 수 있게 된 것은 아닐까.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그들이 서로 존재하지 않았다면, 그렇게 안타까운 서로에 대해 신뢰하지 않았다면 그들 또한 무너지지 않았으리란 보장이 있었을까? 하는 물음이 든다.
이론적으로 존재하지 않음에도 실제로 존재하는 길잡이 개의 이야기처럼, 결국 우리는 기대면서도 기대지 않는다고 말하고, 기대지 못하는 것을 알면서도 기대려고 하는 것은 아닐까? 그렇게 언어로, 이론으로 설명될 순 없지만, 우리는 그렇게 서로에게 적절한 시기에 길잡이 역할을 해주며 살아가는게 아닐까. 이미 지나간 찬란한 시기에 우리는 때로는 길잡이 개를 따라가는 역할을 하기도 하고, 그 길잡이 개 스스로가 되기도 하지 않았겠는가. 그리고 어쩌면 지금도. 아니, 분명 앞으로도...
어쩌면 모순적이게도 그들은 함께하지 않음에도 서로를 의지했을지도 모를 일.
그렇다면 결국 실체는 기대지 않아도, 영혼은 믿음으로써 기대고 있었다고 봐야할까.
이렇게 생각하고 나니, 문득 윤과 명서를 떠올리면서 그들에게 이 노래를 들려주고 싶다.
“누가 뭐래도 사람이 꽃보다 아름다워. 이 모든 외로움 이겨낸 바로 그사람”
'안치환 - 사람이 꽃보다 아름다워 中'
지독하게 안타까우면서도 아름다운 그것. ‘사람’. 그도 그녀도 다시 한번 잊지 말아야 할 진리를 일깨워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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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기억조차 나지 않는 잊혀진약속들, 지키지 못한 채 사라져버린 약속들 (p26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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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청춘은, 아니 인생이 상실과 떨어질 수 없는 것은, 그 누가됐든 하나하나 일일이 나열할 수 없는 각자의 이유들로, 그 인생의 한 시기를 통과하면서 버려야 할 수 밖에 없었던, 버려질 수 밖에 없었던 이야기들을 하나씩 가지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하는 생각을 해본다. 이성이든 동성이든 관계란것은 항상 파도처럼 밀려왔다 떠나가곤 하니깐. 다만 그 시간의 길이에 차이가 있을뿐. 상실은 삶 여기저기에서 청춘이라 불리는 시기를 지나서도 끈덕지게 연결된다. 진부하지만, 상실의 연속이 삶이 되는 것이다.
그렇지만 다행스럽게도 대부분의 사람은 그 힘든 시기를 통과하면서 살아나가게 된다. 대부분이 거치지만 결코 만만치 않은 청춘의 시간. 그리고 그것을 견뎌낼 수 있었던 기성세대가 되서야 비로소, 이땅의 현재진행형 청춘들에게 따뜻한 격려의 한마디를 건낼 수 있는것인지 모른다. 그리고 기꺼이 그 역할을 해준 신경숙이라는 작가 덕분에, 우리는 이 끝이 보이지 않는 긴 터널같은 청춘의 방황속에서도, 언젠가 이 끝에 빛이 보일것이라는 막연한 희망을 가질 수 있는 것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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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은 언제나 밀려오지만 똑같은 날은 다시 오지 않는다는 것을 젊은날에 인식하고 있었다면 뭔가 달라졌을 거란 생각이 든다. 그랬다면 누구는 작별하지 않고 누군가는 살아남았을지도, 모든 것이 끝났다고 생각되는 그 순간에 또다른 일이 시작되기도 한다는것을 그때 알았더라면. (p1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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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알았라면... 그때는 알 수 없었던, 알지 못했던 것에 대한 안타까움.
청춘이 지나고나서야 그때가 청춘이었음을 알게 되듯, 그때 미처 알지 못했던 것들은, 그 순간에 우리에게서 숨어있던 것이 아니라, 오랜 시간이 지나서 비로소 우리가 그것으로부터 거리를 두었을 때 알 수 있는 것이니깐.
예기치 않은 곳에서, 어떻게 이것을 예견하고 만들었을지 추측하기도 힘든 고대의 나스카 유적지에서 거미형상의 모습을 쫓으며 단이를 떠올리면서 ‘두려워하지마, 너를 잊지 않을게’ 라고 말할 수 있게 되는 것은 오래전이라고 부를 수 있는 시간이 지난 후에야, 그것을 멀찌감치 떨어져서 볼 수 있을 때 비로소 그것에 대해서 조금 더 이해할 수 있게된 모습이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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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전, 이라고 쓸 수 있을 만큼 시간이 흐른 후에야 알게 되는 것들,
어쩌면 우리는 그런 것들로 이루어져 있는지도 모른다. (p35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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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지금 우리가 서있는 ‘현재’란 곳은 그렇게 해서 알게된 것들의 (지금까지의) 총체,
그리고 앞으로 언젠가 또 안타까워할지 모르는 ‘과거의 그때’의 순간인게 아닐까.
청춘이라 함은 [작가의 말]에서 ‘이십년 후에도 이 작품을 쓰고 있을 것 같다’는 신경숙의 말처럼 오래전이라고 부를 수 있을만한 시간이 지난후에, 비록 그때와 같은 절망은 없을지라도, 여전히 그 빛바랜 먹먹함이 우리 가슴 한켠에 자리잡으며 잊혀지지 않는 슬프도록 찬란한 생의 한 순간인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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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우리에게 생긴 일들을 고통 없이 받아들이는 순간이 올거라고
누군가 말해주길 간절히 바랐던 시간들. (p36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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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론 아주 가끔, 어떤 것을 표현할 때 ‘언어로는 표현할 수 없는것’ 이라고 이야기 할 때 가 있다.
그것은 나의 미천한 언어적 한계를 솔직하게 인정하는 것과 동시에 나에게는 그것에 대한 최고의 예우이다.
떠나간 그 사람에게, 나는 신경숙의 소설에 대해서 이렇게 얘기해줬던 적이 있다.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막막한 우울함과 외로움, 고통이 있다...’ ..라고
그리고 그 사람은 ‘엄마를 부탁해’ 를 읽고 그것이 무엇인지 알 것 같다고 이야기 했었다.
그때를 떠올려서인지, 처음 ‘어.나.벨’ 을 읽었을때도 다른 그 무엇보다 강렬히 기억됐던 그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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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아무말도 할 수 없는 순간들이 살아가는 동안 얼마나 많이 다가올까.
한 인간이 성장한다는것은 아무 말도 할 수 없는 순간들을 하나씩 통과해나가는 일인지도 모른다. (p21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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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뼛속까지 스며드는 아픔 앞에서 우린 그 어떤 위로도 찾지 못하고 입을 다물 수 밖에 없지 않겠는가. 그렇다면 그 아무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서글픈 청춘의 순간들을 언어로 풀어내기 위해 작가는 얼마나 많은 고민을 거치고, 자신을 들여다보았을까.
신경숙의 이 소설은 독자의 내면 깊숙한 곳으로 천천히, 조심스럽게 이끈다. 번역된 것이 아닌, 태생부터 순수하게 우리말로 이루어져, 감성의 끝을 끈질기게 추척해 나아가 결국에는 우리가 그 언어를 통해 자신의 내면에 다다를 수 있게 해준다.
문득, (끝없이 반복될 것 같은, 시대에 대한 아픔을 잊지 않았으면서도) 결국 내가 바라보는 세상의 면은 내가 만들어놓은 내면을 통해서 보여지는 것이란걸 다시금 체감할 수 있을만큼, 나의 이 감상이, 개인과 개인의 상실에만 집중되는 것은 스스로도 아쉽긴 하지만, 대신 이 책을 두번째로 읽으면서 그만큼 나는 더 가까이 내 심연 깊숙이 다가갈 수 있었다. 그리고 그들 각자의 상실을 읽어내는 내내 나의 상실이 어루만져저서 괴로웠다. 하지만 어느샌가 인정할 수 밖에 없게 된다. 그렇게 힘든 시간을 버텨왔던 동안, 이 책을 읽는 동안, 그리고 이것을 쓰는 순간순간에도 나는 그렇게 상실을 인정하고 감당하고 있다는 것.
앞으로 어디서 무엇을 하던간에 그 상실이란 녀석은 불쑥 나를 찾겠지만, 그때도 그 무엇인가를 하면서 그것을 인정하고 견뎌내리란 것. 그때에는 아마 지금과 같은 쓰디쓴 모습은 아닐 것이란 것. 상실은 계절과 같아서 나의 어깨에 다시 또 쌓이겠지만, 그 언젠가도 나는 그것을 털어내고 또 다시 앞으로 나아갈 수 있지 않을까. 그 슬픔을 잊지 않고, 가슴에 품은 채로..
그리고... 그때 쯤 되면, 그 상실의 존재가 다시한번 나의 전화벨을 울리진 않을까 하는
기약없고, 염치없는, 어쩌면 바보같은 기대도 해가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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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 이른 새벽에 깨어나거든 이 세상 어딘가에 쓰는 나도 깨어 있다는 것을 한번쯤 생각해주세요.
그러면 그 순간에 우리는 함께 꺠어 있는 셈이 되겠지요. (작가의말 p37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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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경숙의 전화벨은 나에게 다다랐다. 그녀는 마치, 잘못 걸려온 전화에서 누군가를 애타게 찾는 목소리를 묵묵히 놔둔 그때의 정윤의 모습이다. 그칠 때 까지 울게 놔두고, 지칠 때까지 노송위에 쌓인 눈을 털게 놔뒀던 윤교수의 모습이기도 하다. 그 어떤 이별과 상실에 관한 책보다도 더, 이 소설이 더 힘있다고 말할 수 있는것은, 이야기 전반에 걸친 절망과 외로움의 한켠에서, 그럼에도 항상 우리에게 살아있으라는 이야기를 해주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한땀 한땀 정성스럽게 풀어놓여진 언어에, 그녀의 진심어린 이해와 응원이 담겨있기 때문에.
그래서 난 신경숙의 이 '어.나.벨'이 '언어로 만들어진, 우리의 내면을 향한 튼튼한 계단' 과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치 미루의 집에 가기 위해 내려가야만 했던 긴 계단을 참을성 있게 따라 내려가듯이.
그리고 그 끝엔, 슬프도록 생생한 백합이 우리를 맞이했던 것처럼.
그리고 누군가 그랬을 것처럼, 나 또한 어렵게 어렵게 책장을 덮고난 후, 많은 생각과 다짐을 했다.
과거의 ‘언젠가’ 우리가 누군가에게 그런 존재였는지는 온전하게 기억하지 못할지라도,
앞으로의 ‘언젠가’ 우리 또한 누군가에게 그런 전화벨을 울리는 사람이 되자.
그리고 꼭 “내가 거기로 갈게”라고 말해줄 수 있는 사람이 되자.
혹시 또 알겠는가. 그렇게 살아가다보면,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멀어진 사람에게서 전화벨이 울리게 될지.
그러니까 우리는 ‘오.늘.을.잊.지.말.고’ 살아가자. 그렇게 살기위해서 노력하자.
윤교수의 말처럼,하늘의 별은 우리가 죽은 후에도 그 자리에서 빛나고 있겠지만,
오늘 우리가 볼 수 있는 별은, 오직 오늘이란 순간속에서만 존재할 테니.
기쁨의 순간이 영원하지 않았듯, 슬픔 또한 영원하지 않을테니깐.
꺼지지 않겠다는 스스로의 몸부림이 곧, 누군가에게 강한 별빛으로 비춰질지도 모를테니.
당분간은 '이 아무말도 할 수 없는 순간들을 얼마나 더 통과해야 하는걸까’ 라는,
그 누구에게도 대답을 찾을 수 없는 질문이 내 머릿속을 맴돌 것 같다.
어쩌면 먼훗날에도 나는 같은 질문을 던지고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그리고 이 내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청춘을 통과하는 시기에,
그녀의 진심이 담긴 이 책이 함께하는 것이 정말 고맙고, 다행스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