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년여우
콘 사토시 감독 / 대원DVD / 2004년 8월
평점 :
품절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라며, 한 남자의 간절한 만류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우주선에 탑승한다. 결코 돌아오지 못할 것을 알고도 그녀는 떠난다... 이것은 비디오 테잎이 가득한 편집실에 있는 다치바나가 보고 있는 후지와라 치요코의 출연작 중 한 장면이다. 하지만 영상 속 우주선 발진에서 느껴지는 진동과 때를 같이 하며, 다치바나가 있는 곳의 현실 또한 미세한 지진에 흔들린다. 후지와라 치요코의 영화속 한 장면과 함께 현실 또한 흔들리며 균열을 일으킨다. 그렇게 다치바나, 그리고 다치바나가 곧 만나게될 후지와라의 현실이 곧 영화와의 경계가 무너질 것임을 암시한다.

 

'은영영화사' 는 촬영장 철거를 기념하며, 전설적인 여배우 후지와라 치요코의 다큐멘터리를 기획한다. 다치바나는 30년간 은둔 생활을 한 치요코를 겨우 수소문해, 허락을 받아내었다. 그리고 촬영조수를 데리고 그녀의 저택으로 향하는 길, 다치바나의 들뜬 마음과 긴장된 마음이 역력하다. 이윽고, 치요코를 만나게 된 감격의 순간. 다치바나는 그녀에게 아주 귀한 선물을 건넨다. 낡은 옛날 열쇠. 그녀는 그 열쇠를 감격스레 받아들지만, 이내 다시 지진의 조짐이 보인다. 이제 정말로 본격적으로, 한 여배우의 파란만장한 지난 삶과, 영화와, 그리고 그 현재의 삶에 경계에 균열이 생기며 붕괴되는 순간이다.

 

치요코의 말은 곧 그림으로 펼쳐진다. 전쟁 중, 소녀잡지를 좋아하며 왕자님을 기다리던 꿈많던 치요코는 우연히 영화사 전무의 눈에띄어 배우의 길에 오를 기회를 얻지만, 엄마의 반대로 쉽지가 않다. 내심 기대했던게 틀어지자, 그녀는 실망한채 밖으로 나온다. 그리고 밖에서 눈을 던지며 괜한 심술을 부리던 중, 누군가에게 쫓기던, 부상당한 '운동가' 인 그를 우연히 마주친다. 그리고 엉겁결에 그를 숨겨주게 된 치요코. 그림을 그리는 그에게, 치요코는 짧은 시간 동안 나눈 대화속에서 깊은 호감을 갖게 되지만, 그는 며칠을 못가 이내 추적을 피해 다른곳으로 도망쳐야 했다. 뒤늦게 그 뒤를 쫓은 치요코, 하지만 열차는 만주로 이미 떠나버리고, 그녀는 그를 꼭 쫓아갈 것임을 다짐한다.

 

하지만 이 기차역에서 등장하는, (치요코를 인터뷰하는) 다치바나는 이 장면에서 수십번을 울었다고 한다. 카메라를 든 조수는 놀란다. '이게 그럼 실제가 아니라 영화의 한 장면이라는 거?' 그리고 다시 인터뷰를 하는 현재. 치요코는 이 일을 계기로, 영화사에서 제안했던 영화가 만주에서의 촬영이라는 이유로, 영화배우가 되기로 결심했다고 말한다. 자 여기서 촬영조수는 한번 더 놀란다. 말하진 않지만 딱 봐도 관객과 같은 질문 '뭐야, 좀전엔 영화라더니?? 진짜인거야??'

 

자, 어차피 이 애니메이션에서 명확한 경계를 지으려는 시도는 무의미하다. 혹, 자신만의 기준으로 그것을 세웠다 하더라도, 이내 그것은 다시 무너지고 만다. 이미 치요코의 인터뷰가 그려지는 모든 장면들, 그러니깐 그녀의 영화의 장면 장면마다 다치바나와 조수는 옆에서 함께하며, 때로는 해당 영화의 한 역할로 출연해서, 그녀가 그를 찾아가는 여정을 돕는다. 현실과 영화와의 경계. 무의미다. 영화와 현실은 풀어질 수 없을 만큼 교묘하게 얽혀있다. 추론할 순 있어도, 확신할 순 없다.

 

그녀, 후지와라 치요코는 그 당신 전설의 7작품의 한장면 한장면에 대해 시공간을 넘나들며 어딘가로 향했을 그를 향해 내달린다. 달리기도 하고, 거의 날기도 하고, 말을 타고, 마차를 타고, 자전거를 타며 그를 향해 내달린다. 이 모호한 경계가 치밀한 연출적 계산으로 매끄럽게 넘어가며, 관객또한 현실과 영화 사이에서 너무나 박진감 넘치는 줄타기를 시도하게 된다.

 

전쟁이 끝나고, 그에게로 향하는 열쇠마져 사라지고, 그녀는 결국 감독과 결혼하게 된다. 하지만 그녀가 몰랐던 진실이 곧 밝혀지고, 그녀는 다시금 첫사랑의 그를 찾아 내달린다. 현실을 뛰고 뛰어, 영화의 극적인 순간들을 다시금 주마등처럼 통과하며, 달린다....

 

누군가, 과거의 자신을 추억하는 것. 첫사랑을 추억하는 것, 누군가, 우상과 같던 사랑을 추억하는 것. 이런 이야기들을, 한 인생이 여러편의 영화와 병치되며 그려진 한 파란만장한 여배우의 삶. 이제는 기억조차 잘 나지 않는 그 사람이지만, 여전히 마음 깊히 남아있는 애잔한 감정. 가장 순수했던 첫사랑. 잊을 수 없는. 그런 이야기...

 

 

 

 

 

(아래는, 스포일러성 포함한 마무리)

 

 

 

 

 

끝내 고백하지 못하고 그녀를 목숨바쳐 구해주기만 했던 다치바나의 순정, 여전히 추억속의 그를 잊지 못하고 죽음을 앞두고도 그를 따라가는 그녀의 순정. 바보같지만 아름답다. 어쩌면 사람은 추억을 더듬는 것만으로도, 이미 돌아갈 수 없는, 죽은 시간의 누군가를 그리워하고, 추억하는 일을 통과하며 살아갈 수 잇는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지난 시간의 누군가를 순수하게 끝없이 추억하는 일, 그것으로도 한 인간의 삶은 만족할 수 있는지도 모르겠다.

 

사실 치요코의 '그'는 이전에 갖은 고문으로 이미 오래전에 죽은 사람이었다. 후지와라는 죽은 이를 찾고 잇던 것이었다. 어쩌면 추억속에 사는 사람은 그렇게 죽은 이다.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죽음이자, 현재의 시간성에는 존재하지 않는. 하지만 그런 죽은 시간을 쫓는 일, 그것은 인간이 할 수 있는 숭고한 일 중에 하나가 아닐까. 바보같지만, 비난 할 수 없는 일, 그 순수한 마음이, 결국은 아름답게 번져가는 일. 가장 소중한 것을 열 수 있는 열쇠, 그 열쇠를 쥐고있는 후지와라는 영화라는 초월성의 시공간을 넘나들어서라도 다시금 돌아갈 수 없는 첫사랑의 추억의 마침표인 그에게 갈 수 밖에 없던 것이다.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그에게 그렇게 향하려 하는 것은, 어쩌면 현실적으로 이미 부질없는 일이었다. 그럼에도 우리가 그것을 아름답게 볼 수 밖에 없는 이유는, 그녀의 영화 인생은 한편한편이 곧 자신의 삶이 되고, 이후 아무도 제대로 말할 수 없는 사후세계에서 조차도 그를 찾고 있는 순수한 마음 때문이다. 사후 저 어딘가에서는 어쩌면 그를 만날 지도 모른다는 것을 기대해보는 일은 이미 그녀가 스스로, 자신의 영화들을 삶 그 자체로 받아들이고 있는 증거일 것이다. 그리고 죽음의 순간까지도, 영영 만날 수 없는지도 모를 그를 찾고 있는, 그 자신을 보고 행복해하는 모습이야말로 우리가 삶에서 어떻게 스스로 충만감을 느끼고 행복해 할 수 있는지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한다. 어쩌면 죽은 시간, 추억이라는 삶의 한 순간을 아름다게 간직하는 일, 그것을 끊임없이 더듬어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야말로 행복 아니겠는가.

 

끄적이긴 끄적였지만, 이 애니메이션을 글로 설명하는게 참 뭣하다. 누군가의 표현처럼, 로맨스도, 판타지도, 드라마도 (적어도 내 기준에선) 완벽하다고 밖에 말할 수 없다. 더욱이, 영상으로만 그려질 수 밖에 없는 부분은 아무리 내 깜냥에 애써 설명해봤자 발끝에도 못미칠 것이다. 환상적인 분위기속에는 탄탄한 이야기와 캐릭터가 받쳐지고 있다. 두번째 감상이후 감정을 주체할 수 없어 정말로 졸음을 꾸역꾸역 참아가며, 오히려 처음에 느끼지 못했던 감정들을 새로이 느끼며 눈물이 그렁거렸다. 대단한 애니메이션이다. 정말 최고다. 콘 사토시 감독은 분명 천재다. 그렇기에 너무 빨리 세상을 등진 것이라는 생각까지 들 정도다. 아 이 애니메이션을 극장에서 볼 수 있다면 얼마나 행복할까. 너무 늦게 알아버렸다...

 

 

다른 리뷰를 보며, 내가 놓친것이 있다고 생각해서 덧붙이는 글

 

노파는 정말 마지막에는 치요코의 모습과 많이 닮아있다. (점의 존재는 내가 봤을때 눈치채지 못했으니 어쨌거나) 치요코는 자신이 가장 순수하고, 풋풋한 사랑을 했던 그때가 아닌, 나이가 들어 어른이 된 자신과 그가 만나는 것을 상상할 수, 원하지 않았던지도 모른다. 그녀는 극 후반부에 스스로, 나이가 든 자신을 보여줄 자신이 없었다고 말한다. 그것을 보면, 어쩌면, 계속해서 그녀는 끝까지 그를 찾은게 아니라, 그 스스로, 자신의 아픈 마음이 남아있을 때 까지만 그에게 다가가려 했는지도 모르겠다. 물론 이것은 좀 이래저래 무리가 있는 해석이다.

 

차라리 아래와 같은 해석이 더 맞는 듯 하다. (타 리뷰 꽤 활용/인용)

치요코는 자신이 순수하게 한 남자를 마음에 두었던 소녀시절의 마음이, 나이를 먹어서도 계속 존재하고, 또 앞으로도 그렇게 되길 원한 나머지 노파라는 환상을 스스로 만들어내어 자신이 저주 받았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계속해서 그를 사랑하며, 자칫 그를 사랑하지 않게 된다면 늙어가며 서서히 사라질 그런 사랑에 가슴 시린 감정을 붙잡아두려고 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사랑'을 연기해서, '젊음'을 연기한다라..  여성의 궁극적 자기애.. 사랑하는 자신을 사랑하는... 깊게 생각해 보고 싶다.. 조만간, 천년여우를 다시 만나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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