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해지지만 않는다면 괜찮은 인생이야 - 삶의 본연을 일깨워주는 고요한 울림
세스 지음, 최세희 옮김 / 애니북스 / 2012년 10월
평점 :
품절


누구에게나 그런것들이 한 두개 쯤은 있는 법이지. 결코잊을 수 없는것들.

 

누구에게나 삶을 바꾸는 여러가지 것들이 있다. 삶은 태어나서 숱한 환경의 영향속에서 자라오는 것과 다름없다. 아니, 어쩌면 태어나기도 전, 이미 한 생명이 잉태되면서부터 시작되는 것인지 모른다. 성인들의 정신질환이나, 성격, 트라우마 등을 유년에서 찾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나아가 임신기간에 임산부의 정신이나 질병의 영향에 따라서도 한 인간의 많은 것들이 좌우된다는 과학적 이론이나 근거들을 심심찮게 발견할 수 있다. 그리고 인간 외적인 것들을 지칭하는 환경을 제외한다면 남는 환경요소는 인간, 혹은 인간이 만든 그 무언가가 될 터. 

 

누군가가 만든 기계에서부터, 누군가가 만든 만화에서까지. 그 분야는 다양하고, 또 광범위하다. 어느 나이가 되었든, 누군가는 작은 비디오 카메라를 갖고 놀며 꿈을 꾸었을것이고, 누군가는 티비를 보며 꿈을 꾸었을 것이고, 누군가는 또 다른 누군가를 보며 꿈을 키웠을 것이고... 그리고 여기에는 자신의 유년의 많은 영향들을 '만화'에서 받았다고 고백하는 한 인간이 있다.

 

만화는 언제나 내 인생의 아주 큰 부분을 차지해왔다. 어린 시절부터 지금까지 만화 없이 내 이야기를 한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여기서 내가 말하는 만화는 디즈니나 워너브라더스의 애니메이션이 아닌, 신문에 연재되던 짤막한 카툰이나 만화책들이다.

 

재미있는 일이야... 에르제가 그 장면을 삭제했더라면 기차를 보며 땡땡을 떠올릴 일은 없었을테지. 이런식으로 내 인생을 바꿨을 만한 소소한 것들의 리스트를 작성한다면 아마 백만 개쯤은 나올 거다..

 

유년과 관련된 기억, 부모님, 고향 집, 동네, 그리고 만화 등, 새로운 것들보단 오래된 것을 훨씬 더 좋아하고 그리워하며, 많은 것이 옛날과 바뀌어버린 현실과, 앞으로 또 많은 것이 바뀔 가능성을 끔찍히 싫어하는 만화가 세스는 엄마와 동생이 살고있는 고향집에 갔다가 우연찮게 만화책 한권을 손에 들게된다. 그것은 작은 우연과 같았지만, 그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꿔놓은 책이었다. 하지만 재밌는 것은 그 만화책이 세스를 바꾼 것이 아니라, 그 만화책 때문에 관심을 갖게 된 '뉴요커'라는 잡지에서 보게 되는 다른 만화가가 그의 인생을 바꾼다는 사실. 마치 친구 따라 오디션 현장에 갔다가 캐스팅되고, 소개팅에서 알게된 이성의 다른 친구와 교제하는 것처럼. 우리 또한 우연히 어떤 것을 접하고선, 그것과 관련된 다른 어떤 것에 관심을 갖게되는 경우처럼 말이다

 

어쨌든 순수한 열망이 없었다면 우연으로 점철된 이 믿기지 않는 길을 따라 캘로의 집까지가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135)

 

세스가 관심을 갖고, 꾸준히 찾게 되는 캘로라는 작가는, 한때 잘나가긴 했지만, 쇠락의 길을 걷고 만 만화가다. 여러방면으로 수소문해보지만 많은 자료를 찾을 수도 없었고, 게다가 이미 사망한 상태였다. 만화가인 세스가 만화가에게 관심을 갖는 것은 어찌보면 이상한 일이 아닐수도 있다. 하지만 그 자신도 고백하듯, 캘로라는 만화가는 그렇게 잘 나갔던 만화가는 아니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전성기는 잠깐 있었지만 그리 오래가지 못 했던, 그러니까 어쩌면, 한 시대를 살아갔던 그저 그런 만화가들 중에 하나였을 뿐이다. 명성과 업적으로 본다면, 그것은 존경받거나 길이길이 남아 누군가가 발굴의지를 가질만큼 대단한 만화가는 아니었다는 말.

 

세스는 옛것을 추종하고, 현대의 것과 미래의 것을 거의 두려워하는 지경에 까지 이르는 인물이다. 게다가 주변의 것들과 현상에 대해 무척이나 회의적이고 비관적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는 그런 회의와 비판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거기에서 또 고민하고 생각하고 질문한다.

 

자신에게 솔직하지 못하다는 것이 문제다. 나의 자기기만이 어느 정도 인지도 모르고 있으니. 스스로를 지기한다는 것은 참 어렵다. 마침내 자신에게 정직해졌다고 느끼는 순간에도, 마음 저 깊은 곳에 내가 외면한 진실이 남아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의심이 생긴다. 신기할 따름이다. 뭔가에 대해 생각하는 동시에 그걸 회피할 수 있다는 게.

 

누군가와 깊이 사귀고 싶다는 생각이 강해질수록... 상대방과 관계를 지속할 수 있을까 하는 회의가 들어.

 

내 생각에 인간은 두 종류로 나눌 수 있어. 착한 만신창이와 못된 만신창이. 그렇잖아 누구나 다 만신창이야. 누구나 다 자신만의 상처를 지고 살아간다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상처를 안으로 삭이잖아. 개중엔 훨씬 더 잘 다스리는 사람도 있고.

 

많은 노력과 시간을 들여봐도, 캘로에 대한 성과는 미미했다. 하지만 캘로라는 만화가에 대한 퍼즐을 맞추는 일은, 작지만 조금씩 진전을 이뤘고, 그 사이에서 그의 인생은 여전히 앞으로 나아갔다. 죽마고우인 체트와 만나 진지하거나 혹은 쓸데없는 얘기를 나누며, 여자친구를 만났다가 헤어지기도 했다. 혼자, 혹은 누군가와 함께 기억속에 존재하는 과거의 것들에 대해서 무한한 경배와 신뢰, 그리움을 갖고, 자기 자신의 회의적이고 비관적인 시각들을 비판하기도 했다.

 

한생 다 살고 나면 결국 이깟 종이 몇 장 남기고 끝이란 말이야? (108)

 

캘로라는 만화가에 대한 관심과 탐구는 그 자신의 개인 취향에 따른 것임을 알기라도 하듯, 그는 캘로에 대해서 이렇게 자조할때도 있지만, 캘로의 고향에서 만나게 되는 사람들을 통해서, 별 볼일 없어 보였던, 누군가의 생이.. 자신이 생각했던 것만큼 미천하고 불운했던 것이 아님을 알게된다. 그렇다고 그것이 대단한 것도 아니었지만, 오히려 그만큼 잔잔함은 더 파동을 더해간다.

 

아무리 사소한 기억이라도 어느순간 마음속에 강렬하게 새겨져 세월이 히르면 흐를수록 더 소중해질 수도 있다. (78)

 

인생의 진정한 가치에 대해서 묻는 이 만화는 , 직접적으로 독자에게 말하지 않는다. 그 과정을 통해서, 그 과정의 사람들이 느끼고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으로 보여준다. 무엇을 남겨야, 얼마만큼의 업적을 남겨야 인간은 행복했다고 기억되는 것일까? 전성기를 가졌다가, 쇠락한 것으로 보여지는 한 만화가-캘로의 삶은 세스에게 진정한 인생의 가치와 행복에 대한 질문을 던져준다. 만화가로서의 삶을 접고, 사랑하는 이와 결혼한 후 사업가로서 생을 마감한 만화가 캘로. 마지막으로 세스가 찾은 캘로에 대한 조각은 그의 가족들과 친구였다. 그의 딸과 그의 친구, 그의 어머니...

 

만화가로서는 긴 생명을 얻지 못한 한 남자가, 자신의 부인과 자식과 함께 했던 시간을 행복하게 간직하고 살아갔음을.. 세스는 캘로의 딸과 그의 어머니를 통해서 알게되는 것이다. 세스가 종이 몇장 남기고 끝이라고 생각한 한 인간의 삶은 그것보다 훨씬 가치있고 행복한 인생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미 인생을 떠난 캘로의 가족이, 당시에는 알지 못했던 부분을 떠올리며 행복해하는 모습은 삼자가 겉으로 드러난 업적을 가지고 바라보는 삶의 가치는 큰 의미가 아님을, 떠난이가 남은 이들에게 얼마만큼 남겼나 보다는, 어떤 감정과 순간을 남겼느냐가 비교할 수 없이 중요한 것이라는 것을 알게해준다. 세스가 캘로라는 한 만화가이자 한 인간의 삶을 좇다가 만난 것은, 세스뿐만이 아니라 캘로의 가족들에게도 행복한 순간을 안겨주는 것처럼 말이다.

 

자네도 내 나이쯤 되면 세상 모든 게 다 중요하다는 걸 알게 될거야. 인생은 좋은 선택과 나쁜 선택의 연속이 아니야. 흔히들 생각하는 것처럼 이 방향으로 간다고 갈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저 방향으로 간다고 갈 수 있는 것도 아니야. 그냥 끌려다니는 거지. 지난 날들을 돌이켜보면 '좀 다르게 살 수도 있지 않았을까' 싶게 마련이지만, 그건 정말 보통 의지로는 안 되었을 걸세. 그게 불가능한 건 아니지만... 그러려면 정말 어마어마한 의지가 필요했을 거야. (155)

 

한 인간이 자신의 삶을 바쳐 남긴것의 가치는, 물질적인 양과 돈으로 환산할 수 있는 것으로 판단될 수 없는 것이다. 삶을 떠난 사람이 스스로 얼마나 행복했는지, 그리고 그것을 추억하는, 남겨진 사람이 어떻게 받아들이냐에 따른 것이다. 그래서 삶은 무엇을 하지 못했느냐가 아니라, 무엇을 했느냐로 판단되어야 할지도 모른다. 어쩌면 행복은 거기에 있는지도 모른다.

 

헬렌이 죽고 얼마 안되어 나도 그 애한테 그런 얘기를 한 적이 있었다네... 작가로 살았던 때가 그립지 않냐고 물어봤었지. "조금 비참한게 영혼에는 좋아요." 자네한테는 불행하다는 대답으로 들릴지도 모르겠지만, 그 말을 했을 때 그 애의 미소를 봤다면 절대 그럴 수 없지. 아무렴, 그 애는 행복하게 살았어. 말없이 수긍하며 사는 삶에 만족했어. (163)

 

각색은 있었겠지만, 어쨌든 이 <약해지지만 않는다면 괜찮은 인생이야> 는 실제 만화가인 세스가 정말로 캘로에 대한 자료를 모았던 이야기 이다 . 세스가 그간 모은 캘로의 만화는 맨 뒤에 삽입되어 있다. 게다가 이 책의 구성 그 자체가 마치 캘로의 한 일대기를 담아놓은 앨범인 것인마냥 책의 앞뒤 날개 안쪽에는 캘로의 가족사진들이 배치되어 있다. 독자들이 마치 세스가 되어 캘로의 삶을 잠시 열어본 것처럼 느낄 수 있게 말이다.

 

이 책의 제목 <약해지지만 않는다면 괜찮은 인생이야>는 실제 만화가 세스의 어머니가 그에게 종종 해주었던 얘기라고 한다. 바래고 잊혀진 것에 대해.. 그리고, 인간이 인생의 끝에서 남기는 가치는 물질적인 것이 아닌, 소중한 이들과 함께 했던 행복한 순간들 이란 것을... 세스는 알게되었고, 독자 또한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깐...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자신의 인생에 대해 스스로... 약해지지만 않는다면 괜찮은 인생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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