콜럼바인
데이브 컬런 지음, 장호연 옮김 / 문학동네 / 201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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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통은 귀먹은 세상을 불러 깨우는 하느님의

메가폰이다.

  -C.S. 루이스

 

 

 진작에 알았을껄.
 사람들은 때때로 일이 이미 벌어진 후에야 이런 일이 있을껄 몰랐다는 듯 말하곤 한다.
 정말로 몰랐을까.. 어떤 큰 일이 벌어지기 전에는 그 전조현상들이 있기 마련이다.
 그걸 감지하지 못할만큼 둔해서? 


 벌어진 후에는 이미 늦었다. 그런데 늦은건 늦은 거고 다시 또 일어나지 말란 법도 없는 일들을 주워담을 수 있는 다양한 해결책들을 논의해야 한다. 자신의 실수를 숨기기 바빴던 공적 책임자들, 막을 수 있었음에도 의무를 이행하지 않았던 사람들, 그리고...  어떤 식으로든 책임이 직접, 간접적으로 있는 사람들.. 그들은 그들의 행동에 책임을 져야 한다. 잘못된 것은 무너져야 올바름이 알아서 솟는다고 하지 않던가. 

 

 대부분은 쓸모없는 이미 벌어진 일들을 다시 회자시키고 비논리적으로 방향을 잘못 잡은 헐뜯기가 몇년이나 지속된다. 그것이 무슨 도움이 될까.

 

 피해자들에게는 누군가에게 하소연할만한 매개체가 필요하다. 그들은 자신들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위로해주고 그들이 그만이라고 할때까지 계속해서 관심을 가져주어야 할 공동체의 책임이 있다. 그게 국민이고 국가이며 같은 공동체 안에 사는 사람들의 의무이다.

 

 콜럼바인.
 이 책은 미국 총기사건이 연쇄적으로 퍼지기 시작한 시초에 대한 보고서이다. 객관적인 시각을 유지하며 최대한 가해자들이 일을 벌이기 직전 몇년전부터 사건이 일어난 후의 몇 년 후까지를 그들이 남겨놓은 흔적과 사건 당사자들의 증언을 통해 작성되었다. 많은 부분들에서 의문점과 어려움을 가질 수밖에 없는 것은 가해자들이 자살을 하였기 때문에 가해자가 없는 상황에서 그들의 의도를 짐작해야만 하는 다양한 가능성에 초점을 맞추어 해설하고자 하기 때문에 결과가 없다는 것이다.

 

 이 책을 펴고 덮을때까지 내가 줄곧 떠오른 생각은 미국민의 시선과 시스템이다. 그렇게 무차별적 살인이 시작되어 줄곧 이어지는 수많은 총기사건들을 몸소 겪고 있으면서 왜 총기금지법을 만들지 않았는가. 너무 많은 이해관계들이 얽히고 설켜 개개인 국민의 목숨 따위는 안중에도 없는것인지, 땅덩어리가 커서 주별로 있다보니 공동적인 합의를 이끌어내기 힘들어서인지, 몇명 정도의 사람들이 목숨이 잃었을때야 총기금지법에 대한 적극적인 법개정이 이루어질 것인지 정말로 궁금해졌다. 이미 법이 만들어진 이후에는 거기에 많은 이해관계가 얽혔을때는 특히 개정하기가 힘든 것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국민들은 법을 바꿀 수 있는 힘을 스스로 지니고 있다. 반이상의 미국민들은 총기를 허가한다는 것일까...

 

 이 책이 한국에 출간되고 널리 퍼져있을때즘 라스베가스에선 또다시 총기사건으로 59명의 사람들이 사망하고 몇백명의 사람들이 부상을 입었다. 난사범은 역시 자살을 했다. 콜럼바인에서 시작됐던 난사범들은 책을 뚫고 나와 라스베가스에서 다시 무차별적 살인을 행했다. 그들 모두의 공통점은 그다지 환경이 어려웠던 사람이 없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의 두뇌는 쌩쌩히도 잘 돌아가서 다른 일을 했더라도 먹고 살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될 운명이었다는 점이다.

 

 콜럼바인의 난사범들은 지극히 평범했으나 질풍노도의 청소년기를 겪었던 남학생들이었다. 청소년기는 뇌의 변형이 이루어지는 시기라 감정의 폭이 수시로 바뀌며 변덕 또한 남다른 시기이다. 제 2차 성장이 맞물리는 시기에 그들에게 주입되었던 사상은 무엇이었을까. 그 사상이 그들을 그런 길로 흐르게 하였을까. 적어도 둘 중 한명은 나치즘을 신봉하긴 했었다. 인종차별적이었고 사람이 세상을 해롭게 하기 때문에 최대한 많은 사람들을 죽이면서 세상을 정화시키며 그렇게 할 수록 멋진 삶이라고 굳게 믿고 있었던 것 같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없었던 우울증과 비행은 극적으로 치달으며 그들에 손에 너무나도 쉽게 쥐어진 총에 의해 폭발하고 말았다. 총이 그렇게 쉽게 쥐어지지만 않았더라도 나는 저런 비극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라고 확신한다. 그들은 사람을 죽일 수도 있었을 것이다 . 하지만 다수는 아니었을 것이며 제재로 인해 언젠가는 그들의 악행은 막을 내렸을 것이다. 하지만 콜럼바인사건은 막을 내릴 일이 아니며 앞으로 계속될 사건들의 전조증상이다.  

  콜럼바인사건은 다양한 모방 총기범들을 잉태했으며 한국인이라서 더욱 노심초사하게 만들었던 조승희 사건은 이민자의 삶의 궁핍에서 그를 바라보아야할 것인지, 제대로 그를 조사하지 않았던 미국조사관들에 의해 숨겨진 이야기가 있는 것은 아닐지 의심스러웠다. 32일간의 금식을 했던 주미대사의 행동과 미국인들의 한국인에 대한 위협행동들 등 한 개인의 행동을 국가적 차원으로 확대해석하려 했던 그때의 일들이 떠올랐다. 조승희는 콜럼바인사건의 총기범들과는 다른 형태의 총기범이었다. 하지만 조승희 개인의 보고서에 대해서는 콜럼바인에서 보여준 증거들과는 달리 방대한 양의 자료가 없었고 그가 정말로 많은 언론과 책출간을 통해 보도되었듯이 피해자로 자란 가해자인지 확실할만한 증거물이 없었다. 조승희사건 후의 조승희는 있었지만 조승희사건 전의 조승희는 알 수 없었다. (사건이 일어나기 전의 일들을 지극히 평범한 시선으로 분석한 콜럼바인의 두 학생에 비해 조승희에 관해선 그런 시선으로 바라본 정보가 없었다. 객관적인지 판단할 수 없는 언론만 있었을 뿐이었다.) 다만 조승희는 조현병 증상을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은 확실했다.

 

 에반 레이첼 우드가 주연으로 나오는 '인 블룸'이라는 영화가 있다. 극중 다이애나로 나오는 그녀는 단짝 친구 모린과 함께 있다가 교내에 총을 들고 와 무차별 난사 중이었던 남학생에 의해 둘 중 한명만 살려 주겠다는 제안을 받게 된다. 그로부터 15년이 지난 후 다이애는 사랑스러운 딸과 남편과 함께 평범한 행복을 경험하며 살고 있지만 결말로 가면 영화는 완전히 다른 진실을 보여준다. 사실 그 총기범이 제안했을때 그녀는 총에 맞아 이미 죽었던 것이다. 결국 그녀에게 앞으로 있을 수 있었던 행복한 삶들은 총기범의 단순한 역학적 손가락운동에 의해 무참히 사라진다.

 

 총기범들에 의해 많은 개개인들의 삶들이 물거품처럼 흩어지고 깨어졌다. 희생된 사람들과 함께 생존한 가족들과 현장에 있었던 사람들의 삶 또한 많은 부분의 행복을 예전처럼 누리지 못할 것이다. 보다 감정이 풍부한 사람들은 희생자의 감정에 공감하여 멀리 떨어져 있는 사람까지도 그때의 기억을 통해 불행한 순간을 간접체험할 이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가해자가 없다니 참 억울한 일이다. 가해자는 없으되 가해자만큼의 책임은 미필적고의에 의해 총기를 허가해야 한다는 사람들에게 가야하지 않을까.

 

 두가지 갈래 길이 있을때 모든 것을 파괴하는 길로 가야할지 때때로 이런저런 사건이 있을지되 다시 일어설 수 있는 가능성이 있는 길로 가야할지를 선택해야 한다면 두번째 길로 가는 게 낫지 않을까.  적어도 모든 것이 파괴되진 않을테니까  계속해서 시도해볼만한 가능성들이 주어지니 말이다.

 

 현재 우리나라를 둘러싸고 있는 핵문제에 대해서도 생각해보게 한다. 미국과 북한이 포기하지 않았던 파괴의 길을 한국은 다른 길을 선택해서 다른 가능성들을 시도하고 있다. 이게 어떤 결과로 나올지 앞으로도 계속될 존재하느냐, 파괴되느냐의 갈림길에 선 신중한 선택이 각 나라 정상에게 진심으로 깨달아지길 바라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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