킬리만자로의 눈
어니스트 헤밍웨이 지음, 정영목 옮김 / 문학동네 / 201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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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은 배에 탄 채 나흘 밤낮을 홀로 황새치와 싸운 늙은 어부와, 잡은 고기를 배 위로 끌어올릴 수가 없어서 뱃전에 묶어두자 결국 상어들이 그것을 먹어버린 이야기. 이건 쿠바 해안이 전해 준 멋진 이야기라네. 나는 모든 사실을 정확히 알기 위해 카를로스와 함께 그의 작은 배를 타고 바다로 나가보려고 해. (...) 내가 제대로 해낸다면 이건 훌륭한 이야깃감이야. 책 한 권이 될 이야기 말이네.”
 
 1939년 2월, 헤밍웨이는 스크리브너 출판사의 편집자 맥스웰 퍼킨스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썼다고 한다. 이 이야기는 '노인과 바다'라는 작품으로 탄생한다. '심장이 둘인 큰 강'은 이 작품을 떠올리기에 충분하다. 한때 그는 낚시 하는 것을 즐기느라 글쓰기를 제쳐둘만큼 빠져있기도 했다. 헤밍웨이는 작품 속에 언제나 자신을 투영시켰다. 그랬기 때문에 그의 작품은 그저 소설인 것만이 아닌 실질적인 정신적 사유가 담겨있다. 또 그래서 쉬이 해석되지 않는 모호하면서도 표현하긴 어렵지만 내면의 진리가 있다. 그 진리는 말로 설명되지 않고 보여지는 형태를 받아들임으로써 느낄 수 있는 감정인데 감상을 적는다는 것도 어려운 일이다.

 

 유난히 사냥에 대한 것과 죽음, 공허, 허무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나오는 그의 작품을 보다보면 그 우울적인 요소가 감염되는 느낌이다. 행복해지고 싶어도 행복해지지 않는 한 인간의 고질적인 우울증은 변덕의 주범이 되고 까닭 모르게 문득 찾아오는 허무함은 공허의 공간을 맴돌다 심연의 한 부분을 건드린다. 이렇게 쓰여진 작품이 이 책 속의 단편들이다.

 

 "우리가 모든 걸 가질 수도 있었다고요. 우리는 지금도 모든 걸 가질 수 있어. 아니 가질 수 없어요. 우리는 온 세상을 가질 수 있어. 아닐 가질 수 없어요. ... 중략.. 우리 거야. 아니 그렇지 않아요. 한번 빼앗기면 다시는 돌려받지 못해요. 하지만 빼앗기지 않았잖아. 두고 봐요." -143p '하얀 코끼리 같은 산'에서는 남여의 대화가 그렇다. 의미 없는 말인 것 같으면서도 의미를 부여하기 위한 의지는 마치 삶에 대한 의미를 억지로라도 새기고 행복하지 못한 영혼이 기분 좋은 한 인간의 감정을 연기하는 것과 비슷하다. "나는 아무 문제 없어요. 기분 좋아요."라는 마지막 문장은 그럼에 의미심장하다.

 

 '프란시스 머콤버의 짧고 행복한 삶'은 사자 사냥에 나간 머콤버가 막상 총 맞은 사자 앞에서 다리에 힘이 풀리는 모습이 나온다. 죽어가는 사자는 오히려 마지막 힘을 다해서 저항하려 하지만 결국 윌슨의 총에 맞아 숨을 거둔다. 그런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머콤버의 아내는 사내 답지 못한 자신의 남편을 대놓고 무시하고 윌슨을 유혹한다. 가진 것이라곤 돈 밖에 없던 머콤버는 다시 사냥을 나가자고 제안하고 물소를 총으로 쏜다. 쓰러진 물소는 놀라운 힘을 발휘하며 숲으로 뛰어가고...

 

 무언가 달라진 듯한 눈빛의 머콤버는 물소를 향해 쫓아간다. 머콤버의 짧고 행복한 삶은 어찌보면 비극적인 그의 삶에 대한 조롱이자 이 작품에서도 역시 찾아볼 수 있는 삶에 대한 허무이다. 인간과 인간이 맞닿아 사는 세상에서 절로 생겨나는 서로 간의 감정, 자존심, 일반적 관습 같은 것들은 사실 별로 중요한 것이 아님에도 그런 것들에 집착하고 신경 쓰며 사내가 되고자, 겁쟁이가 아닌 강한 어른이 되려 했던 머콤버는 그래도 마지막 몇 분간은 자신이 원하는 인간상의 형태로 있었으니 만족했을 것이다. 비록 그를 보는 많은 사람들은 어리석은 사람이라 칭할 테라도.

 

 머콤버의 모습 또한 헤밍웨이의 다른 일면이라고 볼만한 일화가 있다.

 

 한 번은 어느 친구가 그의 팔에 난 긁힌 상처를 보며 어찌 된 일이냐고 물었다. 그러자 헤밍웨이는 “사자 발톱에 긁힌 상처”라고 대답했다. 사람들은 이 말을 듣자마자 아프리카의 초원에서 사자와 일대일 승부를 하는 파파의 모습을 상상했을지 모르지만, 문제의 사자는 아프리카가 아니라 뉴욕의 한 서커스단에 있는 길들여진 사자였다. 파파가 용기를 과시하기 위해 굳이 조련사에게 부탁해서 우리 안으로 들어갔고, 순해빠진 사자와 장난을 치다가 긁힌 것뿐이었다.


 사실 헤밍웨이는 무척이나 소심하고  나약하기 짝이 없는 성격이었으며, 이런 약점을 숨기기 위해 자신의 남성미를 과장하는 버릇이 있었다. 주위에도 그의 표리부동한 성격을 간파한 사람이 종종 있었다. 가령 스콧 피츠제럴드의 아내 젤다는 헤밍웨이를 가리켜 “가슴에 털 난 계집아이”라고 빈정거렸다

 

  헤밍웨이가 이런 인물이어서 실망적이긴 하지만 이런 식으로 인생을 살아가는 것이 그만의 일은 아니다. 이 작품은 모든 사람의 삶을 압축시켜 빙 둘러 머콤버의 삶에 비유했을지도 모른다. 결국 우리 모두는 이처럼 바보 같은 집착과 어리석은 이유로 행복하다고 착각하며 삶을 살아가는 지도 모른다.

 

 불면증에 잠을 이루지 못하는 '이제 내 몸을 뉘며'는 전장에 대한 경험도 경험이지만 해밍웨이의 결혼관과 여자에 대한 생각과도 관계가 있다. 헤밍웨이는 여자와의 관계가 결코 원만하지 않았다.

 

 '킬리만자로의 눈'과 '어떤 일의 끝'에서도 주인공과 여자와의 대화를 통해 여자는 그에게 없으면 괴롭고 있어도 질리는 그런 존재라는 것을 얼핏 느낄 수 있는 대목이 있다. 실제로 헤밍웨이는 몇 번의 결혼과 이혼 경력이 있었고 성불구자이기도 했다. 작품 '태양은 다시 떠오른다'에서 주인공 제이크가 성불구자인 것은 헤밍웨이가 작품 전반에 자신의 인생 이야기를 밑바탕에 깔아놓는다는 것을 다시 한번 보여준다. 사실 헤밍웨이는 자신의 실제 경험을 부풀리기도 하며 작품에 드러냈다. 그럼에 작품은 더욱더 빛을 발했다.

 

 하지만 스스로 자신의 명성을 망친 사건이 있었다. 1944년에 연합군이 노르망디 상륙 작전에 성공하자, 헤밍웨이 부부는 종군 특파원이 되어서 나란히 유럽으로 떠난다. 종군기자는 본래 비전투원이었지만, 헤밍웨이는 평소의 버릇대로 자체 의용대를 조직해서 총기를 휴대하고 마치 지휘관인 척했다. 심지어 파리 해방 당시에는 최고급 호텔인 리츠를 장악하고 마치 전쟁 영웅처럼 행세하다가, 급기야 연합군 사령부에 의해 계급 사칭 혐의로 군법회의에 회부되었다. 비록 실형이 선고되지는 않았지만, 이 사건이 헤밍웨이의 명성에 적잖은 먹칠을 했다. 

 

 이후로 그가 쓴 작품은 독자들에게 외면 당하지만 말년에 완성한 '노인과 바다'로 다시 큰 인기를 얻는다. 하지만 이 인기가 되려 헤밍웨이에겐 독이 되었는지 그의 우울증과 과대망상증은 심해진다. 그보다 훨씬 일찍 쓴 '킬리만자로의 눈'과 '살인자들'은 그가 늘 말하던 죽음에 대한 암시였을까..

 

 헤밍웨이라는 한 작가의 행동들은 종종 미운 감정을 불러 일으켰을지 모르겠지만 '헤밍웨이'라는 한 사람에 대해서는 이해가 되기도 한다.

 

 책을 덮은 지금도 뭔가 아른하게 스며오는 감정이 내 마음 속의 배경을 덮는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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