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선가 나를 찾는 전화벨이 울리고
신경숙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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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삶에 가장 예뻤던 날들을 묻는다면, '어디선가 나를 찾는 전화벨이 울리고'의 주인공들은 언젠가 사랑을 했던 그 시절, 함께 사랑하던 사람들이 있었고, 방향을 모르고 방황하던 시절, 외로워하며 함께 웅크리고 있던 사람들이 있었으며, 같은 의견을 가진 영혼끼리 어울려 불의에 맞써 싸우던 때가 아니었을까..

 이 책을 보면 공선옥의 '내가 가장 예뻤을 때'가 생각난다.

내가 가장 예뻤을 때
주위 사람들이 숱하게 죽었다
공장에서 바다에서 이름도 없는 섬에서
나는 멋을 부릴 기회를 잃어버렸다

(……)
나는 너무나 불행했고
나는 너무나 안절부절
나는 더없이 외로웠다
(  이바라기 노리코, 내가 가장 예뻤을 때 중에서)
 

 이 소설은 가장 예쁘고 풋풋한 스무 살 무렵의 청춘들이 다양한 모습으로 아픔을 견뎌내는 모습이 애틋하게 그려진다. 이런 비슷한 배경을 끌어안고 '누군가 나를 찾는 전화벨이 울리고' 또한 이십대의 사랑, 그들이 가지고 있는 개개인의 아픔들이 이야기를 구성하는 뿌리처럼 얽혀 너무나 예뻤지만 너무도 가슴 아픈 아이러니를 만들어낸다.
 
 차분하고 절제적인 문장은 서정성과 더불어 가을 밤 조용히 들려오는 귀뚜라미 소리같이 감성을 일깨운다. 자칫 이 단조로움이 지루해질 무렵, 나는 아마 나만의 과거로 흘러가버리는 경험을 해보기도 했던 것 같다.


 오오, 나는 이 글쟁이들에게 정말 질려 버렸다!
 유익하고 즐겁고 사람들에게 위안을 주는 글은 도무지 쓰려 들지 않고
 땅속에 숨겨진 온갖 더러운 비밀만 캐고 있다....!
 그런 자들에겐 더 이상 글을 못 쓰도록 해야 하는데!
 그래, 대체 이것이 다 무엇이란 말인가!
 그런 글을 읽고, 자기도 모르게 망상에 잠기고
 말도 안 되는 온갖 잡다한 생각들이 머릿속으로 들어오고...
 정말이지, 그런 자들에겐 글을 못 쓰게 해야 한다.
 정말 한 줄도 못 쓰게 막아야 한다.                 - V. F. 오도예프스끼 공작

 
 
 도스또예프스키의 [가난한 사람들]의 본문을 들어서기 전에 써진 내용이다. 도스또예프스키는 지극히 실존적인 글을 썼고 글 속에서 어떤 판단이나 행복함만을 내놓지는 않았다. 그의 글이 시작되기 전에 이런 서문 아닌 서문이 실려 있었던 이유가 무엇이었을까. 분명 이 글 그대로라면 도스또예프스끼는 오도예프스끼 공작이 글을 막고 싶은 작가였을 것이다. 그러나 속뜻을 살펴보면 반어적으로 오히려 도스또예프스끼의 작품이 너무나도 사람들의 감성을 파고들고 한시도 머릿속을 떠나지 않도록 만드는 매력이 있다는 것을 강조하는 서문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오도예프스끼 공작은 도스또예프스끼의 글을 읽고 그의 작품이 한동안 머릿속을 가득 메웠을 것일테다.

 문학이라면 그런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한 번 읽고 끝나버리는 것이라면 그건 문학으로써의 기능을 하지 않는다. 불현듯 생각나고 기간이 지나면 다시 한번 읽어보게 되고, 그렇게 다시 읽을 때 또달리 읽히는 게 진정한 문학이다.

 나는 달을 가르킬 때 손가락이 아닌 그너머를 볼 줄 아는 혜안을 가진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책 한권을 쓸 수 있다고 생각한다.

 (짧게 줄여)'어.나.벨.'에서의 20대의 외로운 영혼 '정윤'은 엄마가 돌아가시고 얼마 되지 않은 아픔에서 아직 헤어나오지 못한 개인의 상처를 지니고 있다. 겉으로 내색하지 않고 친구를 사귀려 시도하지 않는 그녀가 유일하게 손을 내밀고픈 또다른 상처를 지닌 '미루'와 '명서'를 만나게 되고, 그들의 관계 속에 스며들어 이상적인 삼각의 관계를 만들어낸다.

 그들에게 윤교수는 크리스토프 이야기를 해주며 그대들이 크리스토프인지, 그의 등에 업힌 아이인지 묻는다. 이것은 간접적인 물음이다. 이 물음은 조금 헷갈릴 소지가 있긴 하지만 아마도 내가 세상을 지고 가는 사람이냐, 세상에 업혀 가는 사람이냐를 묻는 궁극적 물음일테다. 윤교수는 삶을 두려워하는 20대 그들에게 위안와 격려, 힘을 아낌없이 불어넣어주는 존재다. 그는 하늘을 밝혀주는 하나하나의 등불이 되라며 마지막 숨을 놓을 때까지 마지막 응원의 메시지를 보낸다.

 어쩌면, 그들은. 또 우리는 누군가로부터 이런 메시지를 듣고 내 안의 에너지를 발견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20대여, 당장 밧줄을 집어던져라
   안전한 항구에서 벗어나라
   항해하라. 탐험하라. 꿈꾸라
   그리고 네 자신의 열정을 발견하라    - 마크 트웨인

 
 

 이성적으로 이해할 수 없다고 하기전에 막상 실제에서 또한 이성보단 행동과 감정이 앞서나가는 경우가 많다. 감성으로 문학을 이해한다면, 문학이니까.. 라는 말로 현실성이 없다고 잡아때기는 어려운 경우가 있다. 지금 이 경우처럼.

 시대의 배경이 부각되지는 않았지만 틀림없이 시대는 개개인들에게 영향을 주었다. 그 배경 밑에 개개인들이 얽히고 섥혀 겪는 상처와 아픔을 살며시 짚어가며 부각시킨 '어.나.벨.'은 애잔하고 잔잔한 슬픔을 느끼게 한다.

 작가가 새벽에 이 작품을 써서였을까. 그 새벽의 뿌엿함과 반투명 어둠을 이 작품에서 확인한 것 같다. 그 시절이 가고 그 뒤로는 아무일도 없었네.. 라는 글로 끝나지 않고 마지막에 '어디야? 내가 그쪽으로 갈께.'라는 문장의 마무리는 시도의 끝이 아니라 다시 시작이다.

 너무 가슴 아파 건들 수 없는 상처들은 다시 희망의 불로 살아난다. 그 불을 살려냄으로써 작가는 미래를 긍정한다. '이 소설에서 어쩌든 슬픔을 딛고 사랑 가까이 가보려고 하는 사람의 마음이 읽히기를, 비관보다는 낙관 쪽에 한쪽 손가락이 가 닿게 되기를, 그리하여 이 소설에 자주 등장하는 '언젠가'라는 말에 실려 있는 아직 다가오지 않은 미래의 꿈이 읽는 당신의 마음속에 새벽빛으로 번지기를...' 378p 작가의 말 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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