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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기억의 피아니시모
리사 제노바 지음, 민승남 옮김 / 세계사 / 2009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하얀 세상.. 백지에 그림을 그리지만 언제나 깜쪽같이 사라지는 반복.. 기분 나쁜 환상, 존재 모를 두려움과 어두움.. 공포와 우울을 유발하는 매일의 반복. 이 책의 주인공에 관한 이야기이며 나라면 어떨지 상상해본 감상이다.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라는 생각을 열두번 정도 하게 만든 [내 기억의 피아니시모]. 아예 암이라면 차라리 낫겠다고 말한 책속의 주인공은 여태까지의 '알츠하이머'라는 주제를 가지고 영화화되거나 출간된 책에서 나오는 인물과는 좀 다르다.
드라마 "꽃보다 아름다워"나 영화 "내 머릿속의 지우개" 또는 내가 좋아하는 배우가 나왔던 "노트북"의 인물보다 독자에게 너무 가까이 다가온다. 이유를 생각해보면, 전자의 이야기들의 알츠하이머를 걸린 주인공들이 '엄마', '아내', '연인'이었다면 [내 기억의 피아니시모]에서의 주인공은 책에선 분명 하버드 교수이자 누군가의 아내이고 누군가의 엄마이지만 독자에겐 알츠하이머를 걸린 주인공에게 쉽게 자기 자신을 대입시키도록 만든다.
즉 이 책의 주인공은 독자들 스스로가 되어 [내 기억의 피아니시모]의 사건을 경험하게 되도록 하는 것이다. 그러니 분명 책에선 앨리스라는 명확한 여주인공이 있을지라도 독자는 또다른 앨리스가 되어있다. 너무 가까이에서 두려움과 마주치자 사람들은 앨리스를 피한다. 혹시 나도 그렇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무의식적으로 상대방에게 진정한 위로를 하기 보단 피하고 싶은 생각만 드는 사람들에 대한 묘사를 읽으면서는 나는 책속의 앨리스가 느끼는 감정이 무얼지 알것 같았다.
앨리스는 자신의 증세가 심해지면서 남편에게 더더욱 정신적인 사랑을 갈구하지만 남편은 개인의 자유로움과 욕심을 위해서 자신이 정한 선을 넘지 않는다. 이로써 앨리스가 건강했을 때 남편과 완벽한 사랑이 유지된 것은 순전히 자유로움에 대한 배려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음을 깨닫게 된다. 병이 악화될수록 열정적인 사랑을 받고 싶었던 앨리스. 자식들 앞에서 PS1유전자를 물려준 자신에 대한 죄책감이 들어 걱정하던 앨리스.(알츠하이머의 증세는 가임기가 지나고 돌연변이 유전자가 다음 세대에 전해진 후에야 나타난다.
PS1 돌연변이 유전자. -> 나는 이 사실을 이 책을 통해 알았다.
그렇다면 이 유전자를 가진 것을 자신이 미리 알고 있다면 임신을 하지 않음으로써 병에 걸리지 않을수도 있었다. 여기에 관한 문제는 앨리스의 큰딸 애나의 이야기로 시각의 가치관과 선택적인 내용을 보여준다.) 그녀의 앞에서 자식들이 마치 앨리스가 앞에 없는 양 자존감을 무너뜨릴만한 이야기들을 하는 모습 때문에 모두가 상처받아야 하는 현실을 겪는 앨리스. 그럼에도 매일 증세는 더 악화되고 환영과 무력감, 무기력함, 혼란함이 계속되는 피곤한 앨리스. 이 모든 앨리스를 책을 통해 나는 겪어본다.
"대개는 누워서 걱정을 해요. 병이 심각하게 악화되리란 건 알지만 그때가 언제일지를 몰라서, 내일 아침에 잠이 깨면 내가 어디 있는지, 누구인지, 뭘 하는지 모를 수도 있다는 걱정을 하게 돼요. 비이성적이란 건 알지만 알츠하이머가 자는 동안에만 뇌세포를 죽이는 것 같아서 잠을 안 자고 감시하면 병이 악화되지 않을 것 같기도 하고요. 그런 불안감 때문에 잠을 못 잔다는 걸 알면서도 어쩔 수가 없어요. 잠이 안 오면 걱정이 되기 시작되고 그 다음엔 걱정 때문에 잠에 못 드는 거죠. 그런 말을 하는 것으로도 지쳐요." -164p
앨리스의 말이다. 앨리스는 비교적 멀쩡했을 때 자신의 미래의 모습을 상상하고 어떻게 해야 할지 계획을 짜둔다. 5가지 질문을 블루베리에 저장해놓고 또는 그녀의 눈에 쉽게 띄는 곳에 보이게 해놓고 답을 하지 못하면 자신이 정해놓은 지시상황을 그대로 따를 것. 그것이 그녀의 계획이다. 여기에 대해서 나는 이 계획이 전적으로 어둡다고만도, 그렇다고 밝다고만도 느낄 수 없었다.
앨리스, 다음 질문들에 답할 것.
1. 지금은 몇 월인가?
2. 어디에 살고 있는가?
3. 연구실은 어디 있나?
4. 애나의 생일은 언제인가?
5. 자녀가 몇 명인가?
위 질문들 중 하나라도 답할 수 없다면 컴퓨터의 '나비' 파일을 열어 즉각 거기 적힌 지시 사항에 따를 것.
하지만 그녀는 이 5가지 내용을 뇌의 세포들이 한참 파괴되고 상황이 심각해져 있을 때도 비교적 잘 기억해낸다. 그러다 한순간 질문에 대한 답이 헷갈리기 시작하면서 지시 사항을 따르기 위해 행동한다. 여기서 반전은 그녀가 행동하는 도중에 단기기억 상실증처럼 자신의 무얼하려고 했는지 잃어버리는 것이다. 다름 아닌 침대위에서 약병을 손에 잡고 말이다. 왜 이걸 잡고 있는지 바로 몇분 전의 상황을 기억하지 못하는 것이다. 이 부분에서 나는 영화 한편이 연상되었다.
자신의 아내가 강간당하고 살해되던 날의 충격으로 기억을 10분 이상 지속시키 못하는 단기 기억상실증 환자가 된 주인공의 이야기. 그가 마지막으로 기억하고 있는 것은 자신의 이름이 레너드 셸비라는 것과 아내가 강간당하고 살해당했다는 것, 그리고 범인은 존 G라는 것이 전부이다. 중요한 단서까지도 잊어버리는 그는 범인을 찾기 위해 메모와 사진, 자신의 몸에 문신까지 하며 정보들을 남겨둔다.
10분 뒤 그는 기억을 잃고 메모와 문신 사진으로 뒤에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정하게 된다. 하지만 시간이 지남에 따라 여러가지 변수가 생기고 모든 기억들이 뒤엉키기 시작하면서 뒤죽박죽 되버리는 사건을 그린 영화 '메멘토'의 이야기이다.
기쁨, 슬픔, 행복, 미움, 증오, 두려움, 공포등..을 느끼되 왜 그 감정들을 느끼는지 기억하지 못한다는 것. 그것이 얼마나 끔찍하고 무서울까. 해결방법도 없는 것일 때 찾아오는 절망감은 또 어떤 것일까. 본인이라도, 주위의 사랑하는 사람이라도.. 모두에게 힘든 일이라는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실화같은 느낌이 들 정도로 섬찟하게 묘사한 [내 기억의 피아니시모]는 실제 알츠하이머 병을 앓고 있는 사람들에게 유일하게 추천받은 책이라고 한다. 그들의 생각과 이야기들을 너무나도 치밀하고 세세하게 묘사했다는 것은 그들이 인정했다. 그러니 이 책은 실화를 바탕으로 한 것이나 다름 없이 만들어진 소설이라고도 할 수 있을 듯하다.
- 이미 그때, 그러니까 1년여 전부터 그녀의 머리 속에서 뉴런들이 질식해 죽어가고 있었다. 귀에서 멀지 않은 곳의 뉴런들이었지만 너무 조용한 죽음이었기에 그녀 자신에게조차 들리지 않았다. 부지불식간에 상황이 너무 나빠져서 뉴런들이 스스로 파멸했을 수도 있다. 그것이 분자 살해였든 세포 자살이었든, 뉴런들은 죽기 전에 그녀에게 그런 상황에 대해 경고할 수가 없었다. -
= 이야기를 시작하며 도입부에 나온 이 문장은 작가가 가장 좋아하는 문장이란다. 알츠하이머를 내 머릿속에 잠깐 만이라도 넣어두고 비록 간접일지라도 경험을 통해 그들에 대한 관심과 이해도가 높아졌다. 그들은 나일 수도 있고 가족일수도 있고 주위의 사랑하는 사람일수도, 아는 누군가일수도 있다. 이들이 느끼는 투명인간의 느낌. 존재하지만 존재하지 않는 그들의 존재를 깨닫게 된 것만으로도 내게 큰 시각의 전환점이 되었다.
잘 알지 못했던 작가의 생소한 작품이라 처음에 책장을 넘기면서 기대를 하지 않았던 [내 기억의 피아니시모]. 책장을 펴기 전엔 결코 속을 판단하지 말라는 말과 비슷한 속담이 생각났다. 책장을 덮으면서 더 큰 기대를 하게 만든 책이다. 작가의 다음 작품도 무척 기대되지만 그녀가 끼친 기억력과 관련된 영향만 하더라도 큰 충격으로 독자들을 사로잡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