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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모른다
정이현 지음 / 문학동네 / 2009년 12월
평점 :
21세기는 소통부재의 시대인가보다. 그 '소통'이라는 것이 버티고 설 재간이 없어서 그런지 요즘 문학책은 하나같이 하나의 메시지를 던지는 듯하다. 20세기까지는 전쟁이 끼어 있다 보니 개인 대 개인의 교감이고 뭐고 할것 없이 제 입에 풀칠하기가 바빴던 시절이었다. 그때도 소통의 부재에 대해 이야기 하는 사람이 있긴 했다. 대부분이 작가나 지식인이 아니었을까 생각되지만. 혼란스런 시기 때 그 사람들은 시대의 이방인이었으며, 지금 세대의 사람들은 그 사람들을 '시대를 앞서간 사람'이라고 말하곤 한다.
어쨌든 과거를 따로 놓고 보더라도, 오늘날은 개인의 자유가 많아졌고 직접적인 전쟁의 영향은 없어져 전장의 불안함이라던지, 원시적인 잔인함과 학대 속에선 벗어나 있다. 대신 그 빈자리를 삐집고 더 많은 자리를 차지한 것이 바로 '소통의 부재'라고 생각된다. '너는 모른다' 책을 읽고 나서 생각하다보면, 제목 한번 정말 자알 지었다는 생각이 든다. 이 책의 제목이 바로 21세기의 트랜드가 아닐까.
책 속 인물들 또한 독자들에게 많은 공감대를 가져다준다. 같은 시대 같은 세상 속에서 살면서 개인의 생활을 영위하며 서로가 가장 잘 알 것이라고 당연히 생각되던 가족들의 이야기. 그러나 그들은 같은 집 안에서 매일 얼굴 보며 살더라도 각자 생각과 개인에게 일어난 사건에 대해서는 전혀 모른다. 또 설사 함께 있을 때 일어난 사건이라 하더라도 이들은 각자 다른 사람들이므로 제각각 받아 들이는 것도 틀리며 앞으로 행동하는 것에서도 천차만별 다르다. 즉, 생판 모르는 남보다 더 아는 것이라곤 외모의 특이점, 어떤 음식을 좋아하고 싫어하는지, 또는 개인적인 버릇 같은 외적인 것말고는 딱히 가족들 또한 남과 크게 다르지 않게 서로를 모른다.
생각해보면, 요근래 인기몰이를 해온 3D영화 '아바타'에서 나비족 외계인들이 다른 생명체들과 교감을 나누는 장면이 가장 이상적인 소통 해결법이 아닐까 느껴지기도 한다. 그런 점에서 나비족이 부럽기까지 하다. 그저 뿌리와 뿌리의 끈이 연결되어 교감이 이루어지면 서로가 서로를 마음적으로 이해하는 것이 가능한 그들의 소통법.
나는 작가들이 인물을 창조할 때를 생각해본다. 사람들이 칭송하고 좋아하는 작품들을 두루 살펴보면 그 속에는 인물과 인물의 빠질 수 없는 우정 또는 가족애가 존재한다. 그 속의 사랑이 영화나 책 속에는 좀 더 각별한 경우가 있다. 주인공을 위해, 또는 더 큰 목표를 위해 이 인물들은 서로가 서로를 누구보다 이해하고 그 속에서 진정으로 소통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그래서 사람들은 현실에서 좀처럼 쉽게 이루어지지 않는 이 소통의 관계를 영화와 책에서 보며 진실어린 감동을 느끼기도 한다. 그러고 나중에는 '영화니까, 책이니까.' 일어날 수 있는 일이라고 체념해 버린다. 현실에선 나 하나만으로 소통은 불가능하다.
겪어본 봐로도 실제와 내가 좋아하는 작품들속에 나오는 '사랑애'는 큰 차이가 있는 것을 느낀다. 그래서 나는 실제보다 작품을 더 좋아하지 싶다. 그런 인물들을 작품속에서 살려낸 작가 또한 자신의 이상향의 모습을 그려내며 대리만족하는 게 아닐까. 내가 작가라면 그럴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라틴어에는 누가 설명을 길게 하면 'Verb sap'이라 하는 데 그 말은 그 뜻을 알아들었다는 말이다. 서로가 짧은 단어만으로도 통할 수 있는 경지에 오르는 관계. 그것이 불가능할까.
[나는 모른다]는 조금 씁쓸하지만 현실을 비틀어 본 현실과 비슷한 허구소설이다. 그 속에서 나오는 가족. 평범하지 않은 듯하지만 21세기에서 의외로 쉽게 찾아볼 수 있는 가족형태이기도 한 구성원들이다. 남녀가 각자 자유로워지면서 이혼률도 높아졌다. 옛날에는 여성들의 인권이 거의 없었으니 아무리 남편이 개차반이여도 끝까지 참고 사는 방법밖에 없었지만, 지금은 서로가 부부생활에 관해서는 동등해지고 있는 실정이라 여성들이 자신의 가슴을 쥐어짜며 참고 살 필요가 없어졌다. 이런 이유로 이혼률이 늘어난 것도 있겠지만, 자본주의 또한 한 몫을 톡톡히 해내 각자 개인들에게 때론 간접적으로, 때론 직접적으로 영향을 끼치고 있다. 이런 점이 작품 속에서 알게 모르게 부각되고 있다.
이 책을 만일 무대에 올린다면, 등장할 사람은 부친, 새엄마, 혜성, 은성, 유지, 밍, 블로그여인, 옥영엄마, 혜성과 은성의 외할머니, 이모할머니 정도로 볼 수 있을 듯하다. 무대에 더 올라야 한다면 그 밖에 사건의 테두리밖에 있는 엑스트라들이라고나 할까? 그 밖에 다른 인물들은 혜성과 은성의 친모처럼 대화나 전화에서만 등장해도 무방할 듯 보인다.
부친은 장기매매로 돈을 벌어 가정을 이끌고, 새엄마는 그 돈으로 모자라지 않게 좋은 집에서 생활하고 백화점에 드나들며 거리낌없이 소비하는 강남의 잘나가는 안부인처럼 보인다. 하지만 사실 한국인 친구가 없는 화교출신이다. 혜성은 의대를 합격한 후 일학기만 등록하고 학교를 나가지 않았지만 그 뒤에도 계속해서 부친에게 등록금을 받아 자신의 유흥비나 생활비로 소비하는 가짜 대학생이다. 은성은 무분별하고 생활력이 없어 부친에게 항상 돈을 요구하고 줏대없이 아무 남자나 만나고 다니며 사랑을 갈구하는, 그러나 누구에게도 버림 받는 불쌍한 여성이다. 새엄마 옥영 또한 그녀만의 이야기가 있다. 그녀는 밍이라는 고향친구는 남자로써 진짜 사랑하고 상호는 남편으로써 든든한 버팀목으로 생각한다. 그래서 결혼후에도 자주 외국에서 떠도는 밍을 간간히 만난다. 유지. 옥영의 딸로 소설을 끝까지 읽어보면 알 수 있듯이 사실 상호의 딸인지, 밍의 딸인지 명확하게 확신할 수 없다. 유지는 음악에 소질이 있는 아이로 일찍부터 바이올린을 배운 부끄럼을 많이 타고 지극히 소극적인 아이다. 바로 이 아이가 이 책에서 모든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복선이며 실마리이고 사건이며 깨달음이다.
유지의 실종은 나머지 가족들에게 큰 변화와 앞으로의 삶은 그 전의 삶과는 다를 것이라는 암시를 준다. 아이의 외로움. 고립이 실종으로써 심화되고, 이는 가족들의 소통관계의 부재에 틈을 만들어준다. 가족들 또한 각자가 고독하고 외로운 개개인들이지만 어떻게 보면 유지의 실종이 이들에게 서로의 끈을 연결시켜 주는 어떤 매듭의 역할을 하게 된다. 그렇게 함으로써 저자는 개개인들의 삶을 샅샅히 파헤친다. 이렇게 파헤친 사실들은 서로에게 알려지기도 하고 또 그럼에도 알려지지 않은 사실들도 있게 된다. 알려진 사실에는 치명적인 진실도 밝혀지는 데 여기서 아이들에게는 부친, 개인으로써는 상호의 범죄적 사실이 드러난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그들의 현실 속에서 우리는 실제와 닮은 그들의 걱정과 망설임, 초조함을 보게 된다. 그들의 모습은 우리에게 다시 한번 나는 저 상황에서 어떻게 할까.. 하고 생각해보게끔 만든다.
마지막까지 긴장감과 팽팽함을 끌고 가는 작가의 지구력에 감탄의 숨을 한번 내뱉는다. 결말이 어떻게 보면 약간 허무하다 싶을만큼 우연적인 요소가 남아있지만, 결과를 그렇게 내놓지 않았다면 아마 작가가 작품을 끝내지 못했으리라는 생각이 든다. 작가가 남긴 마지막 여운은 독자들에게 맡겨둔 것이리라.
내가 외떨어져 살기를 좋아하는 것은 사람들을 피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나 자신의 리듬에 맞추어 내 길을 가기 위해서다 -라고 법정스님이 말했는데 모두가 자기 길을 가면서도 함께 공존할 수 있는 소통이 존재한다면 더 힘차고 씩씩하게 걸어갈 수 있지 않을까. 더 나은 세상이라는 것은 바로 소통의 세상일 것이라 생각하며 그런 세상이 오길 어둠속의 촛불처럼 기다려본다.
- 기억에 남는 장 -
(33-34p 페이지 첨부)
- 내가 은성과 혜성을 이해할 수 있는 대목이다. 예술가가 경험한 시련의 아픔을 반드시 겪어야만 창조물을 이해할 수 있는 것처럼 나또한 비슷한 경험이 있었기 때문에 글로써만이 아닌 경험으로 그들을 이해할 수 있었다.
-> 이 소설에서 순수한 피해자는 사실 아이들이라고 볼 수 있다. 아이들이 뱃속에 있을 때부터 말릴 수 없이 이루어진 일들. 바른 어른이라면 어쩔 수 없이 자식을 돌보는 게 아니라 사랑의 결실로 인한 결과로써 당연히 아이를 돌봐야 한다는 의식을 가져야 한다. 이렇게 되지 못한 가정의 아이들이 자라서 불행한 삶을 반복한다는 것은 그리 놀라울 일이 아니다. 그래서 은성은 성인이 되어서 누구에게든 사랑을 구하지만 누구에게도 사랑을 받지 못하는 인간으로, 혜성은 누군가에게 사랑을 받기도 하지만 누구도 사랑하는 법을 배우지 못하는 인간이라는 결과로 나타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