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지 - 그린북스 4 그린북스 4
펄 벅 지음 / 청목(청목사) / 1990년 8월
평점 :
절판


나는 책을 읽을 때 특히 스토리가 있는 문학이라면 인물에 직접 감정이입을 시키기도 하지만 어쩔땐 마치 제 3자의 입장으로 들어가 그 세계를 몸소 체험한 듯이 느껴보곤 한다.

대지의 작가는 작품을 전지적작가 시점으로 보면서 왕릉의 심리는 자세히 묘사하지만 오란의 심리에 대해서는 아주 미흡하게 묘사되어 있다.

작가가 이 책을 쓰게 된 계기가 자신의 딸 때문이라는 것을 보고 책 속에 나온 왕릉의 천치인 딸이 이렇게 해서 만들어짐을 알았다.

책을 읽고 나니 갑자기 요근래에 본 잉크하트라는 영화가 생각났다. 줄거리는 책을 소리내서 읽으면 그 인물들나 물건들이 현실로 빠져나오고 현실에 있던 누군가는 책 속으로 들어가게 되는 내용을 다룬 영화였다. 잉크하트 자체도 책이름이였는데 이는 어느 작가가 개개인의 인물들에 생명을 불어넣고 스토리를 엮어가는 형식이었다.

이 영화의 발단은 평범한 가정을 일구고 살아가던 남자주인공이 책을 소리내서 읽으면 생기는 이러한 비범한 능력을 모르고서 자신이 사랑하던 아내와 딸이 있는 앞에서 잉크하트라는 책을 소리내서 읽어 아내는 책속으로 들어가고 책속의 인물들이 대거 현실로 빠져나오면서 일어나는 이야기이다.

책속에서 나온 인물들은 현실로 나와 자신들이 작가가 만들어낸 인물일 뿐임을 알고 정해진 자신의 운명과 성격에 무기력해지고 그 운명에 맞써 싸우지 않고 일찌감치 포기해버린다.

그렇게 점점 얽히고 섥히며 이야기들이 진행이 되고 이들은 자신들의 운명이 바꾸어지는 것은 자신의 손에 달려있다는 것을 깨닫게되고 앞날의 어떤 운명이 기다린다할지라도 그에 맞썰 용기를 지니게 된다.

왜 이 영화가 생각났느냐 하면, 대지의 인물들은 실제 있을만한 현실적인 인물들이었지만 이 책에 나온 인물들 중 대부분이 운명론적 무기력함에서 그와 맞써 싸울 만한 용기있는 인물은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은 그런 운명속에서 한탄하고 자기 자신을 정당화하며 타락하는 와중에도 그 타락의 깊이를 알 지 못했으며 그 운명을 체념한 체 그대로 받아들일 뿐이었다. 그러나 유일하게 이를 극복한 사람은 다름 아닌 오란이었다.

가령, 왕릉은 오란이 없었더라면 결코 윤택한 삶을 이루기가 힘들었을 것이다. 처음에 그런 오란에게 고마움을 느끼지만 부가 쌓이기 시작하면서 그는 다른 곳에 눈을 돌리기 시작하고 그 고마움도 잊는다. 오란은 어떤 시련이 닥쳐오더라도 이에 맞썰 줄 알며 가장 대지와 비슷한 인물이다.

그녀는 남의 집에 종으로 팔려갔었으나 곧 농부의 아내가 되고 부를 쌓게 하는 데 일등공신이다. 그러나 농부인 왕릉은 힘들었을 때는 그녀의 공을 알지만 윤택해지면서는 모두 자신이 이루어낸 결실이라 생각한다. 게다가 아내에 대해서는 우월의식을 가지고 있는 왕릉은 일이 잘 풀릴때는 지신에게 향을 피우고 절을 올렸으나 일이 뒤틀리고 힘들어지면 지신을 탓했다. 그리고 나중에는 결국 지신을 외면하게 된다.

여기서 그는 자신이 믿었던 신념은 없어지고 땅에 대한 애착만이 남는다. 지신은 그가 믿고 싶은 것에 대한 소망실현의 안정제였다.

이렇듯 인간의 허상과 허무한 신념, 환경에 따라 마음가짐이 어떻게 바뀔 수 있는 가를 왕릉의 삶을 통해 일부분 들여다 볼 수 있다.

내가 즐겨 감정이입을 하던 생생한 인물보다는 마치 개미병정같이 주어진 삶에 충실할 뿐 포부나 대의도 없이 살아가는 인물들의 성격에 그리 매력을 느끼지 못한 점도 있었다.

그러나 작가가 만들어낸 그들은 평소에 주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사람들의 모습이라는 점에서 가장 현실과 비슷한 인물들이다. 현실은 신비롭고 모험이 가득차며 용기있는 자들이 엮어가는 모험소설같이 그리 재미나고 흥미진진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나는 현실에서 느끼는 허무함과 무기력함 때문에 더 많은 이야기를 책에서 찾아헤매이기도 했었다. 대지는 그런 나의 욕구에 재미나 흥분을 주지는 못했지만 차분함과 뭔가 설명하기 어려운 답답함을 가져다 주기는 했다.

이 책이 쓰여진 시기는 1930년대, 즉 그 시대에는 남녀차별과 여러가지 불공정한 삶의 일부분들이 많았다. 지금에서라면 범죄가 되는 일도 비일비재했다. 비록 집이 가난하다 하더라도 자식을 남의 집에 판다던가, 자식을 재산의 일부분이라고 생각하는 부분에서 아무래도 이 시대를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에게는 거부감이 없지 않아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의식은 자신도 모르게 몇몇 사람들의 머리속에는 유지되어온 것 같다. 예를 들어 동양에서는 아직도 자식을 부모 뜻대로 하려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이들은 자녀를 독립한 개체로서의 인간으로 보기보다는 자기가 낳았으니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다는 마음이 팽배해 있다. 그들의 의식을 바꾸려는 시도는 별로 설득력이 없다.

내가 무엇보다 놀랐던 점은 작가가 미국인이었는데도 불구하고 중국인의 삶과 성격을 그렇게 잘 묘사했다는 면에서 감탄했다.

나 자신도 중국인이 아니라 중국인의 심리는 잘 모르겠으나 그래도 읽을 때 중국 특유의 느낌을 그렇게 잘 살릴 수 있었던 펄 벅의 상상력과 창조력은 대단한 것이었다.

그렇게 활발하게 작품을 내지는 않았던 펄벅의
다른 작품을 아직 못 읽어봤는데 나머지 작품도 곧 읽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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