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인의 취약성 - 왜 백인은 인종주의에 대해 이야기하기를 그토록 어려워하는가
로빈 디앤젤로 지음, 이재만 옮김 / 책과함께 / 202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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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빈 진 디앤젤로는 미국내에서 '백인성'연구로 저명한 학자이자, 인종주의에 대한 백인들의 모호성 및 묵인에 대한 문제를 다룬 '백인의 취약성' 등을 고안한 사회학자입니다. 그녀는 1991년 미국 시애틀 대학에서 역사학 학위를 받은 뒤, 2004년 워싱턴 대학에서 다문화 교육과 관련된 박사 학위를 수여 받게 됩니다. 노동자 계급의 자녀로 태어난 것이 오히려 미국 사회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고 밝힌 그녀는 현재 워싱턴 대학의 부교수로 재직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점차 확대되고 있는 다양성 교육과 관련해, 미국의 인종주의가 과거에 비해 전혀 나아지지 않았다고 주장하는 한편, 그녀는 이러한 연유에 미국 건국 이후부터 백인 남성 엘리트들에 의해 주도적으로 백인 계급의 이익이라는 사회적 관념이 제도화되었고 이것의 근본이 지금까지도 미국 사회에 뿌리 깊게 박혀있다고 주장합니다. 이쯤에서 보면 역설적이게도 '인종의 용광로'라는 미국에 대한 세계인의 이미지가 허상에 불과하다는 것을 어렴풋이 모두가 짐작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한 주제와 연장선상에 있는 것이 바로 이 책이라 말할 수 있겠습니다. 따라서 이 책은 원제, "White Fragility"로 2018년에 출간되었고, 국내에는 2020년 11월 번역 출판되었습니다.

흔히 미국은 개념적으로 다원화된 국가이며, 이러한 체제를 견고한 민주주의가 뒷받침하고 있는 국가이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각종 뉴스와 그외 여러 논저들로 미국 사회가 심각한 인종적 문제를 안고 있다는 것을 거의 모두가 알고 계시리라 생각됩니다. 바로 이러한 현실 인식을 바탕으로 이 글의 저자는 이러한 인종적 문제의 가장 큰 책임이 현재 다수 백인들에게 있다고 전제하고, 일부 극우주의자들과 인종주의자들 혹은 백인우월주의자들에 의해 일반적인 정치 무대 위에서 '정치적 올바름'을 무력화시키기 위해 노력했고 그로 인해 견고하게 내면화되어 있는 인종주의가 꿈쩍도 하지 않는 상황이라고 진단하고 있습니다. 즉, 현재의 사회가 다수 백인들에게는 특별히 문제가 없다는 인식하에 지금도 인종 문제가 나아지고 있다는 터무니 없는 믿음과 백인은 대부분 '좋은 사람'이라는 인식하에 그럼에도 자신들은 이미 인종주의를 제도적 차원에서 내면화하고 있는 실정에서 이 인종주의 자체를 자의든 타의든 언급도 하지 않으려는 태도를 저자는 '백인의 취약성'으로 해석하는데 글 전반을 할애하고 있었습니다.

이미 피터 칼레로의 글에서도 언급되었듯이, "흑인들이 직업적 책임감이 부족하다"는 등의 백인들의 흑인들에 대한 인종적 편견은 상당히 뿌리 깊다고 할 수 있겠는데요. 이는 백인 엘리트들이 규정하고 확대시킨 '백인들이 마땅히 누려야 될 권리'와 관련해, 건국의 아버지들조차도 과거의 타성에 젖어 인종의 차이에 있어서 백인이 더 우월하다는 관념을 내재화시킨 결과라고 봐도 지나치지 않은데요. 그러면서 다수 백인들이 소중하게 여기는 자유와 그것을 바탕으로 고도화 되어 심지어 이데올로기화 된 '능력주의'에 있어, 흑인들이 스스로를 교육하지 않고 성공하지 못하는 건 전적으로 개인의 책임이라고 믿고 있는 백인들의 그러한 관념체계는 저자의 언급대로 일종의 '암묵적 편향'이라고 부를 수 있겠습니다. 즉, 미국 사회가 개인주의와 능력주의를 신봉하고 있는 상황은 그 사회를 지탱하고 있는 다수 백인들의 가치 체계가 바로 앞선 개인주의와 능력주의를 맹신하고 있다는 결론으로 이어지는데요. 뭐 이것을 단순한 타성이라고 부를 수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체제 자체의 무결점성을 비롯 자신들이 믿고 있는 그 체제 자체에 대한 이성적 판단이 결여되어 있는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성공하지 못하는 사람은 그저 타고난 재능이 없거나 자격이 없거나 열심히 노력하지 않은 것이다"라는 진술과 이것이 작동시키는 건 "불평등한 체제로서 인종주의를 감추는 이데올로기로 작용되어 왔다"는 것을 저자 스스로 여실히 드러내는 것이라 생각됩니다. 이것은 자본주의 체제하에서 가진 부로 상위권에 속해 있는 계층의 일원들이 지금의 체제가 전혀 문제가 없다고 여기는 것과 마찬가지인 인식이고, 백인 다수들이 미국 사회 체제의 일면들이 그렇게 나쁘다는 것이냐로 반문하게 되는 진정한 연유일 겁니다.

과거 미국인들이 자신들의 노예 제도를 유지하기 위해 벌였던 정치적 로비라든지, "흑인이 마땅히 노예에 처해져야 한다" - 개인적으로 이 문장을 쓰면서 안토니오 네그리와 마이클 하트의 "삶이 노동에 처해졌다"는 문장이 떠올라 혼자 웃고 말았습니다 - 는 당위를 만들어내기 위해 당시 노예주들이 노력했다는 것은 꽤 유명하기도 한데요. 이처럼 백인들의 인종적 편견은 꽤 오래전부터 시작된 역사의 결과물이기도 합니다. 지금에야 여러 매스컴을 통해, 노골적인 인종주의 편견을 가진 백인은 나쁜 백인이라는 인식이 확대되었지만 여전히 흑인들의 말투와 행동을 따라하며 비웃는 것에 대해 전혀 죄의식을 갖지 않는 경우처럼 사회학자인 저자가 논하고 있는대로 다수의 백인들은 인종주의가 무엇인가에 대해 거의 알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여겨지기까지 합니다. 즉, 저자의 의견대로 백인이 흑인과 같은 유색인들의 입장에서 미국 사회가 만들어내고 있는 인종적 편견을 포착하고 그것이 매우 잘못된 것이라고 백인들 스스로 인정하고 개선시켜 나가야 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는 것이 현실이라고 할 수 있겠는데요. 바로 이 부분에 있어 '백인의 취약성'이라는 사회적 언어가 탄생한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저자는 이 글 초입에서 이미 "우리에게 편향이 있음을 부인함으로써 결국 그런 편향을 검증하거나 바로 잡지 않게 하기 때문"이라고 분석하고 있었습니다.

지금도 다수의 흑인들이 있는 장소나 거리에 갈때 백인들은 알 수 없는 공포를 느낀다고 합니다. 이것은 학교-교도소라는 파이프라인을 타고 상대적으로 더 많이 수감되어 있는 흑인사회의 현실, 자신이 멕시코계 라티노일 경우 백인에 비해 더 많은 형량을 받게 되는 현재의 미국 사법 시스템의 문제로 봤을 때, 이러한 암묵적 편향은 미국 사회에 지대하다고 봐야할 것입니다. 물론 어처구니 없는 "백인은 인종주의적 차별을 하지 않는다"는 주장을 대변하려는 것은 아니지만 '순진한 백인'이라는 논법으로 이 인종주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는 것은 매우 당연하다고 여겨집니다. 과거에 도널드 트럼프가 "자신은 누구보다 인종주의적이 아니다"라고 주장한 것과 비슷한 맥락일 수도 있겠는데요. 다른 인종에 비해 확연한 교육의 기회와 고용의 인센티브 더불어 사회 진출의 우위라는 측면에서 백인들이 누리고 있는 권리는 매우 지대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지금에야 이런 현실에 눈을 감고 오히려 역차별이라고 주장하는 '티파티'들이 있기도 합니다만 저자의 강조대로 미국 사회 체제 전반이 제도적으로 인종주의적 편견을 강화시켜왔고, 진지하고 현명한 백인은 이 인종 문제를 결코 입밖으로 내뱉지 않는다는 일종의 금언이 현재 대부분의 백인들이 내면화시킨 상황이라 볼 수 있겠습니다. 이것은 마치 청담동과 대치동에 사는 사람들이 서울의 부동산 문제는 그리 심각한 것이 아니다고 말하는 것과 유사하다고 할 수 있는데요. 제도화된 권리를 누리고 있는 자들이 반대편에 있는 상황을 알려고 하지도 않고 꺼내려고 하지도 않고 그저 자신은 그런 인종주의자가 아니라고 정색하며 언급하는 것이현재 일개 시민으로서의 백인들의 기본적인 관념 체계라 보여집니다.

끝으로 이 책은 사회학적인 논증과 더불어 르포르타주와 같은 여러 사례들이 뒷받침되어 있는 꽤 견실한 글이라 생각되었습니다. 현재 미국의 개인주의적이고 능력주의적인 맹신 혹은 이데올로기화가 사회적으로 내면화되어 있어 이 인종주의 문제 조차도 개인적 문제로 축소시킬 수 있는 것은 대단히 유감스러운 일이었습니다. 민주주의가 다수 시민의 평등과 안녕을 강조하는 정치 이념으로서 세계 민주주의의 제일 국가라고 여겨지는 미국이 '백인 우월주의 국가'로 그려지는 것은 실로 미국에 각별한 감정을 갖고 있는 일개 한국인으로서도 받아들이기 어려운 부분이었습니다. 저 역시 미국의 민주주의는 절대선에 근접한 것이라고 세뇌를 받았기에 내심 관련 서적들을 접했으면서도 실제 미국 사회를 겪어본 것이 아니기에 그저 긴가민가 했던 것도 사실입니다. 하지만 근래 미국 사회의 단면이 꽤 적나라하게 드러나고 있는 상황에서 시민들에게 아주 기본적인 민주주의적 가치 조차 제대로 보장할 수 없는 미국의 현실은 실로 씁쓸하다고 할 수 있겠는데요. 엉뚱한 소리겠지만 한편으론 이래서 미국인들이 평등을 좋아하지 않는 건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습니다. 사실 국제 사회에 미국이 부르짖는 인권의 개념은 지금 미국 사회에서 벌어지고 있는 인종주의와 관련해 가장 필요한 것이 아닌가 글 말미에 다시금 생각해 보게 되었습니다.

개인주의는 개개인의 성공을 막는 근본적인 장애물 따위는 없으며 실패는 사회 구조의 결과가 아니라 개성의 결과라고 주장한다

그렇지만 대부분 백인은 우리의 인종 프레임에 관해 숙고하기를 유독 힘들어하는데, 인종적 관점을 갖는 것은 곧 편향되는 것이라고 배우기 때문이다. 유감스럽게도 이 믿음은 우리의 편향을 보호할 뿐인데, 우리에게 편향이 있음을 부인함으로써 결국 그런 편향을 검증하거나 바로 잡지 않게 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미국의 지배 계급은 노동을 착취하기 위한 방편으로 결국 가난한 백인 노동 계급에 완전한 백인 지위를 부여했다. 가난한 백인이 자신들보다 지위가 낮은 사람들에 대한 우월감을 갖게 되면 더 지위가 높은 사람들에게 덜 집중할 터였기 때문이다

불평등한 체제로서의 인종주의를 감추는 이데올로기들은 아마도 가장 강력한 인종적 구속력일 텐데, 일단 인종 위계에서 우리의 위치를 받아들이고 나면 설령 우리에게 불리하다 해도 자연스럽 의심하기 어려운 처지로 보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백인성을 백인이라는 존재의 모든 측면 - 단순한 신체적 차이를 넘어 사회에서 백인으로 규정된다는 것의 의미와 그에 따른 물질적 이첨과 관련이 있는 측면들 - 으로 생각할 수 있다

백인 인종 프레임의 가장 일반적인 수준에서는 백인이 문화와 성취의 면에서 우월한 존재로, 유색인이 사회적, 경제적, 정치적 성과의 면에서 제대로 백인보다 떨어지는 존재로 여겨진다. 또 국가를 운영하는 능력에서 유색인이 백인보다 열등하다고 여겨진다

흑인을 범죄와 연관짓는 백인의 굳은 확신은 현실을 왜곡하고 역사상 흑인과 백인 사이에 존재해온 위협의 실제 방향을 뒤집는다

그렇더라도 나는 인종주의에 기반하는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인종주의의 구속력에 영향을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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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를 위한 인간
에리히 프롬 지음, 강주헌 옮김 / 나무생각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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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리히 젤리히만 프롬은 1900년 독일 프랑크푸르트 태생의 독일계 유태인으로 태어났습니다. 후에 학문적으로 동시대에서 가장 유명한 유태인으로 알려졌고, 더불어 독일계 미국인으로서 지그문트 프로이트를 자신의 사회심리학에 융합해 해당 학계에서 유래를 찾아 볼 수 없는 거장으로 자리매김하였습니다. 본디 그는 프랑크푸르크 대학에서 법철학을 전공하려 하였으나, 바로 2년 뒤에 하이델베르크 대학으로 옮겨 사회학으로 진로를 바꾸게 됩니다. 이후 나치 독일이 자신의 모국을 철저하게 장악하자 유태인이었던 그는 스위스 제네바로 옮겼으며, 1934년에 미국 뉴욕의 컬럼비아 대학에서 학문적으로 또한 자신의 삶에 있어 새로운 출발을 시작하게 됩니다. 앞서 짤막하게 언급한대로 프롬은 지그문트 프로이트의 심리학을 분석적으로 개괄해 자신의 고유한 학문으로 만든 장본인이기도 한데요. 뿐만 아니라 당시 각광을 받고 있던 허버트 스펜서의 '윤리학 원리'를 탐독했고, 프로이트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허버트 스펜서 사상과 관련한 일종의 비판적 수용을 거치게 됩니다. 공교롭게도 그 시대의 허버트 스펜서와 히틀러의 나치라는 존재는 개인적으로 역사의 아이러니라고 생각하는데요. 히틀러가 허버트 스펜서를 탐독했다는 일화는 매우 유명하기도 합니다. 저도 다른 분들처럼 학부 시절에 무슨 유행처럼 에리히 프롬의 글을 찾아 읽기도 했습니다만 한나 아렌트처럼 전체주의의 연원을 알고 싶어했고 또한 시대의 어두운 측면이라고 할 수 있는 이 나치즘에서 어떻게 하면 학문적으로 탈출할 수 있는지에 대해 에리히 프롬 역시 많은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나 생각해봅니다. 그의 '자유로부터의 도피'역시 그런 맥락에 있는 글이고 마찬가지로 이 글 역시 그와 같은 인식적 궤에 놓여있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었습니다. 따라서 이 책은 지난 1947년 원제, "Man For Himself"으로 출간되었고 국내에는 2018년 6월 번역 출판되었습니다. 에리히 프롬에 대한 약간의 개인적 소회라면, 예전 1980년대에 나온 그의 국내 해적판 판본을 여러 출판사 판으로 헌책방에서 주구장창 구입하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지금 제 서가에도 '에리히 프롬 섹션'을 만들어도 될 만큼 많은 해적판(?)이 쌓여 있는데요. 지금과 같은 합법적인 저작권 시대에 그런 출판물이 있었다는 것을 현재의 나이 어린 분들은 전혀 이해할 수 없겠지요.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것으로서 프롬은 그와 같은 인식하에 인간의 본성에 대한 꽤 면밀한 작업의 소산이 바로 이 책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가 언급하는대로 부제는 '자유로부터의 도피'의 part 2 이기도 합니다만 그와 같은 인간의 본성을 설명하기 위해 도입되는 상대주의적 윤리를 비롯한 철학과 심리학 및 역사학을 망라하는 저자의 논증적 나레이션과 더불어 과거 나치 독일의 전체주의적 역사에 기반해 상대적으로 진정한 인간의 행복과 쾌락에 대한 철학적 의미를 살펴보고 이것에 대한 배경으로 철학과 역사학이 사회심리학과 만나 앞선 주제를 규명하는 데 지면이 할애되고 있었습니다. 즉, 이러한 가운데 윤리학의 역사적 맥락에서 '권위주의적 윤리'와 '인본주의적 윤리'를 비교 분석하며 양자를 단순히 대립적인 인식물로 보지 않고 '보편적인 인간성을 거부'하는 당위로 이 양자가 인간의 본성을 설명하게 되는 여러 연구와 역사적 배경에서 어떻게 서로 영향을 끼쳤는지 분석해 내고 있습니다. 즉, 글 4장에서 '양심'과 '죄의식'이라는 주제로 권위주의적 윤리와 인본주의적 윤리를 매개로 그러한 대립되는 윤리적 맥락이 과연 인간에게 있어 어떠한 본질로 나타나게 되는지 서술하고 있는데요. 여기에는 프로이트의 초자아를 인용하면서, 자신의 의사와 상관없이 거의 강요되기까지 하는 양심의 문제가 프롬은 권위주의 자체에 기반한 것이라고 단정하고 그와 더불어 인간을 불편하게 만드는 죄의식과도 뚜렷하게 연관 지으면서, 그동안 인간은 스스로의 본성에 입각한 양심을 거스리게 되는 경우에 사회가 인간으로 하여금 죄의식을 갖지 못하게 강요하는 것이 과연 옳은 일인가에 대해 저자는 비판적인 의견을 피력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인간이라면 누구나 갈등하게 되는 양심의 문제, 깊은 죄의식의 발현은 다시금 강조하지만 사회의 일방적인 권위주의와 관련되어 있으며, 이것을 과연 인간 본성의 양심이라고 단언할 수 있는지에 대해 프롬은 회의적으로 보고 있습니다. 사실 이 책이 1947년에 쓰여진 것을 감안한다면, 나치 독일에 의해 조직적으로 인간의 이기심, 이익, 행복 및 쾌락 등이 전체주의 시기에 분쇄되어 왔다는 것을 먼저 이해해야 될 것입니다. 이 부분에서 프롬이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계보를 잇는 학자여서가 아니라 전체주의에 대한 뼛속 깊은 각인이 내재되어 있고 기존의 건전한 공동체주의와 그러한 인식이 분명 사회에 필요함을 알고 있으면서도 공동체와 개인의 자유 및 이기심의 추구가 상대적으로 등한시되었다는 것을 독자들은 글을 읽지 않아도 선선히 인정할 수 있겠습니다. 1장 중간에 프롬은 "아직도 개인의 이기심 추구라는 인식과 그에 따른 행위 추구 자체가 제한되어 있는 것"에 아쉬움을 표하기도 했는데요. 이것을 거창하게 사회적 진보라는 맥락으로 이해할 수도 있겠지만 그는 인류의 지성사라는 측면에서 전체주의라는 굴절의 시기가 있었다는 것을 이를 통해 거듭 강조하는 듯 보였습니다. 그래서 프롬은 글의 4장 초입에서 이 '이기심'을 꽤 면밀하게 분석하고 있었는데요. 이는 앞선 1장의 성격의 역동적 측면이라는 여러 지향적인 분석과 관련되어 있고, 따라서 '이기심의 인간'을 단순히 타인을 배려하지 않고 자기가 원하는 것을 추구하는 이기심의 본질을 인간의 본성에서 마땅히 제한해야 한다는 의견에는 동의하기는 힙듭니다. 이 부분과 관련해, 한가지 프롬의 통찰이라고 할 수 있다면 "사람들은 하느님의 도구가 아니라 경제 기구와 국가의 도구가 되었고, 하느님의 도구라는 역할이 아니라 산업 발전을 위한 도구라는 역할을 받아들였다"고 이와 같은 이기심의 논증에서 인정하고 있습니다. 물론 그가 이와 함께 '단순히 소유하는 것, 소유의 문제'를 뒤이어 쾌락과 관련해 비교 분석하고 있긴 하지만 학문적 엄숙주의를 경계한 프롬의 입장에서 아마도 그가 찾으려고 했던 인간 본성의 이기심이 후에 현대 사회에서 오로지 경제적 이기심의 한 방편으로 왜곡되어 확산되었던 것을 아마도 예견하지 않았을까 생각해 보는데요. 이러한 저의 예측은 마지막 종교에 관한 논증에서도 마찬가지지만 멀지 않은 사회에서 종교적 쇠퇴가 '더 빠른 자본주의의 확대'로 벌어진 것임을 알게 된다면 그가 짓는 표정이 어떨지 궁금해집니다.

본질적으로 이 이기심과 관련해, 프롬은 인간이 오로지 이타적으로 행동하는 경우는 있을 수가 없으며, 자신의 이기심을 스스로 배려하지 않고 남을 위해 고려하고 신경쓰는 행위 자체가 본연의 인간 모습이 아니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내 이기심을 스스로 제한시켜 남을 배려하고 타인의 기분을 위해 행동하는 것 자체가 진정한 이타와 이기의 어느 한쪽의 것이라고 볼 수 없는 점이 일견 타당하다고 여겨지는데요. 물론 "너의 이익을 먼저 챙기고, 너에게 최선인 것을 목표로 행동하라. 그렇게 행동하는 것이 다른 모든 사람에게 가장 큰 이익이다"라고 프롬은 인용하면서 그에 기반한 자기 중심주의가 보편적 행복의 기초라는 생각에서 나아가 경쟁 사회의 기본 원칙이라는 건 부인할 수 없다고 에둘러 인정하게 됩니다. 오늘날의 신자유주의적 기조에서 모두가 자신의 이기심을 충족시킬 수 없는 것은 분명한데요. 공동체주의의 선을 갖다가 다수의 시민들은 적절하게 행동하라고 가르침을 내리고, 반면에 막대한 자원을 가진 자들의 이기심은 충분히 충족하는게 소위 '낙수 효과'와 견고한 사회적 토대를 필요한 일이라고 주장하는 요즘의 원리원칙이 허버트 스펜서가 윤리에 있어서 상대주의의 길을 놓았다는 프롬의 명백한 결론과 다소 일맥상통한다고 여겨졌습니다.

다음 인간의 쾌락과 행복에 관련해, 프롬은 스피노자와 예전 그리스 철학에서 인식의 근원을 찾고 있었지만, 큰 부분에서 여전히 허버트 스펜서의 사상을 단초로 삼고 있었습니다. 허버트 스펜서 역시 스스로 학문의 본질에서 엄숙주의와는 거리가 먼 인물이라 '인간의 쾌락에 대한 종교의 개입'을 마뜩잖아 하지 않았고 마찬가지로 스펜서의 입을 통해 분석하는 프롬의 쾌락론은 꽤 노골적입니다. 쾌락의 본질에서 '섹스의 결핍'라는 결과를 언급하는 것도 그 이해를 떠나 약간 놀랍기도 이것보다 자유와 행복을 논박하면서 쾌락을 부인하는 것 자체가 선함의 증거라고 주장하기 쉬워졌다고 말하는 것은 이보다 더 놀랍기도 했습니다. 기본적으로 생리적인 욕구에 속하는 '섹스'가 일반적인 남녀간의 이성애적인 측면에서 어느 일방이 노골적으로 원한다 하더라도 사랑이라는 측면에서 동반되는 것이 섹스이기도 하기 때문에 단순히 쾌락적인 측면에서 마냥 양자가 동일한 이해관계가 있다고 보는 것은 진술상 아주 이해가 안되는 것은 아니지만 "자신을 기만하게 되는 측면에서의 사랑" 뿐만 아니라 "순수한 타인과의 사랑"도 분명 사회에 존재하고 사랑 전부를 객관화된 분석물로서 학문적으로 수치화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이는 철학적인 측면에서도 내 자신에 대한 사랑 뿐만 아니라 타인과의 사랑도 중요하고, 루소가 은연중에 강조했던 인간이 고립된 존재로서의 사회적 자각이 수반될 수 있다 하더라도 평범하고 또한, 프롬이 싫어하는 표현인 '보편적인'인 인간에겐 매우 필요한 과정이기도 합니다. 저는 이것을 허버트 스펜서의 영향이라고 생각하는데요. 쾌락과 사랑을 적절하게 분리하여 이것을 인간의 본성이라는 측면에서 객관화 시킬 수 있는 문제인지는 꽤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그가 논하는 인본주의적 윤리관의 비판적인 측면에서 "자신을 향한 사랑과 다른 사람을 향한 사랑은 기본적으로 모순"이라는 진술에 대해 이를 선택론에 입장에서 주장한 심리학이 있냐고 반문하고 있긴 하지만 그럼에도 쾌락과 사랑의 문제는 도식적으로 분리해서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 분명 존재합니다. 이처럼 그가 스펜서의 영향을 받은 부분들은 조금 아쉽기도 했는데요. 물론 프로이트가 온전히 그의 학문적 기반이지만 사회심리학 자체가 스펜서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겠습니다.

사회를 규정하는 윤리적 문제에서 상대적인 입장을 지지하는 개변적인 윤리주의자들이 그만큼 인간의 본성 문제를 학문적으로 복잡하게 만든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이 글이 쓰여진 1940년대를 감안한다 하더라도 저변이 확대되었다고 볼 수 없는 프롬의 사회심리학의 논저는 저에게도 이기심과 양심 그리고 죄의식에 대한 부분에서 생각할 거리를 남겨 놓았습니다. 인간 본성이 보편적일 수가 없다는 것은 각각의 개인들이 고유한 주체이자 주관화 된 존재여서 더욱 그럴 것입니다. 현재에는 이기심의 문제 자체를 어떻게 다뤄야 하는지에 대해 다방면의 의견으로 학문적인 토론에 이르고 있습니다. 다만, 현재의 우리가 인식하고 있는 이기심이 과연 '평등한 이기심'인지는 정치경제학적인 측면에서 더욱 토론이 필요하다고 생각됩니다. 이 글에서 프롬이 간략하게 역사적으로 살펴보고 있는 공동체주의가 현대 사회에서 법으로만 강제되어 거의 무력화 되었다고 봐야하기 때문에 이는 어쩌면 다음 세기의 학자들의 손에 넘겨줘야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더욱이 사회심리학이라는 학문 자체가 여전히 논쟁의 여지가 있기 때문에 독자들은 프롬의 글 뿐만 아니라 프로이트의 지식을 섭렵할 필요가 있다고 여겨집니다. 물론 대의적으로는 프롬도 인본주의적 사회의 실현을 강조했지만 읽는 사람들에 따라서 그를 터무니 없는 이상주의로 몰고가는 경우도 있기 때문에 독자들에게 어느 정도 분별력을 요구한다고 생각합니다.



-프롬의 이 책은 C. 라이트 밀스의 평전에서 인용되어 읽게 되었습니다. 그 책에서도 마찬가지로 '자유로부터의 도피' part 2로 소개되어 있었습니다.

-당시 사회주의의 영향 때문인지 프롬은 평등의 관념에 대해 다소 공격적이었는데요. 민주주의 역시 평등의 가치를 중요하게 여긴다는 점에서 이 점은 아쉬운 부분이었습니다.
 
-프롬은 '시장이라는 동등한 조건'이라는 것을 당시에 너무 믿고 있었는데요. 시장이 어떻게 인본주의와 연결되는지는 대략 감이 잡히기도 했습니다만 지식도 일종의 상품이자 인간도 동일하게 그렇게 될 수도 있다는 측면에서 그는 대단히 자유로운 인식으로 판단하는 듯 했습니다. 


현대 문화는 이기심(selfishness)을 금기시하는 분위기가 팽배하다

인간이 모순을 인지하고 행동으로 반응하는 것을 방해받는다면, 모순의 존재 자체가 부인되어야 한다

듀이는 수단과 목적의 상관관계를 강조했고, 이 사살은 합리주의적 윤리학의 발전에서 상당히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인간의 행위는 타고난 본능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어떤 행위를 수행할 때마다, 또 한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신중한 결정을 내려야 한다면 삶이 불안정하고 고단할 것이다

평등은 개개인의 특유성을 개발하는 조건이 되기는커녕 개성의 멸절을 뜻하고, 시장 지향의 특징인 몰아 selflessness를 뜻한다

비이기심이라는 이데올로기에는 엘리트의 지배를 받아들이도록 국민을 기만합으로써 착취와 조작을 용이하게 하려는 목적이 감춰져 있다

인간은 자유를 억압받으면 본능적으로 자신에게도 원망의 화살을 돌린다는 니체의 주장이 옳다는 걸 프로이트는 설득력 있게 입증해 보였다

죄책감이 의존성을 형성하고 강화하는 가장 효과적인 수단이라는 것은 이미 입증되었고, 권위주의적 윤리가 인류의 역사에서 맡은 사회적 기능 중 하나가 여기에 있다

우리가 양심의 목소리를 듣지 못하기 때문에, 더 노골적으로 말하면 우리가 양심의 목소리를 경청하는 법을 모르기 때문에 양심의 상ㅇ대적인 무용성이라는 문제가 생겨난 것일 수 있다

쾌락 원칙을 가장 포괄적이고 가장 체계적으로 다룬 허버트 스펜서의 윤리학 원리는 쾌락의 심도 있는 연구를 위한 최적의 출발점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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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인도 잘 모르는 미국 선거 이야기 한겨레지식문고 2
L. 샌디 메이젤 지음, 정의길 옮김 / 한겨레출판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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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이스 샌디 매이젤 (혹은 마이셀) 은 1971년부터 미국 메인 주에 소재한 콜비 대학의 정치학 교수로서, 콜비 대학의 골드파브 공공 및 시민 참여 센터의 창립이사 (2003~2012)로 활동한 바가 있습니다. 특히, 미국 정당과 선거를 포함한 17권의 논저를 쓴 연구자이기도 한데요. 이와 달리 그의 색다른 경력에는 1978년에 메인주 의회 예비선거에 민주당 후보로 지명되어 출마한 이력도 갖고 있습니다. 1989년에는 올해의 메인 주 교수를 수상받을 정도로 여러 다른 이력들을 포함해 꽤 인정을 받은 학자라도 볼 수 있겠는데요. 콜비 대학의 홈페이지에 가보니 현재는 교수를 은퇴하고 여러 언론사 기고와 집필활동에 매진하는 것으로 나오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 책은 원제, "A Very Short Introduction : American Political Parties And Elections"로 2007년에 출간되었고, 국내에는 지난 2010년 5월 번역 출판되었습니다. 그리고 현재 이 책은 절판되었습니다.

우선 샌디 메이젤의 이 책은 얇은 팜플렛과 같은 소책자로 현재의 미국 선거제도 및 양당 제도와 관련해, 일반인들을 위해 꽤 명료하게 정보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저역시 그 전부터 관심을 가져온 미국 연방 대통령 선거에서의 선거 인단 제도를 위해 이 글을 고르게 되었는데요. 매이젤의 이 책이 아주 전문적인 정치 논저라고는 볼 수 없지만 평소에 미국 선거 제도에 대한 기본적인 지식을 원하는 분들께는 적잖은 도움이 되리라 생각됩니다. 본격적으로 글을 쓰기에 앞서, 조금 이른 결론이기도 하지만 메이젤이 이 책의 말미에 이르러 의미심장하게도 현재 미국의 민주주의의 한계를 피력하면서 얼마간 선거인단 제도의 개혁을 포함한 제도 개혁이 있어야 믿고 있었습니다. 이 중요한 부분에 있어서 현재까지 왜, 미국 정치 제도하에서 아직도 그와 같은 선거인단 제도가 개선되지 않고 있는지에 대해 몇가지 원인들을 인식하게 된 것은 마찬가지로 일독의 중요한 부분이라고 언급하고 싶습니다.

이 글의 1장에서 저자는 지금의 선거인단 제도에 대해, "선거인단은 건국의 아버지들이 자신들이 직면했던 정치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고안했다"는 개인적 평가를 내리고 있었습니다. 이를테면 다수가 소수의 권리를 억압하게 되는 상황을 우려깊게 본 것이 그들이었고, 영국 정치와 자신들에게 건전한 공화주의 맥락으로서 이러한 미국의 제도적 기틀을 만들었다고 보는 것이 맞을겁니다. 사실 그동안 여러 보수적인 미국 학자들에 의해, 전통적인 제도적 측면에서 자신들의 고유한 역사라는 이유만으로 오래된 선거 제도에 대한 일말의 개선 필요성을 적극적으로 수렴하지 못했습니다. 최근에 미국에서 헌법을 수정하는 작업에 착수하는 일도 있었지만, 연방 대통령을 선출하는 선거인단 제도 만큼은 그동안 여러 여론들이 있었음에도 개선의 의지를 갖기가 다소 쉽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미국 의회제 내에서의 특별한 제도인 상원제도와 맞물린 선거인단 제도가 소수 주(state)에 대한 최소한의 권리 보장이라는 측면에서 오랫동안 유지되어 온 이유이기도 한데요. 사실 미국의 민주주의에서 상원보다 더 문제가 있는 것은 하원의 선출 상황이었습니다. 이와 관련해, 글 6장에서는 "하원의원 선거에는 거의 경쟁이 없다. 2006년 선거를 포함해 지난 30년간 선거 때마다 재출마한 현직 의원의 90퍼센트 이상이 재선해 성공했다"고 언급되고 있는데요. 이렇게 기존의 권력이 고착화되어 있는것이 자신들의 민주주의에 과연 이로울 것인가에 대해 짐작해 보건대 거의 회의적이라고 할 수 있을겁니다. 이는 역설적이게도 많은 미국인들이 희화화해 마지 않는 현재 일본의 자민당이 주도하는 의회 민주주의가 실상 자신들의 하원과 별 다를 것이 없다는 측면은 아이러니하다는 말로 표현할 수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

물론 일각의 보수주의적인 시각에서 기존의 시스템을 잘 유지하는 것도 충분히 공감을 살 만한 부분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 글에서 계속 언급되고 있는 "민주주의의 효율적인 측면"에서 특히나 시민들의 정치적 의사 표시의 실효적인 관심사를 수렴해, 정치인들과 정당인들은 마땅히 이를 수용해 제도의 누수된 부분을 개선할 필요가 있는 것은 분명한데요. 하지만 이 글 1장과 2장을 거치며 논증되는 소위 미국 정당 정치의 연원이 과거 정치에서 "엘리트들의 부업"이라는 것과 지역 내의 보스들이 해당 정치를 좌지우지 해왔다는 측면으로 지금도 상원을 저명한 정치 가문들이 자신들의 기득권을 오랫동안 독점하고 있는 실정은 민주주의의 효율적이고 다원적인 범주 바깥에 있다고 여겨집니다. 즉, 정치 제도에 대한 개선과 기존의 제도 유지라는 양자의 대결이 민의의 수렴이라는 대의를 제대로 인정하지 않고 '정치의 이득 추구'라는 측면에 거의 메몰되어 있는 것이 현재 미국 정치의 심각한 문제일 것입니다. 이 부분과 관련해서도 저자는 현재의 정당 정치와 이익 단체가 거의 상명하복과 다름없는 매커니즘을 갖고 있는 것을 건조하게 진술하고 있었습니다만 대부분을 공생관계로 밀착하는 양자간의 관계가 민주주의에 도움이 되지 않는것은 모두가 짐작할 만합니다. 이는 5장에서 미국 선거 내에, 연방 정부 보조금인 하드 머니 (Hard Money)와 일종의 사적 모금액이라고 볼 수 있는 소프트 머니(Soft money)의 격차가 정치 신인들이 등장하기 여려운 구조를 개선하기 위해 꾸준히 연방 정부의 보조금이 증액되어 왔지만 아직도 후보자들에 따라 비대칭적인 막대한 소프트 머니의 존재 여부는 미국 선거판 뿐만 아니라 미국의 민주주의의 시적 이익화된 측면이라고도 볼 수 있겠습니다. 이처럼 정치를 본업이라고 봐도 무방한 정당인들과 그들의 밑에서 경력을 쌓으려는 여타 신진들이 기존의 시스템에 순응하면서 강고한 제도하에서 자신들의 개혁 성향을 잃게 되는 것은 현 상황에서 미국 선거 제도의 최소한의 개선 필요성은 차고 넘친다고 봐야 할 것 같습니다.

또한, 미국 대선에 출마한 힐러리 클린턴의 경우, 미국의 각 주에 이미 구성되어 있던 남편인 빌 클린턴의 선거 조직을 이어받고 이로 인해 다른 민주당 내의 정치 신인들보다 더 수월하게 선거를 치뤘던 것은 본선 무대에 등장할 수 있는 참신한 주자들의 의지를 꺾는 것으로도 작용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 뿐만 아니라 예비 선거 도중에도 과거 빌 클린턴의 사례와 같이 당 지도부의 소위 과감한 선택을 수락하는 식의 밀실 정치가 미국 정당 정치내에서도 분명 존재하고 있다는 것은 우려스러운 부분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래서 저자가 말하는 미국 양당 제도의 어두운 측면이 바로 이 부분을 뜻한다고 생각되는데요. 결국 현재에 민주당 혹은 공화당 지지가 아닌 무당파가 거의 40%가 넘는다는 것이 이를 반증한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양당 제도의 꽃이라는 국가에서 무당파가 저런 수치로 나온다는 것은 단순히 정치 불신의 문제라고 보기에는 이해하기 어려운 측면이 있습니다. 또한, 대선에서 선거 인단을 뽑는 주 투표에서, 자신들이 월등한 강세를 보이고 있는 주에는 당의 관심과 정치적 지원이 전무하고 치열한 경합주에 대해선 막대한 물량과 인력을 투입하는 양태는 미국 정치가 도저히 건전해 보일 수 없는 일면이라고 할 수 있을텐데요. 미국 대선 자체가 승자 독식의 일종의 치킨 게임이라는 것을 감안하더라도 기존의 정치 기득권들이 현재의 시스템을 바꾸는 것에 대한 부정적이라는 의견과 이를 통해 거의 새로운 얼굴들의 정치 입문을 막고 또한, 시민의 정치적 요구를 이익 단체들의 사적 이익보다 부차적인 문제가 된 것은 전세계 민주주의 국가의 큰형이라는 미국의 민주주의가 과연 어떤 본질을 갖고 있는지 진지하게 고찰할 수 있게 해주고 있습니다.


미국의 정치 지형상 다수의 남부 백인과 기독교 근본주의자들 및 다수의 히스패닉 계열의 지지를 받고 있는 공화당과 소수의 유대인들과 근로 노동자들, 그리고 흑인들의 지지를 받고 있는 민주당의 이 양당 체제는 단순히 기득권 정치의 돌이킬 수 없는 강고함을 넘어 어떻게 민주주의의 실효적인 측면에서 최소한의 변화마저 기대할 수 없는 상황인지 여실히 드러내고 있는데요. 그동안 정치학계 내에서 이런 미국의 양당 제도가 민주주의 하에서 비용을 그리 많이 지출하지 않는 효율적이고 더불어 국가 전체를 소모적인 정쟁에 빠트리지 않는 최소한의 장치를 갖고 있는 정치라고 여겨왔는데요. 사실 이 부분에서 중요하게 비판해야 할 부분은 소위 튼튼한 민주주의에서 시민들의 정치적 불신이 점차 확산되고 있는 상황에 선거 제도의 플레이어들이 이러한 정치 불신을 오히려 반기고 있었다는 점입니다. 그들이 입으로 표현하는 일종의 정치는 자신들만이 참여하고, 시민들은 스스로의 삶에 충실하라는 극단적인 모토라고 이해됩니다. 그래서 이들이 오히려 중도층의 주장과 요구에 귀를 귀울이면서 기존의 정치를 개선시켜 나가는 것도 제도 자체를 개선시킬 수 있는 의지를 미연에 막아왔던 것도 사실인데요. 또한, 선거인단 제도의 개혁과 관련해, "일반 투표의 득표수에 비례해 선거인단 투표를 나눠주는 방식"이 기존의 미국 대선에서의 직접 선거 보다는 크게 거부감이 적은 방안일 수도 있다는 측면에서 귀담아 들을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여기에 강하게 맞물려, 인구 수가 적은 주들의 권리를 어떻게 하면 다른 방식으로 보장할 수 있는지에 대한 심도높은 고려와 현재의 상하원 제도를 민주주의의 진정한 효율적인 측면에서 어떻게 하면 실용적으로 만들 수 있는지를 전문가들과 시민들이 머리를 맞대고 논의해야 할 때라고 생각됩니다.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사적으로 미국의 민주주의가 자유 진영에 끼친 영향은 실로 대단했고 이를 바탕으로 각 국에서 경제적 번영을 추동했던 것은 분명 미국의 직간접적인 노력이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다만, 미국인들 스스로 기존의 가치 체계가 과연 현재에도 유효한지에 대해 스스로에게 질문하고 자신들의 민주주의를 위해 개선시킬 의지를 갖는 것이 미국 정치 뿐만 아니라 전세계 민주주의를 위해 필요한 일이라고 생각됩니다.



-본문 86페이지의 '사회화'는 앞뒤 맥락으로 봤을 때, 사익화가 맞는 표현 같은데요. 원서를 보지 못해 국문 번역으로 추측해 본 점은 참고해 주시기 바랍니다.


-기존의 선거인단 제도를 지지하고 있는 계층들 가운데, 미국 내에 히스패닉과 같은 소수 인종들이 자신들의 정치적 영향력 유지를 위해 기존의 입장을 고수하고 있기도 한데요. 이는 인구 수가 상대적으로 적은 주들도 유사한 입장을 보이고 있었습니다.


-전체적으로 저자가 인식하고 있는 미국 정치의 나레이션이 꽤 객관적이고, 소위 미국 만세가 거의 들어가 있지 않아서 미국 정치 시스템에 대한 한계점이라든지 잘 알려지지 않은 부분에서 일반 독자들이 꽤 객관적인 정보를 얻을 수 있겠단 생각이 들었습니다. 물론 재간행 이야기 들려오지 않는 이 책을 광고나 하려고 쓰는 글은 아니지만 다른 분들의 느낌과는 달리 기본적인 번역도 크게 나쁘지 않은 인상을 받았습니다.


양당제는 일단 성립되기만 하면 자신들의 계속적인 지배를 보장하는 추가적인 대책들을 강구해왔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군소정당과 그 후보에게 현저한 불이익을 주는 선거운동 비용 제도이다

특정 선거에 자원을 집중한다는 당의 결정은 이익단체에도 그 선거에 노력을 집중해야 한다는 신호이다

미국의 정치지도자들이 의원내각제의 정치인들과 달리 당 정강에 충실하지는 않지만, 당 정강은 유권자의 입장에서 정당들을 규정짓는 좋은 방식이다

가톨릭 교도는 민주당의 정치연대에서도 거의 4분의 1을 차지하며, 공화당 정치 연대에서도 민주당원의 30퍼센트에 이른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흑인은 전체 민주당원의 30퍼센트에 이르나, 공화당에서는 1퍼센트 남짓이다

특정 당이 지배하는 지역의 공직자는 여러 당이 경쟁하는 지역의 공직자보다 논쟁적인 이슈에서 더 당파적이고 극단적인 입장을 취하는 경향이 있다

선출 공직자(특히 그의 동료 공화당 주지사들) 등 각 당 지도자, 아버지의 선거 운동 지지자, 텍사스 부유층 주민들의 협조를 얻어 부시는 첫 예비선거 투표가 있기도 전에 7,000만 달러를 모금했다

작은 주에는 두 명의 상원의원 수만큼 선거인단을 그대로 배분해 약간의 혜택을 주는 현 제도는 그대로 유지하되, 일반 투표의 득표수에 비례해 선거인단 투표를 나눠 갖는 것이 최선의 제도라는 주장도 있다

이런 주에 집중한다는 전략적 함의는 무언인가? 2000년과 2004년 격전지 주에 살고 있던 미국인은 대통령 후보와 러닝 메이트, 그들의 부인, 대리인들의 방문을 질리도록 받았다. 다른 35개 주에 살던 미국인은 그런 선거운동 방문을 거의 받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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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 라이트 밀스 - 실천적 지식인과 사회학적 상상력
데니얼 기어리 지음, 정연복 옮김 / 삼천리 / 201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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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쓴 대니얼 기어리는 미국 태생으로 현재 아일랜드 더블린에 소재한 더블린 트리니티 칼리지의 마크 피고트 부교수로서 일하고 있습니다. 그에게는 일종의 사회 비평서이자 연구 평전이라 할 수 있는 이 글이 최초의 논저이기도 한데요. 그는 특히 '극단주의 정치'를 신랄하게 비판하고 동시에 좌파 이념과 그에 따른 정치 이론 등을 연구하고 있기도 합니다. 책을 읽기 전에 그의 이력을 알지 못했을 때는 유럽인의 시각치고는 라이트 밀스를 치밀히 분석했구나 싶었는데 그건 저의 착각이었습니다. 그와 같은 역사학자가 본 라이트 밀스에 대한 학문적 구도가 많이 신박하다고 느꼈는데요. 밀스의 주요 논저들을 분석하는 동시에 사회적 맥락과 밀스가 걸어온 길을 독자들이 되짚어 볼 수 있다는 부분과 사회학자의 진지한 삶과 그의 논저를 입체적으로 살펴볼 수 있다는 점에서 기어리의 이 책은 충분히 일독할만 하다 여겨졌습니다. 다만, 국내에서는 그동안 라이트 밀스를 너무나 왜곡해 왔기 때문에 얼마간 밀스를 읽어 보지 못한 일반 독자들은 그를 단순히 '좌파 지식인' 정도로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됩니다. 물론 이는 한국만의 문제가 아니고 미국도 1949년 전후로 이러한 폭거(?)를 몸소 체험하기도 했습니다. 따라서, 이 책은 원제 "Radical Ambition : C. Wright Mills, and American Social Thoughts"로 2009년에 출간되었고, 국내에는 2016년 8월 번역 출판되었습니다. 다만, 국역된 책 제목과 관련해, 원제를 충실히 번역하지 않은 이유에 대해선 책 판매고를 위해 출판사가 그런 결정을 한 것기도 한데요. 아무래도 '급진주의'에 대한 약간의 자기 검열 기제가 발동한 듯 싶은데 이유야 어쨌든 간에 이 부분은 독자의 입장에서 아쉬울 따릅니다.

이 글에서 주요하게 분석될 수밖에 없는 찰스 라이트 밀스에 대해, 개인적으로 처음 그를 인식하게 된 계기는 꽤 괴랄한 번역으로 알려진 '사회학적 상상력' 이었습니다. 지금이야 판이 바뀌었지만 저의 서가에는 기린판이 몇권이나 꽂혀 있기도 한데요. 왜냐하면 처음에는 번역을 믿을 수가 없어서 제가 구입한 판이 뭔가 잘못된 것인줄 알고 과거 헌책방에서 여러권을 구해 읽었기 때문입니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서, 기어리는 라이트 밀스가 1940년대 후반까지 의미있는 자생을 하고 있던 기존의 '미국 좌파'와 약간 상이한 지식인으로 이해되고 있는데요. 특히, 그가 노동주의 운동에 있어서 상당한 좌절을 맛보았음에도 굴하지 않고 더욱 신념화한 '사상적 급진주의'를 봤을 때, 적지않은 존경심을 느끼기도 했습니다. 이와 같이 저자가 소개하고 있는 밀스의 여러 사상적 통찰들 가운데 개인적으로는 파워 엘리트에 논하고 있는 5장에서, 정치적 다원주의라는 자유주의 개념에 반해 밀스가 직접적인 참여 민주주의를 원했다는 것과 1940년대 이후로 미국의 정치를 지배하기 시작한 것이 경제라는 것과 더불어 본격적으로 미국 사회가 기업 지배 이데올로기에 물들어 갔다는 밀스의 예측에서 절로 오늘날 전세계 여러 사회의 모습과 오버랩이 되기도 하였습니다. 또한, 밀스는 후기 자본주의 이론가들의 자본주에 대한 예측에 회의적인 시각을 갖고 있을 뿐만 아니라 당시의 노동자 정치 및 노동 계급의 권력화가 세련된 보수주의에 의해 무력화 되고 난 후, 자본주의가 어떤 식으로든 시민을 '소외 상태'에 빠트릴 것이라고 예견했던 것 같습니다. 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파워 엘리트에서 기어리가 논평하고 있는대로 그것의 명칭이 지배 계급이든 파워 엘리트든 간에 "지배층이 일반 다수의 시민들을 현재의 시스템이 만족할만한 체제로서 이들을 순응시키기 위한 여러 잠재된 요인들"을 밀스가 간과하고 있었다 것이 분명하다는 저자에 논증에 대해 아쉬움을 느낄 수밖에 없었습니다. 기어리의 말대로 1949년 전후로 광풍으로 몰아친 '매카시즘'이 미국의 진보 좌파 운동을 사실상 궤멸시켜, 그 부분에 대해 적잖은 충격을 받은 밀스가 스스로 창의적으로 작명했던 '파워 엘리트들'의 노골적인 기업 지배 이데올로기를 세뇌시키기 위한 작업을 미리 인지하지 못했다는 것은 그것을 학문적 한계로 받아들일 필요는 없지만 이후 그의 사상이 약간 경직된 부분으로 나타난 것이 아닌가 추측해 보게 되었습니다.

밀스의 생애 초반 행적들이 이후 그의 사상적 기초가 되었다고 강조하는 기어리는 존 듀이를 비롯한 미국 프래그머티즘과 당시 미국 학계의 주류였던 시카고 사회학파의 영향을 밀스가 적잖이 받았다고 언급되고 있습니다. 더욱이 저자는 존 듀이와 비교해 더 왼쪽의 인물이라고 그를 평가하고 있었는데요. 밀스에게 한때 중요한 의미였던 노동과 관련해, 미국 내의 '지성과 권력의 합일'이라는 거대한 과업에 몰입했던 밀스가 노동계에 대해 좌절을 맛보기 전까지 그는 급진주의와 정치 발전에 희망을 노동 운동에서 엿보고 있었습니다. 지금도 그렇지만 지식인들이 노동 운동의 필요성과 그러한 정치적 맥락에 발을 담그게 되면 흔히 '좌파 지식인'이라는 낙인을 받게 마련입니다. 밀스는 스스로를 좌파 지식이라고 규정받는 것보다 스스로 급진주의를 사명으로 인식하고 있던 지식인이자 학자였던 인물이기도 한데요. 이러한 연유에는 지식 사회학에 대한 그의 헌신을 비롯, 급진주의 정치에 빠져들 수밖에 없었던 그의 사상적 연원이 있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가 청년기에 시카고 학파에 사회학적인 영향을 받았음에도, 급진주의와 주류 사회학에서 멀찌감치 떨어져 있었던 인물이라는 점에선 사회학계의 이단아라고 할 수 있을겁니다. 특히, 이뿐만 아니라 밀스는 당시 사회상에서 지식인들에 대한 선명한 요구라고 할 수 있는 "점점 더 뚜렷하게 도덕주의 방향으로 나아가는 사회속에서 올바름을 강조하고 비판적 지식인의 역할을 강조하는 한편, 기존 질서를 지지하거나 당면한 긴급 사안들에서 뒤로 한발 물러서는 지식인을 비난"하기도 하였습니다. 이와 관련해 5장인 파워 엘리트에서는 '진실을 폭로하는' 정치를 강조하면서, 지식인들이 이러한 진실 폭로에 나서서 그에 따른 토론에 참여하지 않게 되는 것은 사회에 대한 의무를 망각하는 것으로도 비판하고 있었습니다. 이와 같은 진실된 정치를 향한 그의 사명은 아마도 급진주의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는 것으로 보이는데요. 밀스의 초기 관심사가 "좀 더 정의롭고 합리적인 사회를 위해 사회학에 깊이 뿌리박고 있는 이성을 사용하는 데 있었다"는 점에서 그가 이해하고 있는 급진주의는 사회 구성원들에 대한 정의와 진정한 합리주의에 대한 고민이 담겨있다고 여겨졌습니다. 물론 당시의 사회적 맥락에서도 '시민들을 위한 정의'가 체제를 뒤흔들 수있는 급진적인 문제로 여겨진다는 것은 안타까운 부분이기도 합니다. 여기에 저자인 기어리는 일관된 맥락으로 기업의 자신들의 이데올로기 주입되거나 사회 전반의 기업 지배 이데올로기의 강조가 어떻게 보면 평범한 자본주의로서의 이행이 아니라 일부에 의한 특권을 강조하는 것으로 왜곡되었다는 인식으로 받아들여지기도 합니다. 이후 벌어지는 1950년대가 거대한 이데올로기의 시대였지만 저변의 인사들이 경제에 국한된 지점에는 이데올로기 따위는 없다는 주장들이 얼마나 허무맹랑한 것인지 비로소 이해할 수 있는데요. 훗날 신자유주의의 태동이 이러한 맥락 가운데 있었으며, 밀스가 일찍이 경고했던 '이성을 빼앗긴 정치'가 경제의 지배를 받게된 오늘날의 변화된 상황에도 이를 충분히 대입할 만하다고 여겨집니다.

당시 사회학에서의 처녀지였던 미국이 막스 베버의 번역된 저작들을 통해 새롭게 나아갈 수 있었다고 여겨지는데요. 제2차 세계대전에서의 루즈벨트와 스탈린의 전폭적인 협력을 차치하더라도 1949년전까지는 미국 사회에서 사회주의 사상에 대한 극명한 배격은 없었던 것으로 여겨집니다. 물론 유수의 자본가들은 그렇지가 않았죠. 특히, 4장에서는 "사회주의자라면 자신들의 목표가 물질적 풍요가 아니라 소외되지 않은 인간, 즉 일과 사랑으로 충만한 인간을 낳을 수 있는 사회구조를 창출하는 것임을 떠올릴 필요가 있었다"고 언급되는데요. 앞선 기업 지배 이데올로기가 많은 노동자들과 시민들을 자신들의 이익에 순응하게 하는 순응주의 conformity에 물들게 하고, 결과론적으로 '명랑한 로봇'과 같은 '명랑하고 온순한 자본주의적 인간'으로 그들의 재탄생시키기 위한 정치적 의도들이 자본주의적 발전이라는 미명하게 감행되었던 것은 결코 부정할 수 없을겁니다. 여기에는 조지 오웰식의 디스토피아를 경고했던 발언들이 상당했던 것도 사실입니다. 이러한 논증을 강조하기 위해 쓰여진 문장은 아니었지만 "자본가 계급 및 자본을 보유한 계층이 무엇보다 사회의 안전"을 바란다는 것은 이토록 의미심장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다수 시민들의 안전을 위해 국가가 노력해야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부분입니다만 견고한 자유주의적 기초하에 설립된 미국이라는 연방 국가가 언제든 혁명에 이르는 길로 귀결될 수 있다고 보는 것은 너무 터무니 없는 시각이라고 생각됩니다. 이처럼 미국이라는 국가의 자유주의적 토대는 너무나 거대하고 본질적으로 강건한 것임에도 반대편에서 건전한 비판을 수행할 수 있는 태생적 좌파들의 몰락을 급격하게 불러 일으킨 냉전의 대결은 프랜시스 후쿠야마가 그토록 찬양한 자유주의적 승리가 아니라 모두의 고통을 초래하게 된 신자유주의적 확대로 이어졌다고 봐야할 것 같습니다.

다시 3장에서 논하고 있는 밀스의 사회학에 대한 진정한 의미에서도 개인적으로 대단히 고마운 마음이 들었습니다. 사회학 본연의 가치가 현대 사회의 발전에 충분히 기여하고 있다는 그의 해석이나 앞으로 사회과학이 "일반적이고 도덕적인 반성에서 더욱 중심"에 서게 될 것이라고 예견했던 밀스의 주장에 더욱 공감과 함께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는데요. 현재의 사회과학이 과연 도덕적인 성찰에 있어서 어느 정도의 지표를 갖고 있는지는 불확실하지만, 한가지 확살한 것은 시민들에게 맹목적인 충성을 강요하는 자본주의를 견제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자 무기임은 분명합니다. 물론 여기에 전제되어야 할 기본 요소는 쥘리앙 방다 뿐만 아니라 밀스도 강조했던 지식인들의 그 귀중한 책무와 사회학이 단순하게 검증된 증거학으로만 소모되지 않고 다시금 강조하는 밀스의 의견대로 합리적 이성을 발휘할 수 있어야만 하겠습니다. 다른 인문학들과는 달리 사회학은 우리의 현실 사회와도 밀접히 관련되어 있고, 현재로선 경제 지배에 대한 함의가 사회 곳곳에 뿌리 내리고 있는 현실을 개선시킬 수 있는 담론을 제공할 유일한 학문이기도 합니다. 물론 앞선 사회학이 노동자들과 노동 운동과 긍정적으로 합치되지 않고 극단적으로 분리됨으로써 벌어진 저자가 언급하는 '세련된 보수주의'의 출현과 굳이 당시의 아이젠하워식 특단이 아니었더라도 이미 미국의 노동 운동 자체가 힘을 잃은지 오래되었다고 봐야할텐데요. "급격한 비대칭적인 권력으로서의 자본주의화에 대한 압력과 중간 계급의 분노를 복지와 좌파의 무능으로 몰아간" 것은 노동 운동 자체가 백안시 되고 또한 순응하지 않는 노동자들은 자본주의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특권화된 자본가들의 요구가 정치사회적으로 관철된 결과물이라고 할 수 있을겁니다.

이러한 가운데 앞선 노동자들에 비해 상이한, 전통적으로 재산을 축적하지 않은 아예 새로운 계급의 출현이라고 볼 수 있는 "화이트칼라"에 대한 밀스의 인식은 일반 노동력을 제공하고 있는 다른 노동자들과 달리 이 화이트 칼라들은 꽤 체제에 녹아들었고, 자신들이 직업에 따라 계층화됨으로써 기존의 사회적 구성원들과는 다른 양상을 갖고 있다고 서술됩니다. 이것과는 별개로 논저 '화이트칼라'에 대한 밀스의 애정은 기어리를 통해서도 잘 드러나고 있기도 한데요. 전문 지식인들이 아니라 일반 대중들이 보기에도 난해하지 않는 글을 목표로 밀스의 이 "하이트칼라"는 쓰여지기도 했습니다. 저자인 기어리에 의하면, 이 '화이트칼라'와 법학자로 훈련받은 데이비드 리스먼의 '고독한 군중'이 유사한 맥락의 작품이면서, 당시 사회학 출판의 열풍을 이끈 논저로 소개되고 있기도 합니다. 다소 확대 해석을 해본다면, 이 화이트칼라의 출현은 자본주의화가 된 계급적 사회에서 뭔가 '부조리에 침묵하는 계층'으로 이해되기도 하지만 '상사의 권위', '회사의 위세' 등을 자신의 권위를 세우는데 몰입하는 어떻게 보면 자본주의적인 요소를 전부 보보여주고 있는 계층으로 판단될 수 있습니다. 1950~60년대를 아우르며 이러한 소위 특별한 계층의 출현은 이들이 밀스의 기대되로 직접 민주주의적인 지원군이 되거나 혹은 영악한 침묵의 근원이 될 수도 있었습니다. 노동 전반에 대한 깊은 환멸을 맛본 밀스가 화이트칼라 라는 이 논저에 많은 노력을 기울인 것은 사실이고 밀스가 결국 노동 계급이 없는 급진주의를 표명하는데 아마도 이 화이트칼라의 존재가 한몫했다고 여겨집니다. 물론 이들도 자본주의에 의한 인간 소외를 피할 수 없는 존재들이었고, 여기에 속한다고 할 수 있는 일반 지식인들조차도 이 체제에 있어선 약간 다른 맥락이기도 하지만 실로 '무기력한 사람들'이라는 배경에는 "자신의 생각이 중용한 차이를 만들어 낼 수 있다는 중대한 질병"을 갖고 있는 지식인들을 향한 비판을 포함한 것입니다. 일개 개인들에서 뿐만 아니라 설사 지식인의 범주에 들어가는 사람일지라도 자의식은 중요한 부분이기도 합니다. 밀스는 누구나 자의식을 항유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여긴 지식인이기도 한데요. 앞선, '명랑한 로봇'이라는 역설적인 명칭에 대비해서도 특히, 인간 소외라는 문제에서도 누구나 이성으로서 자신의 삶의 중심에서 자의식을 찾게 되는 것이 체제의 소모품이 되지 않는 유일한 길임은 과장된 해석이 아닐겁니다.


전후, 미국 사회의 지배 엘리트들을 분석한 '파워 엘리트'는 정치, 경제, 군사 엘리트들이 미국을 좌우하는 지배 계급으로 밀스는 보았는데요. 물론 밀스는 지배 계층, 지배 계급이라는 말을 좋아하지는 않았습니다만 어떻게 보면 파워 엘리트라는 표현은 미국 사회에 가장 잘 어울리는 것 같습니다. 이번장에서도 강조되고 있기도 합니다만, 전쟁 경제, 전쟁 특수라는 이익을 군사 엘리트들은 계속 지속하고 싶어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를 우리식으로 해석해보면 이들은 방산업체라고 할 수 있겠죠. 이미 아이젠하워가 퇴임시에 경고하기도 했습니다만, 아마도 미국 내부에서는 이러한 삼자의 결속이 이익을 매개로 강하게 이뤄졌던 것으로 판단됩니다. 특히, 막대한 군사비 지출과 미국의 전세계에 대한 영향력 유지라는 미명하에 정치 엘리트 뿐만 아니라 경제 엘리트들까지 군사 부문의 엘리트들에게 협력해왔던 것은 또 부정할 수가 없겠죠. 여기에 밀스가 지적했듯이, 장시 전체 인구의 0.2% 혹은 0.3%에 불과한 계층이 기업 주식 대부분을 보유하고 있다는 점은 이처럼 의미심장합니다. 미국의 자유 민주주의하에서 거의 과두제에 근접한 권력 집중이 냉전 시기에 이뤄졌고, 이는 현재 미국에서 결코 돌이킬 수 없는 수준에 이르고 말았습니다. 그런 연유로 밀스가 강조하는 '참여적인 직접 민주주의'가 왜 중요한지 깨달을 수가 있는데요. 여기서 권력의 근원적 속성부터 전반적인 문제 전반을 다룰 수는 없지만, 자유주의적 가치라고 볼 수 있는 다원주의가 미국에서 대다수가 원치않는 결과를 초래했고 더욱이 이 다원주의가 미국 정치내에서 영향력을 잃은 건 둘째치고라도 어떠한 자정 능력을 기대할 수 없는 것도 확실해 보입니다. 피상적인 수사로서야 이 다원주의를 미국의 토대라고 찬양할 수 있지만 금권 정치의 확대와 이익 정치가 성공적으로 실현됨으로써 마찬가지로 자원과 수단의 배타적 차별에 놓여 있는 시민 정치가 이를 현재의 밀실 정치와 다름없는 미국의 정치 상황을 타파하기란 어렵게 된 것이 현재의 상황 이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아마도 3장 즈음으로 기억하는데, 저자는 당시 정치를 빗대어 "극우와 극좌 중간쯤에 자유주의가 있다"고 언급하는데요. 이를 오늘날의 언어로 재해석한다면, 자유주의가 극우(일정 부분에서)에 가까운 보수주의와 결합했다고 봐도 무방해 보입니다. 사실상 밀스가 거의 서술적 측면에서 묘사했던 이 삼각 엘리트들은 현재의 상황에서 더욱더 이익으로 합일이 되었다고 보는 것이 설득력이 높습니다. 당시에서도 견고한 자유주의 개념을 반대하는 것은 지식으로서도 꽤 무리가 있던 것은 분명합니다. 다원주의의 실패를 논하는 지식인들이 지금에는 많이 늘었지만 과거 극명한 이데올로기의 시기에 그와 같은 양심을 내보이는 것은 어려운 부분이었죠. 그래서 평생 동안 주류와 거리를 둘 수밖에 없었던 것이 밀스의 삶이 아니었나 생각해 봅니다. 동류와 동류 의식이라는 부분에서도 한계를 명확히 인식하고 있는 상황을 저들이 잘 알고 있다고 하더라도 일견으로는 처지를 고려하지 않고 비판을 가하는 동종 업계의 인물이 있다는 것은 주류들에게는 상당히 불쾌하게 다가왔을 수도 있을겁니다.

끝으로, 밀스는 기존에 태동하기 시작한 미국 사회학에서 말끔하게 지냈던 인물은 단언코 아니었습니다. 62년에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한스 거스를 비롯해 그를 지지하는 학문적 동지들은 있었지만 지적으로 외로운 상황이었던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제가 기억하는 게 맞는지 모르겠지만 "양심과 행동을 일치시키는 사람은 외로울 수밖에 없다"는 말을 한 사람이 사르트르가 아닌가 싶은데요. 물론 저의 짐작이 아닐 수도 있지만 사실 저 문장의 설득력은 실로 그럴 수밖에 없을 것 같은 느낌을 자아내게 한다는 점입니다. 밀스의 저작들은 사회학에서의 이단아 취급을 받아 어떤 학자들은 극명하게 찬양하고 또 반대는 하품 나오는 수준 정도라고 폄하하기도 합니다. 뒤르켐식의 사회학에 익숙한 학자들은 주관적이고 자의식적인 논증을 크게 의미두지 않습니다. 물론 밀스가 위대한 사회학자였던 것은 제 기준에는 확실하고 그가 여느 사회학자들과는 달리 많은 통찰력을 갖고 있었다고 생각됩니다. 개인적으로는 리스먼의 고독한 군중을 손에 쥐어보고 다음에 파워 엘리트를 일독해보려고 합니다. 둘 다 상당한 분량이라 글을 쓰는 지금도 주저되는 마음이 한켠에서 솟기도 하는데요. 전반적으로 깔끔하게 읽었던 이 책의 느낌과 해석을 제대로 쓰지 못한 것 같아 양심에 찔리기도 하는데요. 어찌됐든 할말은 꼭 해야 직성이 풀렸던 이 위대한 사회학자의 일대기를 모두가 용기내어 접해 보시길 간절히 바랍니다.     


-지식인들이 왜곡된 권력에 저항하지 않고 오히려 이익을 찾아 추종한다는 것은 개인의 이익 추구가 무엇보다 중요한 시대에서조차 변명이 되지 못하는 일이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저들에게 거창한 소명 의식이나 책임 의식을 한 번 더 유념하라고 강조하고 싶지는 않지만 '권력에 부역하는 지식인'이 만연된 사회가 만인의 이익이라는 공익에 봉사할 수 있을지는 불명확하다고 여겨집니다. 이처럼 건전한 비판과 자정 능력을 상실한 민주주의가 어떻게 파멸에 이르게 될지는 지난 역사가 여실히 보여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시대 여러 사회학자들에게 밀스는 사회학의 한계에 맞서는 ‘반역‘의 상징이었다

밀스는 어떤 자율적인 학문 분야를 정하려는 충동이 제도적 고려 때문이고, 그것은 사회 연구를 위한 최선의 방법을 발전시키는 데 해롭다고 믿었다

밀스는 지식사회학의 가장 중요한 결과들이 방법론적인 것이라고 주장했다. 즉 사상을 사회적 맥락 속에서 고찰하는 것은 사회과학자들이 자신의 연구 방법과 목표를 반성할 수 있게 했다

인식론과 방법론의 다소 추상적인 철학적, 이론적 문제들을 추구하는 동안 흡수한 특정한 사회과학 전통들은 그를 급진주의자가 되도록 도았다

1942년 12월 <뉴리더>에 실린 밀스의 논문 <집산주의와 혼합경제>에서 미국 사회구조에서 전시의 경향에 관한 깊은 우려, 시대에 뒤처진 순진한 자유주의에 대한 비판, 권력과 사회구조에 관한 질문, 그리고 민주적 사회주의 대앙ㄴ에 대한 모호하지만 열정적 지지가 바로 그의 정치적 관점에 대한 특징을 보여주는 것이라 할만 했다

민간 기업을 위한 경제적 자유는 민주적 정치제도를 공고히 하는 데 도움을 준다는 체임벌린의 생각을 밀스는 날카롭게 비판했다

비록 그렇다 하더라도, 지식인들은 현대의 여러 경향에 저항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사회적 부류라고 밀스는 주장했다. 그들의 저항은, 권력을 쥐고 있는 자들의 이해관계를 섬기는 일반적인 개념의 정체를 폭로할 ‘진실의 정치‘라는 형태를 띠어야 했다

사회의 주류에서 내몰린 지식인들은 새롭게 출현하게 될 경제, 정치, 군사 엘리트가 지배하는 전후 질서에 대한 유일한 반대 세력이라고 밀스는 전시의 저술들에서 주장한 바 있다

밀스는 1950년대 전반기 대부분을 자신이 매우 좋아하는 주제들 가운데 하나, 즉 사회속에서 지식인의 적절한 역할을 심사숙고하며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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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교양 이론 (양장) - 지식사회의 오류들
콘라트 파울 리스만 지음, 라영균 외 옮김 / 한울(한울아카데미) / 201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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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트리아 빌라흐 출신의 콘라드 폴 리스만은 오스트리아에서 활동하는 철학자이자 문화이론가로 그는 모교인 비엔나 대학에서 오랫동안 윤리철학을 가르치기도 하였습니다. 또한, 오스트리아의 저명한 철학 심포지엄인 '필로소피쿰 레흐'의 학술 책임자를 맡았고 오스트리아에서 큰 존경을 받고 있는 역사가인 프리드리히 히어의 연구 재단의 책임자라도 활동을 하였습니다. 이 가운데 그는 2004년부터 2008년까지 비엔나 대학의 철학과 교육 과학의 연구 책임자로 재직하고, 2008년부터 2012년까지 동 대학의 교육 과학 학부의 부학장을 역임하기도 하였는데요. 뿐만 아니라 오스트리아 방송의 토론 패널로도 참여해 대중에게도 얼굴을 알린 지식인기도 합니다. 특히, 그는 대중 매체들을 통해 자신의 모국과 유럽 전반의 인문학 쇠퇴에 대해 수차례 경고를 하기도 하였습니다. 전통을 갖고 있는 유럽 대학의 소위 '미국화'에 대해 그는 날선 비판을 해왔으며, 대학이 시민의 교육 문제에 등한시하고 연구비를 위한 기업들의 연구소화가 되어가고 있는 현실을 우려깊게 바라보고 있는 인물로도 잘 알려져 있습니다. 사실 전세계에 광범위한 영향을 끼치고 있는 인문학 쇠퇴에 대해선 모두가 할말이 많겠지만 그는 이 글을 통해 가장 큰 주범으로 '신자유주의'를 꼽고 있었습니다. 이 부분과 관련된 문제는 다음에 이어지는 글을 통해 소개하도록 하겠습니다. 따라서 이 책은 원제, "Theorie Der Unbildung"으로 지난 2006년에 출간되었고 국내에는 2018년 12월 번역 출판되었습니다.

앞서, 살짝 언급했듯이 리스만은 이 글을 통해, 근래들어 들불처럼 일어나고 있는 '지식 정보 사회'의 진면목과 그에 따른 허상과 각 국가들의 중요한 교육을 책임져야만 하는 대학들이 어떻게 자본과 신자유주의에 의해 변질되어 왔는지를 밝히고 있습니다. 소위 지식 사회라는 것이 얼마나 허망한 문법인지에 대해 저자는 매우 단호하게 비판하고 있었는데요. 진정한 지식을 위한 학문적 토대를 찾아 볼 수 없는 작금의 유럽 현실에 대해, 역자의 해석이긴 하지만 '몰교양'이라는 단어로 빗대어, "정신의 실종 혹은 정신의 부정"으로 마찬가지로 규정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가운데 글의 3장에서는, 사실상 교양을 갖춘 시민 계급은 현재로선 사라졌다고 봐야 하며, 노골적인 자본의 재창출과 효율적인 생산을 위해 마치 적법한 공장의 노동자를 찍어내는 것과 오늘날의 허망한 지식 사회와도 맞닿아 있다고 강조하고 있었습니다. 물론 현재의 진정한 지식의 실종을 인문학의 부활로 해결해야 한다는 예측할만한 주장을 저자는 펼치고 있지는 않습니다. 다만, 진정한 지식의 추구 혹은 학문의 연구라는 것이 일차적으로는 개인의 끊임없는 성찰과 진지한 태도가 결여된 상태에서는 거의 불가능한 것이고, 오늘날의 범람하고 있는 수많은 오락 거리들과 시민들이 습득된 지식으로 사회를 통찰하고 분석하는 것을 바라지 않는 체제 지배적인 반대가 뒤를 따랐다고 볼 수 있겠는데요. 저자가 밝히고 있는 이와 같은 '지식의 쇠퇴'에 신자유주의가 배경이 되었던 것은 거의 확실해 보입니다. 여기서 굳이 자본주의적 효율성을 부각시키고 싶진 않지만, 자본과 기업의 논리에 의해 사회와 시민들이 지배당해 왔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이것을 어떤식으로 표현하느냐에 따라 여러가지 문장이 나올 수도 있겠지만 이에 대한 본질은 거의 오십보백보 일텐데요. 유럽이 지난 역사에서 인간을 해방시켰던 계몽주의를 꽃피우기도 했지만 역설적이게도 지독한 합리주의의 영향으로 말미암아 이 글 7장에서 논하는 바와 같이 "계몽 절대주의는 과학 지식의 혜택으로 국민을 행복하게 해주었지만 국민을 이 지식의 중심과 그 과정에서 멀어지게 했다"는 점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하겠습니다. 오늘날의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가 국민으로부터 지식을 소외시켰다는 음모론으로 국한시키려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자본주의 체제가 분명 각자의 시민들이 자본주의에에 성공적으로 부역하고 심지어 내면화하게 만드는 일련의 과정에서 '진정한 지식'을 이들로부터 멀어지게 된 것은 분명합니다. 체제에 지속적으로 순응하고 반항하지 않는 국민들을 길러내는 것이 어떻게 보면 자본주의적 체제 안정에 도움이 되었던 것도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특히, 저는 저자의 여러 나레이션 중에 지식의 진정한 쓰임새와 관련된 '세계에 대한 통찰 Durchdringung der Welt"에 크게 공감할 수밖에 없었는데요. 7장에서 이어지는 대학 내지는 사회가 마땅히 길러내야 하는 엘리트들에 대한 교육과 반대로 소외되어가고 있는 일반 시민들에 대한 리스만의 분석은 바로 언급한 이 세계에 대한 통찰이 어떻게 무력화 되고 있는 보여주는 현실이라고 생각됩니다. 즉, 사회를 움직이고 발전시키는 지식들을 '전문화'라는 이름으로 소수의 엘리트들에 집중시키고 다수의 시민들에게는 그저 일자리를 위한 교육만을 시키는 차별적인 행태가 과연 평범한 다른 사람들의 '진정한 인간의 삶'에 있어서 어떠한 긍정적인 기여를 하는지 지금으로선 도저히 이해하기 힘든 부분입니다. 전반적인 이러한 결과물이 의도하지 않은 형태로서, 우연하게 도출된 우민화(愚民化)인지 아니면 "세상을 통찰하고 진정한 삶의 의미를 자각한 시민들에 대한 우려스러운 시선"인지는 여기선 불명확하다는 식으로 갈음하겠습니다. 결국 앞선 의심을 차치하더라도 현재의 지식 사회라는 문법과 그물망처럼 연결되어 탄생한 인터넷 망에 의해 검증되지 않은 '너저분한 지식들'이 진리인 마냥 넘쳐나고 있는 것도 이러한 현상을 더욱 가속화 시키고 있다 생각됩니다.

이뿐만 아니라 저자는 진지하게 구현되지 않은 지식 산업이라는 미명이 산업사회 개념을 잠정적으로 해체하거나 대체하지 못했다고 판단하고 있었는데요. 무엇보다 구조적으로 이러한 지식 발전 매키니즘이나 디지털 혁명이 산업화 시대 생산양식의 근본 구조를 바꾸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검증되지 않은 소모적인 지식 범람이 사회에서 어떠한 혁명이 될 수 있다는 것은 크나큰 오류라고 볼 수 있고 설사 진정한 지식 산업 내지는 지식 정보 사회가 완벽하게 구현된다 하더라도 기존의 전통적인 산업 규모로서의 생산 자체를 완전하게 대체할 수 없는 것은 거의 확실합니다. 애초에 자본가들과 경제적인 측면에서 사회의 효율성을 강조하는 계층들의 이 '지식' 함의가 우리가 알고 있는 지식과는 매우 다른 단어이고, 그러한 구분이 명확하게 알려지지 않고 은폐되어 있는 상황에서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가 요구하는 지식만을 '정당한 지식'이라고 규정하고 그 외의 다른 학문과 지식들을 쓸모없는 것으로 치부되어 왔던 것이지금까지 이어져 왔습니다. 저자는 이 부분을 명확히 이해하고 있었으며, 단순히 '인문학의 부활'로는 현실을 타파할 수 없는 것이죠. 그래서 교육 받는 시민을 길러내는 현재 대학의 위기, 특히 유럽 대학의 거대한 자본주의화로 판단할 수 있는 '볼로냐 프로그램'에 저자가 대학 관계자로서 이를 비판하고 있는 것도 설득력을 갖고 있습니다. 연구 성과급 체계의 유럽 대학의 미국식 프로그램인 이 볼로냐 프로그램은 소위 인문학의 요람이라고 할 수 있는 유럽의 여러 저명한 대학들을 위기에 몰아넣었고 미국 대학 시스템과는 다른 전통적이고 학문지향적인 유럽의 대학 토대를 뒤흔든 사건으로도 유명한데요. 자본과 기업이 대학에 일일이 스며들어 그들이 주장하는 '이데올로기적 봉사'를 돈을 통해 요구하는 것을 차치하더라도 학문 연구라는 대학들의 고유한 영역을 연구비라는 명목으로 줄을 세우는 것은 사실상 건강한 사회 체제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행위라 할 수 있겠습니다. 이쯤에서 우리 시민들이 이러한 노골적인 자본주의화가 주입된 대학 교육을 원했느냐고 질문을 던져 본다면 차마 입으로는 말을 못할수도 있겠지만 속으로는 대부분 아니라고 답할 것입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현재의 연구비에 따른 대학의 서열화가 그것에 완전히 소외된 인문학의 현실이 바로 저자가 답하는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가 요구하는 지식 사회 그리고 대학의 서열화 및 비즈니스 계열을 제외한 다른 순수 학문들의 소외가 결국 현재 우리가 맞이한 학문의 위기로 점철되어 왔던 것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우리의 자본주의는 시민들의 효율적인 소비와 공정한 경쟁이라는 미명하에 모든 사회체제에 이러한 논리를 주입시켜 왔습니다. 경제학과 사회학을 분리해야 하는 것이냐, 아니냐에 각자 논박에 뛰어드는 사람들도 있을테지만 여기서 분명한 점은 경제 전반이 자신들의 주장에 반론을 세우는 것을 탐탁치 않아 했고, 그들 스스로 고립된 전문주의로 말미암아 정작 필요한 사회와의 소통이 전혀 이뤄지지 않았다는 것이 단순히 지식 사회 물음에서 뿐만 아니라 '지식은 긴밀히 소통해야 한다'는 저 자본주의자들과 그를 신봉하는 지식인들의 이중성을 낱낱이 보여주는 사례이기도 한데요. 경제적인 측면을 고려하지 않더라도 사회가 일정한 수의 엘리트들을 배출해야 한다는 저자의 함의에 저 역시 동의합니다. 다만, 소수의 지식을 처리하는 데 있어 엘리트가 유리하다는 관점에는 동의하지 않으며, 역사적으로 프랭클린 루스벨트의 내각의 비엘리트 관료들이 순조롭게 대공황을 이겨낸 것으로 보더라도 평범한 사람들에게도 충분히 기회가 있어야만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대학의 재조정과 시민 교육이라는 본래의 의미를 망각하지 않고 말장난에 불과한 '지식 사회' 놀음을 냉정하게 중단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자가 이 글을 통해 이와 같은 '몰교양'이라는 시대적 책임이 과연 누구에게 있는가에 대해 명확한 결론을 내리고 있습니다만 그동안 우리는, 우리의 책임이 없는 것에도 무조건 '너희들의 책임'이라는 익히 알만한 사람들의 주장을 들으며 살아왔습니다. 저자들의 터무니 없는 말을 불식시키기 위해서라도 모두가 진정으로 '세계를 통찰'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됩니다. 아마도 모두가 이에 동의하시겠죠.


-자리를 빌어 알라딘에 대해 쓴소리를 해야겠는데요. 저는 얼마전에 이 책을 알라딘 중고서점에서 구입을 하게 되었습니다. 계산을 하고 유유히 집에 와서 확인을 해보니, 또 앞장에 "증정 한울"이라는 사각형 형태의 도장이 찍혀 있네요. 아니 대체, 증정품을 왜 매입해서 저와 같은 애꿎은 독자에게 되파는 겁니까? 검수 좀 제대로 할 수 없는 건가요. 물론 구입시 확인을 제대로 안한 일차적 책임이 저에게도 있다는 점은 인정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몰교양‘이란 단순히 지식이 없는 무식함이나 특정한 형태의 반문명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지식을 철저하게 교양 이념과 분리해놓고 대하는 것을 말한다

아도르노는 한때 스피노자의 ‘윤리학‘에서 진정한 교양이 무엇인지 논증해보려고 시도한 적이 있다. 그가 보기에 중요한 것은 그 책을 읽고 지식을 쌓는 것만이 아니라 데카르트 학파의 철학과 그 철학의 체계적, 역사적 맥락을 파악하는 것이었다

어디서, 어떻게 지식을 ‘소환‘할 수 있는지 알고 있더하도 그것은 늘 피상적으로만 아는 사전적인 지식에 불과하다

지식사회가 모든 인식의 목표에, 진리 혹은 적어도 그와 연관된 분별에 도달할 수 없게 만든다는 것, 그것이 바로 지식사회의 역설이다

지식이 쓸모가 있는지는 결코 지식의 문제가 아니라 인간이 처한 상황의 문제이다

빌헬름 폰 훔볼트의 말처럼 인문학은 공부하는 사람의 ‘고독과 자유 Einsamkeit und Freiheit‘를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전혀 다른 원칙을 따르기 때문이다

어떤 의미에서 보면, 지식의 산업화를 이제는 사회의 마지막 피난처로 파악한 보편적인 과정을 따르는 방식으로 이해할 수 있다

새로운 지식 엘리트들을 위한 특별 프로그램을 제외하고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 또 있는데 사람들을 노동과정에 적합하게 만들고 오락산업에나 어울리는 정서를 갖게 하는 부질없는 ‘단편 지식 Stickwerkwissen‘이 바로 그것이다

‘궁극적인 목적의 관점에서 보면‘인식하는 인간의 사유는 항상 ‘자기 자신을 이해하려는 인간 정신의 노력‘이며 인간의 행동은 ‘자기 안에서 자유롭고 독립적인 존재가 되려는‘의지의 노력이다

기업 친화적인 대학들이 우후죽순처럼 확산되는 현상을 보면 한때 대학다움을 갖추고 있던 기관들이 이제는 모두 허울만 대학 이름을 걸치고 있을 뿐이라는 사실이 명백하다

계몽 절대주의는 과학 지식의 혜택으로 국민을 행복하게 해주었지만 국민을 이 지식의 중심과 그 과정에서 멀어지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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