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 라이트 밀스 - 실천적 지식인과 사회학적 상상력
데니얼 기어리 지음, 정연복 옮김 / 삼천리 / 201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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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쓴 대니얼 기어리는 미국 태생으로 현재 아일랜드 더블린에 소재한 더블린 트리니티 칼리지의 마크 피고트 부교수로서 일하고 있습니다. 그에게는 일종의 사회 비평서이자 연구 평전이라 할 수 있는 이 글이 최초의 논저이기도 한데요. 그는 특히 '극단주의 정치'를 신랄하게 비판하고 동시에 좌파 이념과 그에 따른 정치 이론 등을 연구하고 있기도 합니다. 책을 읽기 전에 그의 이력을 알지 못했을 때는 유럽인의 시각치고는 라이트 밀스를 치밀히 분석했구나 싶었는데 그건 저의 착각이었습니다. 그와 같은 역사학자가 본 라이트 밀스에 대한 학문적 구도가 많이 신박하다고 느꼈는데요. 밀스의 주요 논저들을 분석하는 동시에 사회적 맥락과 밀스가 걸어온 길을 독자들이 되짚어 볼 수 있다는 부분과 사회학자의 진지한 삶과 그의 논저를 입체적으로 살펴볼 수 있다는 점에서 기어리의 이 책은 충분히 일독할만 하다 여겨졌습니다. 다만, 국내에서는 그동안 라이트 밀스를 너무나 왜곡해 왔기 때문에 얼마간 밀스를 읽어 보지 못한 일반 독자들은 그를 단순히 '좌파 지식인' 정도로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됩니다. 물론 이는 한국만의 문제가 아니고 미국도 1949년 전후로 이러한 폭거(?)를 몸소 체험하기도 했습니다. 따라서, 이 책은 원제 "Radical Ambition : C. Wright Mills, and American Social Thoughts"로 2009년에 출간되었고, 국내에는 2016년 8월 번역 출판되었습니다. 다만, 국역된 책 제목과 관련해, 원제를 충실히 번역하지 않은 이유에 대해선 책 판매고를 위해 출판사가 그런 결정을 한 것기도 한데요. 아무래도 '급진주의'에 대한 약간의 자기 검열 기제가 발동한 듯 싶은데 이유야 어쨌든 간에 이 부분은 독자의 입장에서 아쉬울 따릅니다.

이 글에서 주요하게 분석될 수밖에 없는 찰스 라이트 밀스에 대해, 개인적으로 처음 그를 인식하게 된 계기는 꽤 괴랄한 번역으로 알려진 '사회학적 상상력' 이었습니다. 지금이야 판이 바뀌었지만 저의 서가에는 기린판이 몇권이나 꽂혀 있기도 한데요. 왜냐하면 처음에는 번역을 믿을 수가 없어서 제가 구입한 판이 뭔가 잘못된 것인줄 알고 과거 헌책방에서 여러권을 구해 읽었기 때문입니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서, 기어리는 라이트 밀스가 1940년대 후반까지 의미있는 자생을 하고 있던 기존의 '미국 좌파'와 약간 상이한 지식인으로 이해되고 있는데요. 특히, 그가 노동주의 운동에 있어서 상당한 좌절을 맛보았음에도 굴하지 않고 더욱 신념화한 '사상적 급진주의'를 봤을 때, 적지않은 존경심을 느끼기도 했습니다. 이와 같이 저자가 소개하고 있는 밀스의 여러 사상적 통찰들 가운데 개인적으로는 파워 엘리트에 논하고 있는 5장에서, 정치적 다원주의라는 자유주의 개념에 반해 밀스가 직접적인 참여 민주주의를 원했다는 것과 1940년대 이후로 미국의 정치를 지배하기 시작한 것이 경제라는 것과 더불어 본격적으로 미국 사회가 기업 지배 이데올로기에 물들어 갔다는 밀스의 예측에서 절로 오늘날 전세계 여러 사회의 모습과 오버랩이 되기도 하였습니다. 또한, 밀스는 후기 자본주의 이론가들의 자본주에 대한 예측에 회의적인 시각을 갖고 있을 뿐만 아니라 당시의 노동자 정치 및 노동 계급의 권력화가 세련된 보수주의에 의해 무력화 되고 난 후, 자본주의가 어떤 식으로든 시민을 '소외 상태'에 빠트릴 것이라고 예견했던 것 같습니다. 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파워 엘리트에서 기어리가 논평하고 있는대로 그것의 명칭이 지배 계급이든 파워 엘리트든 간에 "지배층이 일반 다수의 시민들을 현재의 시스템이 만족할만한 체제로서 이들을 순응시키기 위한 여러 잠재된 요인들"을 밀스가 간과하고 있었다 것이 분명하다는 저자에 논증에 대해 아쉬움을 느낄 수밖에 없었습니다. 기어리의 말대로 1949년 전후로 광풍으로 몰아친 '매카시즘'이 미국의 진보 좌파 운동을 사실상 궤멸시켜, 그 부분에 대해 적잖은 충격을 받은 밀스가 스스로 창의적으로 작명했던 '파워 엘리트들'의 노골적인 기업 지배 이데올로기를 세뇌시키기 위한 작업을 미리 인지하지 못했다는 것은 그것을 학문적 한계로 받아들일 필요는 없지만 이후 그의 사상이 약간 경직된 부분으로 나타난 것이 아닌가 추측해 보게 되었습니다.

밀스의 생애 초반 행적들이 이후 그의 사상적 기초가 되었다고 강조하는 기어리는 존 듀이를 비롯한 미국 프래그머티즘과 당시 미국 학계의 주류였던 시카고 사회학파의 영향을 밀스가 적잖이 받았다고 언급되고 있습니다. 더욱이 저자는 존 듀이와 비교해 더 왼쪽의 인물이라고 그를 평가하고 있었는데요. 밀스에게 한때 중요한 의미였던 노동과 관련해, 미국 내의 '지성과 권력의 합일'이라는 거대한 과업에 몰입했던 밀스가 노동계에 대해 좌절을 맛보기 전까지 그는 급진주의와 정치 발전에 희망을 노동 운동에서 엿보고 있었습니다. 지금도 그렇지만 지식인들이 노동 운동의 필요성과 그러한 정치적 맥락에 발을 담그게 되면 흔히 '좌파 지식인'이라는 낙인을 받게 마련입니다. 밀스는 스스로를 좌파 지식이라고 규정받는 것보다 스스로 급진주의를 사명으로 인식하고 있던 지식인이자 학자였던 인물이기도 한데요. 이러한 연유에는 지식 사회학에 대한 그의 헌신을 비롯, 급진주의 정치에 빠져들 수밖에 없었던 그의 사상적 연원이 있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가 청년기에 시카고 학파에 사회학적인 영향을 받았음에도, 급진주의와 주류 사회학에서 멀찌감치 떨어져 있었던 인물이라는 점에선 사회학계의 이단아라고 할 수 있을겁니다. 특히, 이뿐만 아니라 밀스는 당시 사회상에서 지식인들에 대한 선명한 요구라고 할 수 있는 "점점 더 뚜렷하게 도덕주의 방향으로 나아가는 사회속에서 올바름을 강조하고 비판적 지식인의 역할을 강조하는 한편, 기존 질서를 지지하거나 당면한 긴급 사안들에서 뒤로 한발 물러서는 지식인을 비난"하기도 하였습니다. 이와 관련해 5장인 파워 엘리트에서는 '진실을 폭로하는' 정치를 강조하면서, 지식인들이 이러한 진실 폭로에 나서서 그에 따른 토론에 참여하지 않게 되는 것은 사회에 대한 의무를 망각하는 것으로도 비판하고 있었습니다. 이와 같은 진실된 정치를 향한 그의 사명은 아마도 급진주의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는 것으로 보이는데요. 밀스의 초기 관심사가 "좀 더 정의롭고 합리적인 사회를 위해 사회학에 깊이 뿌리박고 있는 이성을 사용하는 데 있었다"는 점에서 그가 이해하고 있는 급진주의는 사회 구성원들에 대한 정의와 진정한 합리주의에 대한 고민이 담겨있다고 여겨졌습니다. 물론 당시의 사회적 맥락에서도 '시민들을 위한 정의'가 체제를 뒤흔들 수있는 급진적인 문제로 여겨진다는 것은 안타까운 부분이기도 합니다. 여기에 저자인 기어리는 일관된 맥락으로 기업의 자신들의 이데올로기 주입되거나 사회 전반의 기업 지배 이데올로기의 강조가 어떻게 보면 평범한 자본주의로서의 이행이 아니라 일부에 의한 특권을 강조하는 것으로 왜곡되었다는 인식으로 받아들여지기도 합니다. 이후 벌어지는 1950년대가 거대한 이데올로기의 시대였지만 저변의 인사들이 경제에 국한된 지점에는 이데올로기 따위는 없다는 주장들이 얼마나 허무맹랑한 것인지 비로소 이해할 수 있는데요. 훗날 신자유주의의 태동이 이러한 맥락 가운데 있었으며, 밀스가 일찍이 경고했던 '이성을 빼앗긴 정치'가 경제의 지배를 받게된 오늘날의 변화된 상황에도 이를 충분히 대입할 만하다고 여겨집니다.

당시 사회학에서의 처녀지였던 미국이 막스 베버의 번역된 저작들을 통해 새롭게 나아갈 수 있었다고 여겨지는데요. 제2차 세계대전에서의 루즈벨트와 스탈린의 전폭적인 협력을 차치하더라도 1949년전까지는 미국 사회에서 사회주의 사상에 대한 극명한 배격은 없었던 것으로 여겨집니다. 물론 유수의 자본가들은 그렇지가 않았죠. 특히, 4장에서는 "사회주의자라면 자신들의 목표가 물질적 풍요가 아니라 소외되지 않은 인간, 즉 일과 사랑으로 충만한 인간을 낳을 수 있는 사회구조를 창출하는 것임을 떠올릴 필요가 있었다"고 언급되는데요. 앞선 기업 지배 이데올로기가 많은 노동자들과 시민들을 자신들의 이익에 순응하게 하는 순응주의 conformity에 물들게 하고, 결과론적으로 '명랑한 로봇'과 같은 '명랑하고 온순한 자본주의적 인간'으로 그들의 재탄생시키기 위한 정치적 의도들이 자본주의적 발전이라는 미명하게 감행되었던 것은 결코 부정할 수 없을겁니다. 여기에는 조지 오웰식의 디스토피아를 경고했던 발언들이 상당했던 것도 사실입니다. 이러한 논증을 강조하기 위해 쓰여진 문장은 아니었지만 "자본가 계급 및 자본을 보유한 계층이 무엇보다 사회의 안전"을 바란다는 것은 이토록 의미심장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다수 시민들의 안전을 위해 국가가 노력해야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부분입니다만 견고한 자유주의적 기초하에 설립된 미국이라는 연방 국가가 언제든 혁명에 이르는 길로 귀결될 수 있다고 보는 것은 너무 터무니 없는 시각이라고 생각됩니다. 이처럼 미국이라는 국가의 자유주의적 토대는 너무나 거대하고 본질적으로 강건한 것임에도 반대편에서 건전한 비판을 수행할 수 있는 태생적 좌파들의 몰락을 급격하게 불러 일으킨 냉전의 대결은 프랜시스 후쿠야마가 그토록 찬양한 자유주의적 승리가 아니라 모두의 고통을 초래하게 된 신자유주의적 확대로 이어졌다고 봐야할 것 같습니다.

다시 3장에서 논하고 있는 밀스의 사회학에 대한 진정한 의미에서도 개인적으로 대단히 고마운 마음이 들었습니다. 사회학 본연의 가치가 현대 사회의 발전에 충분히 기여하고 있다는 그의 해석이나 앞으로 사회과학이 "일반적이고 도덕적인 반성에서 더욱 중심"에 서게 될 것이라고 예견했던 밀스의 주장에 더욱 공감과 함께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는데요. 현재의 사회과학이 과연 도덕적인 성찰에 있어서 어느 정도의 지표를 갖고 있는지는 불확실하지만, 한가지 확살한 것은 시민들에게 맹목적인 충성을 강요하는 자본주의를 견제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자 무기임은 분명합니다. 물론 여기에 전제되어야 할 기본 요소는 쥘리앙 방다 뿐만 아니라 밀스도 강조했던 지식인들의 그 귀중한 책무와 사회학이 단순하게 검증된 증거학으로만 소모되지 않고 다시금 강조하는 밀스의 의견대로 합리적 이성을 발휘할 수 있어야만 하겠습니다. 다른 인문학들과는 달리 사회학은 우리의 현실 사회와도 밀접히 관련되어 있고, 현재로선 경제 지배에 대한 함의가 사회 곳곳에 뿌리 내리고 있는 현실을 개선시킬 수 있는 담론을 제공할 유일한 학문이기도 합니다. 물론 앞선 사회학이 노동자들과 노동 운동과 긍정적으로 합치되지 않고 극단적으로 분리됨으로써 벌어진 저자가 언급하는 '세련된 보수주의'의 출현과 굳이 당시의 아이젠하워식 특단이 아니었더라도 이미 미국의 노동 운동 자체가 힘을 잃은지 오래되었다고 봐야할텐데요. "급격한 비대칭적인 권력으로서의 자본주의화에 대한 압력과 중간 계급의 분노를 복지와 좌파의 무능으로 몰아간" 것은 노동 운동 자체가 백안시 되고 또한 순응하지 않는 노동자들은 자본주의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특권화된 자본가들의 요구가 정치사회적으로 관철된 결과물이라고 할 수 있을겁니다.

이러한 가운데 앞선 노동자들에 비해 상이한, 전통적으로 재산을 축적하지 않은 아예 새로운 계급의 출현이라고 볼 수 있는 "화이트칼라"에 대한 밀스의 인식은 일반 노동력을 제공하고 있는 다른 노동자들과 달리 이 화이트 칼라들은 꽤 체제에 녹아들었고, 자신들이 직업에 따라 계층화됨으로써 기존의 사회적 구성원들과는 다른 양상을 갖고 있다고 서술됩니다. 이것과는 별개로 논저 '화이트칼라'에 대한 밀스의 애정은 기어리를 통해서도 잘 드러나고 있기도 한데요. 전문 지식인들이 아니라 일반 대중들이 보기에도 난해하지 않는 글을 목표로 밀스의 이 "하이트칼라"는 쓰여지기도 했습니다. 저자인 기어리에 의하면, 이 '화이트칼라'와 법학자로 훈련받은 데이비드 리스먼의 '고독한 군중'이 유사한 맥락의 작품이면서, 당시 사회학 출판의 열풍을 이끈 논저로 소개되고 있기도 합니다. 다소 확대 해석을 해본다면, 이 화이트칼라의 출현은 자본주의화가 된 계급적 사회에서 뭔가 '부조리에 침묵하는 계층'으로 이해되기도 하지만 '상사의 권위', '회사의 위세' 등을 자신의 권위를 세우는데 몰입하는 어떻게 보면 자본주의적인 요소를 전부 보보여주고 있는 계층으로 판단될 수 있습니다. 1950~60년대를 아우르며 이러한 소위 특별한 계층의 출현은 이들이 밀스의 기대되로 직접 민주주의적인 지원군이 되거나 혹은 영악한 침묵의 근원이 될 수도 있었습니다. 노동 전반에 대한 깊은 환멸을 맛본 밀스가 화이트칼라 라는 이 논저에 많은 노력을 기울인 것은 사실이고 밀스가 결국 노동 계급이 없는 급진주의를 표명하는데 아마도 이 화이트칼라의 존재가 한몫했다고 여겨집니다. 물론 이들도 자본주의에 의한 인간 소외를 피할 수 없는 존재들이었고, 여기에 속한다고 할 수 있는 일반 지식인들조차도 이 체제에 있어선 약간 다른 맥락이기도 하지만 실로 '무기력한 사람들'이라는 배경에는 "자신의 생각이 중용한 차이를 만들어 낼 수 있다는 중대한 질병"을 갖고 있는 지식인들을 향한 비판을 포함한 것입니다. 일개 개인들에서 뿐만 아니라 설사 지식인의 범주에 들어가는 사람일지라도 자의식은 중요한 부분이기도 합니다. 밀스는 누구나 자의식을 항유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여긴 지식인이기도 한데요. 앞선, '명랑한 로봇'이라는 역설적인 명칭에 대비해서도 특히, 인간 소외라는 문제에서도 누구나 이성으로서 자신의 삶의 중심에서 자의식을 찾게 되는 것이 체제의 소모품이 되지 않는 유일한 길임은 과장된 해석이 아닐겁니다.


전후, 미국 사회의 지배 엘리트들을 분석한 '파워 엘리트'는 정치, 경제, 군사 엘리트들이 미국을 좌우하는 지배 계급으로 밀스는 보았는데요. 물론 밀스는 지배 계층, 지배 계급이라는 말을 좋아하지는 않았습니다만 어떻게 보면 파워 엘리트라는 표현은 미국 사회에 가장 잘 어울리는 것 같습니다. 이번장에서도 강조되고 있기도 합니다만, 전쟁 경제, 전쟁 특수라는 이익을 군사 엘리트들은 계속 지속하고 싶어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를 우리식으로 해석해보면 이들은 방산업체라고 할 수 있겠죠. 이미 아이젠하워가 퇴임시에 경고하기도 했습니다만, 아마도 미국 내부에서는 이러한 삼자의 결속이 이익을 매개로 강하게 이뤄졌던 것으로 판단됩니다. 특히, 막대한 군사비 지출과 미국의 전세계에 대한 영향력 유지라는 미명하에 정치 엘리트 뿐만 아니라 경제 엘리트들까지 군사 부문의 엘리트들에게 협력해왔던 것은 또 부정할 수가 없겠죠. 여기에 밀스가 지적했듯이, 장시 전체 인구의 0.2% 혹은 0.3%에 불과한 계층이 기업 주식 대부분을 보유하고 있다는 점은 이처럼 의미심장합니다. 미국의 자유 민주주의하에서 거의 과두제에 근접한 권력 집중이 냉전 시기에 이뤄졌고, 이는 현재 미국에서 결코 돌이킬 수 없는 수준에 이르고 말았습니다. 그런 연유로 밀스가 강조하는 '참여적인 직접 민주주의'가 왜 중요한지 깨달을 수가 있는데요. 여기서 권력의 근원적 속성부터 전반적인 문제 전반을 다룰 수는 없지만, 자유주의적 가치라고 볼 수 있는 다원주의가 미국에서 대다수가 원치않는 결과를 초래했고 더욱이 이 다원주의가 미국 정치내에서 영향력을 잃은 건 둘째치고라도 어떠한 자정 능력을 기대할 수 없는 것도 확실해 보입니다. 피상적인 수사로서야 이 다원주의를 미국의 토대라고 찬양할 수 있지만 금권 정치의 확대와 이익 정치가 성공적으로 실현됨으로써 마찬가지로 자원과 수단의 배타적 차별에 놓여 있는 시민 정치가 이를 현재의 밀실 정치와 다름없는 미국의 정치 상황을 타파하기란 어렵게 된 것이 현재의 상황 이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아마도 3장 즈음으로 기억하는데, 저자는 당시 정치를 빗대어 "극우와 극좌 중간쯤에 자유주의가 있다"고 언급하는데요. 이를 오늘날의 언어로 재해석한다면, 자유주의가 극우(일정 부분에서)에 가까운 보수주의와 결합했다고 봐도 무방해 보입니다. 사실상 밀스가 거의 서술적 측면에서 묘사했던 이 삼각 엘리트들은 현재의 상황에서 더욱더 이익으로 합일이 되었다고 보는 것이 설득력이 높습니다. 당시에서도 견고한 자유주의 개념을 반대하는 것은 지식으로서도 꽤 무리가 있던 것은 분명합니다. 다원주의의 실패를 논하는 지식인들이 지금에는 많이 늘었지만 과거 극명한 이데올로기의 시기에 그와 같은 양심을 내보이는 것은 어려운 부분이었죠. 그래서 평생 동안 주류와 거리를 둘 수밖에 없었던 것이 밀스의 삶이 아니었나 생각해 봅니다. 동류와 동류 의식이라는 부분에서도 한계를 명확히 인식하고 있는 상황을 저들이 잘 알고 있다고 하더라도 일견으로는 처지를 고려하지 않고 비판을 가하는 동종 업계의 인물이 있다는 것은 주류들에게는 상당히 불쾌하게 다가왔을 수도 있을겁니다.

끝으로, 밀스는 기존에 태동하기 시작한 미국 사회학에서 말끔하게 지냈던 인물은 단언코 아니었습니다. 62년에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한스 거스를 비롯해 그를 지지하는 학문적 동지들은 있었지만 지적으로 외로운 상황이었던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제가 기억하는 게 맞는지 모르겠지만 "양심과 행동을 일치시키는 사람은 외로울 수밖에 없다"는 말을 한 사람이 사르트르가 아닌가 싶은데요. 물론 저의 짐작이 아닐 수도 있지만 사실 저 문장의 설득력은 실로 그럴 수밖에 없을 것 같은 느낌을 자아내게 한다는 점입니다. 밀스의 저작들은 사회학에서의 이단아 취급을 받아 어떤 학자들은 극명하게 찬양하고 또 반대는 하품 나오는 수준 정도라고 폄하하기도 합니다. 뒤르켐식의 사회학에 익숙한 학자들은 주관적이고 자의식적인 논증을 크게 의미두지 않습니다. 물론 밀스가 위대한 사회학자였던 것은 제 기준에는 확실하고 그가 여느 사회학자들과는 달리 많은 통찰력을 갖고 있었다고 생각됩니다. 개인적으로는 리스먼의 고독한 군중을 손에 쥐어보고 다음에 파워 엘리트를 일독해보려고 합니다. 둘 다 상당한 분량이라 글을 쓰는 지금도 주저되는 마음이 한켠에서 솟기도 하는데요. 전반적으로 깔끔하게 읽었던 이 책의 느낌과 해석을 제대로 쓰지 못한 것 같아 양심에 찔리기도 하는데요. 어찌됐든 할말은 꼭 해야 직성이 풀렸던 이 위대한 사회학자의 일대기를 모두가 용기내어 접해 보시길 간절히 바랍니다.     


-지식인들이 왜곡된 권력에 저항하지 않고 오히려 이익을 찾아 추종한다는 것은 개인의 이익 추구가 무엇보다 중요한 시대에서조차 변명이 되지 못하는 일이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저들에게 거창한 소명 의식이나 책임 의식을 한 번 더 유념하라고 강조하고 싶지는 않지만 '권력에 부역하는 지식인'이 만연된 사회가 만인의 이익이라는 공익에 봉사할 수 있을지는 불명확하다고 여겨집니다. 이처럼 건전한 비판과 자정 능력을 상실한 민주주의가 어떻게 파멸에 이르게 될지는 지난 역사가 여실히 보여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시대 여러 사회학자들에게 밀스는 사회학의 한계에 맞서는 ‘반역‘의 상징이었다

밀스는 어떤 자율적인 학문 분야를 정하려는 충동이 제도적 고려 때문이고, 그것은 사회 연구를 위한 최선의 방법을 발전시키는 데 해롭다고 믿었다

밀스는 지식사회학의 가장 중요한 결과들이 방법론적인 것이라고 주장했다. 즉 사상을 사회적 맥락 속에서 고찰하는 것은 사회과학자들이 자신의 연구 방법과 목표를 반성할 수 있게 했다

인식론과 방법론의 다소 추상적인 철학적, 이론적 문제들을 추구하는 동안 흡수한 특정한 사회과학 전통들은 그를 급진주의자가 되도록 도았다

1942년 12월 <뉴리더>에 실린 밀스의 논문 <집산주의와 혼합경제>에서 미국 사회구조에서 전시의 경향에 관한 깊은 우려, 시대에 뒤처진 순진한 자유주의에 대한 비판, 권력과 사회구조에 관한 질문, 그리고 민주적 사회주의 대앙ㄴ에 대한 모호하지만 열정적 지지가 바로 그의 정치적 관점에 대한 특징을 보여주는 것이라 할만 했다

민간 기업을 위한 경제적 자유는 민주적 정치제도를 공고히 하는 데 도움을 준다는 체임벌린의 생각을 밀스는 날카롭게 비판했다

비록 그렇다 하더라도, 지식인들은 현대의 여러 경향에 저항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사회적 부류라고 밀스는 주장했다. 그들의 저항은, 권력을 쥐고 있는 자들의 이해관계를 섬기는 일반적인 개념의 정체를 폭로할 ‘진실의 정치‘라는 형태를 띠어야 했다

사회의 주류에서 내몰린 지식인들은 새롭게 출현하게 될 경제, 정치, 군사 엘리트가 지배하는 전후 질서에 대한 유일한 반대 세력이라고 밀스는 전시의 저술들에서 주장한 바 있다

밀스는 1950년대 전반기 대부분을 자신이 매우 좋아하는 주제들 가운데 하나, 즉 사회속에서 지식인의 적절한 역할을 심사숙고하며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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