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를 위한 정치 - 분열과 증오의 시대, 한나 아렌트와 함께하는 민주주의 수업
네드 오거먼 지음, 김창한 옮김 / 마농지 / 202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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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드 오고먼은 현재 일리노이 대학의 커뮤니케이션학과 교수로 수사학, 미디어 연구, 정치 문화의 역사와 관련한 글과 강의를 병행하고 있습니다. 그는 테네시 대학을 거쳐, 펜실베니아 주립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했는데요. 이 시기에 그는 콘래드 아데나워 재단에서 관여하는 '콘래드 인문학 장학생'으로 박사 학위 취득 지원을 받기도 했습니다. 어떤 인터뷰에서 드러나듯 오고먼은 수사학에 대해 특별한 관심을 갖게 되었고 이것이 그의 학문적 방향을 좌우하게 된 원인이 되었습니다. 스스로를 '인본주의자'로 칭하는 그는 케네디 암살 이후의 미국의 정치 경제에 관한 글을 쓰기도 했고, 마찬가지로 냉전에 있어 미국 안보 전략의 경쟁적 함의를 다룬 책을 출판하기도 했습니다. 최근에 그는 현재의 미국 정치가 바로 '자유주의의 위기'를 드러내고 있다고 판단하고 이에 관한 문제에 집중하고 있는데요. 이에 학자로서 뿐만 아니라, 방송 활동과 팟캐스트 등을 통해, 일반 시민들을 향한 정치학 소개와 역사 담론에 대해서도 학문적 저변을 넓히기 위해 노력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따라서 그의 이 책은 원제, "Politics For Everybody"로 지난 2020년에 출간되었고, 국내에는 2025년 4월, 번역 출판되었습니다.

오거먼의 이 책은 20세기를 거치는 동안 그 누구보다 민주주의자였던 한나 아렌트의 정치적 사상을 살펴보고, 현재 우리 정치가 자유' 및 '자유주의'의 위협에 직면해 있으며, 이 '자유'와 '정치'의 위기를 어떻게 우리가 개선시킬 수 있을지를 모색해 보고 있습니다. 특히 저자는 이 글의 후반부인 6장에서, 한나 아렌트를 인용하며, "자유와 정치는 동일하다"고 그 선명성을 강조하기에 이르는데요. 또한 "인간의 자유는 오직 정치적으로 그리고 궁극적으로 민주적으로 실현될 수 있다"는 점도 마찬가지로 주목하고 있었습니다. 이미 보수주의자든 진보주의자든 이들 모두가 생각하는 '자유'가 알파이자 오메가임을 오랫동안 인정해 왔고 우리가 왜 지금이라도 현실 정치에 신경을 써야만 하는지에 대한 명확한 대답이 바로 이 지점에 근거한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자유와 평등은 공짜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는 옛 우화의 실제적 요점은 지금을 사는 우리에게도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고 볼 수 있겠는데요. 이 글의 초반부 논증에서 저자인 오거먼이 피력하는 바와 같이 현재의 왜곡된 미디어의 범람 속에서 '정치의 중요한 축'이라고 여겨지는 시민들이 주먹구구식 사고와 편협한 인식으로 매몰되어 각자가 받아들이는 정치의 기본 인식이 어쩌면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탈정치적인 형태에 가까워졌다고 생각됩니다. 이는 그저 시민들의 역량 문제가 아니라 미디어가 자본주의 사회에서 독점적 자본과 특정한 정치 권력에 예속된 상황하에 벌어지는 일종의 치킨 게임이 주요 원인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에 저자는 우리의 오랜 유산이었던 '수사학의 복귀'를 먼저 떠올리며 여기에 한나 아렌트가 고스란히 남긴 그녀의 사상적 체계를 복기하는 것으로 일종의 '사고적 대안'을 제시하고 있었는데요. 이는 아렌트가 '인간의 조건'에서 인간의 정치적 조건을 먼저 짚어보는 것으로 시작되고 있었습니다. 물론 이를 단순하게 보자면 그녀가 남긴 학문적 궤적을 저자의 해석대로 단순히 짚어나가는 것일 수도 있지만 그럼에도 현시대 정치의 위기에 있어 이런 문제에 대해 효과적인 해답을 제시할 수 있는 일종의 사고의 매개에 있어, 한나 아렌트는 그만큼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고 봐야 할 것 같습니다.


한나 아렌트는 그녀의 사상 전반에서, 정치를 정의하는 일들 가운데 무엇보다 "자유롭게 사는 것이 정치적으로 사는 것이다"라고 강조합니다. 이미 2장에서 의미심장하게 인정하는 바와 같이, "대중 매체는 우리를 프로파간다와 여러 형태의 악의적인 영향력의 표적으로 만든다"는 앞선 대중매체의 지배력를 논하면서, 여기에 산업 자동화와 핵무기가 우리의 삶 자체, 즉 정치가 보존하는 자유가 침해될 것을 경고하기도 했는데요. 사실 여기에는 정치적 보수주의자들과 진보주의자들의 공통된 정치 인식의 부재와 더 나아가 현실 정치에서 자신들의 (정치적) 이익을 염두해 두고 중요한 기본 가치들을 입맛대로 왜곡해 왔던 것이 사실상 '정치적 혼란'을 나날이 부채질 했다고 볼 수 있을 겁니다. 그러한 가운데 '선동과 허위 사실 (혹은 거짓말)'로 무장한 '포퓰리즘'이 정치 무대에 서서히 등장한 것은 그리 이상한 일이 아니었는데요. 지금의 도널드 트럼프를 있게 한, 스티브 배넌의 선동에 기반한 작업도 그렇거니와 2장의 주요 논증은 바로 이런 '의도된 몰락'을 가리키는 것이기도 합니다. 특히 2016년 미국 대선에서 "대부분의 정치인들이 옳은 일을 하는 것보다 선거에서 이기는 데 관심이 많다"는 설문조사는 정치가 이미 정치인들과 이들 주변인들이 그저 정치 권력을 획득하는 일종의 수단이 되었다는 것을 반증하기도 합니다. 이런 극명한 상황에서 일반 시민들이 '정치의 복귀'를 위해 실질적으로 노력할 수 있는 일이 그다지 많지 않다는 여러 학자들의 분석은 지나치지 않아 보이기도 합니다.

우리의 정치가 얼마나 삶과 가까운지를 여기서 시급히 논하기 전에, 이어지는 3장 도입부는 아렌트의 말을 빌어, "정치란 공통 관심사를 두고 말과 행위로 다른 사람과 소통하는 인간의 기본적인 현상이다"라고 인식됩니다. 저자가 강조하는 수사의 기능 역시 어쩌면 이와 유사하다고 볼 수 있겠는데요. 이렇게 서로 간의 의견 개진, 결과의 도출, 설득과 수용과 같은 정치 전반의 정상적 매커니즘은 굳이 하버마스를 인용하지 않더라도 기본적 인식이라고 생각됩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무엇보다 이론과 현실의 괴리를 너무나 예민하게 받아들였고 모두의 공통된 인식을 규정하기 위해 나누는 토론 내지 대화조차도 철저하게 이론과 현실의 접근 만을 주먹구구식으로 강조하기에 이르렀습니다. 물론 극명하게 무기력했던 어설픈 이상주의자, 우드로 윌슨의 사례가 있기는 하지만 이런 이상주의를 순진한 생각으로 오랬동안 취급해 왔던 것을 고려해 본다면 양자 사이의 기본적 균형이 기울어진 것은 확실히 문제라고 볼 수 있습니다. 마치 이론과 실제 현실은 무턱대고 매우 다르다는 식으로 말이죠. 결국 정치의 왜곡은 그 구조의 문제일 뿐만 아니라, 정치가 행해지는 여러 수단과 방법에서도 어느 누군가의 입을 막게 하고 특히 비판의 날을 무조건적으로 거부하는 식으로 점철되어 왔다고 볼 수 있습니다. 저는 이러한 상황에서 "더 첨예화 된 관료주의가 민주주의가 토대가 됨"으로써 가일층 악화되어 왔다고 판단하는데요. 저자인 오거먼도 이와 유사한 방식으로 앞선 인식을 다루고 있지만 정치 뿐만 아니라 사회 구조적인 측면에서 관료주의 행태와 유사한 확고한 권위의 문제는 많은 시민들의 입을 막게 하는 원인이 되었다는 식으로 간접적 결론으로 이어집니다. 즉, 관료의 권위, 전문가의 권위, 시장의 권위와 같은 우위와 우선에 준하는 체계들이 민주주의 토대에 어느 정도 악영향을 끼쳤다는 부분도 역시 짚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어지는 한나 아렌트의 논증대로 "정치가 우리의 정치 현실을 있는 그대로 다루어야 한다"는 것은 거의 분명합니다. 이런 현실을 끼고 있는 상황에서 정치적 판단에 대한 반대가 어느 부분에 이르러서 저어되거나 검토가 전혀 되지 않는 점은 앞선 관료주의와 더불어, 상이한 측면의 엘리트주의의 증상으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이런 기존의 정치 행위의 주 행위자가 거의 고위 관료 출신이거나 각 분야의 전문가들로 이뤄지고, 이들이 보통 시민들의 선택을 받아 권력을 발휘하는 선거 과정 자체가 표면적으로는 어느 사회나 몇 세대에 걸쳐, 지속되어 왔는데요. 저자의 말마따나 "정치적 판단이 사회 전체에 파장을 일으킨다" 하더라도 그것의 주체가 다수 시민의 공통된 의견 속에 그 최소한의 동의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민주주의 핵심은 바로 그런 것을 가리키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정치적 판단이 아무리 파장을 초래한다 하더라도 누구나 "어떤 의견"에 방해 받지 않는 스스로의 고유한 판단이 마땅히 존중 받아야만 합니다. 이것은 헌법에서 보장하는 권리임과 동시에 우리가 민주 사회에서 수호해야만 하는 "표현의 자유"라고 읽힐 수 있을 텐데요. 물론 이 표현의 자유는 민주주의에서 매우 중요한 권리이자 가치이기도 하지만 시민 모두는 자신의 양심과 사회적 관계를 고려하여, 충분한 숙고와 함께, 이를 주장해야만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표현의 자유가 우리 모두의 정치적 의견을 개진하고 그것이 양심에서 비롯되었을 때, 그 결과로 이어진 개인의 자유와 권리가 침해 받을 수 없다는 것을 거듭 강조하는 것은 지나치지 않는다고 볼 수 있습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법과 시민의 기본 권리, 그리고 양심의 문제가 얽혀 있으며, 이러한 시민의 권리라는 것은 마찬가지로 타인의 권리를 존중해야만 한다는 그 생각부터 유념해야 될 필요가 있습니다. 다른 한편으론 이런 인식 가운데, 왜 자유와 평등의 절묘한 균형이 민주주의에서 왜 그렇게 중요한지 우리는 깨달을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정치가 직면한 가장 심각한 문제는 정치 안에 매번 도사리고 있는 거짓의 문제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아니 거짓을 이용해 진실을 오도하고 이것을 정치적 이익으로 삼으려는 심각한 정치 왜곡의 단면이라 평가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이것은 그저 정치 체제 내에서 일상적으로 벌어지는 이러한 이익 추구가 어쩌면 개인의 이익 추구를 선(善)으로 여긴 신자유주의의 본질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를테면 정치인들이 입으로는 도덕과 공통 가치를 내뱉으면서도 행동은 그것을 전혀 따라가지 않는, 그것마저도 자기 이익으로 삼는 행위 따위를 말입니다. 바로 저자의 주장대로 "정치에 대한 논의에서 우리가 거짓말 문제를 다루지 않으면 안되는 것"은 이처럼 중요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한나 아렌트는 예전부터 진실, 거짓말, 정치의 관계를 면밀히 탐구해 왔습니다. 나치 전범인 아이히만에 대한 글도 그렇거니와 전체주의에 대한 본성을 규명하고자 했던 이유가 바로, "우리는 왜 쉽게 거짓에 놀아나는가"라는 질문의 시작점이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이 글의 4장에서 보이는 논증은 그만큼 중요하다고 볼 수 있겠는데요. 여기에서 인용된 데이비드 니버그는 [윤색된 진실]에서 "들킬 가능성이 크지 않다면, 보통의 상황에서도 거의 모든 사람이 양심의 가책 없이 타인을 속이거나 자신을 속이려 든다"고 진실과 거짓의 대립 가운데서 그야말로 일침을 놓기도 했는데요. 어떻게 보면 이는 정치가 소위 위험하지 않아 보이는 거짓말들로 윤색되어 왔다고 볼 수도 있겠습니다. 일전에 유시민 작가는 "최소한의 위선도 하지 않는 정치 혹은 사회는 위험하다"고 현정치를 빗대어 언급하기도 했습니다만 그만큼 앞으로 돌아가 보면 정치에서의 허위를 포함한 기술은 그만큼 익숙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처럼 "거짓말이 우리 삶에서 재앙이 되는 것은 진실을 훼손해서가 아니라 타인의 삶을 훼손하기 때문이다"는 본질과 더불어, 그렇다면 왜 정치인들은 거짓말을 일삼고 있느냐는 질문에 있어, 이들이 "진실을 해로울 수 있다"는 명백한 판단을 내리고 있는데요. 트럼프 시대에 발명된 '대안적 사실'이라는 거짓 놀음도 그렇고 거짓으로 오도하여 실체적 진실에 다가가지 못하게 만드는 이런 음모론과 같은 일들이 매일 신문 지상에서 벌어지기까지 하니 말입니다. 이것이 진실과 그것이 아우르고 포함한, 결론이 이끄는 사회적 파장을 단지 우려하는 것으로 보다는 이들 정치인들의 이익과 더 나아가 권력의 유지를 위해 스스로 정치공학적으로 고려해 봤을 때, 이는 필요한 일이라 보기 때문일 겁니다.   

결국 앞선 표현의 자유와 진실의 문제, 그리고 거짓을 섞어 정치에 투영시키는 일련의 조밀한 작업들은 이렇게 어느 정도 서로 영향을 끼치는 관계로 볼 수 있겠습니다. 저자의 분석대로 "표현의 자유란 단순히 표현에 열려 있다는 의미뿐만 아니라 반박이나 검증, 그 밖의 도전을 자유롭게 할 수 있다는 의미를 포함한다"는 일종의 본질적 인식을 특히 정치인들은 새겨둘 필요가 있어 보입니다. 이는 자유롭게 의견을 개진하고 어떤 한 주장에 대해 근거를 들어 비판할 수 있고, 이견에 대해 경청하고 마찬가지로 근거를 들어 재반박 할 수 있는 열린 토대가 무엇보다 정치에 필요한 이유이기도 한데요. 이런 과정 자체는 정치인들이 유념해야 하는 부분이기도 하지만 이들은 이것에 정력을 쏟을 이유가 없는 자들이기도 합니다. 막스 베버가 왜 왜 직업 정치인에 대해 쓴소리를 했는지 여기서 새삼 반복할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이렇게 해로운 정치는 그 논증 과정에서, 우리의 자유를 위협할 수 있으며, 무엇보다 의견을 교환하는 언어의 건전성과 진실성이 수반되어야 한다는 점 역시 우리가 주목할 필요가 있어 보입니다. 그런 연유로 저자는 수사학과 한나 아렌트를 동시에 우리에게 제시하고 설득의 논리를 강화하는 수사학과 민주주의와 현실 정치, 그리고 시민의 권리, 자유와 평등에 천착했던 아렌트의 사상이 많은 시민들에게 여전히 유효하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었습니다. 이 책의 마지막 결론은 예상대로 다소 이상주의적이긴 하지만 그동안 우리는 이 이상주의를 너무나 백안시 해 왔기 때문에 여기에 제안된 논의들은 '시민이 갖는 의미'를 우위에 두고 나서, 다시 한번 충분히 숙고해 볼 가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만큼 우리의 정치가 우리 손으로 다시금 갱생시켜 우리의 자유, 이웃의 삶을 위해 봉사할 수 있기 만들어야 할 것입니다. 이것은 거창하지만 어떻게 보면 우리가 처한 사활적 문제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우리가 다소 과소 평가하고 있는 정치학자 버나드 크릭의 발언을 따로 적고 싶습니다. "모든 것을 정치화하려는 시도는 정치를 파괴하는 일이다. 모든 것이 정치와 관련 있다고 여겨질 때. 정친는 정말로 전체주의적인 것이 된다."는 것은 일종의 무분별한 정치적 만능주의를 떠올리게 만듭니다. 사실 이와 비슷한 구조의 발언이 이미 신자유주의자들에 의해 매번 드러나기도 했는데요. 마찬가지로 저자 역시, 아렌트를 수차례 인용하며 이 시장주의에 있어, 비판적 의견을 첨언하고 있었습니다.  
     




아렌트의 "악의 평범성"은 악, 특히 현대의 악이 단지 "사유하지 않는"죄를 범한 사람들에 의해 그토록 자주 행해진다는 것을 가리키는 말이다.

만약 인간 본성이 순응적이고 조건반사와 행동 통제의 지밸를 받는다고 믿는다면, 사람들을 말 잘 듣는 개와 같은 존재로 만들려고 할 것이다.

아렌트에 따르면, 어떤 시점이 되면 사람들은 경제학자와 법률가, 국방 기획자, 기술자들이 운영하는 시스템의 돈벌이 대상 취급을 받는 데 분개하기 시작할 것이다.

"문화전쟁" 시대의 미국에서 우리는 정확히 바로 여기에 이르렀다. 소위 "시민적 삶"에서 우리는 먼저 적이 되고, 오직 부차적이고 미심쩍고 잠정적으로만 친구가 될 뿐이다. 분명히 말해두자면, 이런 접근 방식은 나치의 "계관 법학자" 카를 슈미트가 표명한 견해였다.

모든 정치를 선거와 관련된 것으로만 생각한다면, 정치가 너무 쉽게 눈에 보인다고 가정하므로 오히려 정치를 인식하는 데 어려움을 겪을 것이다.

제대로 수행된다면 사유한다는 것은 그 자체로 놀라운 행위다. 그것은 인생 경험, 타인의 의견, 상상력, 감정 정서뿐만 아니라 배움에 의지하여 이슈를 만들고, 질문을 던지고, 결론을 내리며, 우리를 오도하거나 탈선시킬 수 있는 공상의 비행을 막는다.

아렌트는 조직적인 거짓말의 궁극적 위험은 무엇이 진실인지 혼란스럽게 하는 것이 아니라, 무엇이 현실인지 혼란스럽게 하는 것이라고 통찰했다.

지식이나 과학, 이론에 정당성을 의탁하는 정치체제는 체제의 기반을 위협하는 사실들을 숨기고 파괴하고 조작하는데 극단적인 노력을 기울일 수 있다.

즉 공화민주주의 국가는 우리의 복수성이라는 사실을 반영하려 하고, 권위주의 국가는 이에 저항하려고 하며, 전체주의 국가는 그것을 말살하려고 한다.

실제로 세상에는 어떻게 해서든 우리의 자유를 조작하거나 강제할 위험이 있는 권력자들이 많다. 아렌트는 이 사실을 매우 걱정했다. 정치가 단순히 자유를 위한 "수단"이 아니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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