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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락 ㅣ 이렌 네미롭스키 선집 5
이렌 네미롭스키 지음, 김계영 옮김 / 레모 / 2025년 4월
평점 :
러시아어 본명이기도 한, 이리나 르보브나 네미롭스카야는 1903년 당시 러시아 제국의 키예프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녀의 부친은 부유한 은행가로 이름은 레프 보리소비치 네미롭스카야였습니다. 특히 어머니 파니 요노브나 마리골리스 네미롭스카야와의 불안정하고 불행한 관계는 그녀의 많은 소설에서 중요한 문학적 모티브였는데요. 딸이 자신의 모친을 증오하고 경멸하는 것이 쉽지 않다는 것을 생각해 본다면 작가 스스로의 개인사적인 측면에서는 충분히 불행한 일이 되었을 것 같습니다. 그녀의 가족은 1917년 러시아 혁명이 시작되자 바로 러시아 제국을 떠나, 1918년에 잠시 핀란드에서 체류하게 되는데요. 그렇지만 이들은 이후 대부분의 시간을 파리에서 보내게 됩니다. 프랑스에 도착한 뒤에 네미롭스키는 소르본 대학에서 수학하게 되었고, 이미 18세 때부터 작가 활동을 시작합니다. 1929년, 그녀의 처녀작이기도 한, [데이비드 골더]가 큰 성공을 거두고, 이듬해인 1930년에는 영화화가 되기도 하는데요. 우여곡절 끝에 출판한 데이비드 골더가 그녀에게는 큰 문학적 명성을 안겨주었음은 분명합니다. 이에 그녀가 삶을 지속하던 그 시대의 유럽은 이미 전체주의가 기승을 부리고 있었고 여기에는 삐뚫어진 민족주의가 한 몫을 하게 됩니다. 물론 프랑스에서도 이러한 상황은 마찬가지였는데요. 그녀 스스로 유대인이라는 정체성을 강하게 부각시키지도 않았거니와, 심지어 러시아계 유대인임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로마 가톨릭으로 개종까지 하게 됩니다. 하지만 1942년 7월 13일, 네미롭스키는 비시 프랑스가 고용한 형사들에 의해, "유대인계 무국적자"라는 이유로 딸들 앞에서 체포되었고, 이후 그녀는 피티비에에 있는 임시 집합 수용소에 이송되었습니다. 이로부터 이틀 후에 그녀와 그녀의 남편인 미셸 엡스타인은 아우슈비츠에 도착하지만 네미롭스키는 한 달후, 발진티푸스로 사망하게 됩니다. 그녀의 남편인 엡스타인 역시, 11월 6일에 나치에 의해 즉시 살해되기에 이릅니다. 따라서, 그녀의 이 책은 원제, "David Golder"로 지난 1929년에 출간되었고 국내에는 2025년 4월, 번역 출판되었습니다.
본격적으로 글을 쓰기에 앞서, 원제와는 달리 국문으로 번역된 제목이 이 작품의 본질을 드러내는데 별로 도움이 되지 못했다는 점을 언급하고 싶습니다. 원제인 '데이비드 골더'는 아주 단적으로 전형적인 유대인을 표징하는 장치라고 볼 수 있는데요. 데이비드라는 이름은 말할 것도 없고, 뒤에 "골더"라는 성 역시 셰익스피어 이래로 유대인들의 덧씌워진 부정적 정체성을 여실히 나타내고 있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이 작품의 주인공인 데이비드 골더는 자신의 동업자인 시몬 마르쿠스와 함께, 자원 시추와 해당 증권과 채권 거래를 도맡아 하는 일종의 투자 회사를 운용하고 있습니다. 작품의 서두에서 오랜 동업자였던 마르쿠스가 앞으로 있을 중대한 계약에서 골더를 사실상 배신하기에 이르고 이들과 난맥으로 얽혀있는 투자자들과의 관계에서 자신의 사적 이익을 위해, 마르쿠스는 자신이 처한 상황을 마지막으로 골더에게 진심 어린 이해를 구하게 되는데요. 이는 마르쿠스 본인의 방만한 생활과 마찬가지로 허영과 과소비에 빠져있던 아내의 본성이 비극적으로 매몰되어, 스스로 삶의 통제력을 상실하게 됩니다. 결국 그는 다음날 자살로 삶을 마감하기에 이릅니다.
이런 동업자의 갑작스런 죽음과 맞닥뜨린 마르쿠스의 장례식을 통해, 골더 역시 자신의 삶을 천천히 돌아보게 되는데요. 역시나 그에게도 일년에 채 몇 번 보지 않는 아내와 오로지 자신에게 돈만을 요구하는 철부지 딸이 존재합니다. 어려서부터 온갖 고생을 경험하고 오늘날 업계에서 입지전적인 인물로 그려지고 있는 골더는 극중에서 돈 자체에 대한 탐심을 갖고 있으면서도 그 이면에는 오랫동안 아내와 딸을 극진히 부양한 인물이라는 다소 이질적인 모습을 함께 가지고 있는데요. 저는 작가인 네미롭스키가 이 골더라는 인물상을 누구보다 자신의 부친 통해, 간접적으로 조형했다고 생각합니다. 여기에 골더의 딸인 조이스와 마찬가지로 네미롭스키 역시, 유복한 유년 시절을 보냈지만 극중 조이스에게 자신을 직접적으로 투영했는지는 불분명한 측면이 있어 보입니다. 더불어 이 시기 여성들이 그 무엇보다 남편이나 아버지의 부양과 보호를 필요로 했음은 거의 부정할 수 없을 겁니다. 특히 이 시대 여성들이 여전히 야만의 시대에 노출되어 있었고, 골더와 그의 아내 글로리아가 처음 대면하게 되는 수 십 년 전의 미국 상황 역시, 이 작품에서 노골적으로 묘사되고 있기도 합니다. 가진 돈이 없는 이민자들의 삶이 얼마나 궁핍한 지경에 이르렀는지 말입니다. 매번 끼니 걱정을 하던 어린 시절의 글로리아나, 후반부에서 골더가 더이상 딸에게 돈을 주지 않자, 결국 늙은 남자에게 자신을 바치는 조이스의 모습은 마치 시대의 극명한 서사로 여겨졌습니다.
골더는 아내와 딸을 만나러 비아리츠로 가는 도중에 의문의 심장 질환을 겪게 됩니다. 후에 병명이 협십증으로 드러나기는 하지만 그도 마르쿠스와 마찬가지로 곧 다가올 죽음을 인지하게 되는데요. 그럼에도 비아리츠에서 재회한 아내는 여전히 정부와 다름없는 룸펜들을 집에 들이고 있었고, 또한 허황된 사교계 생활을 지리멸렬하게 이어가고 있었습니다. 더욱이 이 비아리츠의 저택과 매매와 관련해 그녀가 자신의 정부와 짜고 골더의 돈을 가로챈 과거의 일화는 골더가 이 집안에서 어떠한 위치에 놓여 있는지를 여실히 드러내고 있습니다. 어린 시절 미국에서 고철을 주워가며 갖은 고생 끝에 작금의 위치에 오른 골더에게는 그를 그저 '지갑'으로만 아는 아내와 딸이 있을 따름이었습니다. 미망인에게 몇 푼의 돈도 남기지 못하는 남자를 경멸하는 이들 여자들의 시선과 유럽 전체에 '돈밖에 모르는 유대인'이라는 혐오가 각색되어, 골더의 삶은 그 자체로 무너져 버린 상황으로 비쳐집니다. 더욱이 여기엔 조이스가 자신의 딸이 아니라, 아내와 정부의 자식이라는 사실까지 충격적으로 드러나게 됩니다. 자신과 딸의 어처구니 없는 생활을 이어가게 해주는 돈을 대고 있던 남편인 골더에 대한 경멸과 자조는 대체 어디서 기인한 것인지 되묻고 싶은 마음이 들기도 했는데요. 단순히 서로에 대한 부족한 이해만으로는 이 모두가 설명이 되지는 않았습니다.
돈 자체에 대한 탐욕과 남을 실질적으로 꺾으면서까지 성취하고 싶었던 성공에 온 힘을 다했던 골더는 끝내는 자신의 삶을 돌아보게 됩니다. 저는 작가의 입을 통해, 글로리아와 조이스가 골더를 모멸적으로 대하는 숱한 언행들과 그저 이 모녀에게 아낌없이 지갑을 열었던 일종의 '씁쓸한 자선 행위'가 화자들의 대화 가운데 교차되면서, 과연 돈과 성공 이전의 '비틀린 삶'의 그 처절한 대가는 역시나 비참하고 끔찍할 수밖에 없다고 단언하게 되었습니다. 마지막으로 골더에게 사업 파트너이자 경쟁자였던 튀빙겐과의 대화는 "과연 우리가 세상에 무엇을 남길 수 있겠는가"라는 본질적인 물음과 함께, 골더의 희미하게 남은 마지막 숨결마저도 스스로 자청하여 불사르게 만들었습니다. 평생 딸이라고 여기며 자랑스러워 했던 조이스에게 그가 마지막으로 가졌던 감정을 어느 정도 이해하게 되었고 아주 평범한 사람들일지라도 그저 자신의 이익만을 추구할 수밖에 없다는 아주 극명한 교훈과 더불어, 골더 개인의 그 도드라진 비극은 우리가 우리의 삶을 어떻게 평가해야 하는지에 대한 아주 중요한 단초가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극의 서두에서 자살한 마르쿠스의 장례식에 쓰일 관을 놓고, 그저 싸구려 관을 찾는 미망인의 모습과 인적도 드문 허름한 묘지에 그를 묻고자 하는 '그들'을 대면하면서, 정말로 많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는 특히 싫어하는 몇몇 물건들을 증오 비슷한 감정을 느끼며 바라보았다. 검은 대리석과 청동으로 된 승리의 여신상 네 개가 받치고 있는 램프, 황금 벌 장식이 달린 거대하고 네모난 빈 잉크병. 이 모든 것을 위해서 돈을 내야 했다.
‘한 치 앞을 모르는 사업에서 난관을 피하고 어떻게든 끝까지 물고 늘어져야 하는 법인데, 이렇게 죽다니...‘
그는 자신이 집에 들어서자마자, 마치 연애편지 꾸러미를 감추듯 수표책을 급히 숨기던 아내의 모습을 본 기억을 떠올렸다.
딸이 그토록 자주 그에게 불러일으키던 부당한 모멸감이 몰리적 고통처럼 생생하고아프게 그의 심장을 조여왔다.
"그래서 당신은 대체 뭘 바라는 건데?" 글로리아가 날카롭게 쏘아붙였다. "그 여자가 바보처럼 가진 걸 다 내주고, 그 인간은 주식이든 어디서든 다시 망하고, 2년 뒤엔 결국 자살하는 거? 그땐 아내에게 땡전 한 푼 안남기고 갔으면 좋겠단 거야, 응? 남자들의 이기심이란! 그게 당신이 원했던 거지, 그렇지?"
난폭하고 늙고 추한, 제대로 지킬 능력조차 없는 더러운 돈 말고는 무엇도 사랑하지 않는 그를 미워했다.
나중에 의식이 돌아온 후 골더가 처음으로 한 행동은 치료비 명목으로 2만 프랑짜리 수표에 서명한 것이었다.
"이봐, 자네는 자네가 위대한 사업가라고 생각하지만, 자네는 그냥 투기꾼에 불과해. 자네는 사람을 제대로 볼 줄도 모르고, 고를 줄도 모른다고, 평생 혼자일 거야. 주변에 멍청이들 아니면 사기꾼들 뿐일 테고."
"하지만 왜죠?" 조이스는 절망적으로 애원했다. "예전처럼 해주세요. 사업을 해요. 돈을 벌어요...아빠에겐 너무 쉬운 일이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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