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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요의 시대, 무엇이 가난인가 - 숫자가 말해 주지 않는 가난의 정의
루스 리스터 지음, 장상미 옮김 / 갈라파고스 / 2022년 7월
평점 :
영국 노동당의 정치인이면서, 사회 보장과 여성 시민권에 대해 지대한 관심을 갖고 있는 학자인 루스 리스터는 동시에 러프버러 대학의 사회정책학 명예 교수입니다. 그녀는 에섹스 대학에서 사회학 학사를 마치고, 서섹스 대학에서 다인종 연구에 관한 석사 학위를 취득하는데요. 또한 1992년부터 94년까지 영국 사회 정의 위원회에서 활동했고, 2008년부터 2010년까지 영국 국가 평등 위원회의 위원을 역임하기도 했습니다. 그녀의 이런 활동들은 시민권과 빈곤, 독점적 지위 사회 등에 관한 논저 등을 발표하는 원동력이 되기도 했는데요. 특히나 현재 그녀는 사회 정책과 관련된 이론화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갖고 있습니다. 따라서, 그녀의 이 책은 지난 2021년에 원제, "Poverty"로 출간되었고, 국내에는 이듬해인 2022년 번역 출판 되었습니다.
리스터의 기념비적인 저작이라고 볼 수 있는 이 글은, 빈곤 poverty 이 주로 제3세계와 남반구에 국한된 문제로 오랫동안 치부되어 왔다는 점을 감안해 본다면, 단순한 개념화를 넘는 중요한 의미를 포함한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어쩌면 조금 이른 결론 일수도 있겠지만 자신의 논저를 통해, 저자인 그녀가 진정으로 말하고자 하는 바는 '빈곤에 처한 일반 시민' 혹은 일부 국가에서 '하층민'으로 취급되는 심각한 저소득에 처한 사람들이 국가와 사회에 있어 스스로 시민으로서의 지위를 상실하게 되는 현실 그 자체였습니다. 이는 1장에서도 드러나듯, 빈곤을 어떻게 하면 객관적으로 수치화 할 수 있겠는가라는 현실적인 질문과 함께, 서두에서 "물질적 자원인가 아니면 역량인가"라는 사회적이고 제도적인 비교를 통하여 독자들에게 빈곤에 대한 실질적 이해의 폭을 넓히고 있는 부분도 이 글의 미덕으로 읽히는데요. 다시 한번 말씀드리지만, 빈곤의 가장 큰 문제점은 아마르티아 센과 마사 C. 누스바움의 역량 접근법을 통한, 행복과 삶의 질 개념이 거의 무력화 된다는 점이라 볼 수 있겠습니다. 물론 아마르티아 센은 거의 원초적인 측면에서, 시민들의 삶을 좌지우지 하는 기본적인 생계의 측면에서, 이런 기본적인 자원들에 집중하기도 했는데요. 이는 그를 유명하게 만든 '역량'이라는 의미와 더불어, 전세계 빈곤 국가들의 근본적인 실패를 규정하는 소위 사회 경제학적 지표이기도 했습니다.
바로 1장의 면밀한 논증 가운데서, 빈곤의 관점이 절대적인가 아니면 상대적인가에 대한 질문에 우리가 지대한 관심을 가져야 하는 부분이라 여겨졌는데요. 이처럼 불평등의 근본적인 결과물은 빈곤을 규정하는 절대적인 수치가 아니라 사회 구성원 간의 가용할 수 있는 자원의 상대적인 차이에 집중하게 만듭니다. 이는 인종주의와 인종차별의 만연 뿐만 아니라, 장애인들에 대한 배제와 차별까지 포함하고 있는데요. 뒤이어 나오겠지만 각 사회의 부유층들이 자신들만의 거주지를 구축하고 빈곤 계층과 온전한 삶을 영위하기 위한 경제적 조건이 열악한 다른 시민들과 구조적 평행선을 유지하며, 이들 다수가 이러한 사회 현실에서 유리 되어 있다는 2장과 3장의 분석은 그야말로 의미심장하다고 볼 수 있겠는데요. 글에서는 다소 설명이 부족하지만, 충분히 사회적 자원을 누리고 있는 소위 특별한 계층은 이처럼 '빈곤의 문제'가 오로지 개인의 책임이라는 것으로 전제하고, 삶을 통제하지 못하는 다수의 시민들을 경멸의 눈으로 지켜보기만 하는 것인데요. 이 부분은 명백히 찰스 테일러와 리처드 세넷과 같은 학자들이 일찍이 분석한 바대로, 신자유주의와 첨예한 개인주의, 그리고 노골적인 금융 자본주의가 이러한 상황을 악화시켜 왔다고 볼 수 있습니다. 저는 굳이 이러한 파국을 '세계화의 암울한 측면'으로 그 의미를 반쯤 축소시키고 싶지는 않은데요. 그렇지만 지난 30년 이상의 세계화가 남반구를 비롯, 소위 잘사는 북반구에도 그러한 '사회적 분절'을 초래했다는 점은 거의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일 겁니다.
특히 이 빈곤의 거침없는 낙인은 인종적으로 동일한 백인들에게서도 경제적 차이에 따라, 혹은 일부 시민들을 처참하게 인간 이하의 무언가로 규정 짓는 것으로도 읽힙니다. '백인 쓰레기'와 같은 모멸적 관용어구는 아무리 인종적 기득권을 타고났다 하더라도 빈곤의 상황에서는 거의 여지를 주지 않는 흡사 그런 폭력적 현실이 저의 이목을 끌었는데요. 4장에서 '20세기 후반과 21세기의 꼬리표 붙이기'로 설명되는 일련의 논증들이 빈곤이라는 낙인 자체가 얼마나 무차별적으로 작용하는지 이를 여실히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즉, 사회에서 빈곤이라는 낙인 자체가 시민들을 사회적으로 배제하는데 이르렀고, 단순히 인간이 다른 인간으로부터 인정 받고 싶어하는 인정 욕구를 언급하지 않더라도 무능력과 쓸모 없음이라는 그야말로 배제의 결과를 초래하는 이런 사회적 낙인들이 본질적으로 시민이 보장 받아야 할 삶의 영위와 마땅히 보호 받아야 할 인간적인 권리 조차도 사회로부터 분리되는 현실을 더욱 고착화 하기에 이릅니다. 더욱이 미국의 푸드 스탬프와 같은 제도들이 사활적인 조건에서 '복지 수급'의 필요성을 인식하고 있더라도 반대의 경우, 다수의 빈곤 계층에게 더할 나위 없는 모멸감을 안기기도 했는데요. 이를 정확히 말하자면 현실을 고려하지 않은 탁상 행정과 치밀하지 않은 공무원들이 사회에 인정을 받고 싶어하는 상당수 빈곤 계층의 마음을 닫아버리게 한 요인이 되기도 했습니다. 즉, 각각의 시민들을 단순히 경제적인 차이와 상대적인 자원의 접근도를 따져가며 어떤 한 개인을 사회 경제적으로 판단해 보려는 행위 자체는 '경제적 인간'의 화려한 탄생 뒤에 가려진 음울한 현실을 다시금 반증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해보게 됩니다.
제가 리스터의 이 논저를 통해, 확실히 알 수 있었던 부분은, 현재의 시점에서 빈곤의 상황과 하층민이라는 평가를 받고 받고 있는 다수의 시민들이 자신의 삶을 회복하는 것 뿐만 아니라, 스스로 속한 사회에 남들과 다를 바 없이, 인정 받고 싶어하는 근본적 욕구를 지니고 있다는 점이었는데요. 그래서 4장 이후, 드러나는 '행위 주체성'의 기본적 인식은 이처럼 보다 면밀히 탐구해 볼 이유가 된다고 판단되는데요. 물론 알렉스 캘리니코스가 "시민들이 죄다 노동에 처해졌다."는 자본주의적 일상을 자조한 바와 같이, 노동을 하면 할 수록 더욱 경제적으로 고통스러워지는 현실을 실질적으로 개선시키기 위한, 정치적 차원의 행위 주체성이 무엇보다 시급하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결국 빈곤의 문제는 그저 개인적 차원으로 국한된 것이 아니라, 사회 구성원 모두를 아우르는 삶 자체를 위태롭게 하는 원인으로, 무엇보다 이를 공론화하는 것이 시급하다고 생각됩니다. 그런 연유로 저자 역시, 빈곤에 처한 사람들의 정치적 요구가 결코 폄훼 되어서는 안된다고 거듭 강조하고 있었는데요. 이처럼 5장에서도 마찬가지로 저자는 견뎌내기와 조직화를 통해, 사회에 정당한 요구를 주장할 수 있도록 빈곤층과 사회적 하층민들의 정치적 활동에 대한 당위를 인정하고 있기도 합니다.
끝으로, 빈곤을 통한 타자화와 일부 계층에 대한 분리는 헌법에서 보장된 우리의 인권과 기본권을 위해서라도 지양 되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소위 '불가결한 인권'이라는 구호로 결집하는 수많은 사람들이 배후에 있다는 점을 분명히 하고, 우리가 이들의 활동에 대해 지지를 보내야 하는 것은 '시민권의 보장'과도 깊은 관련이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현재의 민주주의가 자본주의의 이행 가운데 경제적으로 분절된 사회에서 제대로 된 기능을 하지 못하는 점은 빈곤을 받아들이는 방법과 태도에 있어 어느 정도 잘못된 접근을 드러내는 것이기도 한 데요. 이는 사회 보장과 복지에 대한 담론을 무참히 공격하기에 이르렀던 신자유주의와 시장의 자유를 맹신하도록 시민들을 부추긴 경제학자들을 비롯, 다수 지식인들이 펼친 왜곡된 주장이 한 몫을 했다고 봐야 할 것 같습니다. 결국 이 시점에서 시민 연대의 문제를 우리가 다시 고심해야 봐야 할 필요성이 있으며, 스스로 수치심에 빠진 우리 주변의 어려운 시민들을 어떻게 하면 정상적인 사회로 이끌 수 있는지를 무엇보다 고심해 봐야 할 때라고 여겨집니다. 노엄 촘스키의 비판적 인식대로 모든 시민이 이런 자본주의가 지배하는 상황에서 누구나 쉽게 빈곤에 빠질 수 있다는 가능성은 우리가 어떤 상황에 놓여 있는지를 잘 설명해주는 금언이라고 생각됩니다.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시민 개개인은 스스로 존엄성을 갖는 인간으로서 사회에 기여하고, 많은 시민들로부터 인정받고 싶어하는 보편적 가치를 잊지 말았으면 좋겠습니다.
이 점에서 빈곤층보다 더 큰 권력을 지닌 사람들이 물질적 및 비물질적 츠면에서 다중적인 불이익의 관계망을 형성하는 것으로 빈곤 상태를 이해하자는 제안이 있었다.
재분배와 인정 recognition을 빈곤과 결합시켜 분배적 평등과 관계적 평등을 통합하는 정치를 뒷받침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우리가 ‘시민으로서‘, ‘적극적인 자유를 보장받는 차원에서 사회참여의 전제 조건이라고 볼 만한‘,‘자기 몫의 최저 소득을 배부받을 자격이 있다‘는 의미를 갖기 때문이다.
상대적 빈곤과 불평등은 ‘서로가 서로를 강화‘할 뿐 아니라 ‘인간 존엄을 침해하는 면에서 떼어 놓을 수 없는 관계‘일 수 있다.
이것이 명백한 빈곤 정의에 담긴 도덕적 힘을 약화시켜 정치인들이 그 중요성을 묵살하기 쉽게 만들지 모른다고 경고한 이들이 있었다.
불평등이 심할수록 최상층은 빈곤의 현실로부터 멀어지고, 자신을 최하층에 있는 사람들과 동일시하거나 그들의 지위 향상을 위한 구조적 변화와 보호 목적의 재분배 정책을 요구하는 목소리에 공감할 가능성이 낮아질 수 있다.
요컨대 열악한 물리적, 사회적 환경은 개인에게 빈곤이 미치는 영향을 증폭하고, "저소득 생황을 더욱 고통스럽게 만든다."
이미 주장했듯이 빈곤은 물리적 개념으로만 이해할 수 없다. 하나의 개념으로서나 생생하게 존재하는 현실로서나, 빈곤은 사회적 관계로 보아야 하는 것이기도 하다.
"가난한 사람을 모질게 대하는 것은, 상대를 자기와 아주 근본적으로 다르게 바라볼 떄에야 가능한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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