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의 권리 옹호 고전의세계 리커버
메리 울스턴크래프트 지음, 문수현 옮김 / 책세상 / 2018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영국 런던 스피탈필즈 출신의 작가이자, 철학자, 여성의 권리에 대한 적극적인 옹호자였던 메리 울스턴프래프트는 1700년대 중후반 혁명의 기운이 전 유럽을 관통하는 시기에 활동했던 사상가였습니다. 오늘날 그녀는 많은 여성주의 운동가들에 의해 '페미니즘의 선구자'라고도 불리고 있는데요. 계몽주의의 시대가 본격적으로 꽃 피우던 시기에도 여성들의 권리는 남성들에게 거의 종속되어 있었고 그녀의 고백대로 이 시기는 여성이 지성을 탐구할 기회조차 허락하지 않았던 시기이기도 했습니다. 1789년 프랑스에서의 혁명이 영국에도 과거의 유산을 타파할 새로운 기회가 될 것이라 믿었던 그녀는 금새 프랑스 혁명을 지지하기도 하였는데요. 당시의 모든 혁명 세력들에게 전통주의자들이 모조리 급진적이라는 꼬리표를 붙이자마자 울스턴크래프트 역시 세인의 눈초리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됩니다. 아나키즘의 선구자로 활동했던 윌리엄 고드윈 과의 특별한 결혼 생활과 그녀가 말년에 겪었던 여러 고초는 여성의 권리에 대한 필요성과 진정한 인간 평등을 거듭 인식한 혁명적인 지식인에게 더욱 고통이 되지 않았나 싶습니다. 이 책의 원서는 지난 1792년에 원제, "A Vindication of The Rights of Woman"으로 출간되었고, 번역이 된 판본은 2007년에 출간된 영국 케임브리지 대학 출판부의 원서를 바탕으로 하였습니다. 참고로 이 책은 완역본이 아니라 발췌본임을 먼저 밝혀둡니다. 국내에는 지난 2011년 7월 초판 발행되었습니다.

저자인 울스턴크래프트는 9장에서 이 글을 쓰게 된 직접적인 연유를 밝히고 있는데요. 그것은 "인간 종족의 절반인 여성이, 원칙이라는 보다 확실한 안전망 대신에, 외려 그들을 잔인하게 다루는 편견에 종속되어야 하는가?"라는 풀리지 않는 의문에서 시작합니다. 데이비드 흄을 시발점으로 강화된 영국의 계몽주의에서 인권과 자유, 평등이라는 고귀한 개념을 오로지 남성들만 독점하는 상황이 지금의 시각으로선 꽤 받아들이기 어려운 부분이었는데요. 그래서 옥스포드와 케임브리지 출신의 남성들에게 2개의 투표권을 부여하자는 주장이나, 정치는 적절하게 교육을 받은 남성들만이 주도해야 한다는 인식과 별반 차이가 나지 않는다고 느껴집니다. 이 책의 전반에서 나타나는 '여성은 남성을 위해 창조되었다'는 식의 여성을 남성의 소유물로 보는 듯한 차별적인 내용들은 이처럼 뿌리가 깊다고 볼 수 있겠는데요. 사회 전체적인 측면에서 가부장적 전통으로 모든 주도권을 갖고 있던 남성들이 그만큼 여성들이 지성에 가까워지는 길을 인정하기까지 몇 세기가 더 필요했던 우리의 역사는 저자인 울스턴크래프트 역시 이를 진지하게 예측하기까지 하였습니다.

2장에서 거의 남성에 의한 여성의 지배로서, 결혼과 가정 생활에서 여성들이 가져야 할 구태의연하고 수동적인 아내와 어머니 상은 거의 가부장 제도의 핵심이라고 볼 수 있겠는데요. 남편과 정부를 위해 교태를 부리고 저들을 성적으로 만족시킬 의무가 있다는 수많은 주장들과 함께 그런 연유로 평범한 여성들에게 교육의 필요성과 지성을 추구할 가치조차 없다는 이 시대의 세태는 실로 충격적이기까지 합니다. 이런 전통적인 가부장 체제 하에서 귀족 출신이나 사교계에서 활동하는 여성들이 아닌 일반 평범한 여성들은 이러한 굴레들을 결코 벗어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 글 9장에서 강조되는 "한 계급이 다른 계급을 압박한다"는 문장은 진정한 인간 평등을 위해 심지어 '사회 개조'가 있어야만 했을 텐데요. 하지만 무지한 남성들에 의해 소위 성적인 소유물로 인식되기까지 한 일반 계층의 여성들의 상황을 고려해 본다면, 이러한 모순을 타파하기 위해서는 지식인 계층의 총체적인 분기와 사회적인 요구가 있어야만 했을 겁니다. 하지만 거의 귀족 정치에 준하는 영국의 정치가 그저 유럽에 띄엄띄엄 내비치고 있던 '급진적인 기운'에 냉정한 상황 인식이 매몰되어 있었던 점과 프랑스에서의 혁명과 더불어 무정부주의자들에 의한 국가 전복과 기존 체제를 뒤엎는 시도를 그저 지나가는 바람 정도로 여길 수는 없었을 겁니다. 나폴레옹의 몰락 이후, 전 유럽에서 불었던 구체제의 물결과 평민들에 대한 귀족들에 의한 지배는 다시금 구시대로 회귀하게 되었는데요. 울스턴크래프트가 프랑스에서의 혁명을 기화로 여성들에게도 진정한 평등과 권리를 누릴 수 있는 기회가 찾아올 것이라는 기대를 갖게 되었을 겁니다. 그것이 바다 건너 영국이라는 지리적 위치 때문에 설사 점진적인 움직임에 불과할지라도 말입니다.

사실 공화주의에 있어 혁명이라는 존재는 뗴어 놓고 생각할 수 없는 측면이 있습니다. 이 글의 9장에서도 "그들(여성들)이 기혼이건 미혼이건 간에 국가의 시민이라는 조건을 갖춰야만 한다"는 사실상의 명제는 이처럼 중요하다고 볼 수 있겠는데요. 자유와 평등 그리고 인권이라는 개념이 시민과는 뗄래야 뗄 수 없다는 점을 모두가 강고하게 인식하고 있다면 최우선적으로 여성이 모두가 인정하는 시민의 한 형태이자 이에 마땅히 포함되는 한 계층임을 인정해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지성의 추구를 원천적으로 봉쇄당하고 "인간의 주체성"마저 박탈 당하게 되는 여성의 종속 상태는 진정한 인간 평등이라는 가치에 크게 위배되는 것이죠. 인간은 오로지 남성들만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여기에는 여성들의 존재 역시 인정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아마도 초기 계몽주의의 한계가 바로 이 지점에서 드러난다고 볼 수 있겠는데요. 여성의 권리에 대한 지도층 남성들의 사회적이고 계급적인 딜레마는 결국 극복하지 못한 채로 수세기를 거쳐야만 했습니다.

또한 전반적인 '여성들의 노예 상태'에 대한 비판 뿐만 아니라, 9장 전반에서 부의 차이와 물욕에서 비롯된 여러 문제들이 계층들을 지배와 피지배의 관계에 이르게 한다는 일목요연한 논증은 대체로 귀담아 들을 만 합니다. 이는 남성들에게 있어서도 지배의 논리를 강요할 수 있다는 점에서 해악하다고 볼 수 있는데요. 이 부분을 따로 떼어 오늘날의 자본주의에 대한 모순으로 배치시켜봐도 인식적으로 거의 근접한다고 여겨집니다. 그리고 이 글의 전반이라고 볼 수 있는 3장과 5장에서 루소의 충격적인 여성 폄하와 그에 준하는 논증들이 '공화주의의 루소'와 사뭇 매칭이 되지 않는데요. 스스로를 고결한 자유주의자라고 칭했던 루소에게 그 시대의 다른 남성들의 차별적인 시선과 마찬가지로 여성을 남성의 소유물로 그리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전반적인 사회 구조 속에서 울스턴크래프트는 여성들의 지식의 추구 및 지성에의 도달을 위해, 12장에서 평등한 교육을 역설하고 있는데요. 이는 '가난한 소년, 소녀들이 부유한 계층의 아이들과 동등한 교육을 받을 권리'와 맞닿아 있으며, 그동안 여성들을 가부장제에서 옥죄고 체제의 소유물로 만들었던 수많은 증오의 언설들을 진정으로 극복하는 기회가 될 것 입니다. "여성이 육체와 정신의 힘을 갖추면 여성은 무성적인 존재가 되어버리고 딸들에게서 더 이상 부드러운 매혹적 아름다움이 돋보이지 않게 될 것"이라고 외치는 수많은 난봉꾼들의 억지 주장이 더이상 힘을 얻지 못하게 되겠죠. 그래서 앞선 무지가 여성에 대한 어리석음 뿐만 아니라, '인류의 어리석음'으로 비하될 수 있는 것은 이번 장에서 꽤 설득력있는 논조로 입증됩니다.

오늘날은 과거의 무지와 체제의 존속을 위해 여성의 권리를 거부하는 시대는 결코 아닐 것입니다. 하지만 울스턴크래프트가 통찰했던 것처럼 여성들이 자신의 매력을 팔아서 살아가는 어쩌면 그것이 당연하다는 듯 받아들여지고 있는 자본주의 시대를 우리는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의 민주주의가 어느 정도까지 모든 인간에게 이성과 지성을 허락했는지는 사뭇 측정하기가 어렵습니다. 자본주의가 냉정하게 계급주의를 거부함에도 불구하고 보유한 부에 따라 인간에 대해 서열을 매기고 있으니 말입니다. 전체적으로 계몽주의가 자본주의를 대적할 수 없는 이 시기에 울스턴크래프트의 이 글은 충분히 과거의 유산을 극복한 우리의 용기를 다시금 북돋울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요. 물론 지금도 진정한 여성의 권리는 남성들에 비해 부족한 면이 있는 것도 현실일 겁니다. 이러한 체제에서 부와 권력을 쟁취한 소수의 여성 사례들만을 꼬집어 진정한 남녀 평등은 이미 도달했다고 믿는 분들도 계시겠지만 그것은 이념과 정치적 주장과는 그 궤를 달리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민주주의에서 진정한 남녀 평등을 추구하고 인정하는 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것인데요. 아직도 여성을 성적인 측면에서 남성을 위해 존재하는 대상으로 여기는 사람들이 많다는 점에서 울스턴크래프트가 오열했던 당시의 시대와 지금의 우리 사회가 어느 정도의 진보를 이뤄냈는지 참으로 궁금할 따름입니다.



-루소가 주장했던 여성들에 대한 충격적인 인식은 다소 받아들이기 힘들었는데요. 공화주의자의 다른 일면을 보게 된 것은 이 책의 귀중함이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국내에 발췌본이 아닌 완역본이 이미 존재하고 있으니 관심 있는 분들은 완역판을 일독하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결과적으로 우리가 본질을 완성하고 행복을 실현하는 능력은 이성, 덕, 지식의 정도에 의해서 측정되어야만 하는데, 이것들이야말로 각 개인들을 구별짓고, 또한 사회를 결속시키는 법들을 총괄한다

현재와 같이 부패한 사회적 조건에서, 여성들의 지성은 짓밟고 여성들의 감각은 예민하게 함으로써 여성들을 노예화하는 데 기여하는 이유들은 많다

여성의 지성을 확대함으로써 여성의 정신을 강화하라. 그러면 맹목적인 복종은 종식될 것이다

내가 비록 예언자적 재능을 부여받지는 못했어도, 도덕성이 보다 굳건한 토대 위에 자리하게 될 경우 여성들은 남성의 친구 아니면 노예가 될 것이라고 감히 예언하고자 한다

프랑스에서 소년들과 소녀들, 특히 후자는, 타인을 만족시키고, 자신의 신체를 다스리며, 자신의 외적인 행위를 통제하기 위해서만 교육받는다

루소식 교육의 목표가 여성들을 정숙한 부인, 현명한 어머니가 되도록 준비시키는 것이라면, 앞선 스케치에서 그처럼 그럴듯하게 권고된 방식이 그런 결과를 낳도록 계산된 최선의 방식인지 아닌지, 나는 이제 공상적 환성과 세련된 방탕함에서 벗어나 인간의 양식에서 묻고자 한다.

여성들의 육체적 매력에 굴복한 저자들이 그러면서도 교활하게 여성의 품격을 떨어뜨리는 그런 책들의 치명적 성향은 아무리 자주, 혹은 혹독하게 비판되어도 지나치지 않다

그러나 부가 남성들의 기력을 약화시키고 여성들이 자신의 매력을 팔아서 살아간다면, 어떻게 그들이 노력과 극기를 동시에 요구하는 의무를 수행하기를 기대할 수 있겠는가?

현재 여성들은 정부의 논의들과 관련하여 어떠한 직접적인 발언권도 없이 독단적인 지배를 받고 있을 뿐이지만, 나는 언젠가는 여성들이 자신들의 대표자를 가져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Hisway 2022-06-14 14: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잘 읽고 갑니다. 좋은 글 고맙습니다.

베터라이프 2022-06-14 15:46   좋아요 0 | URL
부족한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