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표 - 역사, 논리, 정치 레-프리젠테이션
모니카 브리투 비에이라.데이비드 런시먼 지음, 노시내 옮김 / 후마니타스 / 202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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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르투갈 출신의 정치학자인 모니카 브리토 비에이라는 정치 사상사와 정치 규범 이론을 전문으로 연구하고 있는 학자입니다. 그녀는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박사 학위를 받고 포르투갈 리스본 대학을 거쳐 현재는 영국 요크 대학에서 정치학과 교수로 일하고 있습니다. 특히 토머스 홉스에 관한 연구로 신진 학자들 가운데서 명성을 얻고 있기도 한데요. 이 뿐만 아니라 자연법, 정의론, 헌법론에 관해 활발한 저작 활동을 하고 있기도 합니다. 더불어 같은 공저자인 데이비드 런시먼은 영국 런던 북부 세인트 존스 우드 출신으로 다원주의 이론과 여러 정치학 이론서들을 썼던 정치학자인데요. 그도 마찬가지로 케임브리지에서 수학하고 현재 모교에서 교편을 잡고 있기도 합니다. 런시먼과 관련해 한가지 흥미로운 점은 2015년부터 ‘talking politics‘라는 팟캐스트를 운영하고 있다는 점인데요. 이 프로에 토마스 피케티, 주디스 버틀러 등이 출연하기도 했습니다. 최근에 국내에도 그의 두 편의 논저가 번역되기도 하였습니다. 실제로도 견고한 민주주의자라고 할 수 있는 런시먼은 정치 외부에서 민주주의를 위해 끊임없이 발언을 하고 있는 지식인이기도 합니다. 이 책은 지난 2008년에 원제 ˝ Representation˝으로 출간되었고, 국내에는 2020년 11월 번역 출판되었습니다. 이 책과 관련해 한가지 더 첨언하고 싶은 부분은 해당 글을 출간한 국내 출판사에서 ‘레-프리젠테이션‘이라는 소위 ‘대표 개념‘시리즈로 몇몇 논저의 출판 일정이 잡혀 있기도 한데요. 특히, 한나 피트킨의 글이 번역될 예정으로 나와 있어 개인적으로 무척 반가운 기분이 들었습니다. 조만간 피트킨의 글을 만나볼 수 있기를 기대해 보겠습니다.

우선 이 글은 총 3부로 구분되어 결론을 포함한 총 7장의 하위 주제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대표의 현대성을 다룬 3부가 중요하다고 여겨졌는데요. 사실 대표 자체가 민주주의와 함께 탄생되었느냐에 대한 질문부터 대표와 민주 정치에 대한 연관성을 분석하고자 하는 여러 글들이 있기도 합니다. 우리의 현대 정치에서 민주주의와 관련된 이 대표 개념은 전체적인 민주주의 역사에서 꽤 돌발적으로 나타난 것으로 볼 수 있겠는데요. 과거 영국을 비롯한 사회 발전의 역사와 다수 정치의 이행 과정에서 이 대표 자체는 엘리트들이 자신들의 이익을 어떻게 하면 다수의 반발과 거부 없이 보호할 수 있겠느냐에 따른 어떤 부산물과 같은 의미로 이미 글의 5장에서 논의됩니다. 이미 현대의 민주주의가 엘리트주의적 정치 형태로 사실상 다원주의가 설 땅을 잃어가고 있는 상황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이에 5장에서는 ˝이런 식의 다원주의는 소수 지배의 한 형태이며, 비록 다양한 소수가 교대로 정치 대표자를 압박할 수 있다고 해도, 시민 대다수가 언제든 배제된다는 사실이 달라지지는 않는다˝고 분석해 냅니다. 물론 이런 대표와 민주주의를 서로 긴밀히 연계시켜 이론화하는 글들도 많이 있습니다만 ‘자유주의‘ 대 ‘민주주의‘와 같은 개념으로 대표 역시 민주주의 이념에 있어 어떤 측면에서는 그 의미 자체를 부정적으로 상충시키는 측면도 분명 있다는 점을 먼저 밝혀 두고 싶습니다.

1장에서 공저자들이 다루고 있는 대표 개념의 역사에서 토머스 홉스는 대표 자체가 권력의 수단적 측면으로 바라보고 있었는데요. 그가 밝히는 국가의 개념 또한 수동적인 측면이 있어서 오늘날 홉스의 개념을 중요하게 여기는 학자들에게 있어서 그 의미상의 한계는 명확하다고 봐야할 것 같습니다. 이에 오르테가 이 가세트는 혁명의 언저리 시기에 거대해진 이 공중에 대해 어떠한 조치가 있어야 한다고 믿었던 만큼 그것이 민주주의를 위하던 아니던 간에 대표 자체가 모두를 위해 위임된 권력을 효과적으로 발휘할 수 있겠는가에 이 대표의 역사가 관통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사실 진정한 ‘인민으로부터 권력을 부여받았다‘는 개념은 18세기 장 자크 루소에 의해 비로소 도출된 개념으로 그 이전까지는 명목상이면서 관념적인 의미였다고 봐도 무방해 보입니다. 여기에 루소는 ˝대표 개념의 발전은 정치적 지배의 인민적 형태와 독재적 형태 사이에서 선택할 필요를 없애 준 것이 아니라 그 선택을 두드러지게 부각했을 뿐˝이라고 강조하기까지 하는데요. 루소가 원했던 것처럼 다수의 일반의지가 이 대표에 맞물려 그것이 진정한 인격을 갖추고 모두를 위해 능력을 펼칠 수 있는 시기는 아직 진정으로 나타나지 않았다고 봐야 할 것 같습니다. 다만, 현재까지도 이 대표 개념이 민주주의와 깊은 연관을 갖고 있다고 모두가 믿으려고 하고 싶어하는 것처럼 직접 민주주의냐 대의제냐 하는 문제를 떠나서 스스로 실효적인 대표성 확립을 위해선 개인들 간의 이익 충돌의 문제, 사익과 대의와 관련된 인식적 부조화, 시민의식의 결여 등 이러한 본질적인 문제들을 해결하지 않고서 어떤 대표의 외형적 제도 확립과 같은 선언적인 내용들만을 강화하려는 것은 그 한계가 명확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과거 미국 독립 혁명 시기에 건국의 아버지들은 개인들의 자유와 이익을 위해 진통 끝에 연방제를 비롯한 다방면의 국가 제한에 동의하게 되는데요. 이들 남성 엘리트들이 주도한 미국 건국의 모습에서도 슘페터는 ˝민주정치가 불가피하게 엘리트 중심이라는 의견에 동의˝하면서도 ˝대표제 자체가 엘리트와 나머지 사람들 사이의 간극을 메우는 수단이 될 수 있다˝는 관점에 대해서는 이미 회의적인 시각을 보인 바가 있습니다. 앞서 제가 언급한 대로 대표 개념의 탄생 자체가 어쩌면 다수의 공중을 무질서와 혼란으로부터 제어하기 위해 탄생한 개념일 것입니다. 존 스튜어트 밀이 살았던 시기에도 이러한 의도는 아주 명확했으며, 홉스 시기에도 ‘적절한 재산을 가진 자들‘이 다수를 통치하는 형태의 정치 제도에 대한 이해가 상위 계층에 있었던 것도 분명합니다. 물론 민주주의 제도 하에서 대표를 뽑을 수 있는 권한은 분명 시민들에게 주어진 것은 부정할 수 없는 부분입니다. 주권의 의미가 본질적으로 확대된 개념으로 이 대표를 해석하는 것도 충분히 근거가 있으며, 엘리트 정치 역시 민주주의의 주권 개념을 확실히 수용하고 있기도 합니다. 다만, 이렇게 이론적으로 규명된 정치학 세계의 관념들이 현실 세계와 비교했을시에 일정 부분 충돌이 일어나며 많은 학문적 차원에서 이론과 현실이 서로 들어맞지 않는 상황까지 나타나기도 합니다. 뿐만 아니라 현대 민주주의는 자본주의의 지배를 받고 있다고 봐도 무방할 정도로 정치의 쇠퇴화가 거의 40여년에 걸쳐 각 사회에서 진행되어 왔고 여기서 근본적인 문제는 이러한 자본주의를 마땅히 비판하기 위해 모두가 나서야 하지만 반대의 이상한 저항이 있는 것도 한편으론 이해하기 힘든 부분이기도 합니다.

앞선 측면에서 장 자크 루소 이전에 존 스튜어트 밀은 ˝노동계급을 적절히 대표할 수 있는 방법에 관한 자신의 관심˝을 드러낸 바가 있습니다. 의회를 구성하는 다수의 정치인들이 계급 정치를 이해할 수 있겠는가와 권력 바깥에 있는 다수의 시민들의 삶에 얼마나 진정성을 갖고 이를 대변할 수 있겠느냐가 오늘날은 중요한 문제로 대두되었습니다. 이미 지금의 미국 정치는 정당 정치 자체가 이익 단체화 된지 오래되었고 개개의 정치인들이 마이크 앞에서는 정치적 대의와 민주적 선명성을 매번 강조하지만 실제로는 그 반대의 행동을 보이게 되는 정치 구조적인 파편화에 이르렀는데요. 그래서 저는 진정한 의미의 대표는 민주주의 정치에서 아직 실현되지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애초에 1945년 이후 이러한 가능성을 엿볼 수 있는 기회가 있었으나, 이후 진행된 첨예한 냉전의 시기에서 거의 맹목적인 자본주의 이념으로 인해 철저하게 무산된 것은 굳이 언급하지 않아도 잘 아시리라 믿습니다. 아마도 이러한 파행에는 제러미 벤담이 이해했던 위에서 아래로부터의 정치적 대표에서 기인해 그것이 굳어진 채로 이어져 내려온 역사가 있기 때문이 아닌가하는 생각도 들기도 하는데요. 샹탈 무페는 이 지점에서 진정한 민주주의 혁명을 시민들에게 요구했던 것이 아닐까 짐작해 봅니다. 과거 토크빌과 존 듀이의 요구 역시 이와 궤를 같이한다고 할 수 있는데요. 불행하게도 대표제 민주주의 자체의 흥망성쇠는 시민들과 엘리트 정치 사이에서 권력의 지렛대가 다수의 시민쪽으로 기울여져야만 실행될 수 있을 겁니다. 여기에는 다수의 정치를 중우 정치나 군중 정치로 몰아가는 엘리트화 되어 있는 지식인들의 공격부터 정치는 애초에 우리것이 아니었다는 만성적인 패배감에 젖어 있는 다수 시민들의 각성이 필요한 것은 명백해 보입니다. 물론 이러한 상황에서 자본주의 자체를 배격하기 보다는 정치의 축소를 되살리기 이전에 개인의 이익과 사회 전체의 이익을 어떻게 하면 충돌없이 조화를 이루게 할 수 있을지 고민하는 것도 전제되어야 할 것입니다. 개인적으로도 자본주의가 개인의 자아 실현과 욕망 충족에 분명 이바지하는 부분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뭐든지 지나친 형태로 돌출되는 것은 지양해야 할 것입니다. 개인적으로 4장에서 보이는 시민의 생득적 권리와 이익이 어떠한 관계가 있을지 조금 의문이 들기도 합니다만 전체적인 측면에서 두 공저자의 이 논저는 크게 벗어나지 않는 대표 개념의 개론서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끝으로 민주주의가 헌법적인 정당성 내에서 발전해야만 하는 것처럼 반대로 정치 전반의 모든 갈등과 문제를 사법으로 해결하고 사법이 이에 개입하게 되는 것은 좋지 못한 결과로 나타날 수 있다는 인식에 다시 한번 동의하게 되었습니다.

인민은 그 자체로 하나의 집합적 인간이 아니며, 이질적이고 분쟁을 일으킬 수 있는 개인들로 이뤄진 집단들이 전부 그러하듯 어떤 행동을 하기 위해서는 대표자가 필요하다

홉스는 대표가 권력의 도구임을 확고히 밝혔다. 그는 만일 대표가 ‘권한 부여‘와 ‘책임 감수‘라는 측면에서 이해된다면, 인민의 동의를 기반으로 이뤄지는 정치는 절대적인 복종의 의무를 낳을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주었다

벤담은 영국의 기성 정치 지배충이 이성의 목소리에 귀 기울일 의사가 없다는 것을 깨달은 후에야 비로소 선거권 개혁 - 보통선거, 연례 회의, 비밀 투표 등과 같은 - 을 밀어 붙여야 한다는 급진적인 생각을 받아들였다

슈미트가 봤을 때 대실수는 다원주의와 거기에 결부된 가치 및 관행은 민주적이고, 결단력 있는 리더십은 비민주적이라고 전제하는 데 있었다. 이 같은 전제와 달리 그는 바이마르 공화국에서 그토록 두드러지게 나타난 정치적 우유부단과 불안정성이 자유주의의 증상이라고 믿었다

만약 정치 대표자가 피대표자의 이익을 대변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데, 아무도 거기에 이의를 제기할 수 없다면, 그것은 대표가 아니라 그냥 온정적 간섭주의다

대표의 원리 그 자체는 집합적 의사 결정 과정에서 소수파에게 스스로를 보호할 수 있는 방편을 제공하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홉스가 국가를 비롯한 몇몇 집단은 독자적으로 행동할 수 없을 것이며, 집합적 의사 결정을 내리기 위해서는 대표자에 의존해야 할 것으로 본 점은 옳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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