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애하는 빅 브라더 - 지그문트 바우만, 감시사회를 말하다 질문의 책 1
지그문트 바우만 & 데이비드 라이언 지음, 한길석 옮김 / 오월의봄 / 2014년 2월
평점 :
절판


더이상 다른 수식어가 필요없는 위대한 사회학자인 지그문트 바우만과 스코틀랜드 출신의 사회학자이자 감시학의 대가이며, 근대성과 관련된 연구에 평생을 바친 학자이기도 한 캐나다 온타리오 킹스턴의 퀸즈 대학의 교수인 데이비드 라이언의 대담집인 이 책은 지난 2011년 9월과 11월 사이에 오고간 이메일을 통해 탄생한 논저이기도 합니다. 두 사람은 직접 대면하지 않고서도 쉬이 대서양을 오가는 전자 이메일을 통해 서로간의 의견을 교환할 수 있는 네트워크적 시대의 도래를 증명해내는 것으로도 증명하고 있는데요. 이러한 관점의 시각은 이 글이 관통하고 있는 주제와도 일정부분 연관되어 있어 여러모로 모두에게 꽤 시의적절한 관심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고 여겨집니다. 어쩌면 촘스키와 바사미언의 대담집과 유사한 측면의 논저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만, 어찌됐든 바우만과 라이언의 현재의 ‘감시 체제 및 통제 사회‘에 대한 꽤 논리적인 근거들은 제게 있어서도 시사하는 바가 가볍지 않다고 느껴졌습니다. 또한, 데이비드 라이언의 훌륭한 논저인 ˝감시사회로의 유혹˝도 국내에서 구할 수도 있으니 따로 참고하는 것도 이 책을 이해하는 도움이 되리라 생각됩니다. 따라서, 이 글은 지난 2012년, ˝Liquid Surveillance˝라는 원제로 출간되었고, 국내에는 2014년 2월 번역 출판되었습니다. 다만 아쉽게도 현재 이 번역본은 절판된 상황인데요. 얼마전에 서평을 쓴 지그문트 바우만의 ‘부수적 피해‘의 판권 문제를 고려해 봤을 때, 동일 출판사가 다시 재간행을 할 수 있을지는 불확실하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먼저, 책의 6장에서 데이비드 라이언이 인정하고 있듯이, 2001년 이후의 변화된 세계에 따른 전세계적인 초고밀도의 감시 체계와 통제 사회로의 이행은 사실상 ˝사회학에서도 보기 힘든 사례˝임은 분명해 보입니다. 책의 원제인 ˝유동하는 감시˝가 밝히는 주제와 마찬가지로 꽤 오랫동안 이 감시라는 주제에 관심을 가져온 지그문트 바우만은 자신이 고안한 사회학적 개념인 ˝유동성과 액체 근대, 소비주의 및 쓰레기가 되는 삶과 쓰레기가 된 인간˝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글을 추동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가운데 데이비드 라이언은 지그문트 바우만의 의견을 이끌어내면서 자신과 바우만의 동일한 이해를 바탕으로 일종의 열린 결말을 이끌어내고 있는데요. 단순히 전방위적인 세계 감시 체계와 그에 따른 안보 보장을 위한 이런 시스템의 구축이 그저 조지 오웰과 올더스 헉슬리가 예견한 디스토피아적인 산물이 될 것인가에 대해서는 두 사람 다 단순한 문제로 보고 있지는 않습니다. 이에 1장에서, 오늘날 페이스 북으로 시작된 수많은 개인들의 연결된 인간관계와 온라인 삶의 확대는 단순히 좋다 나쁘다를 판단하기 이전에 ˝극명한 양가적인 문제˝가 존재하고 있다는 점은 꽤 설득적이기도 합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바우만은 현재의 시민들이 ˝확실하게 분리된 온-오프라인에서의 삶을 영위하고 있다˝고 전제하고 이것이 현재의 사회와 사회학에 증명하고 있는 것은 긍정과 부정을 모두 포함한 것이라고 그는 밝히고 있습니다. 여기에는 각각의 개개인들의 실존적 딜레마를 포함하고 있고 과연 이러한 보여주기식의 삶에서 자신들의 정체성을 스스로 규명해내고 과거와의 단절을 용인하면서까지 거대 네트워크 기업들의 살만 찌워주고 있는 현 시대의 단상을 꽤 비판적인 인식을 통해 두 사람 모두 이를 파헤치는데 할애합니다.

뒤이어, 2장은 불확실성을 더욱 부추기는 현대의 유동성을 근간으로 벌어지고 있는 시대적 단상에서 더욱 강화되고 있는 제레미 벤담의 파놉티콘의 ˝차별적인 강화 버젼˝에 대해 논하는 것으로 이어집니다. 단순히 단조로운 구속 상태에 대한 시스템의 안정을 추구했던 벤담식의 파놉티콘으로는 현재의 모습을 전부 해석해 낼 수는 없으며, 그러한 감시 체제 가운데에서 철저히 배제되고 있는 외부자들, 잉여자들, 쓰레기 인간들의 발생에 대해 바우만은 일관된 논조로 이 현상을 비판하고 있습니다. 바우만의 이 확장된 인식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의 논저 ˝쓰레기가 되는 삶들˝의 일독이 필요해 보입니다. 이에 데이비드 라이언도 일정 부분 동의하고 있듯이, 민주주의가 쉽게 전체주의로 나아갈 수 있다는 점과 마찬가지로 자유주의 사회에서 예외로 존재하는 권력에 대한 경계와 더불어 극한의 자유가 필시 극한의 이기주의를 낳는다는 토크빌 식 개념의 차용은 현재의 ˝감시 통제 사회의 구축˝이 무얼 뜻하는지 짐작하게 합니다. 이것은 바로 3장에서 바우만이 지나간 역사속에서 찾고 있는 ˝나치주의자들과 공산주의자들이 신념에 가득한 채 벌인 일들˝에 대해 논하는 것으로 독자들에게 진실의 그림을 그려보게끔 하고 있는데요. 국가와 사회에 해가 된다는 이유만으로, 마땅히 축출할 수 밖에 없는 인간들이 있다는 이유 만으로, 자신들의 절대적 순수함을 위해 수많은 무고한 사람들을 절멸에 이르게 한 전체주의와 자신의 사상에 반한다는 이유로, 혹은 반동주의 사상에 물들어 있다는 이유 만으로 극한의 수용소로 수많은 인명을 말살에 이르게 한 공산주의의 결말이 현재 빠른 속도로 구축화 되고 있는 또는 권력에서 빛보다 빠른 속도로 정치를 분리시키고 있는 암울한 미래에 대한 ‘증명 사진‘될 수 있다고 여겨집니다. 물론 이 지점에서 터무니없는 인식 과정이라고 반대할 분들이 계시겠지만, 쿠바 관타나모에 있었던 사건이나, 대표적인 인명 경시의 부수적 피해로 확인된 2011년 2월의 아프가니스탄에서의 무고한 22명의 결혼 하객에 대한 드론의 공격은 어느 정도 이를 증명한다고 생각됩니다. 또한, 미국의 연방수사국 (FBI)이 600만명의 안면 인식 데이터를 넘어서 전국민의 안면 인식 데이터를 구축하고자 하는 이 불필요하고 위험한 욕망을 과연 정치가 제어할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얼마간 불명확하다고 할 수 있을겁니다. 마찬가지로 3장 또한, 바우만의 ˝부수적 피해˝의 일독이 필요한 장이기도 합니다.

다음, 4장과 5장에서는 ˝완전 강박적인 반자유주의적인 민주주의가 컴퓨터 기술에 기초한 감시를 증가시키고˝ 있는데, 바우만과 라이언이 동의하고 있듯이, 이런 체제 이면과 더불어 날로 발전되는 과학 기술의 비윤리성 및 도덕성의 배제는 우리 미래의 전반을 암울하게 만드는 것이기도 합니다. 제임스 데어 데리언에 따르면, 이런 군-산-미디어-연예 복합체 military-industry-media-entertainment 는 더욱 가속화 되고 있고, 분명 이러한 감시 체제의 확장과 발전은 이들 주요 이익 수여자들에게 새로운 산업임은 분명해 보입니다. 애초에 안전과 안보라는 미명하에 구축되고 있는 이 시스템이 과연 ˝도저히 채워지지 않는 안전이라는 욕망˝을 완벽하게 채워줄 수 있겠는가에 대해서는 극히 회의적입니다. 바우만의 언급대로라면, 아무리 현관에 많은 자물쇠를 채운다 하더라도 그러한 집에 살고 있는 사람의 안전에 대한 욕망을 완벽히 채울 수는 없을 것입니다. 더불어 더 큰 문제는 이 패러다임의 강고함이 이를 수용하지 않고 반대하는 사람들의 처우를 사실상 관심을 끊거나, 바깥으로 밀어내는 식으로 ‘사회의 균질함‘을 추구할 수도 있다는 점에서 사뭇 큰 문제로 도출될 수 있을텐데요. 그래서 무엇보다 ˝권력에 정치가 더욱 더 가까워지고 밀접해져야˝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한 것이 확실한 불안요소 일테죠. 결국 이 모든 메커니즘은 불활실성을 가중시킨 ‘유동적인 근대˝에 기인한 것이며, 그런 연유로 ˝우리의 현대는 이에 마땅한 대답을 제시할 수 있어야만 한다˝는 데이비드 라이언의 주장은 그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끝으로, 7장의 결말은 자크 데리다가 단초를 제공한 ˝최후 희망의 보루˝가 과연 우리에게 주어지게 될지에 대해서 법을 지키는 개인들로서 마땅한 침해할 수 없는 권리를 갖고 살아가는 수많은 시민들의 종착점이 반민주주의적인 무언가로 나아가게 될지도 모르는 이 불확실성을 안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매우 당연하게도 이를 거부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해야 될겁니다. 그런 의미로 저는 이 글에서 앞선 논의에 대한 약간의 단초를 얻기도 했는데요. 그것은 ˝자유주의 사회에서 예외된 권력˝을 휘두르는 조르조 아감벤의 경고 아닌 경고인 ˝이 축소된 예외 상태˝와 같은 시민들에게 어물쩡 수용되기만을 바라는 인정되지 않는 권력에 대한 제거와 이를 통한 모두의 공감대가 필요하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단순히 제러미 벤담식의 ˝다수에 의한 소수의 감시˝가 아니라 ˝소수에 의한 정밀한 다수에 대한 감시˝의 모두가 원하지 않는 결말을 우리가 어느 정도 인지하고 있는 것 만으로도 이를 미연에 막을 수 있는 최소한의 시작점이 될겁니다. 따라서, 그런 의미에서도 오늘날의 네트워크 시대의 도래는 다른 한편으로는 시민들의 연대와 각성을 불러 일으키는 수단이 될 수도 있다는 측면에서 양가성을 드러내고 있는 부분은 마냥 디스토피아적인 문답을 강요하기도 어려운 실정임은 다소 분명해 보입니다.


-본문 46페이지의 피루스 왕의 승리는 피로스 왕으로, 52 페이지의 뒤르켕은 뒤르켐으로 수정해야 된다고 생각됩니다.

-1장에서 지그문트 바우만은 한국의 디지털 사회 사례를 소개하며, 한국의 사회 생활이 이미 전자적으로 매개된 지 오래이며, 이러한 가운데 피와 살을 가진 존재들과의 사회 생활은 부차적일 뿐이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이 지점은 단순히 온-오프라인의 철저히 분리된 삶을 뛰어넘어 오늘날 한국 사회의 일면을 명확히 분석한 것으로 여겨졌습니다. 물론 약간 현 상황에 대한 부정적인 뉘앙스는 존재하지만, 그것도 2012년에 한국에 대한 실정을 바우만이 이렇게 정확히 짚어낸 점은 대단하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다만, 이러한 한국 사회의 ‘디지털 매개적 삶‘은 분명 장단점이 확연한 것으로 일정 부분 정치에서의 긍정적인 기여도 있다고 언급하고 싶습니다.

-바우만의 현실 인식이 들어간 직설적인 화법이기도 합니다만, 역시 프랜시스 후쿠야마의 시대 착오적인 논법을 마지막 장에서 비판하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공포를 동반하는 삶을 살아볼 만한 것으로 만들려고 무진 애를 쓰고 있다

파놉티콘이라는 주제를 다룰 때 장치라는 푸코적 개념의 중요성은 여전히 인정받을 수 있지만 오늘날 세계적 맥락에서 나타나고 있는 정치경제학 기술을 다루기 위해서는 이 개념을 넘어서야만 한다

만일 사회 분석이 소외되고 떨쳐진 사람들에 대해 특별히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믿는다면, 이러한 현상을 강화시키는 메커니즘을 이해하는 작업은 매우 중요하다

우리는 시민이 아닌 평범한 사람들로서 역할을 하면서 끊임없이 점검과 감시, 시험을 받고, 평가되며, 값이 매겨지고, 판정을 받는 것을 허용하고 있다

이 사회는 예전에는 공개적인 것과 사적인 것을 분리시키던 경계를 지우고, 사적인 것을 공개적으로 노출시키는 것을 공적 미덕이자 책무로 만들어버리는 것으로 악명을 떨치고 있다

나치와 공산주의자들은 어수선하고 불분명하고 무작위적이며 통제를 거부하는 모든 요소 혹은 인간 조건의 측면을 대규모로 그리고 일거에 제거하려고 착수했다

우리는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다. 불/안전에 관련된 기술들은 단지 정보와 소통 기술공학의 소산으로만 이해할 수도 없고, 혹은 우리가 용인하고 있는 예외 상태에 갇혀 버려서 생긴 결과물만으로 이해할 수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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