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시민주의 전통 - 고귀하지만 결함 있는 이상
마사 C. 누스바움 지음, 강동혁 옮김 / 뿌리와이파리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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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래 인도 출신의 저명한 경제학자이자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인 아마르티아 센과 함께 보편적 평등주의에 입각한 전세계의 빈곤 문제와 사회경제적 불평등에 집중해 온 마사 누스바움은 세계적으로 존경받는 법철학자입니다. 그녀는 미국 뉴욕대에서 학사 학위를 하버드 대학에서 박사 학위를 수여 받은 뒤, 하버드 대학과 브라운 대학을 거쳐 미국 사회과학의 명문 시카고 대학에서 교수로 재직중에 있습니다. 어떻게 보면 누스바움은 ‘보편적 인류애‘에 입각한 인간 존엄과 인권에 관심을 갖고 있는 학자라고 볼 수 있을텐데요. 이 책에서도 인용되고 있지만, 키케로가 철학자들이 정치에 참여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큰 잘못이라고 말한 부분을 우리가 인지한다면 최근의 누스바움은 이러한 ‘할말을 하는‘ 지식인의 책무에 관한 표본이 되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런 그녀의 이 글은 원제, ˝The Cosmopolitan Tradition : A Nobel but Flawed Ideal˝로 2019년 출간되었고, 국내에는 거의 최근인 2020년 6월 번역 출판되었습니다. 간단한 소개글을 마무리하기에 앞서, 역자의 번역이 매우 훌륭하다는 점을 밝혀두고 싶습니다. 이렇게 번역하기 쉽지 않은 논저를 매끄럽게 번역한 역자의 노고에 감사하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군요.

저자인 누스바움에 의해 이뤄진 강연에 기반해서 쓰여진 이 논저는 크게 현재의 ˝물질주의적 자유주의 세계정치˝에서 과거 키케로부터 시작된 세계시민주의에 대한 단초를 기반으로 주류 철학의 기반이 되어있는 스토아주의를 일정부분 비판하고 이를 통해 보편적인 인류애적인 세계 시민 사상의 좀 더 가능성 있는 틀을 마련해보고자 하는 꽤 대단한 작업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사실, 많은 철학자들이 강조하고 있듯이 이성을 품고 있는 인간이 현실의 작동 원리와 칸트가 규명하고 강조했던 인간 본연의 자유, 인권과 같은 보편적 권리가 오늘날에 와서는 왜 제대로 작동하고 있지 않은지에 대해 끊임없이 의문을 갖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이 지점에는 우리의 자본주의가 꽤 원치 않는 결과를 양산해 낸 것은 분명합니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시민의 권리로서 또한 정당한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이를 제대로 인식조차 하지 못하고, 또한 이런 알권리들에 대해 반대의 입장을 가진 어용 지식인들의 입질에 넘어갈 수밖에 없었는지 그 원인을 다소나마 찾는데 누스바움의 이 글은 큰 도움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세계시민주의에 대한 주요한 선구자들로 등장하는 키케로와 그로티우스, 애덤 스미스를 연결시켜보는 것은 그녀의 탁월한 작업이라고 할 수 있을겁니다. 다만, 국내에는 그로티우스의 논저들이 번역되어 있지 않은 점이 큰 아쉬움으로 다가오기도 하는데요. 그나마 핵심 의제들을 누스바움이 잘 정리해 놓고 있어서 간접적으로 그로티우스의 지적 궤적들을 독자들이 이해할 수 있게 되는 점도 마찬가지로 이 책의 훌륭한 점이라고 하겠습니다.

먼저, 키케로는 당시 스토아주의에 맞서 약간 소크라테스와도 일맥상통하며 ‘스스로 원했던 최후를 맞이한‘ 당시의 정치가이자 철학자, 웅변가였습니다. 소위 ‘틸리의 책‘이라고 불리우는 그의 의무론은 누스바움이 꽤 심도있게 스토아주의와 비교 분석하는 학문적 매개이기도 합니다. 여기에서 키케로는 일반적인 ‘정의론‘을 지지하고 적극적 불의와 소극적 불의로 대변되는 ‘불의론‘으로도 누스바움은 이를 인용하고 있습니다. 예를들면, 누스바움이 해석한 ˝그들이 겪는 굶주림과 가난이 한 명 이상의 다른 사람들이 저지른 부당행위로부터 야기된 게 아니라고 가정할 수 없다는 것˝과 같이 키케로에게도 정의의 의무와 물질적 원조의 의무는 일반적인 ‘정치적 정의‘에서 중요한 사유였던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오늘날에 이르러서도 반대의 스토아주의적 교설(doctrine)의 허위로서, 개인의 삶의 비참함이 그 사람의 도덕적 나약함의 결과라고 주장하는 것과 같은 종래의 언설들이 상반된 입장을 갖고 있는 키케로주의자들과의 간극이라고 할 수 있을겁니다. 바로 여기에서는 누스바움이 지적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오늘날 스토아주의적인 곡해로 애덤 스미스의 사상을 왜곡하는 결과는 매우 심각한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 사실 기존의 애덤 스미스의 사상을 곡해한 밀턴 프리드먼과 프리드리히 하이에크가 자유주의의 화신으로 스미스를 세운 것과 하이에크 본인이 ˝사회에 정의 따위가 필요한 이유가 있는가˝를 내뱉은 것과 상반되는, 과거 칸트가 ˝이성으로 이뤄진 모든 인간이 불필요한 중세적 굴레를 벗어나기 위한 시작점에서 계몽주의가 있었던 것˝처럼 보편적 인간이라면 바로 그 ‘정의감‘에 눈을 감고 있을 수는 없을겁니다. 바로 여기에는 그동안 수많은 왜곡된 지식인들이 ˝정의 따위를 찾는 것은 나약한 이상주의에 불과하다˝거나, ˝경제적 인간이라는 관점에서 개인의 합리적 이기심을 위해 약간의 도덕주의는 무시할 필요가 있다˝는 식의 합리화가 어떤 부류들에게 이익이 되었는지는 얼마간의 분석으로도 다소 명백해 보이지 않습니까.

뒤를 이어, 이러한 키케로의 사상에 접목한 인물이 바로 휴고 그로티우스입니다. 그도 역시 쉽게 저버릴 수 있는 개인적 신념을 지녔던 것으로 추측되는데요. 특히 자신의 종교의 자유와 관련하여 자신의 모국을 떠나 프랑스로 사실상 망명한 점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생각합니다. 그도 앞선 키케로와 마찬가지로 보편적인 인류애와 무엇보다 개인이 주체가 되는 도덕주의에 집중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 부분은 그가 국가의 주권과 관련된 문제와 관련해서 일반적인 측면의 국가 주권과 개인의 도덕률 내지는 도덕주의의 충돌에 대해 후자의 입장을 강조했던 것을 비추어 보면 명확합니다. 이에 누스바움은 ˝그로티우스가 보기에는 도덕적 자율성이나 그를 통한 정치적 주권의 궁극적 원천은 모두 개인의 양심이었다˝고 분석합니다. 이런 누스바움이 설명한 그로티우스와 관련된 4장을 읽으면서, 그가 오늘날의 인식대로 꽤 상식적인 다원주의자이자, 세계 정부와 같은 이론을 그려본 것이 아닌가 생각해봅니다. 아쉽게도 민족국가에 이르는 베스트팔렌 체제를 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난 것이 그의 학문적 사상이 완성되지 못하는 원인이 되기도 했습니다만, 저자인 누스바움의 말대로 그로티우스가 오늘날 세계의 국제정치학자들에게 끼친 영향은 지대하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특히 ‘화점론‘이라고 일컬어지는 그의 전쟁과 평화론은 여러모로 의미가 있는 논저라고 불릴만합니다. 또한, 국제 사회 및 세계 국가들에게서 각자가 갖고 있는 외적 자원과 자원을 할당할 권리는 국가 주권이라는 개념의 핵심에 놓여져 있는 것으로 생각하고 키케로의 정의로운 전쟁론과 사뭇 대비되는 그로티우스적인 정의 전쟁의 인식적 결과물 또한 흥미롭기도 합니다. 빈곤과 가난이 심각하게 퍼져 있는 도식적인 한 국가를 토대로 삼자간의 전쟁에 대한 명분이 어떤식으로 행위에 대한 결정론이 되는지 누스바움은 이를 잘 설명해내고 있습니다. 과연 이들 가운데 누가 도덕적으로 정당화될 것인가에 대한 질문은 흥미롭기도 합니다.

다음 5장은 누스바움의 이 책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라고 할 수 있겠는데요. 기존의 스토아주의적인 전통에서 외적 자원과 관련된 인간 사회의 구조적인 맹목성으로 말미암아 어떻게 이 애덤 스미스를 곡해하고 왜곡해 왔는지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 절은 앞선 키케로와 그로티우스에 이은 세계시민주의적 도덕적 세계 정부론에 중요한 원리가 되는 스미스의 ‘도덕 감정론‘을 기반으로 하고 있습니다. 물론 ‘국부론‘ 역시 적절하게 인용이 되기도 하는데요. 물질적 재화와 그에 따른 분배를 ‘외적 자원‘의 기본 코드로 놓고 이번 장을 분석한다면 꽤 명쾌한 결론을 얻을 수 있습니다. 이것과 관련해 칸트는 ˝스미스의 저작을 존경했고, 칸트적 형태의 자유주의는 이에 영향을 받은 것이 틀림없다˝고 저자는 분석하고, ˝개인의 사익 추구에 대한 스미스의 변호는 자제력에 관한 도덕적 주장에 짜여 들어가 있으며, 이런 토대 위에 지어진 사회에 대한 그의 설명은 홉스나, 심지어 로크의 설명과도 엄청나게 떨어져 있다˝는 점도 그동안 얼마나 스미스의 사상이 곡해받아 왔는지 드러낸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그는 당시의 노동자들의 삶에 관심이 많았고, 특히 날로 증대하고 있던 대규모 제조업자들이 정부에 끼치는 부당한 영향력에 그가 관심이 많았다는 것은 실로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오늘날에는 밀턴 프리드먼과 궤를 같이 하는 인사들이 애덤 스미스를 무슨 자유주의 경제의 화신으로 여기고 있으나, 진실은 그가 정치적 도덕성에 관심이 많았으며, 개인의 권리와 사회적 관계의 중요성, 그리고 ˝어떤 사회도 구성원의 대다수가 가난하고 궁핍한 가운데 번영하며 행복을 누릴 수 없다˝고 주장한 바가 있습니다. 더불어, 앞서 키케로가 중요시 여긴 ˝인간 존엄성의 맥락˝이 실상은 다치고 부서지기 쉬운 것으로 현실주의적 입장을 내비친 스미스의 지혜 역시 뭔가 그 이질감이 대단하다고 할 수 있겠는데요. 아마도 이런 연유에는 다수 경제학자들에 의한 도덕 감정론의 무시와 이것을 꽤 관념주의적 논저로 몰아간 몇 백년간의 지속된 작업도 한 몫을 했을 겁니다. 따라서, 스미스 역시 개정된 도덕 감정론에서 이런 스토아주의에 대해 비판을 가하고 있는데요. (인간과 사회에 대한) 절대적 무관심이 ‘섭리‘라는 스토아주의의 교설과 만났을 때, 도덕주의의 사실상의 퇴락을 가져온다는 점에서 어떻게 보면 기존의 자본주의의 이행(인간과 사회가 배제된)과 그런식으로 매우 교묘하게 닮아 있기도 합니다.

끝으로, 꽤 (실제로) 합리적인 경제학자인 대니 로드릭은 오늘날의 세계 정부와 세계 시민주의와 관련된 움직임에 다소간 부정적인 시선을 던진바가 있습니다. 다른 관점으로 돌려보면, 이 세계 정부에 대한 선결적인 조건들 가운데, 다원주의적인 관념이 포함되어 있어야 할 텐데요. 이는 명백하게 민주주의적 토대의 기본 가치이기도 합니다. 이를 다시 고려해본다면, 오늘날의 경제적 파행의 결과들을 개선하기 위해 나타난 세계 시민주의와 관련된 이론들은 결국 다시 ˝민주주의로 돌아가자˝는 것과 다름 없습니다. 아예 좀 더 노골적으로 말한다면, ˝시장에 다시 정치를 귀환시키자˝와 같은 말이 되겠죠. 이에 누스바움은 마지막 결론에서 모두가 인정할 만한 정의로운 가치와 인간 존엄성의 존중, 더이상 혐오를 하지 않는 발걸음 등을 내세우고 있습니다. 몇가지 구조적인 움직임에 대한 선결 또한 제시하고 있는데요. 다만, 아직까지도 민족에 의한 국민국가주의에 손을 들고 있는 시민들도 많고 현재 유럽의 이슬람 이주민들과 다른 민족의 유입에 따른 여러 문제들을 놓고 봤을 때, 이 지점은 특히나 ˝시민들의 사회경제적 불평등 문제˝에 관련이 깊어 아예 기존의 사회경제적인 패러다임의 변화와 소수의 배만 채우고 있는 ˝금융화˝에 대한 조절이 먼저 필요해 보입니다. 이 점은 과거 국제 사회가 각 은행들의 ˝자기 자본 비율˝을 강제했던 것과 같은 아이디어가 있어야만 한다고 여겨지는데요. 따라서, 올바른 정치는 이런 부분에서 꽤 훌륭한 효과를 거둘 여지가 있어보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본질적으로는 다수의 시민이 중심이 되는 이러한 시민 정치에 대해 소수의 기득권과 엘리트 계층이 소위 말하는 ‘군중 정치‘로 몰아갈 가능성이 다분하기에, 양자 사이의 긴장은 최근들어 높아졌다고 봐도 무방해 보입니다. 마찬가지로 여기에는 주권에 대한 개념과 이 주권의 시도 행위가 어디까지 용인될 수 있는가에 대한 시민들의 공감대와 누스바움이 이 책에서 지적하고 있듯이, 주권과 시민의 기본권이 어떻게 하면 평화롭게 맞물려 나갈 수 있을지에 대한 올바른 지식인들과 학자들의 연구도 동시에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저자가 염연히 철학자인 만큼 이러한 꽤 관념적이고 도덕적인 저술이 마음에 들지 않을 독자들이 있을텐데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동안의 애덤 스미스의 사상에 대한 본질을 파헤친 5장의 존재만으로도 충분히 읽을 가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스토아주의에 대한 계보가 철학 뿐만 아니라 사회학 및 경제학 전반에 뿌리 깊다는 걸 이 책을 통해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키케로는 타인에게 헌신하는 삶에서 이런 사랑의 연대가 어마어마하게 중요하다는 점을 드러낸다

수많은 현대 미국인이 가난이 사실상 의지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고 믿는다는 것이다. 의지가 꺾인 사람을 보고 그것을 개인적 나약함이나 실패의 결과라고 생각하니 말이다

존엄성은 지위나 신분과 아무 관련이 없으며, 사실 지위와 신분에 대한 대단히 격렬한 거부를 핵심적인 도덕적, 정치적 가치로서 동반한다

세상을 똑바로 보는 사람에게는 두려워 할 만한 일이 아무것도 없다. 도덕적 힘은 잃어버릴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아이의 괴로움에 대해 부모가 품을 법한 관심이 그가 세계시민주의자의 선행에 대해 품고 있는 상이다

애덤 스미스는 정의를 세우기 위해 제도를 개선하는 데에 돈을 지출해야 할 필요성을 지적했다

여기에는 동시에 "훼손된" 사람에게서 인간 존엄성을 찾는 것, 공교육이나 삶의 다른 적절한 조건들의 부재가 말려 죽이고 있거나 심지어 이미 회복할 수 없이 고사시킨 기본적 역량을 보는 것 또한 요구된다

스미스는 이런 양심과 자제의 미덕을 인간 존엄성이라는 개념과 밀접하게 연관짓는다

개인의 사익추구에 대한 스미스의 변호는 자제력에 관한 도덕적 주장에 짜여 들어가 있으며, 이런 토대위에 지어진 사회에 대한 그의 설명은 홉스나, 심지어 로크의 설명과도 엄청나게 떨어져 있다

키케로는 "공화제를 정말이지 온 세상에 좋은 것이다"라고 말년에 그와 같이 언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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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풍오장원 2020-07-30 13:2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스미스-칸트의 연결고리가 있다니 리뷰만 읽어도 흥미진진합니다^^

베터라이프 2020-07-30 14:08   좋아요 1 | URL
칸트가 스미스의 저작에 깊은 공감을 보인 것은 인간에 대한 도덕주의적인 겸허한 스미스의 사상에 긍정했기 때문이 아닌가 추측해봅니다 ^^ 물론 어떤 극우 유튜버처럼 종래의 신자유주의를 옹호하는데 칸트을 끌어다 쓰는 경우도 있습니다만 본질적으로 임마누엘 칸트는 인간의 보다 보편적인 이성의 함양과 인간성에 주목했던 위대한 철학자임은 더 분명하겠죠. 더불어 그동안 지오바니 오리기와 같이 곡해했던 애덤 스미스를 다시 이해해보고자 하는 학자들의 움직임이 있어왔는데요. 그런 의미에서 누스바움의 의한 새로운 애덤 스미스 독해는 세계시민주의적인 연결성과는 별개로도 매우 의미있는 학문 작업이 아닌가 일개 독서인으로서 짐작해보네요 ^^ 모쪼록 추풍오장원님도 이 책을 일독해보시길 바래봅니다. 감사합니다!

페크(pek0501) 2020-07-31 12:4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누스바움의 책을 두 권 가지고 있어요. 둘 다 흥미로운 책이죠.
<지혜롭게 나이 든다는 것>과 <시적 정의>라는 책이에요.
이런 책도 있는 줄 몰랐어요. 신간인가 봅니다. 정보에 감사드립니다.

베터라이프 2020-07-31 18:49   좋아요 1 | URL
안녕하세요 페크님. 저에게 누스바움은 아마르티아 센과 더불어 역량 접근이라는 의미에서 다수 시민들의 사회경제적 불평등을 개선하고자 하는 철학자이자 사회학자로만 인식되고 있는데요. 실은 국내에 번역된 그녀의 글을 살펴보면 삶의 태도라든지, 공공인으로서의 마음가짐 같은 철학적 기본서도 얼마간 집필하기도 했더라구요. ^^ 다만, 이 책은 앞서 설명해드린 세계시민주의에서의 역량 접근이라는 학문적 기반의 확장판이라고 할 수 있을겁니다. 부족한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