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 지리학의 시선 - 개정3판
전종한 외 지음 / 사회평론아카데미 / 201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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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의 사회학자 마뉴엘 카스텔(Manuel Castells; 1942 - )은 세계화가 빠르게 진행되는 것을 보면서 지리학의 종말을 예고했다. 하지만 세계화가 빠르게 진행됨에 따라 인간 삶은 네트워크화하고 다양한 연결망을 형성하면서 새 공간을 만들어가고 있기에 지리학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지리학의 기본 개념은 위치, 장소, 장소 내의 관계, 이동, 지역 등이다.

 

지리학은 위치를 중심으로 인간들의 삶을 연구하는 학문이다. 앙리 르페브르는 우리가 일상 생활 속에서 접하는 모든 공간이 자본주의적인 재화 흐름의 결과라는 말을 했다. 지리학자가 연구하는 장소, 공간, 지역 속에 시간이 퇴적(포함)되어 있다. 최초의 지리적 호기심은 제국주의자와 무역업자들에 의한 실용적 계기를 따라 촉발되었다.

 

칸트에 의하면 발생 시기에 대한 관심을 토대로 구축되는 지식은 역사학, 발생 장소에 대한 관심을 토대로 구축되는 지식은 지리학이다. 역사학은 시간과, 지리학은 공간과 연결되어 있다. 지역 연구 전통에 뿌리를 둔 지리학의 한 유형인 내셔널 지오그래픽은 첩보 활동처럼 지역에 대한 사진을 중시하고 모든 정보를 가시적으로 소개할 뿐 정보제공자의 판단은 최대한 유보하기 때문에 어떤 면에서는 지리가 아닐 수 있다는 느낌을 갖게 한다.

 

구조주의 지리학자들은 공간 문제를 이해하는 방법론으로 노동의 공간 분화, 세계 체제론, 마르크시즘에 기초한 정치경제학적 관점을 차용한다. 지리적 지식의 축적이 존재론(세상에 무엇이 존재하고 관찰될 수 있고 알 수 있는가에 관한 신념), 인식론(존재하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어떻게 지식을 도출할 수 있는가, 어떻게 다양성 있게 알 수 있는가에 관한 입장), 관념론(지식 추구의 기저에 있는 사회적, 정치적 이유나 목적에 관한 것), 방법론(자료를 수집하고 분석하는 절차에 관한 것) 등에 근거해 이루어진다면 포스트모더니즘은 지식이란 객관적 실체가 아닌 ‘사회적 구성물’이라는 주장을 담고 있다.

 

지식이 사회적 구성물이란 말은 지식은 구성적이며 편견적이며 상황의존적이며 입장 차이를 반영한다는 의미다. 지도는 재현의 한 방식이다. 지도는 재현 주체가 누구인가에 따라 의미가 달라진다. 모든 지도에는 의도적 거짓말이 아니라 해도 운명적 거짓말이 자리한다. 지도는 보여주고 싶지 않은 것은 감추고 보여주고 싶은 것만을 표현하는 방식으로 정치적 이해관계를 반영한다.

 

저자에 의하면 어떤 이들은 지도를 정치적으로 해석하려는 시도 자체가 소수 의견이며 그 소수의 학자들이 자신들만의 의제를 부각시키기 의해 불편부당한 연구용어를 사용하고 있다고 비판한다.(불편부당이란 아주 공평하여 어느 쪽으로도 치우침이 없음을 의미하니 잘못 사용한 용어다. 자신들만의 의제를 부각시키기 위해서라는 말에 들어 있는 자신들만의라는 말이 단서다. 자신들만의 의제를 부각시키려는 사람들이 아주 공평하여 어느 쪽으로도 치우침이 없는 용어를 쓰는가, 말이다.)

 

책에는 지리학자 양성지(梁誠之)가 나온다. 규장각을 건의해 현실화시킨 사람이고 우리나라를 성곽의 나라로 정의한 사람이고 압록강과 두만강을 우리 국경선으로 생각하지 않는 사람이다. 성리학을 통치이념으로 삼은 조선시대에도 풍수지리 사상이 중요한 자리를 차지했다. 풍수는 자연 형세와 인간의 길흉화복을 연관지어 이해하는 전통 지리이론이다.(151 페이지)

 

풍수의 5방색은 청(동), 백(서), 적(남), 흑(북), 황(중앙)이다. 저자는 인간과 자연환경을 대립 항으로 설정하고 어떤 것이 어떤 것에 대해 더 강한 영향을 미치는가를 논하는 것은 큰 의미가 없다고 말한다. 저자는 인간이 실제 살지만 인간 답게 살 수 없는 곳이라면 외쿠메네가 아니라고 말하는 학자의 견해를 소개한다.

 

저자는 인간과 자연의 관계를 조화, 쌍방적 관계 등으로 표현하는 생태론적 입장은 우리를 현혹시키는 다소 그럴 듯한 생각이라 말한다. 즉 인간과 자연을 부단히 구분하고 양자를 대립항으로 설정하는 관점이라는 것이다. 터 잡기 예술로서의 풍수와 달리 지식체계로서의 풍수는 거의 논의된 적이 없다. 지식체계로서의 풍수에서 기(氣)는 중요하게 처리되지 않는다.

 

지식체계로서의 풍수는 풍수를 우리 조상들의 공간관이나 환경관으로 인식하는 관점이다. 풍수는 당나라로 유학 갔던 선종 스님들에 의해 도입되었다. 이들은 자신들이 당나라에서 경험하고 깨우침을 배운 곳과 유사한 선종도량을 찾기 위해 전국을 찾아 다니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산문 구산파가 형성되었다. 풍수는 애초 상류층의 지식이었으나 조선 중후기 이후 일반에 전해져 집터, 묘지 등을 잡는 데 적용되었다.

 

선승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던 왕족, 귀족 등은 선승들로부터 배운 풍수 원리를 통치이념으로 사용했다. 반궁수(反弓水)도 그 중 하나다. 강 흐름이 활처럼 휘어져 땅이 움푹 들어온 곳을 말하는 것으로 이 경우 개경을 겨누는 것이 되기에 그 지역 사람들은 등용하지 말라는 것이다. 금강은 오래전 읽은 신동엽 시인의 서사시집 제목이기도 하다. 이익(李瀷)은 금강을 공주강이라 했다.

 

그는 고려 태조가 금강을 반궁수(反弓水; 강 흐름이 활처럼 휘어져 땅이 움푹 들어온 곳)의 강 즉 화살로 개경을 겨누는 반역을 꾀할 곳으로 낙인찍어 그 지역 사람들은 등용하지 말라고 명했다고 썼다. 신도비(神道碑)는 종2품 이상의 관직을 역임한 사람에게 세우는 것이 원칙이었지만 조선 초기에는 태조의 건원릉 신도비나 세종대왕 신도비처럼 왕릉에 세우거나 이순신 신도비처럼 공신이나 큰 유학자에게 내려지는 경우도 있었다.

 

다산 정약용의 ‘경세유표(經世遺表)는 도성 및 읍성 계획의 원리인 국도조영(國都造營) 원리와 기준을 기록한 ‘주례동관고공기(周禮冬官考工記)’에 의한 도시 계획 원리를 기록한 우리 나라 책이다.(‘동관; 冬官’은 토목을 담당한 ‘공조; 工曹’의 별칭이다.)

 

포스트모더니즘은 차이라는 말로 설명하기에 적합한 개념이다. 다양성, 특수성, 고유성, 다성성 등은 차이의 이음동의어다. 공간이 모더니즘을 상징하는 용어라면 장소는 포스트모더니즘을 상징하는 용어다. 전자는 설명할 수 있다는 생각, 후자는 이해하거나 읽어낼 수 있다는 생각과 연관된다. 역사학자 다비(Henry Clifford Darby; 1909 - 1992)는 경관(景觀; landscape)을 사람들과 그들이 살고 있는 세계의 조화와 통합, 자연과 인문이 결합된 것, 다양한 힘들의 순간적 균형 및 평형 상태로 정의했다.

 

이런 기준에 따르면 농촌 경관이라는 말은 성립해도 밭 경관이란 말은 성립할 수 없다. 밭은 농촌을 이루는 한 요소다. 담론이란 신체를 통한 실제 체험과 대비되는 언어적 구성물을 의미한다. 지금은 언어를 경과해야만 이해할 수 있는 것이 많아진 담론의 시대다. 동일한 현상이라도 현상을 바라보는 주체에 따라 다르게 읽는 시대를 말한다. 인식론적 상대성이 나타난 시대다.

 

포스트모던 인문지리학에서는 장소를 용기(容器)가 아닌 사회, 문화적 범주(사회 또는 집단 등에 의해 구성된 것)로 읽는다. 앞에서 풍수가 정치적으로 이용되었던 전력을 이야기했지만 일본 역시 그랬다. 그들은 우리의 음택풍수를 공동 묘지 제도 도입을 통해 제약함으로써 일본에 대한 순종을 도모했다.

 

경관과 장소는 문화적으로만 읽힐 수 없고 정치적으로만 읽힐 수도 없다. 인구는 사람의 수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특정 시공간에 존재하는 사람의 수를 의미한다. 현대 사회는 도시 사회다. 오늘날 사람들은 대부분 도시에 살고 있다. 도시(都市)란 왕궁이 있는 장소와 시장이 있는 장소를 합친 말이다. 학술적 의미의 도시를 뜻하는 urban은 고대 최초의 도시 메소포타미아의 우르에서 왔기에 음미할 만한 것이 없다.

 

행정적 의미의 도시를 뜻하는 city는 거주나 캠프를 의미하는 케이(kei)에서 왔다. 우르는 불을 의미한다. 아브라함이 가나안으로 가는 중에 한동안 거주했던 곳이다. 우르는 성곽으로 둘러싸인 작고 아담한 도시였다. 우리나라에서 상업 기능이 공공 기능보다 우세한 도시가 본격적으로 등장한 것은 조선 후기 상업 발달기다. 우리의 일상적 도시 경험은 부자 동네와 가난한 사람들의 동네, 서울 강남구 도곡동의 타워팰리스가 상징하는 상류층과 구로구 공단 주변의 외국인 노동자 쪽방촌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주거지 스펙트럼을 통해 계급과 계층을 드러낸다.

 

도시는 그 내부에 다양한 측면을 포함하고 있지만 도시 전체적으로도 하나의 특성을 갖는다. 도시 바깥의 대상을 향하는 것이다. 경제학이 무엇을 얼마나 생산할 것인가를 문제 삼고 입지를 문제 삼지 않는 반면 지리학은 어디서 생산되는가를 주시한다. 지리학의 임무는 지역성을 밝히는 것이고 그 지역성의 핵심적 요소는 산업 활동이다. 자본주의는 속성상 생산 시설을 특정 공간에 집중하게 되고 그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소외 지역을 만들게 된다.

 

자본주의 발달은 공간적으로 점(point)에서 시작해 교통로를 따라 선(linear pattern)적으로 확대되므로 자본주의를 담지하는 국민국가 영토의 전 영역 구석구석까지 발전의 손길이 미치지 않는다. 거주 문제에 이르면 공간 불평등은 더욱 커진다고 하며 저자는 기회의 평등을 위하여 넓은 영토 국가에서 시골 지역 전체의 주민들을 모두 서울로 이거시키는 것이 가능하다면 거리에 따른 기회 불평등도 사라지겠지만 그럴 수 없기에 공간적 정의라는 문제가 발생한다고 말한다.(466 페이지)

 

지역 불균등을 논의하는 것은 지역 불균형 현상을 비판하고 균등 발전을 위한 대안을 모색하기 위함이다. 책 앞 부분에 베르나르 바레니우스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15, 16세기 이래 이루어진 수많은 탐험과 무역 활동을 통해 세계 여러 지방에 대한 지리적 지식 및 세계 각지에 대한 자세한 지지(地誌)적 정보와 자료들이 수집되었으나 자료 방식을 더욱 체계적으로 조직, 기술, 설명할 필요가 대두된 과정에서 베르나르 바레니우스가 공헌한 바가 있다는 내용이다.

 

그의 고민은 지리학을 점성술이나 천문학 등과 분리하고자 하는 데서 비롯되었다. 그는 점성술과 천문학에 대한 저 먼 공간의 지리학을 지표를 대상으로 하는 학문 즉 실질적인 땅에 관한 지리학으로 구체화했다. 사정이 다소 다르지만 천문학에 대한 관심에서 지리학과 지질학에 대한 관심으로 돌아선 나의 사정을 생각하게 된다. 물론 억사학은 변함 없는 내 관심사다. 지리학은 공간, 역사학은 시간과 이론적으로 연결된 학문이라는 말이 와닿는다.

 

독신(瀆神)이라고만 쓰면 신을 모독하는 것이지만 앞에 해악(海岳)을 붙이면 해악독신 즉 바다와 산, 강을 주관하는 신을 의미한다. 조선은 사직, 종묘 등에 대사(大祀)를, 삼각산신, 한강신, 경기도 송악(개경)산신 등의 13곳의 해악독신에게 중사(中祀)를, 목멱산신, 계룡산신 등 23곳의 산림천택(山林川澤)신에게 소사(小祀)를 드렸다.

 

와쓰지 데스로우는 추위를 느낀다는 것의 의미를 사례로 들어 자연환경이 자연과학적 대상에 국한하지 않고 근원적으로 인간과 관련한 문제 즉 인문성의 문제임을 강조했다는 내용이 인상적이다. 가령 우리는 추위를 느낌으로써 한기(寒氣)라는 독립적 존재를 발견하는 것이라는 말이다. 우리 자신(주관적 체험)과 한기(초월적 객관)를 구분하는 것은 옳은 것이 아니라는 의미다. ‘인문지리학의 시선’은 많은 유용한 시사점을 주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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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개의 철학 지도 - 나와 세상을 이해하기 위한 인문학적 밑그림
김선희 지음 / 지식너머 / 201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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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담론 및 정치사를 철학적 관점으로 조명하는 김선희 교수의 책이다. 여덟 개의 질문에 답을 해나간 책이다. 왜 우리는 유토피아를 꿈꾸는가? 왜 우리는 청년을 이야기하는가? 왜 우리는 고통스러운가? 왜 우리는 웃음을 추구하는가? 왜 우리는 결국 집으로 돌아오는가? 우리에게 우정이란 무엇인가? 왜 인간은 자기 고백을 남기는가? 왜 우리는 공부하는가? 등이다.

 

모두 만만하지 않은 질문들이다. 내게는 왜 인간은 자기 고백을 남기는가? 왜 우리는 공부하는가? 등이 크게 관심을 끈다. 각 챕터에 주요 철학자들의 이름이 거론되어 있다. 가령 왜 우리는 웃음을 추구하는가?에는 헤라클레이토스, 아리스토텔레스, 임마누엘 칸트, 프리드리히 니체, 앙리 베르그송, 한스 게오르그 가다머, 움베르토 에코, 장자, 호이징하 등이 거론되어 있다.

 

유토피아를 다룬 장에서 저자는 유토피아의 유형을 셋으로 나누었다. 천년왕국, 아르카디아, 유토피아 등이다. 유토피아는 섬으로 묘사되는 특징이 있다. 외부와 단절되었다는 점에서 섬이지만 이는 닫힌 공간이기에 디스토피아가 될 수 있다. 저자는 철학적 주제이자 철학적 제안으로서의 유토피아는 과연 과학, 정치, 도덕이 조화를 이룬 세계가 가능한가라는 고전적인 질문 위에서 시작된다고 전제하며 수많은 유토피아가 디스토피아가 되지 않으려면 이 철학적 제안을 외면해서는 안 될 것이라 말한다.

 

왜 우리는 청년을 이야기하는가?에서 인상 깊은 부분은 자기를 향유하고 삶의 중심에 자신을 두는 것은 어쩌면 미성숙의 특권, 청춘의 상징과 같을지도 모르지만 그런 식으로 자기 안에 머무는 것이 전부라면, 그래서 밖으로 나오지 못한다면 그것은 청춘이 아니라 어린아이에 가깝다는 말이다. 자기 안에 머물다가 밖으로 나온 사람은 루소 말대로 제2의 탄생을 이룬 사람이고 성공이 아닌 성장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일 것이다.

 

왜 우리는 고통스러운가?에서 우리는 그리스 비극이 극 형식을 의미할뿐 그 자체로 슬프고 고통스러운 이야기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접하게 된다. 중요한 사실은 그리스 비극은 거대한 운명, 개인이 뒤엎을 수 없는 커다란 운명과 불완전한 인간의 대결을 다룬 것이 아니라 인간이 그 대결 속에서 발생한 엄청난 고통을 이기고 승리에 도달하는 방법을 다룬 것이라는 점이다.

 

그리스 비극에서 주인공들은 운명에 의해 망가지는 존재이지만 그 운명에 무작정 끌려가는 존재는 아니다. 저자는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존재한다.‘는 말보다 더 본질적인 것은 ’나는 아파한다, 그러므로 존재한다‘는 말이라고 말한다. 저자는 대단히 염세적이고 비관적인 해석일 수 있지만 우리의 삶은 고통을 견디는 시간과 고통을 잊고 있는 시간, 고통을 보류하는 시간, 그리고 겪은 고통을 해석하는 시간의 묶음이라고도 말할 수 있을 것이라 말한다.

 

passion이란 단어가 있다. 이 단어는 수난(受難)과 열정(熱情)을 함께 의미한다. 고통은 수난당하는 것이지만 그렇기에 모종의 결단을 촉구하는 듯 하다. 저자는 수전 손택의 ’타인으의 고통‘을 이야기한다. 손택은 카메라를 총에 비유했다. 총의 비유는 카메라가 살아있는 존재를 대상화하고 고통받는 타인을 사물화하기 때문에 나온 것이다. 카메라에 담긴 타인의 고통은 더 이상 고통이 아니라 나와 상관없는 하나의 외적인 대상이 된다.

 

저자는 사진에 담긴 고통받는 타자들은 단순히 일회적인 연민의 대상으로 추상화되기 쉽다고 말한다. 고통받는 사람들은 내가 소비하는 일회적 상품이 될 가능성이 높다. 어떤 사람이 프레임에 포착되는 순간 이미 연출되고 조작되고 선별되고 구성된 이미지로 환원된다.(109 페이지) 타인의 고통을 관음하고자 하는 심리의 바탕에는 그 고통에 대한 나의 무관함, 그리고 그 고통에 대해 내가 확보한 안전한 거리가 깔려 있다.(110 페이지)

 

스토아철학자 세네카는 연민이란 원인을 보지 않고 감정적으로 사건을 대하는 태도, 감정적으로 타인을 대하는 것이라 말한다. 그러나 원인을 보더라도 연민의 마음은 생길 수 있지 않을까? 물론 연민받은 대상은 수치를 느낄 것이다. 저자는 어떤 고통에도 나의 책임이 일부 있을 것이라고 전제하며 고통과 비극이 나의 조건이기도 하며 이를 이겨내고 극복하는 힘 역시 온전히 나에게만 속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이 비극과 고통을 바라보는 출발점이어야 할 것이라 말한다.

 

왜 우리는 웃음을 추구하는가?에서 우리는 아리스토텔레스가 웃음을 중요한 철학적 주제로 정의한 것을 알 수 있다. 희극 즉 코메디는 어원적으로 술의 신이자 방랑과 격정의 신인 디오니소스를 위한 가장행렬(광란의 축제)을 의미하는 데서 온 말이다. 저자는 우리사회에 인신공격과 감정적 손상을 동반하지 않는 웃음이 얼마나 될까요라고 묻는다.

 

저자에 의하면 풍자는 적대자에 대한 비판을 담고 있고 그 대상에 자신을 포함하지 않는다. 해학은 자기 약점에 대한 부정을 바탕으로 한다. 상대에 대하여 감정이입을 하거나 상대를 연민하면 웃을 수 없다. 웃음의 대상과 감정적으로 연결될 때 우리는 웃음을 거두게 된다. 저자는 불교적으로 느껴지는 말을 한다. 자신에게 닥친 비극마저 드라마의 관객 같은 자리에서 볼 수 있고 그냥 남의 일로 받아들이면 나의 비극은 희극으로 바뀔 것이다.

 

그래서 “내가 나의 삶을 비극적이라 느낀다면 그것은 아마도 남의 삶에 대해서만큼 나에게 거리를 두지 못했기 때문”일지 모른다는 말을 할 수 있다. 니체는 디오니소스적인 것을 모든 경계를 허물고 근원적 일자와 하나가 되고자 하는 예술로 보았다. 니체는 진정한 그리스 예술은 디오니소스적인 것과 아폴론적인 것의 조화를 통해 이루어지는데 질서 잡힌 체계를 향한 통제의 힘들(대낮의 힘들)이 디오니소스적인 것들에 질서와 빛을 부여한 뒤 진정한 예술성 즉 비극성이 깨졌다고 보았다.(131 페이지)

 

고통을 피하지 않고 마주하며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정당한 것으로 받아들이게 된 후의 긍정, 고통을 통과한 이의 명랑성이 진정한 명랑성이라 할 수 있다. 놀이하는 인간을 의미하는 호모 루덴스란 개념이 있다. 호이징하가 한 말이다. 오로지 그 자체의 기쁨을 위해 하는 행위들이 놀이다. 놀이는 그 자체로 자유로워야 하며 일상적 삶과 구분되어야 한다.(137 페이지)

 

놀이는 반복 속에서 새로움을 만드는 생성의 힘이다. 헤라클레이토스는 자연의 생성 과정을 우연성이 지배하는 자유로운 전개과정으로 보며 그것을 놀이라 표현했다.(헤라클레이토스와 파르메니데스를 비교해 볼 필요가 있다.) 황금용에 대해 낙타는 순종하고 사자는 반항하지만 어린아이는 그것을 가지고 논다고 본 니체에게 세계는 선과 악을 넘는 신성한 놀이다.

 

왜 우리는 결국 집으로 돌아오는가?에서는 집에 관한 이야기가 다루어졌다. 한국사회에서 집은 개인이 입은 가장 큰 옷이자 물질로 치환된 자아(自我)다.(157 페이지) 저자는 자기 곁에 영원히 머물기를 바라는 바다의 님프 칼립소를 뿌리치고 고향으로 돌아간 오디세우스에 대해 이야기한다. 신화의 세계에서 정주와 이동은 단순히 공간의 변화가 아니라 한 사람의 영혼의 변화, 지적 능력까지 포함하는 영혼 전체의 성숙과 관련된다.(167 페이지)

 

변화 자체가 하나의 질서이지만 이 변화는 무한한 확장이거나 양적 증가가 아니라 매번 국면의 전환으로 나타난다. 도가적 사유에서 순환은 같은 자리를 빙빙 도는 원형적 순환이 아니라 리듬의 전환으로 보아야 한다.(171 페이지) 우주는 기계적으로 작동하지 않기에 인간이 쉽게 예측하거나 통제할 수 없지만 그럼에도 변화와 운동에는 근본적으로 질서와 리듬이 있어서 인간은 이를 예측하고 해석해 나쁜 국면을 무사히 통과할 수 있다.

 

그래서 주역은 나쁜 운명을 바꿔줄 신비한 점서가 아니라 부정적 국면을 견디기 위한 예측과 해석을 제공하는 책이다.(173 페이지) 파르메니데스는 변화란 논리적으로 불가능한 개념이라 생각했다. 그에 의하면 변화는 우리의 감각 때문에 생기는 가상(假象)에 불과하다. 이 부분에서 영지주의자들의 가현설(假現說)을 생각할 수 있다.

 

파르메니데스는 모든 것이 계속 변한다면 우리는 그것에 이름을 붙이거나 하나의 이론을 만들 수 없으며 그래서 진정한 사유는 감각에 포착되는 변화가 아니라 오직 이성에서 사유되는 고정 관념뿐이라 여겼다.(175 페이지) 저자는 사람들이 잡 노마드, 21세기 유목민 등의 말에서 밝은 미래를 보는 것 같다고 말한다.(182 페이지) 저자는 어떻게 하면 고착되지 않을 것인가.

 

어떻게 이동의 낭만성을 자각하고 부유를 벗어날 것인가 등의 질문에 답하는 것이 철학 공부를 하는 이우 중 하나일지도 모른다고 말한다. 우리에게 우정이란 무엇인가?에서는 우정의 의미가 집중 다루어졌다. 우정은 한 순간에 영혼이 열리면서 시간성을 초월할 수 있는 사랑과 달리 오랜 시간 동안의 관계로 이루어진 시간성의 산물이다.(190 페이지)

 

중요한 사실은 18세기 조선 지식인들 사이에서 우정론이 유행한 배경이 마테오 리치와 관련 있다는 점이다. 공자는 친구를 위해 자신을 내던지는 것을 진정한 우정이 아니라 생각했다. 공자는 곧은 사람, 성실한 사람, 들은 것이 많은 사람을 이로운 벗으로 보았다. 공자는 서로 성장에 도움이 되는 사람이 아니라면 사귀지 말라고 말한다. 스피노자는 파문당한 후 렌즈를 연마했다. 아는 고급 기술이었다. 비루하고 구차한 삶을 산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우정론에서 빼놓을 수 없는 사람이 스피노자다. 그는 이성에 따르는 사람을 자유인, 정서나 속견에 이끌리는 사람을 노예인으로 정의했다. 저자는 자유인은 자족적인 존재라면 그런 이에게 공동체란 아무런 의미도 없지 않을까? 라고 묻는다. 스피노자는 자유인은 공동체를 초월하는 존재라 말했다. 자유인의 모든 행동은 자신의 본성으로부터 파생된다.

 

물론 스피노자는 자유인은 공동체 내부에서 다른 사람들과 우정으로 연결되기에 힘쓴다고도 말했다. 스피노자는 능동적 인간 즉 강한 인격의 사람은 다른 사람을 증오하거나 멸시하거나 조롱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스피노자에게 신은 세계에 내재하는 존재기에 자신과 관련된 우주 만물을 사랑하는 것이 신에 대한 사랑을 의미한다. 왜 인간은 자기 고백을 남기는가?에서는 자화상에서부터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자화상은 화가들이 붓으로 쓴 자서전 같은 것이다. 그림은 현재의 사실적 기술이 아니라 화가가 세상과 대면하는 방식, 세상에 드러내고 싶거나 드러내고 싶지 않은 모습을 담고 있다.(227 페이지) 저자는 자신을 그리는 행위는 자신에 대해 쓰는 것과 차원이 같은 것이라 말한다. “나는 왜 나를 잊지 않고, 흘려 보내지 못하고 기록하는가?” 근대에 이르러 자신을 자각하게 되었다. 개인이라는 자각이 역사적으로 부상한 이후에 자화상이 나왔음을 유의할 필요가 있다.

 

근대적 개인은 성찰하고 계획하는 인간이고 시간적으로 미래를 향해 현재를 기획하는 존재다. 왜 우리는 공부하는가?에서 저자는 우리가 책을 읽고 글을 쓰는 이유를 근본에서부터 다시 생각한다. 동아시아에서는 지적 학습만이 아니라 자기를 변화시키는 모든 실천적 노력을 모두 공부라고 한다. 저자는 다양한 지적 전통을 하나로 규정하려는 시도만큼이나 경계해야 할 것이 과학을 유일한 기준으로 보려는 시도라고 말한다.

 

청출어람이란 말이 있다. 제자가 스승보다 뛰어남을 의미하지만 실제 맥락은 조금 다르다. 청출어람은 학문의 효과를 말하는 말이다. ’순자‘ 권학편에 나오는 말이다. 순자는 자기를 바꾸는 힘을 학문으로 정의한다. 공자는 다양하게 배우되 마음의 의지나 지향은 단단하고 두텁게 하고 더 나아가 스스로 문제를 만들어 절실히 탐구하되 이를 일상의 현실적 차원에서 떠나지 않는 것이 진정한 학문이라고 생각했다.

 

공자에게서 가장 바람직한 것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것은 신분이 아니라 능력을 통해 세상의 중심에 설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이 능력은 자신의 책임을 다하면서 타인을 사랑할 줄 아는 도덕적 능력이다. 공자는 능동적이고 도덕적인 주체를 군자라 불렀다. 타고난 신분으로서의 군자가 아니라 자기 이익에만 관심을 갖고 다른 사람에 대한 책임을 내버리는 사람은 소인이라 불렀다.

 

리(理)는 사물의 구성 원리일뿐 아니라 그 자체가 도덕적 가치이기도 하다. 인간은 자신의 본성에 리(理)를 부여받아서 이루어진 존재다. 저자는 성적에만 올인하고 성공을 위해 매진하는 숨막히는 사회에 우려의 시선을 보낸다. ’8개의 철학 지도‘는 철학은 근본적인 것에 대해 질문을 던지는 작업임을 알게 하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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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웨슬리와 감리교 전통의 여성들
이정미 지음 / 한국학술정보 / 201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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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웨슬리는 18세기 영국의 가장 탁월한 신학자이자 사회개혁가, 실천적 페미니스트였다. 웨슬리는 감리교부흥운동을 통해 근대 여성 해방운동의 역사적 초석을 마련한 인물이다. 웨슬리는 1787년 10월 멘체스터 감리교 연회에서 공식적인 여성 설교자로서의 출현을 승인했다. 감리교의 여성해방운동은 북미 성결주의 운동에도 큰 영향력을 행사했다.

 

이정미의 책 ‘존 웨슬리와 감리교 전통의 여성들’은 감리교 전통의 열 명의 여성을 다룬 책이다. 첫 번째 인물은 감리교의 어머니 수잔나 웨슬리다. 웨슬리는 어머니 수잔나를 통해 여성의 능력에 대한 산 교훈을 얻었다. 수잔나는 아들 웨슬리의 사상 형성에 무시할 수 없는 영향력을 미쳤다. 수잔나는 웨슬리가 감리교인이 되기 오래전부터 이미 감리교인이었다.

 

웨슬리가 감리교 운동 속에서 여성 리더십을 인정하고 공식적인 여성 설교자들을 승인한 것은 어머니 수잔나를 보면서 하나님께서 여성을 통해 일하신다는 사실을 체험했기 때문이다. 두 번째 인물은 존 웨슬리의 영적 후원자 셀레나 헤이스팅스다. 웨슬리나 감리교회에 대한 책을 읽을 때 유의해야 할 것은 영국국교회(성공회)와 감리교의 관계다.

 

지난 2017년 보도이지만 영국 감리교와 성공회가 18세기 이후 200년 이상 갈라져온 교회 역사를 통합하는 절차를 밟기 시작했다는 소식이 있었다. 사실 웨슬리는 성공회 사제였다. 세 번째 인물은 감리교 여성 설교자의 원형인 메리 보산퀫 플레처다. 네 번째 인물은 감리교 최초의 비공식 여성 설교자 사라 크로스비다.

 

다섯 번째 인물은 감리교 운동의 재정적 후원자인 레이디 맥스웰이다. 이 분은 플록의 부유한 남작부인으로서 주일학교의 설립자이며 헌팅턴의 셀레나 백작부인과 함께 웨슬리를 비롯한 많은 감리교 지도자들의 영적 카운슬러였다. 레이디 멕스웰은 스코틀랜드 장로교회 소속이었다. 그녀가 감리교회에 입회한 것은 1764년으로 이 해에 웨슬리와 레이디 맥스웰이 처음 만난 것으로 알려졌다.

 

여섯 번째 인물은 파운데리 신도회의 엘리자베스 리치 몰티모어다. 이 분은 웨슬리와 함께 순회설교여행(itinerant preach trip)을 하면서 자신의 은사를 십분 발휘해 많은 사람들을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돌아오게 했다. 일곱 번째 인물은 감리교의 여성 순회설교자 헤스터의 앤 로우 로저스다. 이 분은 이사야 40장 본문(“내 백성을 위로하라“)을 설교를 통해 듣고 감흥을 얻었다.

 

여덟 번째 인물은 공식적인 여성 설교자 사라 말렛이다. 감리교 역사상 처음으로 멘체스터 연회에서 공식적 여성 설교자로서 승인을 받은 인물이 사라 말렛이다. 당시는 여성은 교회 내에서 잠잠하라는 성경(고린도전서 14장 34, 35절)을 근거로 여성들의 설교를 허락하지 않던 시대였다. 1786년 웨슬리가 사라와 면담을 통해 그녀의 소명(하나님으로부터 들은 설교하라는 말씀)이 하나님에게서 온 것임을 확증했다. 아홉 번째 글은 메리 테프트와 여성 설교자 임명에 관한 감리교회의 반대에 대한 글이다.

 

마지막 열 번째 글은 페베 팔머(Phoebe Palmer; 1807 - 1874)와 성결주의 운동이란 글이다. 페베 팔머는 ”여자의 가르치는 것과 남자를 주관하는 것을 허락하지 아니하노니”란 구절(디모데전서 2장 12절)을 이렇게 해석했다. 여성이 가르치는 것을 저지하는 것이 아니라 바울이 금지한 것은 남자의 권위를 무시하는 것, 교회 질서를 거스르는 행위이며 여성이 공중에게 가르치는 것 자체를 반대한 것은 아니라고.

 

그러면서 그녀는 만일 바울이 여성의 가르침을 전적으로 금했다면 사도행전 18장 26, 27절이 증거하는 사례 즉 브리스길라가 아볼로에게 예수의 복음을 가르친 것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겠느냐고 말했다. 또한 팔머는 성경의 여성 선지자들 가운데 이스라엘 사사 시대의 드보라와 아론의 누이 미리암, 예언자 훌다 및 초대교회의 신실한 동역자인 유오디아와 신디케 등의 주목할 만한 여성 지도자들의 실례를 들면서 여성 사역에 대한 적극적 지지와 후원을 호소했다.

 

팔머는 성경적 근거에서 설교와 예언은 분리할 수 없는 복음서이며 그런 단서는 오순절 사건의 성령 강림의 역사에 있다고 강조했다. 팔머는 “오순절에 성령의 은사와 권능이 무시될 수 있는 기사입니까? 마가의 다락방에서 여자들과 예수의 모친 마리아와 그의 제자들이 마음을 같이하여 기도에 힘쓸 때 예수의 부활하심을 맨 먼저 증거한 여자 증인들도 그들과 함께 회개하며 탄원의 기도를 하지 않았습니까? 그들은 예수의 죽음과 부활의 사건에 이르기까지 천사의 입술로부터 그러한 계시를 들었고 교회의 머리 되신 그리스도로부터 직접 세상의 만인에게 복음을 전파하도록 권한을 위임받은 여자 사도들이 아닙니까?“라고 말했다.

 

팔머가 여성 목회의 정당성을 뒷받침하는 핵심 성구로 든 구절은 사도행전 2장 3, 4절이다. ”마치 불의 혀처럼 갈라지는 것들이 그들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하나씩 임하여 있더니 그들이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언어들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

 

팔머는 미국에서 제2차 대각성운동이 전개되는 시기에 여성의 참정권과 금주에 대해 캠페인을 벌인 동역자 프랜시스 우리라드와 함께 노예 해방운동에도 적극 참여했다. 마지막 순서로 언급된 페베 팔머는 인상적인 인물이다. 성경 해석에도 세심한 주의가 필요하다는 생각을 하게 한 인물이기도 하다. 페베 팔머는 바로 가부장적인 전통으로 뭉친 교회에서 참으로 의미심장한 구절을 들어 멋진 해석을 해낸 인물이다.

 

두 가지 말을 인용하고자 한다. 모두 하이젠베르크가 한 말이다. ”역사가 가르쳐주는 것은 어느 이론을 받아들이게 되는 것은 그 이론이 일관성이 있다거나 명확하기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그 이론을 더 다듬고 그 진위여부를 가리고자 하는 일에 참여해보겠다는 희망에서인 것이라고 한다. 바로 이것이 우리가 보자는 바람이며 이것 때문에 우리는 과학의 길을 혼자 더듬어 가는 것이다.“(‘입자, 인간, 자연에 대한 단상’ 16 페이지)라는 말이 그 하나다. 

 

”과학의 역사는 비단 발견과 관찰의 역사뿐만 아니라 개념의 역사이기도 하다.“(같은 책 23 페이지)는 말이 다른하나다. 과학이란 말을 기독교로 바꾸어도 아무 문제가 없을 것이다. 성경을 더 다듬고 그 진위여부를 가리는 일이 필요함은 물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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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설 내용 숙지(熟知)를 위해 워밍업 차원의 글을 쓰고 나니 머리가 아프다. 물론 머리가 아픈 것은 생각을 무리하게 이어갔기 때문이다. 어떻든 시급하지 않은 글을 쓴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최근 들은 바에 의하면 아마존에서는 잘 모르면서 질문하지 않고 모른 체 하는 것(자신의 무지를 인정하지 않는 것, 무지에 대해 생각하지 않는 것)이 가장 어리석은 짓이라고 한다.

 

생각을 정리해야 하는 상황일뿐 무지함을 해결해야 하는 상황은 아니기에 여유로울 때 정리, 기록해도 되는데 무리했다. 컨디션을 조절하는데 알라딘에 올린 김선희 교수의 ‘서학, 조선 유학이 만난 낯선 거울’ 리뷰에 댓글이 달렸다. “같은 저자의 ˝마테오 리치와 주희, 그리고 정약용˝도 정말 좋습니다 ㅎㅎ” 감사하다.

 

이 말을 듣고 책 서핑을 한다. 내가 읽고 서평을 쓴 김 교수님의 책은 세 권이다. ‘서학, 조선 유학이 만난 낯선 거울’, ‘나를 공부할 시간’, ‘동양 철학 스케치 2’ 등이다. 곧 ‘동양 철학 스케치 1’, ‘8개의 철학 지도’, ‘실實, 세계를 만들다’ 등을 구입할 것이다.(‘마테오 리치와 주희, 그리고 정약용‘은 절판이다.) 이렇게 시간을 보내고 있지만 허비는 결코 아니다. 곧 가다듬고 준비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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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한 번역가로부터 국내 저서는 번역서에 비해 수준이 떨어진다는 말을 들었다. 공감한다. 독자의 수준이나 문제의식이 높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고 저자의 역량 부족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물론 많은 우리 저서가 상당 수준의 역량을 보이지만 외국 저서가 보이는 치밀함과 시의적절함과 끈질김에 기반한 깊이 등을 따라가려면 시간이 많이 걸리지 않을까 싶다.

 

내가 눈여겨 보는 것은 일본 저서들의 약진이다. 최근 박문호 박사께서 추천한 두 권의 지구과학 책 가운데 한 권이 가와하타 호다까의 ‘지구 표층 환경의 진화’다. 인상적이라는 평을 듣기에 부족함이 없는 책이라고 한다. 히메노 켄지, 니시자와 타츠오, 세키 노부코 공저의 ‘재미 있는 흙 이야기’는 검색을 통해 알게 된 책이다.

 

이 책에서 눈에 띄는 챕터들은 ‘고생대, 중생대, 신생대 등의 지질연대는 어떻게 정해지는가’, ‘달에는 정말 흙이 없을까’, ‘지형학, 지질학, 토양학, 지반공학 등 비슷한 분야가 있는데 차이점은 무엇인가’ 등이다. 지구와 달리 달에 산, 구릉, 평야, 해저 등이 없는 이유를 물과 공기로 인상 깊게 설명한 모쿠다이 구니야스의 ‘그림으로 배우는 지층의 과학’도 주목할 만한 책이다.(설명 자체보다 쉽게 생각하기 어려운 작은 것에 ‘착안; 着眼‘한 안목이 돋보인다 하겠다.)

 

물 즉 수(水)란 말이 나왔으니 이 단어와 짝으로 쓰이는 유(流)란 말도 생각하게 된다. 유(流)는 음미하기 좋은 글자다. 흐르는 물은 웅덩이를 채우지 않고서는 앞으로 나아가지 않는다(유수지위물야; 流水之爲物也 불영과불행; 不盈科不行)는 맹자(孟子)의 말이 인상 깊게 다가온다.

 

이 구절에 나오는 과(科)란 말은 과학(科學), 과거(科擧) 등에 쓰이는 말로 가장 많이 알려져 있지만 그루, 웅덩이 등 잘 알려지지 않은 뜻도 가지고 있다. 유수지위물야 불영과불행이란 말은 흐르는 물은 앞다투려고 하지 않는다는 유수부쟁선(流水不爭先)이라는 노자(老子)의 말보다 훨씬 자연스럽다.

 

유수부쟁선은 물은 흐르더라도 앞다투려 하지 않는다고 번역해야 한다. 호수처럼 잔잔하게 멈춰 있는 물은 당연히 부동(不動)의 평형 상태 즉 선두를 다투는 경쟁심을 보이지 않지만 흐르는 물도 그렇다는 말이다.(유수부쟁선은 식견이 좁은 말이다. 곧 설명하겠다.)

 

여담이지만 부동의 평형상태라고 하니 양자역학에서 무(無)를, 공간은 존재하지만 질량이 없는 빈 공간으로 정의하는 사실이 떠오른다. 그들은 그래서 진공에서도 순간적으로 에너지가 존재할 수 있다고 말한다, 이에 한 기독교인 물리천문학자는 ”그렇다면 공간은 어디에서 기원했는가?“라고 물었다. 어떻든 유수부쟁선이란 말을 거론하는 사람들은 막히면 돌아가는 것까지 물의 미덕으로 거론한다.

 

하지만 나는 이 말에 ‘홍수를 본 적이 있는가?’란 물음을 던지고 싶다. 엄청나게 모여 흐르는 물은 무섭게 서로 앞서려고 경쟁하고 그런 물은 돌아가지 않고 모든 것을 넘어 간다. 물은 때로 엄청난 도약(파도)을 한다. 거품이라 하지만 물은 물이다.

 

이곳 한탄강 지질공원에서는 한탄강을 메우며 흐르던 용암이 임진강으로 역류했다는 말을 한다.(가스통 바슐라르가 술을 불의 물이라고 한 것이 생각난다. 그렇다면 용암은 초고도의 불의 물이라 할 만하다.) 하지만 역류라는 말은 쉽게 접할 수 있는 말도 아니고 옳은 말도 아니다. 조건이 되면 물은 어디로든 간다.

 

노자가 간과한 것은 앞 다투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잔잔하고 평화로운 물 역시 조건이 되지 않아 그럴 수 있다는 사실이다. 진정으로 역류라는 말을 쓰려면 사람이 의도적으로 역방향의 조작을 가했을 때라야 할 것이다. 역류시켰다고.

 

유(流)는 한번 흘러간 물은 돌아오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돌아오지 못하는 유배를 뜻한다. 2천 5백리 강진 귀양형에 처해진 정약용은 18년만에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었지만 3천리 흑산도 귀항형에 처해진 정약전은 그러지 못했다.(강효백 교수 페이스북) 상투적이지 않은 말로 흐름의 비유를 해야겠다고 다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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