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도전 - 백성을 위한 나라 만들기 창비 한국사상선 1
정도전 지음, 이익주 편저 / 창비 / 202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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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익주(李益柱) 교수의 정도전에서 한자를 많이 배운다. 추대(推戴), 산직(散職), 총재(冢宰) ...추대의 대는 받들다, 머리에 인다 등의 의미를 지닌 대(). 대관식(戴冠式)의 그 대다. 한직(閑職)은 들어보았지만 산직(散職)은 처음이다. 한산(閑散)하다는 말의 한과 산이 모두 높지 않거나 한가한 직()을 뜻하는 것으로 쓰이는 것을 보는 재미(?)도 쏠쏠하다. 총재는 이조판서를 이르는 말이다. 무덤 총자를 쓴다는 점이 흥미롭다. 세계(世系)는 조상으로부터 대대로 이어지는 계통을 말한다. ()은 찌지, 덧붙이는 쪽지, 주석(註釋)을 의미한다. 찌지는 간단한 쪽지를 말한다


정도전은 조선경국전에서 왕건을 가리켜 궁예를 대신하면서 고려라는 이름을 그대로 사용했다고 말했다. 왕건 외의 박석김(朴昔金), 온조, 견훤, 주몽, 궁예 등이 한 지역을 몰래 차지하여 중국의 명을 받지 않고 스스로 국호를 세우고 서로 침탈했다고 썼다. 오직 기자만이 주() 무왕의 명을 받고 조선후(朝鮮侯)에 봉해졌다고 전제한 정도전은 지금 조선이라는 아름다운 이름을 계승했으므로 마땅히 기자의 선정을 강구할 것이라 썼다. 정도전은 재상(宰相)의 재()는 다스린다는 의미이고 상은 돕는다는 의미라고 했다. 


정도전은 임금은 오직 사람이 어진지 그렇지 못한지를 알아서 등용하거나 물리치면 백관이 다스려질 것이며 일이 온당한지 그렇지 않은지를 살펴서 구분해 치리하면 만물이 제자리를 찾고 만민이 편안해질 것이라 썼다. 임금의 직책은 재상 한 사람만을 택하는 데 있고 그 밖에 아래의 여러 일에 관여하지 않는 것이 순리라 썼다. 지인(知人)은 사람의 됨됨이를 알아보는 것을 의미한다. (), ()는 모두 찬성하는 의미의 감탄사다. (), ()은 반대하는 의미의 말이다.(144 페이지 참고


정도전은 임금은 좋은 신하를, 신하는 좋은 임금을 만나기 어렵거니와 바야흐로 지금은 밝은 임금과 좋은 신하가 만나 성의로써 서로 믿으며 유신(維新)의 정치를 함께 도모하니 천년, 백년 만의 융성한 시기라 썼다. 정도전은 과거에 대해서도 논한다. 문장으로 시험을 보면 겉만 화려하고 실속이 없는 무리가 그 사이에 끼어들게 되고 경사(經史)로써 시험하면 실정에 어둡고 편벽되며 고루한 선비들이 간혹 나오게 된다고 했다. 경학과 부논(賻論)으로 평가해야 한다는 것이다. 농상(農桑)은 농사와 뽕나무를 가꾸는 일을 말한다. 친경(親耕), 친잠(親蠶)과 함께 생각해볼 만하다


정도전은 농상 즉 농사와 양잠은 먹는 것과 입는 것의 근본이니 왕도정치에서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이라 말했다. 정도전은 나주(羅州) 지역에 대해 이야기하며 그곳이 상마(桑麻)가 풍부하다고 했다. 상마는 뽕나무와 삼을 이야기하는 것으로 옷감의 재료를 뜻한다.(230 페이지) 정도전은 백성은 국가의 근본이며 임금의 하늘이라고 했다. 본실(本實)은 농업을, 말업(末業)은 수공업이나 상업을 의미한다. 천조(天朝)는 천자의 조정을 제후국에서 이르는 말이다. 정도전은 구리와 철은 그릇, 농기구뿐 아니라 무기를 만드는 소재이니 필수품이라 칭했다. 철장(鐵場)은 쇠를 단련하는 곳을 이른다


연경(燕京)은 북경(北京)을 말하는 것으로 원래 연나라의 수도였던 데에서 유래한 말이다. 본문에는 원나라의 수도인 대도(大都)라고 설명되어 있다. 정도전은 수공업자, 상인, 무당, 재인, 화척 등은 농사를 짓지 않고 남들이 생산한 것을 먹는 사람(생산하지 않는 사람)으로 분류했다. 견면(蠲免)은 세금이나 부역을 감해주는 것을 의미한다. 관헌(祼獻)은 술을 땅에 뿌리고 음식을 올리는 제사 의식(儀式)을 말한다. 선마(宣麻)의 선은 임금의 말, 하교(下敎) 등을 이르는 말이다. 마는 조서(詔書)를 의미한다.


사람은 토지가 아니면 설 수 없고 곡식이 없으면 살 수 없다. 적전(籍田)은 임금이 몸소 경작하는 밭을 의미한다. 온 천하가 다 같이 제사를 지내는 것은 오직 문묘(文廟)뿐이다. ()은 성정(性情)의 바름에서 나오는 것을 성문(聲文; 소리)을 빌려 표현하는 것이다. 상제(喪製)편에는 참최복(斬衰服)과 재최복(齊衰服) 이야기가 나온다. 참최복을 재최복으로 갈아 입는 이야기다. 주나라 제도에서는 병(), ()이 일치했다. 정도전은 평소 무사한 때에 군사훈련은 반드시 전렵(田獵)을 통해서 하게 된다는 말을 했다


정도전은 사마양저(司馬穰苴)의 병법을 가감해 강무도(講武圖)를 지어 바쳤다고 말했다. (((()4계의 사냥을 지칭하는 말이다. 조선 성종은 1489"나라의 큰일은 사사(祀事)와 융사(戎事)에 있는바....···(蒐苗獮狩) 하는 것을 중하게 여겼다...우리 나라의 강무(講武)하는 법은 곧 이 수···수의 뜻이라 조종 때에는 오래 거행하지 않은 적이 없었는데, 기해년(1479년 성종 10) 이후 일이 많아서 여기에 미칠 겨를이 없다가, 전에 두 해 동안 외방(外方)의 군사를 징발하여 근교(近郊)에 벌였으나, 또한 사고 때문에 문득 다 파하여 보냈다...이제 다행히 일이 없고 곡식도 익어 가는데 이 큰 일을 강습하는 것을 그만둘 수 있겠는가? 928일에 교외에서 열병(閱兵)하고 102일에 경기와 강원도에서 사냥하고자 한다.“고 하교했다.


정도전은 사냥은 한가한 놀이에 가깝고 잡은 짐승을 자기가 갖는다는 의심을 살만하므로 성인은 이런 점을 염려해서 사냥의 법도를 만들었다고 썼다. 하나는 백성의 곡식을 해치는 짐승만을 사냥하는 것, 다른 하나는 잡은 짐승을 제사에 바치는 것으로 이는 종묘사직과 생명을 위한 계책이라고 풀이했다. ()은 교통 요지에 설치한 관문, ()은 교통 요지에 설치한 나루를 말한다. 정도전은 임진도(臨津渡)와 벽란도(碧瀾渡)는 서울에서 매우 가까우므로 특별히 별감을 파견해서 검문을 더 하게 했으니 이는 또한 서울을 존중하고 나라의 근본을 소중히 여긴 까닭이라 썼다.(120 페이지


매이(罵詈)는 말로 욕하는 것, 소송(訴訟)은 관청에서 싸우는 것을 말한다. 악독(嶽瀆)은 산과 강을 말한다. 정도전은 경제문감에서 재상의 업무는 임금을 바로잡는 것보다 더 큰 일이 없다고 말한다. 정도전은 마땅히 임금을 바르게 해야 할 사람이 옳은 것을 건의하고 그른 것을 고치도록 하지 않고 부화뇌동해서 임금의 뜻을 따르는 것을 능사로 삼으며 세상을 경륜하고 만물을 주재하는 일에 마음을 두지 않고 자신을 보전하고 은총을 굳히려는 술수를 부린다면 재상의 직분을 잃은 것이라 말한다.(156 페이지) 정도전은 어찌하여 붕당이 없는 것을 옳다고 하고 붕당이 있는 것을 그르다고 하는가라고 말했다.(159 페이지


()은 조화롭게 한다는 의미다. 정도전에 의하면 지엽적인 일에 얽매이는 것도 아니고 아무 일도 하지 않으면서 저절로 다스려지기를 바라는 것도 아니다. 경제문감에는 중국의 여러 재상에 대해 논한 부분이 나온다. 주공(周公)은 성왕의 재상이 되어 예악을 정하고 천하의 모범이 되어 후세에 전할 만하다고 정도전은 평했다. 미단숙영(微旦孰營)이란 말이 있다. 주공(周公) ()이 아니면 그 누가 경영하겠는가?란 의미다. 한나라의 장량(張良)은 고제(高帝)의 재상이 되어 진나라를 멸망시키고 항우를 핍박해서 공()이 역시 극에 달했다. 정도전은 임금은 지극히 존엄하고 재상과 장수는 지극히 귀하지만 또한 간언하고 문책하며 규찰하고 탄핵할 수 있으니 나머지는 가히 알 수 있다고 말했다


정도전은 허물은 원래 임금이 피하지 못하고 간언은 신하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이라 말했다. 다음의 글을 보자. ”조선은 탄핵의 나라였다. 조선왕조실록에 탄핵(彈劾)463번 언급되고, 유의어인 대론(臺論), 거핵(擧劾), 탄론(彈論), 대탄(臺彈) 등을 합치면 1852건에 이른다. 이해관계에서 비교적 자유로운 신진 관료들을 대간(臺諫)으로 임명하고 면책 특권을 부여함으로써 거침없는 직언의 길을 보장해 주었다. 이마저도 당쟁의 수단으로 전락한 면이 있지만, 적어도 왕이나 권세가의 폭주를 막는 제도적 기능은 이어졌다.“(송혁기 교수 글


정도전은 무릇 사물의 이치에는 하나의 옳고 그름이 있을뿐인데 오늘날 조정에서는 옳고 그름을 과감하게 말하려 하지 않아서 재상이라면 굳이 임금의 뜻을 거역하려 하지 않고 대간 역시 재상의 뜻을 거스르려 하지 않는다는 말을 했다. 옛날부터 나라를 다스리는 사람은 문()으로써 태평을 이루고 무()로써 난리를 평정했다.(190 페이지) 정도전은 책임을 지지 않는 수령에 대해 개탄하며 관리는 백성의 유모요 목자라고 결론짓는다. 책임이란 남이 주는 음식을 먹는 자가 지는 책임을 말하며 남이 주는 옷을 입는 자가 지는 근심을 풀어주는 책임이다


경제문감별집은 주역에 근거한 서술이 전개되는 글이다. 몽괘(蒙卦)의 육오 효사(爻辭)에 동몽(童蒙)이니 길하다란 주역 구절을 예로 들며 임금이 된 자가 지성으로 어진 이에게 맡겨서 그 공을 이룬다면 자기에게서 나온 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란 결론을 내린 글이 대표적이다. 정도전은 임괘(臨卦)의 육오 효사에 지혜로 임함이니 대군의 마땅함이니 길하다는 구절을 예로 들며 오직 천하의 선()을 취하고 천하의 총명한 사람에게 맡기면 두루 미치지 않음이 없으니 자신의 지혜만을 스스로 믿지 않으면 그 지혜가 큰 것이라 말한다. 26괘인 산천대축(山川大畜)괘의 육오 효사에는 멧돼지를 거세하여 어금니를 쓰지 못하게 함이니 길()하다란 구절이 있다.(분시지아 길; 獖豕之牙 吉


정도전은 임금은 마음을 비우고 스스로 덜어내어 아래 있는 어진 이에게 순종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주나라 문왕이 위수(渭水) 북쪽에서 낚시질을 하던 강태공을 만난 것도 새길 만하다. 본문에 덕은 크고<; > 길고<; > 곧다<; >란 말이 있음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정도전은 절개가 돌과 같아서 결단하기를 하루가 다할 때까지 기다리지 않으니 바르고 길하다는 주역 예괘(豫卦)의 육이 효사를 언급한다.(232 페이지) 정도전은 돌이 단정하고 단단하며 수려하고 의젓한 것이 덕 있는 군자의 모습 같다고 말하는가 하면 기기괴괴하게 생긴 돌은 고요한 산속의 선비와 같다고 말하기도 했다. 이런 연고로 사람들이 돌을 즐기는 것이라 풀었다.


공양왕에게 올리는 상소문이 눈길을 끈다. 정도전은 덕()이란 득()이니 마음에서 얻는 것이고, ()이란 정()이니 몸을 바로잡는 것이라 한 뒤 덕이란 것이 처음에 타고나기도 하고 수양해서 얻기도 하는데 전하께서는 평소에 책을 읽어 성현의 모범을 깊이 헤아려본 적이 없고 일을 해서 지금 세상에 통용되는 사무를 안 적이 없으니 어찌 덕을 꼭 닦았다고 할 것이며 다스림에 결함이 없다고 하겠습니까 말했다. ”전하께서는 타고난 천성의 선함을 스스로 믿지 마시고 아직 수양에 이르지 못한 것을 경계하십시오. 그리하면 덕이 닦아지고 정치가 잘 행해질 것입니다.”(245 페이지


정도전은 임금은 하늘을 대신해 공을 세운 자에게 상을 주고 죄를 지은 자에게 벌을 내리는 것이라 말했다. 정도전은 공양왕에게 우왕(禑王)과 창왕(昌王)은 신돈의 아들이라 말한다. 그러나 이는 개혁세력이 자신들의 입지(立地)를 위해 내세운 설득력이 떨어지는 명분이다.(박종기 지음 조선이 본 고려참고) 공양왕은 고려의 마지막 임금이다. 정도전은 삼봉집에서 천자의 문을 단문(端門)이라 한다며 단이란 바로 정()이라 풀이했다. 경복궁의 정문을 오문(午門)이라 한다는 말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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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봉(三峰) 정도전(鄭道傳)에 관한 책은 조유식의 ‘정도전을 위한 변명‘ 한 권을 읽었을 뿐이다. 오늘 광화문 교보문고에서 이익주 교수의 ’정도전’을 우연히 보고 합정 알라딘에 가서 중고로 그 책 외에 같은 시리즈(창비 한국사상선)로 나온 ‘세종 정조‘, 김재원의 ’세상에서 가장 짧은 한국사‘, 오타 히로미치의 ’오늘도 화학‘ 등도 사서 귀가했다. 

그간 과학책을 많이 사서 오늘은 역사책들만을 사려 했는데 합정 알라딘 직원이 40,000원 이상 구입하면 4,000원을 할인해 드리니 더 구입하시라고 말해 ’오늘도 화학‘까지 구입했다. 한국사상선 가운데 ’이황‘, ’김시습 서경덕’도 있었는대 한번에 너무 많은 책을 사는 것 같아 포기했다. 물론 오늘 산 책을 다 읽고 나서 온라인에 나온 것이 있으면 살 생각이다. 

이익주 교수가 편저(編著)한 ’정도전’은 조선 경국전, 경제문감, 경제문감별집 등 정도전의 저작물에 대한 해설이 주를 이루는 책이어서 기대가 크다. 고려의 태조, 현종, 문종, 원종 및 신숭겸, 복지겸, 홍유, 유금필, 배현경, 서희, 강감찬, 윤관, 김부식, 조충, 김취려, 김방경, 안우, 이방실, 김득배, 정몽주 등 16공신을 모신 연천 숭의전을 해명하는데 유용하리라 생각한다. 

정도전은 경제문감별집에서 올바른 군주상을 제시했다. 교보문고에서 본 김두규의 신간 ‘그들은 왜 주술에 빠졌나?’는 사고 싶었으나 그러지 않았다. 이 책에는 고려 8대 임금 현종과 『훈요십조』의 진위, 풍수술의 탈을 쓴 비보술, 술수에 빠진 왕과 술사의 운명, 무능한 왕의 불안을 파고든 운명적 만남, 비보술과 성리학의 충돌 등 읽을 만한 챕터가 있다. 

이 책도 중고로 나오면 구입해 본격적으로 읽을 생각이다. 책을 읽으려는 것은 비보나 풍수 차원을 넘어 역사 자료 차원으로 접근하기 위해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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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은 하나의 철학이다 - 리(理)와 기(氣)로 해석한 한국 사회
오구라 기조 지음, 조성환 옮김 / 모시는사람들 / 201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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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구라 기조는 새로 읽는 논어의 저자로 알게 된 일본 철학자다. 한국은 하나의 철학이다는 리(理)와 기(氣)로 한국을 분석한 책이다. 리(理)는 보편 원리를 의미한다. 기(氣)는 구체적 현상을 의미한다. 저자에 의하면 한국 민족에게는 리(理) 신앙이 존재한다. 하나의 보편 개념이나 원리 또는 도덕 이념으로 세계를 설명하려는 욕구를 가졌다는 말이다. 성리학은 인간의 마음에서 사회와 우주에 이르는 모든 영역을 리와 기의 관계로 설명하는 학문이다. 조선은 성(性)을 심(心)으로 바꾸는 것도 이단으로 낙인을 찍은 사회였다. 성즉리(性卽理)를 심즉리(心卽理)로 바꾼 것을 말한다. 


전자는 우리가 갈 길은 사물이 가진 고유한 가치에 따라 결정된다는 말이고, 후자는 우리가 갈 길은 나의 마음에 따라 결정된다는 말이다. 한국인은 강력한 도덕 지향적인 사람들이다. 이는 한국인은 강력한 리(理) 지향적인 사람들이라는 의미이기도 하다. 리(理)는 보편이고 기(氣)는 특수다. 리(理)란 오늘 말로 진리, 원리, 윤리, 논리, 심리, 생리, 물리 등의 총칭이다. 근대 이전에는 하나의 리(理)가 있었다. 기(氣)는 물질성을 뜻한다. 기는 하나이지만 음, 양으로 나뉘기도 하고 금목수화토의 오행으로 나뉘기도 한다. 성리학을 다른 말로 주자학이라 한다. 이 학문은 성선설의 학문이다. 


주자학은 인간이 악한 것은 기(氣) 때문이라고 본다. 기에는 좋은 기와 좋지 않은 기가 있다. 밝은 기는 원래의 리를 있는 그대로 드러내지만 탁한 기는 리를 흐리게 한다. 상승형 성선설을 사회제도적으로 뒷받침한 것이 과거(過擧)라는 장치다. 주자학적 사회는 체현(體現)된 리의 많고 적음이라는 위계질서로 인간을 측정한다. 한 사람 한 사람의 인간을 수직적인 잣대로 점수 매기는 것과 같다. 우리나라는 대학, 학군, 연봉, 주거(住居) 공간의 평수 등 숱한 서열화에 열심인 나라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저자는 한국인의 깊고 깊은 정(情)의 세계는 주로 기의 세계에서의 일로 그 배후에 지극히 준엄한 리의 세계가 있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정치의 세계, 역사의 세계, 학문의 세계, 혈통이나 학통의 세계 등 여행자가 들어갈 수 없는 리의 세계에는 엄격하고 굳건한 질서 의식이 존재한다. 리의 공간과 기의 공간이 있다. 가령 선생님과 식사를 하는 자리는 리의 공간, 친구들끼리 술을 마시는 자리는 기의 공간이다. 전자는 흐트러져서는 안 되는 자리이고 후자는 감정이 자유로운 자리다. 리(理)만의 사람도, 기(氣)만의 사람도 없다. 지식인이기만 한 사람도 없고 대중이기만 한 사람도 없다는 말이 생각난다. 


리의 공간과 기의 공간의 총체가 한국 사회다. 리의 공간에도 기가 있고 기의 공간에도 리가 있다. 한국은 하나의 철학(제목)이라 규정한 저자는 한국은 복수(複數)이지만 유일한 리에 귀의한다는 점에서 한국은 하나의 리이고 하나의 극장이라 말한다. 한국에서 기를 소리 높여 주장하는 사람들도 실은 모두 그 기를 지배하는 리를 주장하는 것이다. 민족 정기, 풍수지리 같은 기의 논리는 사실 기의 구조, 질서, 원리, 도덕성 즉 리를 말하는 것이다. 풍수지리는 기 자체가 아니라 기의 흐름과 힘의 질서 즉 리를 논하는 것이다. 지기(地氣)가 아닌 지리(地理)인 것이다.


 ‘플라톤과 다르게 형상을 구현하고 있는 세상을 이야기한 아리스토텔레스‘(이정우 지음 ’가로지르기‘ 191 페이지)란 말이 생각난다. 저자는 중요한 질문을 던진다. 리는 보편적 도덕성인데 왜 수직적 질서(차별적 계층성)를 만들며 기는 청탁(淸濁)이라는 차별적 성질을 지니는데 왜 관용이라는 수평적 세계를 형성하는가?란 물음이다.(81 페이지) 관용과 관련하여 기의 공간에 들어서자마자 사람들은 표정을 풀고 틈을 보이며 서로 용서하는 얼굴이 된다(71 페이지)란 글을 참고하면 좋다. 리는 모든 존재에 보편적으로 동등하게 부여되어 있지만 원래 그것은 계층적, 차별적인 구조물로서 있는 것이다. 이일분수(理一分殊)란 말이 생각난다. 이치는 하나이지만 그 나뉨은 다양하다란 의미의 말이다. 


저자는 주자학이 한국인으로 하여금 리를 선호하게 한 것이 아니라 한국인의 성향이 주자학에 열광하게 만든 것이라 말한다. 균열(전쟁, 위기 등) 상황이 리 즉 질서를 추구하게 한 것이란 말이 저자의 지론이다. 성리학은 성선설의 입장으로 성(性) 즉 본성을 강(江)에 비유하곤 한다. 성은 본래 물처럼 맑았는데 탁한 곳을 흐르면 더러워진다.(95 페이지) 한국 요리는 궁정, 양반의 리의 요리와 서민의 기의 음식으로 나뉜다. 리의 요리는 모두 소재 = 기의 논리로 이루어져 있다. 리의 요리는 우주, 자연의 대질서와 인간 몸의 소질서를 우주, 인간, 요리의 동형성에 근거하여 매개한다. 그렇기에 리의 요리는 리의 태도로 먹어야 한다. 리의 태도란 곧 예(禮)를 말한다. 


주자는 예를 천리의 절문(節文; 하늘의 질서가 분절된 질서의 무늬)으로 보았다. 기의 음식은 정념(情念)의 밥이다. 삶을 향한 서민의 에너지가 응축된 음식물이다. 리의 요리가 결코 맵지 않은 것과 대조적으로 기의 음식에는 거친 기가 용솟음쳐서 맛이 맵고 짜고 뜨겁고 진하다.(108 페이지) 기의 음식은 기의 태도로 먹어야 한다. 기의 태도란 곧 자유분방함을 말한다. 리의 음식은 리의 태도로, 기의 음식은 기의 태도로 먹어야 한다. 조선 시대에는 신분에 의해 요리의 가짓수가 정해져 있었다. 왕의 수라상은 5즙, 12채, 그 내용도 엄격하게 정해져 있고 오행의 오색을 조화시키는 등 소재에도 정연한 우주적 질서를 반영시켰다.


한국에서 이판승은 좋은 승려, 사판승은 나쁜 승려라는 이미지는 뿌리 깊다. 저자는 기독교도 리의 기독교와 기의 기독교로 나눈다. 전래 당시 지식인들이 믿었던 기독교를 리의 기독교, 서민들이 믿었던 기독교를 기의 기독교로 본 것이다. 저자에 의하면 1) 양반 = 도덕 + 권력 + 부, 2) 사대부 = 도덕 + 권력, 3) 선비 = 도덕으로 구분한다. 3위 일체인 1)은 어렵다. 도덕은 권력 + 부와 결합하는 순간 부도덕(비리; 非理)으로 쉽게 전락하기 때문이다. 


사대부나 선비는 항상 과거 시험에 대해 비판을 했다. 과거가 응시자의 현실 타파를 지향하는 도덕적 잠재력 내지 도덕적 달성을 테스트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 추종만을 양산해내는 사장지학(詞章之學)을 일삼는다고 하는, 과거의 공리주의적 성격에 대한 비판이다. 선비는 학문이 있으면서 벼슬하지 않은 사람을 말한다. 양반, 사대부, 선비는 모두 주자학의 틀 안에 있었지만 주자학에 대한 해석을 달리 했다. 야당인 사대부는 여당인 양반의 도덕을 공격했다. 핵심 권력과 손을 잡은 사대부는 쉽게 귀족화, 보수화했다. 선비는 이 소용돌이 속에서 항상 핵심 권력의 밖에 몸을 두고 양반과 사대부의 도덕을 싸잡아 공격했다.


한국인은 강렬한 상승 지향을 양식으로 삼아서 살아가지만 이 나라에 하강 지향이 없는 것은 아니다. 유학자의 세계에는 재야로 내려간다는 인생철학이 있었고 그것을 자랑스럽게도 생각하였다. 실제로 재야로 내려가서 고상하고 멋있게 산 문인도 많다. 이것들은 모두 상승하는 하강이다. 단순한 하강이 아니라 리가 있는 하강, 리를 향한 하강이다. 아버지는 한국에서 전형적인 리의 존재이고 어머니는 한국에서 전형적인 기의 존재다. 아버지는 수직적 질서의 유지자이고 어머니는 수평적 질서의 유지자이다. 


한국의 가족에는 리의 가족과 기의 가족이 있다. 리의 가족이란 피의 질서와 규정에 근거한 족보상의 가족, 기의 가족이란 피의 질서를 넘은 정으로 결합된 가족이다. 주자학적 전통에서 중심은 왕이나 황제가 아니라 리다. 왕은 리에 합치되는 때만 왕이기에 리를 장악하고 있다고 자부하는 사대부에 비하면 그 힘은 오히려 미약하기까지 했다. 왕은 리에 합치되지 않으면 쫓겨날 수도 있었다. 


화폐가 사물로부터 초월해 있으면서 사물에 가치를 부여하고 사물에 깃드는 것처럼 리도 사물로부터 초월해 있으면서 사물에 가치를 부여하고 사물에 깃들어 있다. 한국에서 페미니즘이란 주자학적 보편 운동 중 하나이다. 그것은 여성이라는 새로운 도덕적 주체 즉 리의 담당자를 사회에 등록 시키고자 하는 움직임이다. 여성을 기 진영의 존재로 폭력적으로 규정하고 리 진영의 존재인 남자에게 지배되어야 한다고 하는 유교적 위계질서에 대해 여성은 기 진영의 존재가 아니며 여성도 리를 드러낼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 한국의 페미니즘이다.


리와 기의 개념으로 한국 사회를 분석한 오구라 기조의 책은 흥미로운 부분이 있다. 그러나 일본이 조선을 병합한 것에 대한 해석은 저자의 문제의식을 비판적으로 보게 한다. 즉 일본을 새로운 리의 담지자로 인정하고 적극적으로 변혁과 개혁에 매진한 조선인들도 많았다며 이들 친일파가 지금 완전히 부정되거나 무시되는 것은 오늘날 한국인을 지배하는 민족주의적 리 때문인 바 언젠가 이 민족주의적 리가 변혁되면 식민지 시대에 대한 시각도 변할 수 있을 것이라 결론지은 것은 아쉽다. 저자는 일본이 조선을 식민지화하고 이전까지의 리에 정면으로 대항하는 새로운 리에 의해 조선 사회를 변혁시키려 했다고 말한다. 


일본은 정말로 새로운 리에 의해 조선 사회를 변혁시키려 했는가? 그들이 조선을 침략, 식민지화한 것은 조선의 많은 자원, 식량, 노동력을 취하고 동원하기 위해서가 아닌가? 일본의 조선 식민지화를 하나의 리를 새로운 리로 대체(代替)하는 차원으로만 보면 역사의 무대를 물들인 조선인들의 고통, 희생, 피억압의 실상은 보이지 않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철학의 한계인지 오구라 기조라는 일본 지식인의 한계인지 잘 모르겠다. 일본이 2차 대전 패전과 함께 자국에 진주한 맥아더 군대를 죽창 들고 때려죽이자고 하다가 맥아더를 칭송하고 납작 엎드린 것처럼 우리도 그랬어야 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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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학 전공에서 생물학 전공으로 길을 바꾼 팀 콜슨의 ‘ 존재의 역사‘는 리처드 도킨스, 데이비드 크리스천 등의 외국의 유명 과학자들, 박문호, 궤도 등의 우리 나라의 유명 과학자들의 추천사가 달린 책이다. 과학과 비과학 등이 포함된 1장 거대한 역사의 전제에서부터 반물질, 그리고 화학 반응 등이 포함된 3장 화학적 이끌림, 추측과 의문 등이 포함된 마지막 10장 존재의 이유를 찾아서까지 읽을 만한 내용들이 빼곡히 들어선 책이다. 560여 페이지의 책에서 어디에 초점을 두면 좋을까? 그간 과학책을 많이 접하였지만 채 만나지 못한 부분들에 초점을 두면 좋을 듯 하다. 


원소 또는 소립자 부분이 그 범주에 들어갈 가능성이 높다. 내게는 우주의 크기처럼 광대무변한 부분보다 소립자 부분이 훨씬 신비롭게 여겨진다. 가령 저자에 의하면 우주를 횡단하는 데 7조 광년 이상이 걸릴 것으로 추정된다.(95 페이지) 그러면 수소 원자는 어떤가. 이를 알기 위해 다음의 구절을 숙고할 필요가 있다. “쿼크끼리 상호 반응하면 양성자와 전자라는 더 복잡한 입자로 바뀌며, 두 입자 또한 상호 반응으로 원자핵이라는 더욱 복잡한 형태를 만든다. 원자핵은 전자와 상호 반응하여 원자를 만들고 원자끼리 상호 반응하면 분자가 된다.”(21 페이지)


수소 원자핵은 양성자다. 원자번호=양성자 수=전자 수라는 사실도 알 필요가 있다. 흥미로운 부분은 여기에 있다. 즉 수소 원자는 항상 양성자와 전자를 하나씩 지니지만 자연 상태의 수소 핵에는 중성자가 아예 없거나 1개이거나 2개다.(99 페이지) 중성자가 없는 것을 프로튬(protium), 하나인 것을 듀테륨(deuterium), 두 개인 것을 트리튬(tritum)이라 한다. 이를 수소의 동위원소라 한다. 양성자 수는 같고 중성자 수가 다른 것을 말한다. 


중성자와 양성자는 쿼크로 만들어진다. 쿼크는 강한 상호작용으로 서로 뭉쳐 있다. 강한 상호작용이 있기에 양성자와 중성자, 쿼크가 서로 결합할 수 있다. 그렇지 않았다면 원자핵도, 생명도 존재하지 않았다. 당연히 우주도 존재하지 않았다. 약한 상호작용은 어떤가. 이 또한 원자핵에 작용하는 힘으로 일부 원소가 방사성 동위원소로 존재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원자핵은 대부분 안정적이어서 중성자가 갑자기 양성자로 바뀌거나 양성자가 중성자로 바뀌어 다른 원소의 원자가 되는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하지만 일부 원소의 특정 동위 원소는 양성자와 중성자의 배치가 불안정하여 양성자가 중성자로 변하거나 그 반대의 일이 일어난다. 이 과정에서 방사선이 방출된다. 차이가 중요하다는 말을 할 수 있다. 모든 방사성 원소가 위의 원리로 붕괴하지 않는다. 하지만 트리튬은 상기 과정을 거쳐 헬륨으로 붕괴하며 이때 관여하는 힘이 약한 상호작용이다. 이 작용이 없었다면 태양 에너지의 원천인 핵융합도 일어나지 않는다.(100 페이지) 강한 상호작용이 없었다면 생명이 존재하지 않았듯 약한 상호작용이 없었어도 생명은 존재하지 않았다. 


전자들이 오비탈이라는 흐릿한 궤도 형태로 핵 주위를 빠른 속도로 이동하는 것은 즉 전자가 제 자리를 지키는 것은 전자기력 덕분이다. 전자기력은 양성자, 중성자, 전자의 개수에 따라 원자의 종류를 결정하기도 한다. 중력도 중요하다. 중력이 없었다면 생명체는 물론이고 태양, 지구, 달 등이 모두 존재하지 않았다. 우주에서 최초로 생성된 원자핵은 수소, 헬륨이다. 수소와 헬륨은 원자핵만 있는 뜨거운 플라즈마 상태로 존재하다가 우주의 온도가 충분히 내려간 후에야 마이너스 1 전하를 가진 전자와 결합해 최초의 원자를 형성했다.(109 페이지) 


과학에서 말하는 무(無)는 에너지도 역장(力場)도 없음을 의미한다. 어떤 이유에서인지 우리 우주는 무에서 태어났고 그 원리는 과학자도 모른다. 3장 화학적 이끌림이 내게는 가장 유용한 챕터다. 화학은 지구과학 특히 지질에 대해 알 필요가 있을 때 의미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앞에서 강한 상호작용, 약한 상호작용, 전자기력, 중력이 없었다면 생명, 지구, 우주 등이 존재할 수 없었을 것이란 말을 했다. 마찬가지로 물질과 반물질이 동일한 양만큼 생성되었다면 우리는 존재할 수 없었다.(140 페이지) 원소끼리 결합하여 분자를 만들지 않았다면 우주는 훨씬 더 따분한 곳이 되었을 것이다. 우리 또한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146 페이지) 


주기율표에서는 리튬과 나트륨 등의 금속을 왼쪽에, 염소와 산소를 비롯한 비금속을 오른쪽에 배치하여 금속과 비금속을 구분한다. 각 열(列)은 다른 원소와의 반응 방식 등 원소의 특징에 따라 집단을 이룬다. 주기율표에서 금속은 다른 원자와 반응시 전자를 내주려는 반면 우측에 위치한 비금속 원소는 전자를 받으려고 한다. 그런가 하면 주기율표 중앙에 있는 원소의 경우 전자를 공유하려는 경향이 있다.(148 페이지) 그 자체로 화학의 복합체인 우리와 같은 생명체는 만일 모든 원소가 헬륨이나 네온처럼 반응성이 없다면 절대 탄생하지 못했을 것이다.(153 페이지) 


저자의 설명은 새롭다. 파동 입자 이중성과 양자(量子) 현상을 설명하는 것이 대표적이다. 결빙선(結氷線; front line)이란 말이 있다. 태양에서 일정 거리 이상 떨어졌을 때 물이 얼음이 되고 가스 화합물이 고체로 응축되어 거대 가스 행성이 되는 경계선을 말한다. 경계선 안쪽으로는 무거운 화합물만 응축될 수 있으므로 암석 행성(수성, 금성, 지구, 화성)이 형성된다. 태양에 가까울수록 암석 행성이 형성되는 이유는 바깥쪽에서 생성된 행성들보다 무거운 원소가 차지하는 비중이 더 높기 때문이다.


저자는 지구 외핵은 왜 용융 상태일까?란 질문을 던진다. 외핵은 철, 규산염, 황화물, 방사성 금속 등으로 구성되었다. 핵이 지닌 열의 일부는 지구를 형성하던 때부터 남아 있는 것이다. 초기 태양계에서 지구는 물질 응축 및 테이아와의 충돌 결과 많은 열이 발생했다. 용융 상태인 외핵의 바깥쪽은 맨틀이며 주성분은 산화마그네슘과 규산염으로 이루어진 조암광물로 감람석, 석류석, 휘석이 있다. 맨틀은 고체이지만 수백만년이라는 시간의 관점에서 매우 느린 속도로 움직인다. 맨틀은 지구 부피의 약 85%를 차지한다. 두께는 최소 2,800km이상이며 핵만큼은 아니지만 온도가 높다. 


맨틀 상부와 하부의 온도 차로  인해 더 아래쪽에 있는 고온의 광물과 암석이 매우 천천히 표면으로 올라온다. 맨틀에서 외핵과 접하는 가장 깊은 부분의 온도는 4,000~5,000°C에 이르지만 상층부는 200~600°C로 훨씬 낮다. 대륙 지각이 천천히 닳는 현상을 지질학 용어로 풍화와 침식이라고 한다. 바위 틈새의 물이 얼고 녹기를 반복하면 바위가 쪼개지고 오랜 세월에 설쳐 비와 바람에 마모되기도 한다. 수분에 포함된 산(酸) 성분도 풍화 작용에 한몫을 한다. 이뿐 아니라 식물의 뿌리, 진균, 세균, 심지어 몇몇 동물 등 생명체도 두 현상에 힘을 보태어 바위를 조각내기도 한다. 


계속해서 움직이는 지각판은 맨틀 아래로 들어가면서 소실되는 양과 새로운 지각이 형성되는 속도에 따라 크기와 모양이 끊임없이 바뀐다. 최초의 생명체가 진화했을 당시 지구의 대기는 화산 폭발이 뿜어낸 가스로 만들어졌다. 이때는 황화수소, 메테인, 일산화탄소, 이산화탄소가 풍부했다. 만약 생명체가 진화하지 않았다면 오늘날 지구 대기는 금성과 유사하게 이산화탄소가 95%를 차지하고 1~2%의 질소 및 산소와 기타 분자로 이루어졌을 것이다. 


오늘날 대기 중 질소 비중이 큰 것은 질소는 다른 원소와 쉽게 결합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런 특징으로 질소는 우리가 서 있는 땅속의 암석이나 결정을 잘 형성하지 않는다. 따라서 질소는 대기 중에 흔하지만 지상에서는 상대적으로 드문 편이다. 반면 산소는 여러 원소와 산화 작용을 일으킨다. 이는 암석에서도 발견되고 물도 만들어낸다. 진화란 자기 복제에 가장 효율적인 DNA를 선택하는 자연스러운 과정이다.(239 페이지) 진화는 생존과 번식에 최적화된 개체를 이끌어내는 과정(295 페이지)이라고도 할 수 있다. 


DNA가 먼저 존재해야 당신도 있다. 우리의 DNA는 진화의 선택을 받아야 한다. 저자는 개인적으로 생물과 무생물의 차이를 정의하자면 크게 자연발생, 복제, 그리고 외부 에너지원을 활용하여 막(membrane) 내에서 조절 가능한 화학 반응으로 나눌 것이라 말한다. 진화는 중력과 전자기력, 약한 상호작용, 강한 상호작용처럼 실재하는 개념이다. 진화가 없었다면 우리는 존재할 수 없었다고 말하는 저자는 물리학자가 강한 상호작용과 약한 상호작용을, 화학자가 전자기력을 이해하듯 생물학자가 이해하는 진화의 깊이도 그와 다르지 않다고 덧붙인다. 


저자는 생물학자인 만큼 생물에 대한 서술 비중을 가장 높게 설정했다. 저자는 자신이 접근법이 다른 네 분에게서 조금씩 영향을 받으며 한 가지 과학적 연구 방법만 깊이 파고든 달인이 아닌 만능 과학자로 성장했다고 말한다. 저자는 네 분의 지도 속에서 다음과 같이 좋은 과학자의 덕목을 배웠다고 한다. 첫째 상상력이 풍부하되 멋진 아이디어도 기존의 지식에 반한다면 과감히 버릴 수 있어야 한다. 둘째 신봉하던 가설이 틀렸다는 사례가 제시되었을 때는 기꺼이 주장을 수정한다. 셋째 근거에 기반하고 건설적인 비판이 가능해야 한다 등이다.


대량 멸절이 일어나면 대부분 우점종이 완전히 힘을 잃고 새로운 종들이 번성하는 무대가 마련된다. 포유류가 지배적인 종이 된 것은 6600만년전이다. 백악기 멸종 이후를 말한다. 저자는 의식은 인간의 전유물인가?란 글에서 사람들이 정신을 특별히 여기는 이유는 심장이나 비장처럼 위치를 특정할 수 없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저자의 글을 읽으며 나는 무분별함(?)을 반성하기도 했다. 신경과학자들이 의식을 뇌의 전기적 활성이라고 주장하지만 사실 그것이 의식의 본질까지 설명해주지 못한다는 말이 그것이다. 


뇌에 대한 이야기 중 글리아 세포(glia cell)에 대한 이야기가 눈에 띈다. 19세기에 과학자들은 교세포(膠細胞)가 없다면 신경계가 서로 분리될 것이라 생각했다. 그리스어로 풀(쌀이나 밀가루 따위의 전분질에서 빼낸 끈끈한 물질. 무엇을 붙이거나 피륙 따위를 빳빳하게 만드는 데 쓴다.)을 뜻하는 글리아를 따서 명명하였지만 실제 역할은 엄연히 다르다. 뉴런에게 세포란 경주용 자동차가 잘 작동하도록 보장하는 정비팀 같은 존재다. 해마가 뇌에서 만들어낸 세상의 시뮬레이션과 과거의 경험이 합쳐지는 부위라는 말도 신선(?)하다. 


의식을 연구하는 과학자들은 우리가 감각으로 외부 세계에서 무언가를 인지한 후 반응하기까지의 과정을 지각, 주의, 평가, 통합, 의사 결정, 행동과 같이 단계적으로 구분한다.(384 페이지) 동물은 짝, 물, 보금자리, 온기, 안전한 곳을 찾아다닌다. 경쟁자의 유무 등 주변 상황을 확인하려고 이동하기도 한다. 결과적으로 동물은 여러 상황에서 최선의 결정을 내리는 것으로 추정된다. 동물은 좋은 결정을 많이 내린다. 인간이 다른 동물과 다른 점이 있다면 장기적 관점에서 생각하는 능력이다. 


이따금 진화를 통해 지구를 바꾸는 종이 등장한다. 인간은 지구를 바꾼 최초의 종도, 최후의 종도 아니다. 수십억년전 남세균은 대기에 산소를 공급하며 지구를 바꾸었다. 복잡한 구조를 가진 생물의 시대가 도래했음을 알린 존재는 최초의 진핵생물이었다. 최초의 포식자는 생명체가 살아가는 방식을 송두리째 바꾸었다. 최초의 육상 식물은 생명체가 대륙을 점령할 가능성을 열었다. 인간은 지구를 바꾼 속도가 매우 빨랐던 종이긴 하지만 결국 자연의 결과물일 뿐이다.


인류의 조상인 호모 에렉투스는 매우 성공적으로 번성한 결과 아프리카를 벗어나 유럽과 아시아까지 퍼져 나갔다. 이 집단은 인도네시아의 플로레스, 자바 등의 섬에 자리를 잡았는데 이들 지역은 바다를 건너지 않으면 정착할 수 없는 곳이었다. 일부 과학자는 그 사실을 두고 어떤 형태로든 언어적 소통을 요구하는 항해 능력이 있었다는 증거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이와 달리 고대에 발생한 지진 해일에 의해 초목 더미에 탄 사람들이 바다로 떠밀려 나간 뒤 바람에 밀려 우연히 섬에 도착했을 가능성이 크다는 주장도 제기된다. 


흥미로운 논쟁 중 하나로 호모 에렉투스가 플로레스 섬에 자리를 잡은 후 몸집이 왜소한 호모 플로레시안시스 일명 호빗족으로 진화했다는 주장이 있다. 플로레스 섬은 과거에도 섬이었으므로 이곳에 자리를 잡으려면 호모 에렉투스가 바다를 건너야 한다. 소수의 무리가 통나무나 풀숲 더미에 매달려 우연히 섬에 도달했는지 아니면 쪽배나 다른 형태의 배를 특별히 설계했는지 여부는 논란의 대상이다. 


저자는 우주가 탄생한 시점에 우리의 존재는 필연적이었을까, 아니면 그저 운이 좋았던 것일까?란 질문에 답을 할 수 있다고 말한다. 쉽게 답할 수 없는 문제라는 것이 저자의 견해다. 책에는 뉴턴과 로버트 훅의 이야기가 나온다. 거인의 어깨 운운이 아닌 다른 이야기다. 물론 뉴턴의 이상 성격에 기인한 잘못된 행동에 대한 이야기다. 저자는 책을 쓰기 위해 자료를 조사하면서 인간이 이룩한 지식의 폭과 다양성에 놀랐다고 말한다. 과학적 연구 방법이란 매우 유연하며 서로 다른 분야의 과학자들이 그 방법을 다양한 측면에서 저마다 다른 방식으로 활용하고 있음을 알게 되었고 이뿐 아니라 인류의 가장 위대한 성과인 과학적 연구 방법도 완벽하지는 않음을 깨달았다고 말한다. 


저자는 개인적으로 무언가를 설명할 때 그 내용이 최대한 간단해야 한다는 오컴의 면도날은 확률론적 우주를 가리키는 말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 주장 역시 의견일뿐 과학이 아니다. 감정적 인식도 중요하지만 과학적이지는 않다.(510 페이지) 저자에 의하면 우주가 흔한지 단 하나만 존재하는지도 알 수 없다. 우주가 흔한 존재라면 우리 우주가 전형적인지 특이한지도 알 수 없다. 달리 표현하면 우리는 애초에 우주가 무(無)가 아니라 유(有)인 이유조차도 알지 못한다. 중력과 전자기력, 강한 상호작용, 약한 상호작용이 지금과 같은 세기를 가지게 되는 것이 필연적인 결과인지 우연에 의한 것인지 알지 못한다. 


만약 우주를 만드는 실험을 다시 하게 된다면 다른 형태의 힘이 등장할지도 모르며 현재 우주에서 관찰되는 네 가지 기본 상호작용보다 그 종류가 줄어들거나 늘어날 수도 있다. 결과적으로 우리는 네 가지 힘이 왜 존재하는지도 알지 못한다. 다만 생명체에게는 네 가지 힘이 모두 필요하며 컴퓨터 시뮬레이션에 따르면 각 힘의 세기에 아주 조금의 변화라도 생길 때 우주의 원자나 분자, 별과 행성이 모두 사라져버릴 수 있다는 것만큼은 확실하다. 


일부 과학자와 철학자들은 우리 우주에 있는 힘이 생명체가 존재하기 알맞은 세기라는 점에 경이로워한다. 이를 두고 학자에 따라서는 우주가 우연히 탄생했을 리 없다는 증거로 해석하기도 한다. 만약 우리 우주에서 생명체에 알맞은 세기를 가진 힘이 없었다면 생명체는 진화할 수도 없었거니와 생명체를 목격한 이도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우리가 지금처럼 우주를 관찰할 수 있는 것도 생명체의 진화에 적절한 환경 속에 탄생했기 때문이다. 


생명체의 등장 과정에는 에너지가 필요하다. 이와 관련하여 당시 지구에서 생명체의 등장에 필요한 에너지원은 화산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화산은 지구 고유의 지형은 아니다. 사화산이 일부 섞여 있긴 하지만 수성과 금성, 달, 화성 그리고 목성의 위성인 이오에도 화산이 관측된 바 있다. 화산 에너지와 유기화합물의 결합으로 생명체가 탄생한 원리는 여전히 불확실하다. 저자는 존재의 이유를 구하는 물음에 목적이 없다는 취지의 답은 우리가 인생을 의미 없이 살아야 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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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소·해양·기후
현상민.강정원 지음 / 에이퍼브프레스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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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소의 왕이라는 탄소에 대한 이야기다. 환경에 적응하는 과정과 인류의 발전 과정에는 항상 기후변화가 있었다. 기후변화의 핵심은 온실가스와 탄소다. 다른 것과 화학적 결합을 하거나 다른 곳으로 이동하거나 저장되는 과정을 반복하는 탄소는 암석 속, 지층 속, 동식물 속 등에 스며들어 우주의 여러 원소 중 네 번째로 많은 원소라는 위상을 차지하고 있다. 이산화탄소, 메탄, 이산화질소, 육불화황, 수소불화탄소, 과불화탄소 등이 주요 온실 가스다. 이 가운데 이산화탄소가 전체 온실 가스의 91%를 차지한다. 온실 가스의 정체가 바로 탄소다. 


처음 지구가 만들어질 때 밀도의 법칙이 작용했다. 가장 가벼운 물질은 대기에, 그것보다 가벼운 물질은 지각에, 무거운 물질은 내핵에 자리하게 된 것을 말한다. 지각 물질은 다양한 원소로 이루어진 암석이다. 그 가운데 퇴적암에는 많은 양의 탄산염이 들어 있다. 탄산이 들어 있는 바위라는 의미다. 지구 진화와 함께 만들어진 탄소는 진화가 이어지면서 이곳저곳으로 이동하고 저장되었다. 지구에서 탄소 또는 탄소를 포함하는 물질이 가장 많이 존재하는 곳은 지표다. 탄소에 대해 잘 알려면 전자와 원자를 둘러싼 전자궤도에 대해 알 필요가 있다. 


탄소는 현존 118개의 화학원소 중 하나이지만 인류에게 엄청난 영향을 주었다. 탄소는 우주가 생성될 때 만들어진 행성 기원 원소다. 수소와 헬륨 등 가벼운 원소는 빅뱅 후 비교적 짧은 시간에 만들어졌다. 약 4억년전의 이산화탄소 농도는 산업혁명 이전의 그것에 비해 20배 이상이다. 3억년전에는 현재와 비슷했다. 이 때의 플랑크톤 양도 현재와 같이 상당히 많았다. 긴밀한 연관관계가 있는 것이다. 대기 중 이산화탄소 농도 증감과 플랑크톤 증감이 관련된다는 의미다. 지구상의 탄소 절대량은 거의 비슷한데 이것은 하늘이나 땅(퇴적물 속), 그리고 해양에 머물다가 다른 곳으로 이동한다. 


산업혁명 이후 인간이 배출하는 탄소나 이산화탄소는 자연적인 변화의 속도를 훨씬 뛰어넘는다. 탄소 원자 하나에 수소 원자 네 개가 붙은 메테인(메탄; CH₄)은 이산화탄소와 더불어 강력한 온실 가스이자 자원이다. 메탄은 가스 상태에서는 태워서 바로 에너지를 얻을 수 있지만 지충 중에서는 온도, 압력 조건이 맞으면 얼음 덩어리 형태로 존재한다. 메탄 가스가 낮은 온도와 높은 압력 조건에서는 물과 반응하여 얼음 형태가 되는데 이를 메탄 하이드레이트 또는 가스 하이드레이트라 한다. 메탄은 화석연료 사용에 의한 발생보다 대기중 발생 비율이 높다. 


습지에서 발생하는 메탄의 양은 대기로 방출되는 이산화탄소의 양과 밀접하게 관련된다. 압력이 높고 온도가 낮은 곳이 해저면이다. 이곳에 메탄이 하이드레이트 형태로 보존된다. 압력 형태가 변하면(낮아지면) 메탄 가스가 되고 대기로까지 방출되어 온실효과를 일으킨다.(따뜻한 해수가 유입되면 밀도가 낮아져 압력이 하강한다.) 메탄 가스는 광화학반응을 통해 메탄올이나 포름알데히드로 전환된다. 이 둘이 화학 반응을 일으키면 이산화탄소가 된다. 이 일련의 과정은 순식간에 일어난다. 


학술적으로 석탄은 중량으로 50% 이상 탄소 함유와 용적으로 70% 이상 탄소분을 함유한 물질이다. 석탄은 탄소 함량에 따라 구분한다. 탄소 성분이 60% 정도이면 이탄(泥炭), 70%는 아탄(亞炭), 80~90%는 역청탄(瀝靑炭), 95%는 무연탄(無煙炭)이다. 석탄은 고생대 석탄기에 형성되었지만 석유는 이보다 늦은 중생대 동안 대부분 형성되었다. 현재 존재하는 석유광상의 약 70%는 중생대에, 20%는 6500만 년전인 신생대에, 나머지 10%는 고생대에 형성되었다. 고생대에 번성했던 식목이 석탄을 만들었던 환경이었다면 뒤이어 등장한 동물은 석유가 만들어지는 환경을 제공한 셈이다. 흥미롭게도 꽃도 예쁘고 약으로도 쓰이는 양귀비 꽃나무가 화학적으로 탄소화합물이라고 한다. 


플라스틱은 탄소의 또 다른 형태이며 이 책의 중심 단어이기도 하다. 현대를 플라스틱 시대라고 일컫는다. 탄소는 다양한 결합 형태를 갖는다. 고분자는 분자량이 많다는 뜻이다 다른 용어로는 중합체라고 한다. 저자는 해양과 우주는 인류가 극복하고 개척해야 할 마지막 남은 프론티어라고 말한다. 저자는 얼음에 대해 이야기한다 얼음은 반사율이 높기 때문에 확대되면 지구가 받는 일사 총량이 떨어진다. 그 결과 지구는 더욱 한랭해지고 빙상은 발달한다. 지구 전체에 화산활동이 뜸해져 대기 중으로 이산화탄소가 공급되지 않게 되면 수십만 년 정도 걸려서 지구는 한랭화되고 그 결과 전 지구 동결 상태에 이르게 된다.


스노우볼 어스 상태에서 벗어날 수 있는 비결은 탄소순환에 있었다. 일반적으로 대기 중 이산화탄소는 보통 대륙에서 일어나는 화학적 풍화나 생물의 광합성에 의해 소비된다. 그러나 지표의 물이 모두 동결되면 대륙에서 마땅히 있어야 할 소비 프로세스가 정지된다. 반면 화산활동으로 인해 대기로 방출되는 이산화탄소는 소비되지 않고 그대로 대기 중에 계속 축적된다. 지구 환경이 크게 변동하면 생물의 대멸종이 초래되지만 한편으로는 생물의 극적인 진화가 촉진되기도 한다. 기후변화의 방아쇠를 당긴 것은 이산화탄소이지만 이산화탄소 변화를 일으키는 도화선은 태양 방사이다. 


저자는 고생대 데본기에 출현한 실러캔스에 대해 이야기한다. 본래 한 종류였던 실러캔스가 두 종으로 분리되었다는 사실을 이야기한다. 중생대에 있었다는 대륙이동설이 힌트이다. 화산분출로 인해 화산재가 침적하면 대기 중 이산화탄소가 감소된다는 이야기가 있다.(119 페이지) 이 이야기는 화산활동으로 인해 대기로 방출되는 이산화탄소는 소비되지 않고 그대로 대기 중에 계속 축적된다는 이야기(96 페이지)와 함께 흥미롭게 지켜봐야 할 부분이다. 다섯 번의 대멸종 중 3차 대멸종인 페름기의 대멸종은 판게아라는 초대륙이 분리되기 시작한 시기다. 


4차 대멸종은 화산 분출이 계기가 되어 이산화탄소 농도가 급증한 것이 중요 원인으로 간주된다.(125 페이지) 화산재와 이산화탄소 간의 관계를 보아야 할 것이다. 대멸종의 주요 원인으로 화산폭발, 해수면 변화(해퇴; 海退), 소행성 충돌 등이 꼽힌다. 대형 운석이 충돌하거나 대규모 지진활동이 일어나면 장기간에 걸쳐 지구온난화나 지구한랭화가 일어난다. 메탄하이드레이트의 대량 방출도 한 원인이다. 해양 무산소 사건도 한 원인이다. 현재 진행되는 여섯 번째 대멸종은 과거의 그 어떤 대멸종보다 빠르게 진행되고 있다고 한다. 


저자는 시간, 흐름, 변화를 모두 포용하는 과학적 현상을 기술한 용어를 찾는다면 해양대순환일 것이라 말한다. 해양대순환을 통해 지구의 탄소순환이 조정되며 기후도 조절된다. 과학자들은 지구 탄생 이후 약 5~6억년이 지나서 해양이 만들어졌으리라 추정한다. 육지에서 바다로 유입된 퇴적물이 2억년 후에 해구로 소멸하는 것처럼 원소들도 퇴적물 층으로 소멸(퇴적)한다. 해양대순환은 그 자체로 중요하지만 지구환경변화나 기후변화에도 중심 역할을 한다. 퇴적물은 해양 내부에서 일어난 환경변화를 반영한다. 


해양대순환 편에서 흥미로운 점은 멸종이 일어난 백악기가 지구가 가장 뜨거웠던 시기라는 점이다. 백악기는 대륙 이동이 활발했던 시기이기도 하다. 해저확장도 급격하게 빨라졌고 해수면 상승에 의한 해수의 재배치도 일어났다. 백악기는 해양의 많은 부분에서 무산소 환경이 진행된 시기이기도 하다. 해양대순환은 현재의 지구환경, 기후변화, 탄소 거동 등과 깊이 관련된 문제다. 해양대순환은 지구상에 불균질하게 퍼져 있는 열을 전 세계로 재분배해서 지구의 기후를 조절한다. 주위의 물과 수온과 염분에서 완전히 특성이 다른 물이 집합되어 있을 때는 수괴(水塊; water mass)라 하고 표층에서 심층까지 물 전체는 수계(水系; water column)라 한다. 


수괴는 주변 물과 구별되는 물리적 특성이 있는 공통된 형성 역사가 있는 식별 가능한 수역을 말한다. 바닷물의 순환을 열염순환(熱鹽循環; thermohaline circulation)이라 한다. 열과 염도가 주요 결정 요인이기 때문이다. 열염순환을 일으키는 주 요인은 바람이다. 저자는 왠만한 곳에서 듣기 어려운 말을 한다. 단순한 과학적 사실을 알아내는 것과 그 원인과 결과를 논리적으로 사실에 맞게 설명하는 것은 많이 다르다는 것이다. 조사를 통해 연구된 사실이라도 모두 맞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세계 유수의 과학 저널에 실린 논문도 그렇다. 


게재가 되었어도 절차적 문제나 다른 문제로 인해 철회되기도 하고 후에 사실이 아닌 것으로 밝혀지기도 한다. 해양 대순환의 메커니즘을 밝힌 사람은 미국의 지구화학자 월레스 스미스 브로커(Wallace Smith Broecker; 1931 ? 2019)다. 누적된 과학적 사실은 기존의 사실 관계를 완전히 바꾸어 놓기도 한다.(202 페이지) 기후과학자들은 인류문명 발전이 시작된 과거 1만년(산업혁명 이전까지)을 그 이전까지와 다른 ‘기후변화가 거의 없는 상당히 안정된 시기’로 여긴다. 


해양 퇴적물의 기원은 넷이다. 암석 기원, 생물 기원, 수성 기원, 우주 기원 등이다. 풍화 과정을 거친 작은 입자 암편(巖片), 화산쇄설물 등이 암석 기원 퇴적물이다. 유공충(有孔蟲)이 생물 기원 퇴적물의 대표격이다. 수성 기원은 해수로부터 굳은 퇴적물이다. 증발암, 암염 등이 해당한다. 우주 먼지는 우주 기원 퇴적물이다. 탄산염 각질로 된 유공충은 칼륨, 산소, 탄소의 합성물이다. 퇴적물은 기후변화나 탄소의 거동을 이해하기 위해 꼭 필요한 재료다. 동위원소 기법을 발견한 해롤드 클레이튼 뉴레이는 제자 에밀리아니에게 기술을 전수하였다. 


에밀리아니는 산소 동위원소 값이 일정한 규칙성을 갖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빙기에는 동위원소값이 무거워지고 간빙기에는 가벼워지는 것이다. 지질학자이면서 미고생물학자인 에밀리아니는 고해양학의 창시자다. 책에 두 개의 주요 단어가 나온다. 플랑크토닉(planktonic)과 벤틱(benthic)이다. 전자는 부유성(浮遊性)을 의미하고 후자는 저서성(底棲性)을 의미한다. 부유성 유공충은 해수의 동위원소와 온도 변화라는 두 가지 요인을 모두 반영하고 저서성 유공충은 수온 변화를 반영하지 않고 해수의 동위원소비 변화만을 반영한다.(212, 213 페이지) 


산소동위원소 분석에 의한 값이 변화하는 것 중 60%는 빙하 성쇠에 관한 결과이고, 40%는 수온 변화에 따른 결과이다. 유공충의 골격은 탄산칼슘으로 구성되었다. 주성분은 산소와 칼슘이다. 유공충 각질 속의 산소동위원소를 분석해 과거 표층 해수 온도를 복원할 수 있으며 결과적으로 당시의 해수 온도 즉 기후변화에 대한 중요 정보를 얻을 수 있다. 그러나 모든 퇴적물에 유공충이 있는 것이 아니어서 어려움이 따른다. 책에는 평소 궁금해 하던 내용이 하나 있다. 유공충은 성장할 때 용존되어 있는 탄산칼슘 이온을 활용해 각질을 만든다는 내용이다.(221 페이지) 


유공충은 칼슘이 부족하면 다른 원소를 이용해 각질을 만든다. 유공충의 산소동위원소 연구는 동위원소 분석이 정착된 이래 많은 발전을 거듭하며 지구환경을 이해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알케논은 산소동위원소 분석 기법의 결점을 보완할 유기화합물로 꼽힌다. 이 화합물은 코코리스가 생장하는 과정에서 만들어내는 것이다. 유기물은 유기물이 생성될 당시의 해수 특성을 반영한다. 우리가 겨울이 되면 옷을 한 겹 더 입고 추위를 견디는 것처럼 그들은 생장 당시의 수온 변화에 따라 이중결합을 만든다.(226 페이지)


알케논은 탄산칼슘이 보존되지 않는 지역에서 얻은 퇴적물에도 적용할 수 있다. 단 단점도 있다. 수온이 5도씨 이하인 저온 영역과 28도씨 이상의 고온 영역에서는 알케논 불포화 지수와 생육 수온의 관계가 비례관계에 있지 않다는 점이다. 퇴적물 중에는 미화석(微化石)이나 이보다 더 작은 나노화석에 해당하는 코코리스 등 다양한 종류의 미화석이 포함되어 있다. 기후변화는 해양 표층에 서식하는 생물의 탄소순환과 깊은 관계에 있다. 식물 플랑크톤은 광합성을 통해 대기 해양 간 탄소 교환이 일어나도록 한다. 바다가 탄소를 흡수하는 능력 또한 기후변화와 과년이 높다. 차가운 해수는 용해도를 높여 더 많은 탄소가 녹아들도록 해준다. 


수온이 오르면 용해도가 떨어지고 해양의 탄소 흡수 능력은 떨어진다.(229 페이지) 역동적인 지구는 대기 해양 작용이라는 큰 프레임 내에서 조절된다고 볼 수 있다. 대기는 순환이 빨라 한 지역에서 다른 지역으로 여분의 에너지를 전달하고, 해양은 막대한 용량으로 수증기나 열에너지를 담아두는 저장소 역할을 한다. 당연한 일이지만 지구과학에는 지질 외에 대기, 해양, 천문 등이 포함된다. 


‘탄소 해양 기후’는 대기, 해양 등에 대해 흥미롭고 의미있게 공부할 수 있는 책이다. 저자에 의하면 대기는 순환이 빨라 한 지역에서 다른 지역으로 여분의 에너지를 전달하고, 해양은 막대한 용량으로 수증기나 열에너지를 담아두는 저장소 역할을 한다. 좋은 지구과학 책들이 계속 나온다. 해양과 대기를 알면 지질을 알 수 있다. 그 좋은 지구과학 신간들을 제치고 나온 지 2년 정도 된 해양 관련 책을 읽는 것은 이 때문이다. 지질과 연관이 되는 부분이 많지 않아도 언젠가는 유의미하게 활용할 수 있을 것이다. 


알케논을 만드는 에밀리아니아 헉슬레이는 탄산칼슘을 주성분으로 하기에 크기가 작을뿐이지 결국 탄소를 고정한 결과물이다.(243 페이지) 해수 속에 용존되어 있는 탄산이온이 고정된 것이다. 생물생산 과정을 통해 대기 중 이산화탄소를 줄이는 효과를 내는 것이다. 해양은 이산화탄소를 흡수하는 역할을 하지만 어떤 해양은 방출도 한다. 세계적으로 흡수지역과 방출지역이 뚜렷하게 구분되고 있다. 문제는 흡수 능력이 점점 떨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기후변화나 지구환경변화와 관련해서 해양은 중심적 역할을 한다. 저자는 미세먼지는 기후변화 문제이기도 하다고 말한다. 


블루 카본, 그린 카본은 흡수되는 탄소를 말한다. 전자는 바다와 습지 등 해양 생태계가 광합성을 통해 흡수하는 이산화탄소이고 후자는 육상 생태계가 흡수하여 저장하는 이산화탄소다. 그린 카본은 생태계가 악화되면 빠르게 이산화탄소를 대기 중으로 배출한다. 반면 블루 카본은 퇴적물에 의해 재흡수될 수 있다.(276 페이지) 저자는 온실 가스 감축, 탄소 중립에 대해 충분하게 강조하고 결단을 촉구한다. 탄소 해양 기구는 구체적 자료 및 과학적 연구에 기반한 책이다. 일독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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