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공자의 생활난; 김수영과 논어'를 낸 철학자 김상환 교수님의 열린 연단 '욕망과 기율' 강의를 들었다. 내게는 열 여덢 권의 책을 가지고 있는 이정우 교수님에 미치지 못하지만 김 교수님도 내가 철학적 사유를 형성해 나가는데 많은 도움을 받은 분이다. 읽은 것을 기준으로 했을 때 김 교수님의 첫 책인 '해체론 시대의 철학'은 이 교수님의 첫 책인 '가로지르기'보다 약 1년 정도 이른 1996년 7월에 출간된 책이다. 두 분은 나로 하여금 처음 철학을 사랑하게 한 분들이다.

 

20년이란 시간이 한 순간인 듯 느껴진다. '해체론 시대의 철학'의 첫 두 문장이 김수영 시인의 '비'의 일부를 인용한 뒤 붙인 "김수영은 시를 사랑의 기술이라 했다.그것은 구하던 것보다 피하려던 것을 먼저 만날 때 생기는 기술, 소모 속에서 생의 본능을 키워가는 언어적 행위"라는 구절임을 감안하면 최근 나온 '공자의 생활난; 김수영과 논어' 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고 예견 가능한 출간이라 할 수 있다. 올 들어 오구라 기조의 '새로 읽는 논어'와 신정근 교수의 '공자의 인생강의', 이한우 기자의 '슬픈 공자' 등을 읽은 내게 '공자의 생활난; 김수영과 논어'는 제대로 김수영 시인의 시에 흥미를 붙일 좋은 기회가 되어줄 것이다.


도서관에서 빌려다 놓은 한명희 교수의 '현대시와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에서도 만날 수 있는 김수영 시인은 박인환, 김종삼 등의 시인과 함께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로 분석하기에 충분한 이야기거리가 있는 시인으로 나온다.'철학과 인문적 상상력', '예술가를 위한 형이상학' 등 김 교수님의 다른 책들도 함께 읽을 계획이기에 이 가을은 아무래도 철학과 (인)문학으로 물드는 시간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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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galmA 2016-10-02 10:1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상한 건지 당연한 건지 한국 대다수 남성 시인의 시집에서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읽을 수 있습니다. 독선적인 가부장, 사회적으로 강요된 남성성, 자본주의의 첨병 뭐 그런 역할을 한국 아버지들이 두루 갖춰? 보여줘서 그런 걸까요? 아버지 계승보다 아버지를 죽여야 독립이 더 확고하기도 할 테니...
말은 거칠게 해도 엘렉트라 컴플렉스를 보여주는 여성 시인도 많고.
둘러싸임과 벗어남의 미묘한 결합들...

벤투의스케치북 2016-10-02 10:53   좋아요 1 | URL
김화영 교수는 ‘프랑스 문학 산책’에 수록된 ‘아버지’의 신화 - 파스칼 자르뎅의 ‘노란 꼽추’란 글에서 이런 작가들은 거론합니다. 샤를르 페기, 기욤 아폴리네르, 앙드레 지드, 몽테를랑, 앙드레 말로, 루이 아라공, 사르트르, 카뮈... 이들은 프랑스 문학사 속에서 어린 시절에 일찍 아버지를 여의었거나 아버지를 알지 못한 채 자란 작가들입니다. 김 교수의 결론은 이들이 아버지와 정상적인 관계를 맺고 자랐다면 운명(삶, 작품)은 달라졌을 것이란 점입니다. 김 교수는 카뮈의 삶(저 말없는 어머니라는 우회를 통하여 부재하는 아버지를 찾아 끝없이 방황하는 도정)으로 대표되는 프랑스 문학의 예외로 마르셀 파놀의 ‘내 아버지의 영광’을 듭니다. 이 작품은 “온통 정다운 아버지의 포근한 웃음 속에 묻힌 천재의 걸작“으로 작가는 이를 의식했음인지 이후 세 권의 소설에서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청산하려는 듯 빠르고 따뜻하고 때로 잔혹하게 ‘아버지’를 말했다고 합니다. (카뮈의) 어머니를 이야기했지만 제게 큰 격려를 해주신 박지영 시인/ (정신분석) 평론가의 이야기를 하고 싶습니다. ‘욕망의 꼬리는 길다’에서 저자는 이성복 시인의 몇몇 시에서 시인이 자신을 어머니와 동일시하지 않았는가 즉 자신을 심리적으로 여성으로 본 것이 아닌가 하는 말을 합니다.

”앵도를 먹고 무서운 애를 낳으면 좋겠어“란 구절이 있는 ‘口話’가 대표적입니다. 개인사를 들추고 싶지 않고 또 그럴 수 있어 시인의 삶을 잘 알 수 있다 해도 그런 앎이 환원주의적으로 시 분석에 유용한 의미를 주지는 않을 것입니다. 저는 삶을 부지불식간에 형성된 갈등 관계를 여하히 극복하는가의 문제로 봅니다. 그렇기에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는 가부장, 자본주의적 관계가 굳이 아니라 해도 있을 수 밖에 없다고 봅니다.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구성하는 주 내용이 아버지에 대한 것인지 사회에 대한 것인지 아니면 아버지로 상징되는 사회에 대한 것인지 모르겠지만 여러 시인들이 언급하는 그 콤플렉스는 어느 정도는 삶에 바탕을 둔 것이기에 진정성이 있고 또 어느 정도는 그것이 고급스런 내용물이라는 점에서 (‘책으로 사랑을 배웠어요“란 어느 코미디의 대사처럼) 자신의 진정한 것이 아니기에 의도적인 위악(僞惡) 또는 과장(誇張)일 수 있다고 봅니다. 저는 만일 시인들이 (그럴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프로이트와 그가 말한 콤플렉스에 대한 앎을 갖지 못한 채 시를 썼다면 지금과는 많이 다를 것이라는 생각을 합니다. 페북의 한 여성 시인 친구는 차(茶) 공부를 하고 있다고 합니다. 새로운 시를 쓰기 위해 그렇다고 합니다. 새로워질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가족 관계라 해도 들뢰즈가 말한 가족 관계에 주목하거나 스피노자의 기쁨에 영향을 받았다면 시는 많이 달라질 것이란 생각을 합니다..

AgalmA 2016-10-02 11:3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카프카도 그런 아버지가 아니었다면 그런 작품이 안 나왔을 수 있겠죠.
기형도를 아는 사람들은 그가 그런 시를 쓸만큼 우울한 가계가 아니었다고 말하죠. 그 시절 고만고만한 가난이었고 그는 유쾌한 사람에 더 가까웠다고. 즉 현실보다 시인 스스로가 시 속에서 구축하며 바라보는 시점이 가장 큰 원형이겠죠.
이성복 시인 <아, 입이 없는 것들>은 온통 임신 얘기죠. 아무래도 이성복 시인의 여성성은 예술가들의 창작 배출의 심리와 맞닿지 않을까 싶어요. 잉태와 힘든 출산을 하는 과정은 창작의 그것이죠. 이성복 시인을 비롯 제가 아는 시인들은 프로이트를 엄청 읽더라는. 스스로에 대한 치유가 갈급한 사람들이니 오죽하겠습니까.
글을 쓰기 위해 고난을 자처하던 예전 방식에서 좀 벗어날 필요는 있다고 봅니다. 茶 공부도 좋네요^^

아버지와 어머니가 지나가고 나니 언니와 차남들의 세계도 왔잖습니까. 유령 가족을 꾸리는 시인들도 있고. 시 세계에서의 가족 관계란 여러모로 모색해 볼 여지가 있죠.

벤투의스케치북 2016-10-02 11:31   좋아요 1 | URL
네. 맞습니다. 시인들의 삶을 이해하는 것은 충분히 참고의 의미를 갖는다고 봅니다. 그런 점에서 카프카와 기형도 시인의 예는 흥미롭고 의미 있다고 생각됩니다. 자기 치유의 차원을 넘어 즉 프로이트 탐독에서 더 나아가 다른 창의적인 길을 모색할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아무리 훌륭한 것이라 해도 그로부터 벗어나지 못해 고착되면 문제라 생각합니다. 자기 치유를 위해 프로이트를 엄청 읽는 시인을 말씀 하셨지만 부작용으로 병리적이 될 수도 있다고 봅니다. 김승희 시인이 ‘객석에 앉은 여자’에서 “..삶을 피하기 위해서/ 삶을 피하는 자신을 용서해주기 위해서/ 살지 못했던 삶에 대한 하나의 변명을/ 마련하기 위해서/ 꿈의 상실에 대한 알리바이를 주장하기 위해서..” 늘 여기 저기가 아프다고 말하는 여자를 말한 것이 생각납니다. 에드가 모랭이 말했듯 인간은 환상과 공상 속에서 살아가는 존재, 무질서를 만들어내는 광기의 존재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 세상 정들 것 없어 병(病)에 정듭니다...“란 허수경 시인의 시구처럼 병리(病理)적인 것에 매력을 느낄 수 있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