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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없이는 존재하지 않는 세상 - 카를로 로벨리의 기묘하고 아름다운 양자 물리학
카를로 로벨리 지음, 김정훈 옮김, 이중원 감수 / 쌤앤파커스 / 2023년 12월
평점 :
이탈리아의 이론 물리학자 카를로 로벨리의 [나 없이는 존재하지 않는 세상]은 로벨리가 양자역학을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을 깨닫게 해준 이론물리학자 테드 뉴먼에게 바친다고 한 책이다. 저자는 하이젠베르크의 아이디어가 발아(發芽)한 북해에 위치한 독일 유일의 원해 섬인 헬골란트섬에서 시작하여 세계 실재의 양자적 구조가 발견됨으로써 제기된 더 큰 질문으로 점차 확장해 나가게 되었다고 말한다. 로벨리는 양자역학은 깊이를 헤아릴 수 없는 심연에 가라앉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고 그 심연 속을 들여다보라고 권한다고 설명한다.
하이젠베르크가 친구인 볼프강 파울리와 고민한 문제는, 닐스 보어가 제시한 원자 속의 전자 문제를 둘러싼 교착 상태에서 벗어나는 것이었다. 그 문제란 전자가 원자핵 주위를 특정 궤도로만, 원자핵으로부터 특정한 거리에서, 특정한 에너지로만 회전하는 것이고 마술처럼 한 궤도에서 다른 궤도로 점프한다는 것이다.(20 페이지) 보어 가설에 따르면 우리가 원자의 천자에서 관찰하는 것은 전자가 한 궤도에서 다른 궤도로 도약할 때 방출하는 빛이다. 하이젠베르크는 보어가 말한 전자의 궤도나 도약을 정당화할 수 있는 새로운 운동법칙을 찾을 수 없었기에 관찰할 수 있는 것 즉 전자가 방출하는 빛의 강도와 진동수만 기술 하자고 생각했다.
이듬해인 1926년 모든 것이 명확해지는 것 같았다. 오스트리아의 물리학자 에르빈 슈뢰딩거는 원자의 보어 에너지를 계산하여 파울리와 동일한 결과를 얻었지만 방식은 완전히 달랐다. 슈뢰딩거가 푼 것은 시각적인 미분 방정식을 이용한 것이었다. 슈뢰딩거는 소립자의 궤적이 그 기저에 있는 파동의 움직임에 대한 근사치일 뿐이라는 생각에 매료되었다. 하이젠베르크는 슈뢰딩거 파동의 개념적 명확성이 신기루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금세 알아차린다.
슈뢰딩거의 Ψ(프시)는 실재 하는 실체를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어떤 일이 일어날 확률을 알려주는 계산 도구(라는 것이 일반적인 해석이)다. 막스 보른은 Ψ가 확률의 평가방법일 뿐이라고 이해한 공로로 노벨상을 받았다.(75 페이지) 세계 해석은 슈뢰딩거의 이론을 진지하게 받아들인다. 파동 Ψ를 확률로 해석하지 않고 실제 세계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기술한다고 보는 것이다. 슈뢰딩거의 파동 함수 Ψ만으로는 양자의 모호함을 명확히 밝히기에 충분하지 않다. 전자를 단순한 파동으로 생각하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는 뜻이다.
Ψ는 언제나 한 지점에 집중되어 있는 입자인 전자가 다른 곳이 아닌 한 지점에서 관찰될 확률을 결정하는 불명확한 무엇인가다. 양자역학이 등장하기 전에는 에너지가 입자일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가령 던져진 돌의 에너지는 던지는 속도에 따라 달라지는데 속도는 어떤 값이든 될 수 있으니 에너지도 어떤 것이든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세기가 바뀌는 동안 실험에서 에너지의 특이한 행동이 나타났다. 막스 플랑크가 실험에서 얻은 관찰을 통해 계산한 에너지의 꾸러미와 파동의 진동수 사이의 비례상수를 ĥ라고 부른다.
원자 내 전자의 궤도는 마치 에너지가 꾸러미로 된 입자인 것처럼 특정 에너지만 가질 수 있다. 전자가 한 보어 궤도에서 다른 보어 궤도로 도약하면 에너지 꾸러미가 방출된다. 그것이 빛의 양자다. 입자성은 관찰, 확률과 함께 양자론의 세 번째 핵심 개념이다. 양자역학에서 위치와 속도를 곱하는 것과 속도와 위치를 곱하는 것은 값이 다르다. 닐스 보어는 "양자 세계는 존재하지 않는다. 양자에 대한 추상적인 설명만 있을 뿐이다. 물리학의 임무가 자연이 어떠한지 기술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이다. 물리학은 자연에 대해 우리가 무엇을 말할 수 있는지를 다룰 뿐"이라고 이야기했다.
저자는 우리가 보고 있는지 아닌지가 그 입자에게 도대체 무슨 상관이 있을까?라고 묻는다. 저자는 고전 물리학 공부는 재미있었지만 좀 지루하기도 했음에도 간결한 만큼은 우아했다고 말한다. 이는 앤서니 지가 [놀라운 대칭성]에서 한 말을 떠올리게 한다. 대칭인 공식이 아름답다는 말이다. 물론 저자의 머릿속에 색색의 빛을 밝힌 것은 양자와의 만남이었다. 양자 중첩이 핵심이다. 서로 모순되는 두 가지 속성이 동시에 존재하는 것을 말한다. 주의할 것은 우리가 양자 중첩을 직접 볼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은 입자가 어떤 의미에서 한 번에 여러 곳에 존재할 때 나타나는 중첩의 결과 뿐이다. 이런 결과를 양자 간섭이라 부른다. 우리가 관찰하는 것은 중첩이 아니라 간섭이다.(63, 64 페이지) 저자는 한쪽 경로만 열려 있을 때 절반의 광자가 위쪽 검출기에 도달한다면 양쪽 경로가 모두 열려 있을 때도 절반의 광자가 위쪽 검출기에 도달할 것이라고 예상하는 것이 당연한데 위쪽 검출기에는 광자가 하나도 도달하지 않는 현상을 소개한다. 두 경로가 모두 열려 있을 때 위쪽 검출기에 광자가 하나도 도달하지 않는 이 현상이 양자 간섭의 하나다.
오른쪽과 왼쪽 두 경로 사이에 간섭이 일어나는 것이다. 마치 각 광자가 파동처럼 두 경로를 모두 통과한 것처럼 행동하지만 광자가 어디에 있는지를 관측하면 항상 어느 한쪽 경로에서만 볼 수 있는 것이다. 광자가 두 경로 중 어느 쪽을 따라갔는지 관측하면 간섭이 사라진다. 놀라운 것은 실제로 광자를 보지 않아도 광자가 위쪽 검출기에 도달할 수 있다는 것이다. 광자가 지나가지 않은 쪽의 출구에서 기다리고 있는 것만으로 광자가 경로를 바꾸는 것이다.
숨은 변수 이론이라는 것도 있다. 루이 드 브로이가 고안하고 데이비드 봄이 발전시킨 이론이다. 봄의 이론은 간단하다. 다세계 해석과 마찬가지로 전자의 Ψ 파동의 실체가 있다고 가정하는 것이다. 다만 Ψ 파동뿐만 아니라 실제 전자 또한 존재한다. 즉 항상 확고한 위치를 갖는 실제 물질 입자가 존재한다는 것이다. 물론 이 이론에는 대가(代價)가 따른다. 이 해석을 진지하게 받아들인다면 우리가 원칙적으로 접근할 수 없는 물리적 실체가 존재한다고 가정할 수밖에 없게 되는 것이다.
결국 이 이론은 양자론이 말해 주지 않는 것에 대해 우리에게 위안을 줄 뿐이다. 불확실성에 대한 두려움도 피하겠다는 목적만으로 양자론이 이미 예견하지 못한 관찰할 수 없는 세계의 존재를 가정할 가치가 있을까? 심각한 문제는 상대성을 고려했을 때 발생한다. 이 이론의 숨은 변수는 상대성을 마구 위반한다. 즉 특권적인(관찰 불가능한) 기준계를 설정해 버리는 것이다. 파동 Ψ를 그다지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는 해석을 인식론적 해석이라고 부른다. 이 인식론적 해석에서는 프시가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에 대한 우리의 지식의 요약에 불과하다고 본다. 저자는 과학적 사고는 이미 얻은 확실한 사실로 이루어진 것이 아닌 바 끊임없이 움직이는 사고이며 그 힘은 항상 모든 것에 의문을 제기하고 다시 시작하는 능력에 있다고 말한다.
더 유효한 설명을 찾기 위해서라면 세상의 질서를 뒤집는 일도 두려워하지 않고 모든 것에 다시 물음을 던지고 모든 것을 다시 뒤집어 엎는 능력이라는 것이다. 저자에 의하면 과학자도 측정 장비와 마찬가지로 자연의 일부다. 양자론이 설명하는 것은 자연의 한 부분이 자연의 다른 부분에게 어떻게 자신을 나타내는가 하는 것이다. 우리가 자연을 이해하려면 고립된 대상이 아니라 상호 작용에 주목해야 한다. 세계는 상호작용하는 촘촘한 그물망이다. 대상들은 상호 작용을 통해 서로에게 자신을 드러내며 우리도 마찬가지다.
실험실 관찰뿐 아니라 모든 종류의 상호작용의 기초가 되는 물리적 실제의 근본적인 보편적 문법을 기술하는 것이 양자역학이다. 이 학문에 의하면 사물의 속성은 다른 사물과의 상호작용 속에서만 존재한다. 여기서 두 가지 결론이 도출된다. 하나는 상호 작용 없이는 속성도 없다이고 다른 하나는 속성은 상대적일 뿐이라는 점이다. 가령 전자가 어떤 것과도 상호작용하지 않으면 그 전자에는 물리적 속성이 없다. 위치도 없고 속도도 없다는 뜻이다. 양자론은 모든 대상의 모든 속성이 속도와 마찬가지로 관계적이라는 사실을 발견한 것이다.
가령 하늘은 그 자체로 색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올려다보는 나의 눈에 대해서만 색이 있다. 하늘의 별은 독립적인 존재로 빛나는 것이 아니라 그 별이 속한 은하계를 이루는 상호작용 네트워크의 한 매듭일 따름이다. 따라서 양자 세계는 기존 물리학에서 상상했던 것보다 더 무르며 일시적이고 불연속적인 사건들과 상호작용으로 이루어져 있다. 모든 상호작용이 사건이다. 실재를 엮는 것은 이 가볍고 덧없는 사건이지 철학이 상정한 절대적인 속성을 지닌 무거운 물체 같은 것이 아니다.
슈뢰딩거는 "입자를 영구적인 실체로 생각하기보다 순간적인 사건으로 생각하는 것이 더 낫다. 그 사건들은 때때로 사슬을 이루어 마치 영구적인 것 같은 착각을 주지만 그것은 특수한 상황에서 극히 짧은 시간에만 그럴 뿐이다"란 말을 했다. 사물의 미세한 입자는, 변수들이 상대적이고, 미래가 현재에 의해 결정되지 않는 이토록 기묘하고 작은 세계다. 이 환상적인 양자 세계가 바로 우리의 세계다. 저자는 얽힘을 꿈처럼 미묘하고 매혹적인 양자 현상이라 설명한다. 저자는 얽혀 있는 두 입자가 사전에 합의하지도 않았고 서로 메시지를 주고받은 적도 없는데 어떻게 동일한 결정을 내릴 수 있을까요?라고 묻는다.
무엇이 이 둘을 묶고 있는 것일까요?라고 묻는다. 특정 상황에서 단일 물체에 대해 모든 것을 알고 있다 해도 이 물체가 다른 물체와 상호 작용했다면 그것에 관해 전부 다 아는 것은 아니다. 우주의 다른 물체들과의 상관관계를 알지 못하는 것이다. 두 물체 사이의 관계는 둘 중 하나에만 포함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이상이다. 우주의 모든 구성적 요소가 이처럼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은 그저 논라울뿐이다. 저자는 얽힘은 둘이 추는 춤이 아니라 셋이 추는 춤이라 말한다. 양자 얽힘은 얽힌 두 입자만으로는 완성되지 않으며 그 관계를 성립시키고 확인하는 제3의 존재가 함께 어우러질 때 완성되는 상호작용의 춤이라는 의미다.
저자에 의하면 얽힘은 특별한 상황에서만 발생하는 드문 현상이 아니다. 외부의 물리적인 관점에서 상호 작용을 볼 때 흔히 발생하는 현상이다. 양자 물리학은 물리계들이 서로에 대해 가지고 있는 정보의 이론으로 생각할 수 있다.(131 페이지) 양자 물리학에서 한 물리적 대상에 관해 우리가 가질 수 있는 관련 정보의 최대량은 유한하다. 대상과 상호 작용함으로써 우리는 항상 새로운 관련 정보를 얻을 수 있다. 흥미로운 것은 디랙 버전의 양자론에서는 행렬조차 불필요하다는 점이다. 저자는" 세계는 연속적이지 않고 입자로 되어 있다. 그리고 거기에는 하한(下限)이 있어서 사물이 무한히 작아질 수 없다. 미래는 현재에 의해 결정되지 않는다.
물리적 사물은 다른 물리적 사물에 대해서만 속성을 가질 뿐이며 이러한 속성은 사물들이 상호 작용할 때만 존재한다. 서로 다른 관점을 나란히 놓으면 모순이 나타난다."고 말한다. 우리는 보통 세계를 큰 규모에서 보기 때문에 이 세계의 입자성은 보이지 않는다. 우리가 보는 것은 수많은 작은 변수들의 평균치다. 개별 분자들을 보는 것이 아니라 고양이 전체를 보는 것이다. 너무 많은 변수가 관여하기 때문에 요동은 무의미해지고 확률은 확실성에 가까워진다. 고전 물리학적 세계상은 우리가 근시안 적이기 때문에 견고한 모습을 보이는 것이다.
고전 물리학의 확실성은 단지 확률일 뿐이다. 옛 물리학이 제공해온 선명하고 견고한 세계의 이미지는 사실 환상이다.(139 페이지) 우리가 세계라고 부르며, 그 속에 존재한다는 사실에 놀라움을 느끼는 빛으로 가득한 이 마법의 만화경. 우리가 정신이라고 부르는 연약한 베일은 바로 이 무한한 신비를 탐색하기 위한 서툰 도구에 불과하다. 20세기 물리학의 두 가지 위대한 혁명인 상대성 이론과 양자론은 에른스트 마흐의 영향을 받아 시작되었다. 마흐는 지각에 대한 과학적 연구가 탄생하는 데에도 직접적인 역할을 했다.
또한 러시아 혁명으로 이어지는 정치적, 철학적 논쟁의 중심에 있기도 했다. 과학자인 마흐는 주체에서 경험 자체로 관심의 초점을 옮겨 그것을 감각이라 불렀다. 마흐는 감각 너머에 있는 가상의 실재를 추론하거나 추측하는 것으로 지식을 얻을 수 있다. 마흐의 제안에서 가장 급진적인 부분은 현상을 대상의 발현으로 생각하지 말고 대상을 현상들의 연결 매듭으로 생각하자는 발상이다. 그것은 레닌이 이해한 것과는 달리 결코 의식의 내용에 대한 형이상학이 아니다. 아인슈타인은 거듭 자신이 마흐에게 많은 빚을 지고 있음을 인정했다.
고정된 실제 공간이 존재하고 그 안에서 사물이 움직인다는 형이상학적 가정에 대한 비판이 아인슈타인의 일반 상대성 이론의 문을 연 것이다. 마흐는 과학이란 현상을 조직화할 수 있게 해 주는 한에서만 어떤 것을 실제로 받아들이는 것이라고 이해했다. 그의 이런 과학관이 열어준 공간 속으로 하이젠베르크가 들어와 전자에서 궤도를 벗겨내고 전자를 그 현상의 측면에서만 다시 해석했다. 바로 이 공간 속에서 양자역학의 관계론적 해석의 가능성도 열린다. 의사, 경제학, 철학자, 자연과학자, [붉은 별]이라는 과학소설을 쓴 작가이자 시인, 교사, 정치가, 사이버네틱스와 조직과학의 선구자, 수혈의 선구자이자 평생 혁명가였던 알렉산드르 보그다노프는 20세기초 지성계에서 가장 복잡하고 매력적인 인물이었다.
아인슈타인이 양자역학에 반대하며 신은 주사위 놀이를 하지 않는다고 하자 보어는 신에게 이래라 저래라 명령하지 말라고 응수했다. 비유를 풀어보면 자연은 우리의 형이상학적 편견보다 훨씬 더 풍부하며 자연의 상상력은 우리보다 더 자유롭다는 것이다. 저자는 과학은 진리의 담지자가 아니라 진리의 담지자 같은 것은 없다는 자각 위에 놓여 있다고 말한다. 저자는 양자역학의 이른바 해석들은 대부분 양자역학이 발견한 사실들을 형이상학적 편견에 억지로 집어넣으려는 것처럼 보인다고 말한다.
철학을 과학에 맞추어야지 그 반대는 아니라고 말하는 저자는 실험실에만 양자현상이 있는 것도 아니고 모든 곳이 비양자 현상인 것도 아니라고 말한다. 모든 현상이 궁극적으로 양자적 현상이라는 것이다. 저자는 모든 것을 관계의 관점에서 생각해야 한다고 말한다. 양자를 이해하기 위해 철학자들의 텍스트를 헤매고 다녔다는 저자는 나가르주나로부터 깊은 인상을 받았다고 이야기한다. 저자에 의하면 나가르주나의 핵심 논지는 다른 어떤 것과도 무관하게 그 자체로 존재하는 것은 없다. 양자역학과 공명을 일으킨다.
물론 나가르주나는 양자에 대해 아무것도 몰랐고 알 수도 없었지만 그런 것은 아무래도 좋다. 중요한 것은 철학자들의 세상에 대한 독창적인 사고 방식을 제공하고 있고 그것이 우리에게 유용하다면 우리가 그것을 활용할 수 있다는 것이다. 나가르주나가 제시하는 관점의 도움을 받으면 우리가 양자 세계에 대해 좀 더 쉽게 생각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나가르주나가 독립된 존재는 있을 수 없다는 것을 설명하기 위해 사용한 전문 용어는 공(空)이다. 나가르주나는 별을 보는 것은 전체의 한 요소이며 그것을 내가 관례적으로 나라고 부를 뿐이라고 말한다. 나가르주나는 공조차도 본질이 비어 있다고 말한다.
그것마저도 관습적이라는 뜻이다. 물리학은 오랜 시간에 걸쳐 물질, 분자, 원자, 장, 소립자 등 궁극적 실체를 추구해 왔는데 양자장 이론과 일반 상대성 이론의 관계적 복잡성이라는 암초에 걸려 난파되었다.(181 페이지) 나가르주나는 실재와 그것의 복잡성과 이해 가능성에 대해 이야기하지만 궁극적인 토대를 찾겠다는 개념적 함정에 우리가 빠지지 않도록 막아준다. 그렇다고 해서 탐구의 가능성이 닫히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자유롭게 탐구할 수 있다. 나가르주나는 세상의 실재성을 부정하는 허무주의자도 아니고 실재에 대해 아무 것도 알 수 없다고 말하는 회의론자도 아니다.
창의성에는 우리가 탐구하면 할수록 더 잘 이해할 수 있는 세계다. 나가르주나의 공(空)은 깊은 위안을 주는 윤리적 태도를 길러준다. 우리가 자립적인 실체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음으로써 집착과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게 도와주기 때문이다. 저자는 자신의 책의 바탕이 되는 믿음은 우리 인간이 자연의 일부라는 것이라고 말한다. 우리는 많은 자연 생산 중에서 특수한 사례일 뿐 그 어떤 현상도 우리가 알고 있는 자연에 위대한 법칙에서 벗어날 수 없다. 생명은 지구 표면에서 펼쳐지는 생화학적인 과정이며 지구를 가득 채운 태양빛의 풍부한 자유에너지를 소비한다.
이 과정은 주변 환경과 상호 작용하는 개체들로 이루어져 있으며, 시간이 지나도 지속되는 동적 균형을 유지하면서 자기 조절하는 구조와 과정에 의해 형성된다. 구조와 과정은 유기체가 생존하고 번식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로 이러한 구조가 점진적으로 성장하여 생존하고 번식하기 때문에 생존하고 번식한다. 양자역학을 통해 물리적 세계의 본질을 상관관계의 네트워크로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이 밝혀졌다. 즉 상관관계의 정확히 물리적 의미에서 상호적인 정보를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자연계의 사물은 제각각 고유한 속성을 가진 고립된 요소들의 집합이 아니다.
외부에서 바라보는 관점은 존재하지 않는 관점이다. 세계에 대한 모든 묘사는 내부로부터 이루어진다. 외부로부터 본 세계는 존재하지 않는다. 오직 서로를 비추는 부분적이고 내부적인 관점들만이 존재할 뿐이다. 세계는 관점들의 이러한 상호 반영이다. 양자 물리학은 이러한 현상이 이미 무생물에서 일어난다는 것을 보여준다. 우리는 무비판적인 직관에 의존해서는 세계에 대한 효과적인 이해를 구축할 수 없다. 마음의 본질을 알고 싶다면 내적 성찰은 최악의 탐구 도구다. 자신의 뿌리 깊은 편견을 만나 그 속에서 허우적거리게 될 것이다.
그러나 단순한 물질 또한 잘못된 형이상학 즉 물질에 대한 지나치게 순진한 개념에 기반한 형이상학의 잔재다. 질량과 운동으로만 정의되는 보편적 실체로 보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양자물리학과 모순되기 때문에 잘못된 형이상학이다. 저자는 대부분의 신호는 눈에서 뇌로 이동하는 것이 아니라 뇌에서 눈으로 이동한다고 말한다. 우리는 흔히 눈이 카메라처럼 외부 세계의 이미지를 찍어 뇌로 보내고 뇌가 이를 수동적으로 받아들여 해석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사실은 그 반대다.
우리가 인식하는 시각적 현실은 뇌가 끊임없이 만들어내고 있는 예측과 수정의 결과물이며 우리가 파악하고 생존하는 데 유리하도록 재구성된 정보다. 저자는 이를 통해 주체와 객체는 독립되어 있지 않고 모든 것은 상호작용(관계) 속에서 정의된다는 자신의 양자물리학적, 철학적 관점을 뒷받침한다. 뇌가 이미 알고 있는 것을 확인해주기만 하는 신호를 뇌에 보내는 것은 무용하다. 우리는 오해와 편견을 포함해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을 바탕으로 세상의 이미지를 만들어내고 무의식적으로 불일치를 탐지하여 필요하면 수정한다.(227 페이지)
과학은 기본적으로 우리가 보는 방식의 연장선이다. 우리는 자신이 예상한 것과 세상에서 수집할 수 있는 것 사이의 불일치를 찾는다. 우리는 세계에 대한 상을 가지고 있으며 그 상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으면 그것을 수정하려고 노력한다. 인간의 모든 지식은 이런 방식으로 만들어져 왔다. 우리의 가장 깊은 곳의 세계상을 업데이트 하는 것, 현실에 대해 생각하는 새로운 지도를, 세계를 조금 더 잘 보여줄 수 있는 지도를 찾아내는 것이 양자론이다.(229 페이지)
실재는 상호 작용의 그물망을 짜는 사건들로 가장 잘 묘사될 수 있다. 개체는 이 그물망의 일시적인 매듭에 불과하다. 개체의 속성은 이러한 상호 작용이 일어나는 순간에만 결정되며 다른 것들과의 관계 속에서 결정된다. 사물은 다른 사물 속에 비친 것일 뿐이다. 모든 시각은 부분적이다. 관점에 의존하지 않고 현실을 보는 방법은 없다. 절대적이고 보편적인 시점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시점들도 서로 소통 가능하고 지식은 다른 지식 및 현실과 서로 대화할 수 있으며 그렇게 대화를 통해 수정되고 풍부해지고 수렴되어 현실에 대한 우리의 이해는 깊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