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쓰기에 대하여 - 작가가 된다는 것에 관한 여섯 번의 강의
마거릿 애트우드 지음, 박설영 옮김 / 프시케의숲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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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거릿 애트우드(Margaret Eleanor Atwood; 1939년 ~ )는 현대 캐나다 문학을 대표하는 세계적인 소설가이자 시인, 에세이스트, 평론가다. 2000년 요청받은 윌리엄 엠프슨에 대한 강의에서 파생된 [글쓰기에 대하여]는 글쓰기보다 작가의 정체성 및 위상, 독자의 의미 등을 주제로 삼은 책이다. 말할 것 없이 작가는 글쓰기의 주체이고, 독자는 “대상이 없는데 글을 쓰는 소설가는 드뭅니다.”(184 페이지)란 저자의 말대로 작가와 함께하는 존재다. 저자는 자신은 작가이자 독자일뿐 학자도 아니고 문학 이론가도 아니라고 말한다.

 

저자는 작가들에게 왜 글을 쓰냐고 묻는 대신 글을 쓴다는 것이 어떤 느낌인지 물어보았다. 저자는 글쓰기란 어두움 그리고 그 속에 들어가서 운이 좋으면 어둠을 밝히고 빛 속으로 무엇인가를 가지고 나오리라는 욕망 또는 충동과 관련이 있는지도 모르겠다고 말하며 자신의 책은 그런 어둠 그리고 욕망에 대한 책이라고 말한다. 어떤 작가도 어려서부터 작가에 대한 편견이 전무한 순백의 환경에서 성장하지 않는다고 설명하는 저자는 그에 걸맞게 책과 고독이 함께했던 어린 시절과 자신이 속했던 가족 이야기를 펼친다.

 

저자가 맞이한 2차 대전 종전 후인 1940년대 후반은 더 이상 전시 생산 체제에 동원될 필요가 없어진 여성들이 무리지어 집으로 돌아와 베이비붐이 일어난 때이다. 저자는 1956년 축구장을 가로질러 하교하던 중 갑자기 머릿속으로 시를 쓴 뒤 종이에 옮겨 적은 후부터 오로지 글을 쓰고 싶다는 것 외엔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고 말한다. 저자가 처음 시집을 낸 것은 26세 때였다. 문예지를 통해, 그리고 문예지에 글을 기고하는 교수님들을 통해 감춰져 있던 문을 찾았다고 말하는 저자는 노스럽 프라이, 마셜 매클루언에 대해서도 이야기한다. 노스럽 프라이와 마셜 매클루언은 20세기 중후반 학계를 흔들었던 캐나다 토론토 대학교의 대표적인 대사상가들이자 토론토 학파(Toronto School)를 이끈 주역들이다.

 

저자는 문을 통과해 시인들이 우글거리는 개미총(塚)으로 들어갔다고 해서 반드시 무언가를 보증받은 건 아닐 수도 있지 않을까? 그렇다면 진짜 보증을 받으려면 어떻게 해야 한단 말일까? 어떻게 해야 그만한 수준이 됐는지 아닌지 알 수 있을까? 그나저나 수준이라는 건 뭘까? 이들 중 일부가 자신의 재능에 대해 착각하고 있다면 나도 그럴 수 있지 않을까? 그러고 보니 말인데 훌륭하다는 건 뭘까? 누가 훌륭한지 여부를 결정했으며, 어떤 리트머스 시험지를 사용한 걸까? 라는 생각을 했다고 말한다.

 

저자는 글쓰기가 다른 예술과 차별화되는 한 가지 특징은 외견상 민주적이라는 사실이라고 설명한다. 그것은 모든 사람이 글쓰기를 표현 수단으로 이용할 수 있다는 의미다. 물론 저자가 말했듯 머릿 속에 많은 이야기가 들어 있다고 그것이 바로 작가가 될 수 있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저자는 자신은 이중성의 세계에서 자랐다고 설명한다. 이중성의 세계란 저자의 실제 성장 배경과 작가로서의 정체성을 모두 관통하는 핵심적인 개념이다. 저자는 두 독립체 이야기를 한다. 글을 쓰고 있지 않을 때의 존재 즉 개를 산책시키고 규칙적으로 밀기울을 먹고 세차를 하는 등의 일을 하는 존재와, 아무도 안 볼 때 그 몸을 넘겨받아 글쓰기에 사용하는, 같은 육체를 공유하지만 좀 더 희미하고 애매모호한 또 다른 존재를 의미하는 말이다.

 

저자는 자신의 사무실 게시판에 하나의 문장이 붙어 있다고 말한다. 작품이 좋아서 작가를 만나고 싶어 하는 것은 파테(파이크로스트에 고기, 채소 등을 갈아 만든 소를 채우고 오븐에 구운 것)가 좋아서 오리를 만나고 싶어하는 것과 같다는 글이다. 저자는 작가는 글을 쓰고 출간을 하기까지 엄청난 시간이 소요되기에 독자가 책을 읽을 때는 이미 바뀐 존재라는 의미에서 이중성을 가지고 있다고 말한다.

 

저자는 이중성과 관련된 쌍둥이 이야기를 한다. 그 가운데 카인과 아벨, 야곱과 에서는 성경이 출처여서 친근하다. 이 밖에 저자가 거론한 예 가운데 로마의 건국 신화인 로물루스와 레무스, 이집트의 종교적 핵심인 오시리스와 세트도 있다. 전쟁의 신 마르스와 알바 롱가의 공주이자 제사장(레아 실비아)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들인 로물루스와 레무스는 늑대와 연관이 있다. 왕위를 찬탈한 아물리우스 왕에 의해 테베레강에 버려진 쌍둥이는 암늑대 루파의 젖을 먹고 자란다.

 

저자는 여러 문학 작품을 인용하며 자유롭게 이야기를 이어간다. 저자는 작가는 글을 쓸 때 자신을 작품 속에 집어넣는데 이렇게 할수록 자신의 진짜 자아를 잃어버린다고 설명한다.(81 페이지) 저자는 평론가들은 곤경을 피하기 위해 소설가를 우리 시대 최고의 이야기꾼이라 말한다고 설명한다. 그것은 해당 작가가 플롯은 잘 짜지만 나머지는 별로라는 의미이기도 하다. 글쓰기는 견고하고 영속적이지만 말하기는 아니라고 정의하는 저자는 예수를 이야기꾼으로 소개한다. 저자에 의하면 예수는 우화로 가르치지 글로 적지 않았다. 그 자신이 말씀이요, 소망하는 곳으로 흘러가는 성령인 까닭이다. 또한 예수의 적대자였던 바리새인, 서기관은 법문 즉 기록된 글을 고수한다.

 

저자의 말을 보르헤스의 말과 비교할 만하다. 보르헤스는 “....흔히 인용되는, 글은 남고, 말은 날아간다는 구절은 말이 덧없다는 의미가 아니라 글(文語)이 항구적이고 죽은 것이라는 뜻이다. 반면에 말은 빠르고 가벼운 것, 플라톤의 말처럼 빠르고 신성한 것이다. 흥미로운 일이지만, 인류의 위대한 스승들은 모두 말로 가르쳤다.”란 말을 한 아르헨티나의 현재 작가다. 작가는 글을 쓰는 동안 혼자이고, 이야기꾼은 배우처럼 즉석에서 관중에 반응해야 한다.

 

저자는 자신의 세대는 돈을 더러운 빨래 같이 여긴 세대라 말한다. “예술적 진실과 돈을 무 자르듯이 나눌 수 있을까요?” 저자는 자신은 한순간도 자신이 글쓰기로, 아니 자신이 쓰는 분야의 글로 돈을 벌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 적이 없다고 말한다. 저자가 통과한 1950년대 캐나다는 문학을 위한 최적의 장소인 런던, 파리, 뉴욕의 변방이자 타지였다. 그러니 캐나다 작가들은 부득이하게 오롯이 예술을 위한 예술에 헌신하는 길밖엔 없었다고 한다.

 

저자는 미국의 작가 루이스 하이드 이야기를 한다. 하이드에 따르면 진지하게 예술 활동을 하는 사람은 예술의 영역과 돈의 영역을 중재해줄 수 있는 중재인을 잘 얻어야 체면 구기는 지저분한 흥정에서 손을 뗄 수 있었다. 저자는 자신이 작가가 되었을 무렵에는 여성 작가, 특히 여성 시인이 되면 얼마나 고약한 일을 겪는지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고 말한다. 저자는 여성 작가들은 낭만주의 시대에 있으나 마나한 존재였으며 천재라는 메달을 별로 걸어 본 적도 없다고 말한다.

 

오늘날 여성 작가들은 그들의 힘이 감소했다거나 세계 무대에서 위신이 나아졌다고 느끼지 않는다. 오히려 과거보다도 잘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그렇기에 걸출했던 여자 선배들과 비교해 자신들이 아주 허약하다고 여기지 않는다. 저자는 종류를 막론하고 예술은 종교적 의미에서 수양이라고 말한다.

 

“예술가가 모시는 신은 아름다운 형식을 중시하는 고전주의자 아폴론이어야 할까요? 그게 아니면 말썽꾸러기이자 사기꾼이자 도둑인 헤르메스여야 할까요? 밀턴의 [실낙원]에 나오는 성령을, 아니면 셰익스피어의 [헨리 5세]의 서문에 등장하는 불의 뮤즈를, 아니면 마술사 해리 후디니를 영감의 원천으로 삼아야 할까요?”(157, 158 페이지)

 

저자는 갓 시인으로 등단한 스무 살 무렵의 자신에게 몸소 트럭 운전사가 되어 현실 세계의 사람들이 실제로 하루 종일 무엇을 하는지 직접 깨닫지 않는 이상 시인으로서 어떤 위치에도 오를 수 없다고 말한 한 남자 시인을 떠올리며 자신은 예술과 삶 사이에, 고기를 넣으면 소시지가 나오듯 인과관계가 확실한 상관관계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저자는 예술 지상주의는 신문과 정치적 반응과 시장의 힘이 공존하는 ‘누구나 자유롭게 참여할 수 있는 이상적 세계’이자 예술과 사회 양쪽 모두 표 장사로 번 돈을 세면서 코끼리 똥으로 장식된 성모 마리아상 같은 것들을 놓고 충돌하는 곳에 있다고 말한다.

 

저자는 오래전 자신의 글쓰기 수업을 듣는 학생들에게 “자연을 존중하세요. 그게 여러분이 가진 전부니까요.“란 말을 했다고 한다. 저자는 요즘 무엇보다도 자기 보호 차원에서 일기 비슷한 것을 겨우 쓰고 있다고 말한다. 이제 독자가 누구인지 안다고 한다. 그것은 3주 후의 자신이다. 기억이 나지 않아 하는 대비책이다. 저자는 혹여 독자 때문에 위험해질 수 있다고 해도 작가는 반드시 독자를 가정해야 하고 언제나 가정한다고 말한다. 물론 가정은 하되 명확하고 구체적으로 시각화되지는 않는다고 한다.

 

저자는 너무 큰 실패와 너무 큰 성공은 우열을 가릴 수 없는 두려움의 대상이라고 말한다. 본문에 이런 말이 인용되어 있다. ”성공은 오직 인생 황혼기에, 그것도 오직 작은 양만 복용해야 하는 독약이다.“ 최악은 독자들을 만족시키려고 자기 복제를 했는데 오히려 복제라며 비난받는 경우다. 저자는 ‘죽음의 두려움에 떨고 있네‘라는 라틴어 구절처럼 죽음에 대한 두려움 만이 아니라 그에 대한 걱정이 그를 짓고자 하는 욕구와 관계가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례가 많다고 말한다.

 

왜 다른 예술이나 매체가 아닌 굳이 글쓰기가 개인의 최종적 소멸에 대한 불안과 그토록 복잡하게 연결되는 것일까? 그것은 이야기가 펼쳐지면 무언가가 모습을 드러낸다는 말에서 드러난다. 구부러진 것이 곧게 펴질 수도, 세월 때문에 더 구부러질 수도 있지만 어쨌든 길이 생긴다. 플롯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저자는 인상적인 말을 한다. 모든 책의 해피엔딩도 마찬가지다. 토마스 울프의 말처럼 다시는 고향에 못 가더라도 고향에 대해 글을 쓰면 그것이 어느 정도 가능하긴 하다. 하지만 결국 마지막 장을 만나게 된다. 책은 또 다른 나라다. 그 속에 들어갔다가도 다시 나와야 한다. 지하 세계처럼 그곳에서 영원히 살 수는 없다. 모든 작가들은 죽은 자들로부터 가르침을 얻는다.

 

계속 글을 쓰는 한 작가는 앞서 글을 썼던 작가들의 작품을 끊임없이 탐구하게 된다. 동시에 그들에게 평가받고 질책 당한다고 느낀다. 하지만 작가는 작가로부터 만이 아니라 모든 형태의 조상으로부터 배울 수 있다. 죽은 자들은 과거도, 이야기도, 특정한 진실도 모두 통제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야기를 마음껏 탐닉하려면 결국 지나간 시간에서 온 사람들과 거래를 해야 한다. 그 지나간 시간이 겨우 어제라 하더라도 글을 쓰고 있는 지금이 아니라 과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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