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과학은 가능하다, '느린 과학' 선언 - 상호의존의 관계를 다시 엮는 과학으로
이자벨 스탱게르스 지음, 장하원.김연화 옮김 / 에디토리얼 / 202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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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철학과 교수 이자벨 스탱게르스의 [다른 과학은 가능하다]는 느린 과학 선언이란 부제를 가진 책이다. 저자는 복잡계 과학의 선구자이자 노벨 화학상 수상자인 일리야 프리고진(Ilya Prigogine)과 비평형 열역학을 바탕으로 한 자연의 비가역성과 '혼돈(카오스)으로부터 어떻게 새로운 질서가 발생하는가'를 공동 연구한 인물이다. 저자는 몇 가지 개념을 제시한다. 1) 다른 과학과 느린 과학(Slow Science); 자본과 산업의 논리에 포획되어 맹목적으로 가속하는 현대 과학(빠른 과학)에 대한 대안적 과학이다. 2) 관심의 문제; 브뤼노 라투르가 제기한 것으로 사물이나 현상을 객관적이고 고정된 ‘사실(Matters of Fact)’로만 바라볼 것이 아니라 그것이 만들어지기까지 얽힌 수많은 행위자들의 연결망, 취약성, 그것을 유지하기 위한 돌봄과 염려의 대상으로 바라보아야 한다는 의미다. 저자는 관심의 문제에서 핵심은 단 하나의 정답이 있다는 생각을 버리고 주저하고 집중하면서 세심하게 조사하는 과정이 불가피하게끔 종종 어려운 선택지를 더하는 데에 있다고 말한다. 3) 대중지성; 대중을 일방적인 지식 수용자로 보지 않고 과학과 사회적 의제에 능동적으로 참여하에 전문가와 함께 대안을 만들어가는 주체적 역량을 의미한다.

 

저자는 과학에는 감식가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감식가란 맹신과 맹목적 반대를 넘어선 능동적 시민, 산업 자본에 포섭된 과학에 제동을 거는 사람, 사실을 관심사로 전환하는 사람을 의미한다. 정리하면 감식가란 과학이 실험실에서 규명한 닫힌 사실을 사회적 논쟁과 협의가 필요한 공동의 관심사로 끌어내오는 이들이다. 저자는 대중은 과학자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이해하고 있는 존재들로 그들에게 부족한 것은 개입하고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역량과 수단이라는 말을 한다. 저자는 프랑스의 물리학자이자 과학 비평가인 장 마르크 레비 르블롱이 한 ‘과학에는 아마추어가 없다’는 말을 인용한다. 여기서 아마추어는 실력이나 수준이 낮은 사람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아마추어란 원래 라틴어 'amator(사랑하는 사람)'에서 유래한 말로 보상이나 직업에 얽매이지 않고 순수한 열정과 즐거움으로 그 일을 사랑하는 사람을 뜻한다.

 

레비 르블롱은 예술이나 스포츠와 달리 과학에는 왜 아마추어가 없는지 질문한다. 예술의 아마추어는 악기를 전문적으로 배우지 않았어도 음악을 깊이 사랑하고 연주를 즐기는 아마추어 음악가나 전시회를 찾아다니며 작품을 평하는 아마추어 미술 애호가를 말한다. 반면 과학에서는 실험실 밖의 대중이 과학을 취미로 즐기거나 비평하는 아마추어 애호가가 되기 어렵다. 과학계가 고도의 전문 용어, 거대한 자본, 격리된 장벽을 세워 대중의 접근을 차단하기 때문이다. 저자는 이에 대중은 능력이 없는 것이 아니라 수단이 없다고 말한다. 레비 르블롱이 아마추어가 전멸했다는 말로 경종을 울렸다면 저자는 그렇기 때문에 의도적으로라도 과학의 감식가(아마추어 애호가, 비평가)를 길러내 자리를 내주어야 한다는 대안을 제시한 것이다. 현대 과학에서 학문의 구조와 연구 방식을 기준으로 볼 때 가장 개방적인 과학은 지구·우주과학(지구과학, 천문학), 가장 폐쇄적인 과학은 군사·국방과학, 상업용 응용화학, 신약 개발 분야다.

 

지구 우주과학은 '인류 공공의 자산'을 연구하기 때문에 데이터 공유와 국제 협력이 필수적이다. 제임스 웹 우주망원경(JWST)이나 허블 망원경의 관측 데이터는 일정 기간(보통 1년)이 지나면 전 세계 모든 사람에게 무료로 공개된다. 우주는 한 국가나 기업이 소유할 수 없기 때문이다. 기후 변화, 지진, 대기 순환을 연구하려면 전 세계의 관측 자료를 합쳐야 한다. 세계기상기구(WMO) 등을 통해 실시간으로 데이터를 교환하는 시스템이 구축되어 있다. 군사·국방과학, 상업용 응용화학, 신약 개발 분야는 국가의 안보나 기업의 생존(특허 및 독점 수익)과 직결되어 있어 극도의 보안을 유지한다. 군사·국방과학 분야는 국가 기밀로 분류되어 연구 결과가 논문으로 발표되지 않거나, 핵심 기술은 철저히 은폐된다. 학문적 교류 자체가 법으로 금지되는 경우가 많다. 응용화학 및 제약·바이오 분야는 수조 원의 가치를 지닌 특허권이 걸려 있다. 논문이 나오기 전까지는 실험실 내부의 레시피를 절대 공개하지 않으며 학회에서도 핵심 노하우는 숨긴 채 발표하는 경향이 강하다.

 

저자는 스티븐 제이 골드가 훌륭하게 보여주었듯이 진화 과학의 강건한 성격을 부여하는 것은 증거가 아니라 다윈주의적 관점에서 이해가 가능해지고 흥미로워지는 사례들의 숫자가 다양성이라는 말을 한다. 이는 진화 과학이 단순히 '실험실에서 증거를 하나씩 쌓아 올리는 과학'이라기보다 다윈주의라는 렌즈를 끼고 세상을 보았을 때 얼마나 수많은 생명의 다양성과 현상들이 비로소 이해되고 흥미로워지는가에 의해 그 가치가 증명된다는 뜻이다. (생물의 역사적 우연성과 다양성을 우아한 글로 풀어내며 박테리아부터 인간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생명체들이 다윈주의적 관점에서 어떻게 제각각의 의미를 얻고 흥미진진한 탐구 대상이 되는지를 평생에 걸쳐 보여준 과학자) 스티븐 제이 굴드-(과학이 단순히 딱딱한 진리의 집합이 아니라 세상을 바라보는 흥미로운 방식을 제공하는 과정이라고 보는) 이자벨 스탱게르스의 관점은 설명력이 곧 과학의 강한 힘임을 말한다.

 

저자가 굴드의 말을 인용하는 것은 현대 과학을 지배하는 ‘생산성 중심의 빠른 과학(Fast Science)’에 맞설 강력한 대안으로 ‘느린 과학(Slow Science)’의 가능성을 증명하기 위해서다. ‘증거의 양’보다 ‘설명의 풍요로움’이 가진 힘, 동료 시민을 소외시키지 않는 과학, 통제와 예측에서 ‘관계와 역사’의 과학으로란 말로 요약할 수 있는 바이다. 저자는 건전한 과학이라는 말이 경성과학이란 용어보다 훨씬 더 무례한 용어라 주장한다. 경성과학은 물리학, 화학, 천문학, 생물학 등을 지칭한다. 연성과학은 인문, 사회과학을 지칭한다. 경성과학은 데이터 시각화를 위한 그래프의 사용 빈도가 매우 높고 학계 내의 이론적 합의 수준이 연성과학에 비해 상대적으로 견고하고 조밀한 편이다. 연성과학이란 말은 다소 서열화된 느낌을 주지만 그것이 학문이 아니라거나 가짜라는 식의 전면적인 부정을 뜻하진 않는 데 건전한 과학의 반대어들은 불건전한, 의심스러운, 가짜의, 사기성 있는 등의 말로 도덕적으로 결함이 있고 척결해야 할 가짜 과학으로 받아들여지는 것이다.

 

저자가 건전한 과학이란 말을 극도로 경계하는 이유는 미국 등 주류 정치·경제 권력이 자신들의 입맛에 맞지 않는 연구를 배제할 때 불건전한, 의심스러운, 가짜의, 사기성 있는 등의 말을 쓰기 때문이다. 건전한 과학이라는 용어는 주로 담배, 화학, 기후 변화 등과 관련된 거대 기업들이 자신들에게 불리한 규제나 연구 결과를 방해하기 위해 무기로 사용해 온 말로 겉으로는 객관적이고 확실한 과학을 뜻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기업의 이익에 부합하지 않는 동료 과학자들의 연구나 시민들의 우려를 불건전하고 비과학적인 것으로 몰아세워 입을 막는 기능을 수행한다. 저자는 경성과학이란 말이 학문 간의 방법론적 차이(자연과학과 인문사회과학 등)를 나누는 오만한 표현에 그친다면 건전한 과학이란 말은 무엇이 올바른 과학인지를 기득권이 독점하여 판정하려는 더 교활하고 정치적인 의도가 담겨 있다고 본다.

 

저자는 프랑스의 전통적인 역사적 인식론학파 특히 가스통 바슐라르(Gaston Bachelard)의 핵심적인 관점에 대해 매우 비판적인 태도를 취한다. 저자는 바슐라르가 정립한 과학적 합리주의가 현대 과학을 지나치게 폐쇄적이고 엘리트주의적으로 만들었다고 분석한다. 바슐라르 과학철학의 가장 중요한 개념 중 하나는 일상적인 경험이나 상식(의견)과 과학적 사유 사이에는 명확한 경계가 있다는 인식론적 단절(Rupture épistémologique)이다. 바슐라르는 의견(Opinion)은 원칙적으로 항상 틀리다며 과학자가 되기 위해서는 대중의 상식과 주관적 상상력을 정화해야 한다고 보았다. 저자는 이러한 관점이 과학자와 비과학자(대중, 시민) 사이에 정당하지 못한 이분법적 장벽을 세웠다고 비판한다. 과학을 대중의 무지나 왜곡된 의견으로부터 보호해야 한다는 바슐라르 식의 논리가 결국 과학을 사회적 통제나 민주적 토론으로부터 격리하는 결과를 낳았다고 보는 것이다. 저자는 바슐라르가 상정한 과학 모델을 빠른 과학(Fast science)의 전형으로 본다. 바슐라르가 말하는 과학은 실험실이라는 통제된 환경 속에서 고유한 질문을 던지고, 그 외의 다른 복잡한 세계의 맥락(생태적, 사회적 영향)은 과감히 무시(Ignore)하면서 전진하는 과학이다.

 

저자는 오늘날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속도와 고립을 강조하는 과학이 아니라 과학적 결과가 사회와 생태계에 미칠 영향을 주변 주체들과 함께 고민하는 느린 과학이라고 주장한다. 저자는 바슐라르적 전통은 젊은 연구자들에게 사회의 복잡한 문제나 인문학적 상상력에 관심을 가지면 과학자로서 끝장난다는 식의 강박을 주입해 연구자들의 상상력을 거세했다고 말한다. 바슐라르는 과학이 스스로 오류를 교정하며 진보하는 자율적인 합리성의 영역으로 보았다. 저자는 과학은 결코 진공 상태나 순수한 이성의 영역에서 작동하지 않는다고 본다. 현대 과학은 철저히 자본(산업적 이익) 및 권력과 결탁해 있으며 바슐라르식의 순수한 과학이라는 환상은 오히려 과학이 외부 세력(거대 기업 등)에 의해 포섭되고 도구화되는 현실을 은폐하는 가림막이 될 뿐이라고 꼬집는다.

 

저자는 로버트 보일의 순결한 연구자란 개념도 비판한다. 사적 이해관계의 배제, 투명한 관찰자, 의견과 사실의 분리 등을 주지(主旨)로 하는 보일의 순결한 연구자는 과학의 객관성을 담보하기 위해 발명한 근대적 이상향이지만 오늘날 지구적 위기 속에서는 과학이 사회 및 대중과 단절되는 부작용을 낳았기 때문에 지양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저자는 과학적 사실은 완전히 순수한 상태에서 발견되는 것이 아니라 실험실이라는 인위적 공간과 이를 인정해주는 특정 전문가 공동체의 합의를 통해 생산된다고 본다. 저자는 과학을 정치나 사회와 무관한 순결한 영역으로 두는 탓에 과학자들은 자신들이 만든 환경 파괴, 기술적 부작용 등의 결과물이 사회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 책임지지 않고 오직 연구의 진보만을 외치게 되었다고 주장한다.

 

저자는 지식경제가 초래한 피해를 계기로 병적 공포를 지닌 몽유병자들이 마침내 눈을 뜰 것이라 너무 자신만만하게 기다리지는 말자고 말한다. 여기서 몽유병자들이란 자본주의와 지식경제가 만들어낸 시스템 속에서 위기를 인지하면서도 습관적으로 기존의 삶을 반복하는 현대인들을 뜻한다. 몽유병자라 불리는 이유는 기후변화나 지식경제의 폐해(불평등, 경쟁 심화 등)를 머리로는 알지만 시스템이 정해놓은 궤도(생산과 소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관성대로 살아가는 상태를 보이기 때문(무감각한 순응)이고, 위기가 닥쳤을 때 적극적으로 저항하거나 대안을 찾기보다 무력감과 병적 공포에 질려 눈을 감아버리기 때문(마비된 공포)이고, 잠을 자며 걷는 사람처럼 자신의 행동이 가져올 파괴적 결과를 깊이 성찰하지 않고 자본주의 체제의 논리에 따라 수동적으로 움직이기 때문(주체성의 상실)이다.

 

저자는 위기가 심각해진다고 해서 이 몽유병자들이 저절로 잠에서 깨어나 행동할 것이라 낙관해서는 안 되며 이들을 흔들어 깨울 새로운 정치적·행동적 자각이 필요하다고 강조하는 것이다. 저자는 버지니아 울프와 함께 사고할 때 쉬운 희망은 불가능하다고 말한다. 버지니아 울프는 [3기니] 등에서 전쟁과 가부장제, 남성 중심적 엘리트주의가 어떻게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는지를 날카롭게 직시한 인물로 저자는 울프처럼 우리를 둘러싼 파국의 원인을 적나라하게 응시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고 말한다. 쉬운 희망이 불가능하다는 선언은 절망이나 냉소주의로의 도피를 뜻하지 않고 오히려 값싼 위로를 버리고 우리가 처한 이 엉망진창인 현실 속에 발을 딛고 버텨내야 한다는 의지의 표현이다. 해결책이 즉각 보이지 않더라도 비극적 상황을 있는 그대로 직시하는 주체들이 모여 머리를 맞대고 사유를 시작할 때 비로소 진정으로 유효한 대안과 단단한 연대가 만들어질 수 있다는 철학이다.

 

저자는 브뤼노 라투르가 연구실(실험실)에서는 혼자가 아니라고 말했음을 지적한다. 과학적 사실이 인간 과학자 개인의 천재성이나 외로운 고군분투만으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저자는 질 들뢰즈의 철학을 자신의 학문적 여정에서 가장 핵심적인 자양분으로 평가하며 깊은 경의를 표한다. 저자에게 들뢰즈는 자신을 철학의 세계로 이끈 해방자이자 과학을 단순한 도구가 아닌 마술적이고 생태적인 실천으로 사유할 수 있게 해 준 개념적 나침반이었다. 들뢰즈 역시 생전에 강연에서 저자의 출석을 반가워하며 그녀의 사유를 존중하는 등 두 학자는 깊은 지적 교감을 나누었다. 저자는 들뢰즈가 보인 세 가지 점에 깊이 공감했다. 1. 지식의 도그마(독단)를 깨뜨리는 유머와 해방감, 2. 고정된 본질이 아닌 생성과 배치의 존재론, 3. 정답을 내리는 대신 문제를 발명하는 철학 등이다.

 

저자는 근대 과학이 추구해 온 동일성의 과학(하나의 절대적 진리, 보편적 법칙, 환원주의)에 맞서 세계의 복잡성과 이질성을 인정하는 다원성의 과학을 제시한 대표적인 현대 과학철학자다. 저자는 자신이 실험적 성공을 위해 필요한 것이 극도로 엄격하다는 점을 강조하면서 경성 실험 과학이 이미 누리고 있는 특권을 정당화하려는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오히려 자신의 목표는 실험적 성공을 다른 방식으로 이어가고 그것을 재창조하며 다른 유형의 조건들과 연결함으로써 다른 종류의 성공의 여지를 마련하는 데 있다고 말한다. 이러한 조건들은 반드시 연성일 필요는 없다. 또한 실험적 조건 만큼 엄격할 수 있지만 단지 상당히 다른 것을 요구할 뿐이라 말한다. 경성과학의 실험실만 엄격한 것이 아니라 대상과 맥락이 바뀌면 엄격함의 기준도 바뀌어야 하며, 그 다른 기준을 통과한 지식 역시 동등한 권위를 가진다는 말로 지식의 다원주의를 역설한 것이다.

 

저자의 말들 중 가장 인상적인 것이라 할 수 있는 것은 과학을 느리게 만드는 것 자체가 과학들 사이의 대비를 어떻게 창조할지의 문제에 대한 해답은 아니지만 그러한 해답을 위한 필수 조건이라는 말이다. 첫째는 이는 세계를 주어진 것으로 간주하는 누적적 지식 모델에서 벗어난 방식으로 동료들을 연결할 수 있는 평가 실천을 위해서도 필수적이라 말한다. 저자는 느림에 대한 권리는 그 자체로 목적이 아니라 말한다. 저자에 의하면 느림은 속도와 마찬가지로 연구자들을 유연성과 경쟁력의 명령이 결국 자신들을 파괴로 몰아넣을 것임을 알고 있는 모든 이들과 연결시킨다. 저자는 우리는 근대과학의 기묘한 모험이 어떤 것이었는지 또는 어떤 것이 될 수 있는지 알지 못하지만 우리가 이미 습관적으로 해오던 일을 더 잘 사는 것만으로는 배울 수 없음을 알고 있다고 말한다.

 

속도를 늦춘다는 것은 다시 배울 수 있는 능력을 갖게 되는 것이며 다시 사물들과 친숙해지는 것이고 상호의존의 관계를 다시 엮어가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사고하고 상상하며 그 과정에서 타자들과 포획의 관계가 아닌 관계들을 만들어내는 것을 의미한다. 즉 우리 사이에서 그리고 타자와 함께 병든 자들에게 효과적인 종류의 관계를 만들어내는 것을 의미한다. 타자와 함께, 타자로부터, 타자 덕분에 배우기 위해 서로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을 위한 관계 속에서 우리는 살만한 삶이 무엇을 필요로 하며 가꾸어야 할 가치가 있는 지식이 무엇인지를 배울 수 있다. 저자는 패러다임은 공약불가능하다는 토머스 쿤의 주장에 아연실색한 과학철학자들이 있었음을 이야기한다. 패러다임은 공약불가능(Incommensurable)하다는 주장은 서로 다른 두 패러다임이 공통의 척도로 비교될 수 없다는 의미다.

 

과학적 패러다임이 바뀔 때는 더 우수한 패러다임으로 '발전'하는 것이 아니라, 세계를 바라보는 '눈' 자체가 완전히 바뀌는 혁명적 전환이라는 뜻이다. 저자의 관점에서 토머스 쿤의 공약불가능한 패러다임은 과학이 상대주의나 비합리주의에 빠졌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과학적 실천의 독특하고 까다로운 구체성(situatedness)을 보여주는 강력한 증거다. 쿤은 과학이 계단을 오르듯 지식이 차곡차곡 쌓이며 발전하는 것이 아니라 패러다임이 통째로 바뀌는 혁명(단절)을 통해 변한다고 보았다. 하지만 실제 과학사에서는 옛 패러다임의 핵심 유산이 버려지지 않고 새 패러다임 속으로 흡수되어 발전하는 경우가 훨씬 많다.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새 패러다임)이 등장한 이후에도 뉴턴의 고전역학(옛 패러다임)은 폐기되지 않고, 빛보다 느린 거시 세계라는 특수한 조건 하에서 여전히 유효한 진리로 누적되어 사용된다. 쿤은 주로 천문학(코페르니쿠스), 물리학(뉴턴, 아인슈타인), 화학(라부아지에)의 역사만을 바탕으로 패러다임론을 정립했다.

 

다윈의 진화론 이후 생물학은 패러다임의 붕괴와 혁명을 겪었다기보다는 유전학, 분자생물학 등과 결합하며 외연을 끊임없이 확장하고 누적해 온 역사에 가깝다. 쿤의 이론은 복잡하고 다원적인 타 과학 분야의 발전 패턴을 해명하는 데 한계가 크다. 쿤의 패러다임론은 과학의 발전이 점진적으로 누적되는 과정이 아니라 기존의 지배적인 패러다임이 위기를 맞이하고 새로운 틀로 급격히 전환되는 과학 혁명을 통해 이루어진다고 본다. 이 이론은 지질학의 역사, 특히 판구조론(Plate Tectonics)의 정립 과정을 설명하는 데 가장 완벽하게 들어맞는 사례로 자주 인용된다.

 

저자는 사회구성주의를 이야기한다. 사회구성주의는 우리가 인식하는 현실, 지식, 진리가 객관적으로 고정되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들이 사회적으로 상호작용하고 소통하는 과정 속에서 만들어진(구성된) 결과물이라고 보는 인식론적 흐름이다. 저자의 관점에서 구성주의는 사실(Fact)은 인간에 의해 구성(Constructed)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가짜라거나 허구인 것은 아니라는 의미를 지닌다. 물리학자들은 전통적으로 구성주의(특히 사회구성주의)에 대해 매우 비판적이거나 냉소적인 입장을 취해 왔다. 물리학자들은 과학적 사실이 정치나 문화적 합의로 결정된다는 사회구성주의에는 강력한 적대감을 보이지만 과학이 자연을 관측하기 위해 이론적 모형과 실험 정교함을 만들어 나가는 과정이라는 실천적 의미의 구성에 대해서는 현대 물리학의 발전에 따라 점차 세련된 방식으로 소통하고 있다. 사회적 구성주의는 현대 학문 발전에 크게 기여했지만 치명적인 허점과 한계를 가지고 있다. 이자벨 스탱게르스, 브루노 라투르 등은 인간들끼리만 말장난하는 사회가 아니라 인간의 언어(사회)와 비인간 존재(자연, 물질, 생태계)가 서로를 파괴하지 않고 긴밀하게 연결되어 공존하는 생태적 민주주의(코스모폴리틱스)의 실현을 소망한다.

 

빠른 과학은 단순히 속도의 문제가 아니라 속도를 늦추지 말고 시간을 낭비하지 말라는 명령이며 그렇지 않으면 ...과 같은 식의 경고를 의미한다. 저자는 되찾기(Reclaiming)를 말한다. 자본주의의 주술과 빠른 과학 체제에 포획되어 상실한 과학 본연의 가치와 사회적·윤리적 책무를 다시 회복하는 실천적 과정을 의미한다. 저자는 되찾기는 무엇보다도 우리가 병들었기에 치유가 필요함을 인식하는 것을 의미한다고 말한다. 느린 과학은 이미 완성된 해답을 제공하지 않으며 약이 아니다. 그것은 회복으로 가는 여러 경로들이 함께 모일 수 있는 운동의 이름이다. 저자는 들뢰즈와 가타리의 [1000개의 고원]을 인용하자면 자신은 되찾기 작업이 우리에게 모범 사회가 아니라 전달자들로 이루어진 이동하는 민족에 대해 말해준다고 말하고 싶다고 이야기한다. 저자는 우리가 가이아와 화합할 수 있을지,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우리가 차이를 만들어낼 수 있다고 믿는 것 외엔 다른 선택지가 없다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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