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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날개 옷은 어디 갔지? - 누구나 알지만 아무도 모르는 여자 이야기
안미선 지음, 장차현실 그림 / 철수와영희 / 200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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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배의 블로그에서 이 책을 소개해 놓은 포스트를 보고 사서 읽기 시작했는데 시간이 제법 걸렸다.

 

월간 작은 책의 발행인이고, 부천에서도 글쓰기 강좌를 통해 한번 뵌적이 있는 안건모씨가 이 책의 추천사를 썼는데

안건모씨는 추천사에서 이 책은 바로 '누구나 알지만 아무도 모르는 여자 이야기', 아니 더 정확히  하면

'여자도 모르고 남자는 더더욱 새카맣게 모르는 이야기'라는 말을 했다.

 

그래서인지, 책장을 한장한장 넘기면서 '그래 맞아맞아'라며 고개를 끄덕거리던 것이, 책을 읽어나가면 나갈수록 힘이 들었다...

바로 그 안에는 나 역시도 이런 '여성'들의 삶'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것이 책을 쉽게 읽을 수 없는 이유였을거다...

 

옛날 우리 어머니들 말씀하시길, '내가 살아온 얘길 책으로 쓰면 아마도 수십권은 될거다'라는 말씀들로

당신네들 살아오신 삶이 얼마나 파란만장 했는지를 비유했을텐데... 문득 이 책을 읽으면서,

그렇게 아주 옛날부터 그 어머니들이, 그 여성들이 당신들의 삶을 글로 남기셨다면

그래도 지금쯤은 우리 여성들의 삶이 조금쯤은 달라지지 않았을까 싶은 생각도 든다.

 

남보기 부끄러워서 말 못하고, 부모님 걱정시켜드릴까봐 말못하고, 나만 이렇게 사는 것도 아니고,

'대부분 여자들이 다 이렇게 살텐데 참고 살지 뭐'하는 생각에서 더더욱 말 못하고, 말 안하며 살아가는 여자들 이야기.

 

그러다보니 딸들은 엄마를 보며 '엄마처럼은 살지 않을거야'를 울부짖고, 또 반대로 아들들은 '엄마같은 아내'를 원한다.

이렇게 남녀가 서로에 대해 이해도 공감도 안되는 상태에서  우리가 접할 수 있는 것은  tv를 통해 보여지는 남자, 여자 모습이다.

물론  그 tv속 남자 여자의 모습이  대다수 평범한 우리네들 삶과는 너무도 동떨어져 있다는게 문제긴 하지만...

 

이렇게 여자들 이야기가 개인의 사소한 경험으로 파묻히고, 그 속에 어린시절 꿈조차 파묻혀 갈 때

이 책의 저자 안미선씨는 묻는다.

 

'내 날개옷은 어디갔지?' 라고...

 

모든 여자들이 다 겪는 얘기여서 평범하고, 진부하지만 그래서 더욱 공감할 수 있는 우리 여자들 이야기

대부분의 여성들이 한번쯤은 겪었고, 지금도 겪고 있으며, 언제가는 겪게될  얘기지만,

그 대부분의 여자들이 '쉬쉬'하는 통에 공론화되기 보다는 그냥 '수다'로 묻혀버릴법한 여자들 이야기.

그래서 단한번도 중요하게 거론되지 않고, 그래서 반복되는 여자들 이야기...

'너만 그렇게 사는거 아니고, 대부분 여자들이 다 그렇게 사는데 넌 뭐가 잘났다고...'라는 말들때문에 더욱더

'비밀'스러워지고, 그래서 마냥 사적인 얘기로 치부되어 왔던 여자들 이야기...

 

바로 이 책 ' 내 날개옷은 어디갔지'는 이런 평범한 여자들의 평범한 이야기이다.

하지만 이 책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렇기 때문에 모든 여성들의 이야기이며, 따라서 내 이야기인 것이다.

 

나무꾼이 날개옷을 감추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나무꾼과 결혼(?)해 아이 셋을 낳고 살았던 어린시절 '선녀와 나무꾼' 이야기는

더 이상  정직한 나무꾼의 아름다운 사랑이야기로 읽혀져서는 안된다.

 

수십, 아니 수백년을 '나무꾼' 입장 즉 남성, 가부장의 입장에서 읽혀온 '선녀와 나무꾼' 이야기는 이제 다시 읽혀져야 한다.

 

나무꾼 때문에 사랑하는 가족과 헤어져 어쩔 수 없이 나무꾼과 살아야 했던 선녀.

아이셋을 낳아 키우는 동안도 하늘나라를 못 잊고, 부모님과 언니들을 그리워 했을 선녀.

그렇기 때문에 기어코 아이셋을 낳고서야 날개옷을  받아, 그 세 아이를 들쳐업고, 양팔에 끼고,

결국은 자신의 고향 하늘나라로 돌아가고야 말았던 눈물많고 한 많았을 선녀...

 

이 동화가 언제적부터 우리에게 읽혀졌는지는 모르겠지만, 지금네 우리 여성들의 삶은 과연 이 '선녀'의 삶보다 더 낫다고 말할 수 있을까?

 

옷을 훔쳐간 나무꾼을 '백마탄 왕자'로 생각하며, 그렇게 나무꾼에게 '선택'당했다고 믿으며,  

평생을  땅에서 아이셋을 낳고 나무꾼과 그 어미와 알콩달콩 사는 것을 진정 선녀는 행복해했을까?

 

지금 나의 삶은 이 '선녀'의 삶과 같지는 않은지,

그렇다면 그동안 아이 셋 낳고, 남편에 노부모  뒷바라지 하느라 까먹고 있었던

내 날개옷이 어디갔을지를 한번쯤은 생각해 볼 일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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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 훅스, 계급에 대해 말하지 않기
벨 훅스 지음, 이경아 옮김 / 모티브북 / 200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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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여성주의에 관심있는 사람이라면 단 한번이라도 들어보았을 '행복한 페미니즘'의 저자 벨 훅스.

그녀가 이번에는 '계급'에 대해 말했다.

 

'계급에 대해 말하지 않기'라는 제목으로 이 책에는 '계급'이라는 단어가 도대체 몇번이나 나올까 싶을 정도로

그녀는 구구절절 지금 이 시기에 왜 '계급'에 대해 말해야 하는지를 역설적으로 말해주고 있다.

 

흔히들 '여성'하면 이중 삼중의 억압과 고통을 받고 있다고 이야기한다.

계급 억압이 있고, 인종 억압이 있으며, 장애와 비 장애 사이의 무수한 억압이 있다하더라도,

거기에 '여성'이 붙으면 그 자체로 이중 삼중의 고통이 더해지는 것이다.

 

초기 여성주의가 '여성'의 특수성을 강조하느라 '계급'에 대해 경시했다면, 유래없는 자본의 탄압속에서는

또다시 '계급'이 강조되면서 '여성'의 특수성은 가려지고, 바로 이러한 오류를 반복하면서 여성주의는  자기반성과 변화를  거듭해오고 있다.

 

물론 지금도 여전히 과도기라 할 수 있지만, 여성주의가 진정 '여성해방'과 '인간해방'을 목표로 한다면

'여성'이기 때문에 갖는 보편성외에도 같은 '여성'이라 할 지라도 '계급적 차이'에 따라 , 또 인종에 따라, 장애와 비장애에 따른 

억압의 형태와 문화의 차이들이 조명되지 않고서는  '여성해방'은  이를 주장하고 외치는 또 다른 권력있는 여성들만을 위한 구호로 끝나거나,

이를 위해 또 다른 여성의 억압이 전제될 수 있기 때문이다.

 

바로 이런 점에서 벨 훅스의 '계급에 대해 말하지 않기'는 바로 신자유주의 시대 여성운동이 나아갈 길에 대해 시사하는 바가 크다....

 

 

이 책에서 벨 훅스는  99%의 부를 위해 1%가 어떻게 억압당하고, 착취당하고 있는지,

그 속에서 '계급'이라는 말이 얼마나 정치적으로 은폐되어 오고, 그로 인해 이익을 얻는자는 누구인지

특히 미국사회에서 '자본권력'을 중심으로 어떻게 권력구조가 재편되고 있는지를 '흑인 노동계급'에서 신분상승한 본인의 경험을 통해 설명한다. 

 

우리 사회에서도 한때는 공부 열심히 하고, 좋은 대학, 좋은 직장 나오면 그길이 곧바로 신분상승의 길로 직결되던 시절이 있었다.

그때는 너도나도 오로지 일류대 명문대를 부르짖었고, 소위 '개천에서 용나던' 시절이었던 것이다.

노동계급의 가정에서 태어나고 자라도, 피나는 노력여하에 따라 '계급이동'이 가능했던 시절이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각종 언론과 매체는, 그래서 마치 누구라도 노력만한다면, 신분상승을 할 수 있다는 '꿈'을 심어주면서 소비를 부추겨왔다.

 

또 한편으로는 경제성장으로 노동계급도 일정정도의 부(?)를 누릴 수 있게 되자, 마치 우리 사회에도 더이상은 '계급'이 존재하지 않는 듯

너도나도 '중산층'이라는 말을 쓰곤했다. 그러나 우리가 처한 오늘의 현실은 과연 어떠한가?

 

물론 지금도 끊임없이 신분상승을 꿈꾸며, 일류대, 일류직장, 유학파, 박사학위 등을 어떤 신분상승의 코스처럼 인식하고

이를 위해 이제는 초등학교때부터 아니 그보다 더 일찍 '경쟁'사회로 내몰리고 있다
 

 

하지만, 이제는 질문해야 한다.

과연 99%의 부를 늘리기 위해 1%가 허리띠를 졸라매야 하는 사회에서 과연 '계급' 이동이 현실적인 것인지?

설사 운좋게도 99%중에 소수가 그 1%에 속한다 할지라도, 과연 그 소수가 자신의 '계급적 처지'를 어떻게 규정할 것인지...

 

신자유주의 세계화로 빈익빈 부익부의 양극화 현상이 이제는 선진국 후진국 가릴 것 없이 전세계적으로 치닫고 있는 이 시기에

내가 서있는 위치는 어디인지를 정확히 인식하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소수 몇몇의 신분상승이나 계급이동이 아닌

99%의 계급적 지위와 1%의 계급적 지위를 역전시키지 않고서는 희망을 말하기 어려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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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빠는 필요없다 - 진보의 가부장제에 도전한 여자들 이야기 이매진 컨텍스트 15
전희경 지음 / 이매진 / 200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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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여성신문에서  이 책에 대한 기사를 읽은 후 바로 책을 주문하고 나니 우연치고는 너무 기막히게도 민주노총 성폭력 사건이 보도됐다...

 진보의 가부장제에 도전한 여자들 이야기 '오빠는 필요없다'

왜 제목을 '오빠는 필요없다'라고 했을까? 굳이 필요없다고 까지 말할건 없지 않을까... 

'여성운동의 대중성 회복' 이라는 차원에서만 보더라도 사실, 일반 남성 모두를 지칭해 '적, 또는 가해자'로 규정짓기 보다는 남성들 또한 가부장제사회의 또다른 피해자이며, 이들을 우군으로 얻지 않고서는 여성운동의 성공은 어려운게 아닐까... 라며 초반부터 여러가지 상념으로 책을 읽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런, 애초의 마음은 여지없이 무너져 내린다.

바로 다음과 같은 질문 때문이다...

 1. 왜 장기수는 '선생님'이고 위안부는 '할머니'로 부르느냐?

2. 여자후배가 남자 선배를 '형'이라고 부르는 운동권 특유의 문화에서 '형'이라는 의미가 '학형'의 준말이라 설명하지만, 여성은 남자 선배를 '형'이라 불렀지만 남성은 여자 선배를 '누나'라고 부르는 경우가 대부분이지 않나? '호칭'이 갖는 정치적 의미는 무엇인가?

3. 사무실에 손님이 찾아오면 누가 손님에게 "커피 한잔 드실래요"라고 묻는가?

4. 사무실 컵을 닦는 것은 누구에게 집중되어 있으며, 집기가 있는 곳을 누가 모르는가?

5. 화염병, 사수대, 가두시위, 전투경찰과 싸우는 모습 등의 소위 군사화된 시위문화는 과연 누구, 어느 집단의 정서가 반영된 문화인가? 

6. 강철같은 의지, 강철대오, 전사, 총탄, 총칼, 깃발, 노동자 군대... 등 수 많은 민중가요 투쟁가에 나오는 이같은 언어들은 누구를 표상화한 이미지인가?

7. 잦은 외박과 mt, 사발식, 2차 3차 까지 가는  늦은밤까지 계속되는 뒷풀이 술자리 문화는 누구에게 '가족'과의 갈등을 불러일으키나?

8. 노동운동 탄압에서 가족대책위의 구성원은  '누구'인가?

9. 공적영역만을 정치적인 장으로 보고, 가족, 연애, 결혼은 사적영역으로 분류하고 바라보는 것은 누구의 시선인가?

10. 왜 '가족' '육아'는 여성활동가들에게만 그토록 끈질긴 고민거리가 됐을까?

11. '동지'에게 '성폭력'을 당하고 '진보'를 위해 용서와 침묵을 강요받을 때, 여성 활동가들에게 '성폭력'은 어떤 '의미' 인가?

12 '민족해방' '노동해방'을 전체운동 차원에서 '보편적'이라 정의하고, '여성해방'을 부문운동으로, '특수성'으로 정의 내리고, 바라보는 것은 누구인가?????

 사실, 질문은 끝도 없이 이어진다.

아니, 이러한 가부장적 성차별 문화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는  여성은 거의 대부분 '과도한 감정'을 지적받는다.

그러나 자본가의 부당한 억압에 맞서 투쟁하는 남성(여성) 노동자들의 분노에 대해 "너무 민감하다"거나 "흥분하지 말라"고 주문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사회적 약자가 억압이나 차별에 직면해 '감정적'으로 대응하는 것은 너무 당연하지 않은가? 오히려 부당한 상황에서 '감정적'이 되지 않는 것이 더 문제가 아닌가? 그것은 '합리'나 '이성' 이 아니라 약자의 고통에 공감할 수 없는 무능력일 뿐이지 않은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여성활동가들은 '여성문제'라 일컬어 지는 것들에 대해 얘기할 때는 한껏 조심스러워야 한다. 최대한 감정을 자제(?)하고, 억누르며, 아주 이성적으로, 그것도 아주 세련되게, 예술적으로 표현하지 않으면 절대로 그들이 제기하는 얘기가 들리지 않고, 오히려 반감만 사게될 거라고  여기게 된다.

 또한 많은 여성(활동가)들이 남성들과의 대화에서 무언가 답답함을 느끼고, 근본적으로 소통이 안된다고 여기는 것과 동시에 그것은 자신의 언어가 '합리적'이거나 '이성적'이지 않기 때문이며, 본인 스스로도 잘 '정리되지 않기 때문'  이거나 '내가 조리있고, 설득력 있게 이야기를 잘 전달하지 못한다'고 느끼는 경우가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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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받지 않을 용기 - 알리스 슈바르처의
알리스 슈바르처 지음, 모명숙 옮김 / 미래인(미래M&B,미래엠앤비) / 200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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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우리에겐 '아주작은 차이'로 익숙한 알리스 슈바르처의 신간 '사랑받지 않을 용기'!

개인적으로 새해를 맞이하면서, 올 한해 꼭 이루고 싶은 일 가운데 한 가지를 '다이어트'라고 결정하고 나서, 결혼과 출산 전 몸매로 돌아가기!를 야심차게 선포(?) 했지만, 이 책을 읽으면서 다시한번 '다이어트'에 대해 생각해보게 된다.

자기관리 라는 측면을 벗어나, '다이어트'에 내재되어 있고 있는 근본적인 철학(?)은 무엇인가?

 먹을 것이 풍부한 나라에 살고 있는 여성들이 현재의 이상적인 몸매에 맞추기 위해 굶어 죽는다.

제3세계 사람들이 먹을게 없어서 굶어 죽는 반면, 제1세계의 소녀와 여성들(그리고 소수의 남성들)은 굶어서 죽는다.

그런데 제1세계에서만이 아니다. 텔레비젼을 통해 날씬한 몸매가 전 세계의 유행으로 퍼져나갔다.

1999년에는 다음과 같은 보도가 나왔다.

 튼튼하고 포동포동한 여성을 아름답다고 여겼던 피지섬에 텔렙리전이 도입되자 불과 3년만에, 살을 빼고 싶다는 십대 여자아이들이 6~7명에 한 명 꼴로 나타났다는 것이다.

 모두가 먹기에는 먹을 게 너무 적었던 예전에는, 누가 무엇을 먹는가 하는 것이 지위와 성별의 문제였다.

그런데 왜 부유하고 여성해방이 이루어진 서구 사회의 여성들이 상추 잎이나 갉아먹는 걸까? 남자들은 스테이크나 구운 감자를 맛있게 먹는데 말이다. 그것은 여성들이 유행, 영화, 팝문화, 광고 등에 의해 그렇게 하도록 유인되기 때문이다. 여기에서는 남자들이 연출하고, 여자들은 강요된 이상을 구현한다.

 여성들은 드디어 자신들의 삶과 자유를 만끽할 수 있게 되었는데, 실은 그렇지 못하다. 오히려 마오쩌둥 이전의 중국에서 전족한 발에나 어울렸을 법한 위험천만하게 굽이 높은 신발을 신은채, 굶어서 아픈 몸을 이끌고 작은 세계를 총총걸음으로 돌아다닌다...

 남자들이 신망을 얻으려고 매진하는 동안, 여자들은 다이어트를 한다. 남자들이 삶을 즐기는 동안, 여자들은 칼로리를 계산한다. 요컨대 여자들은  빈약해져야 하는 것이다. 어떤 관계에서나...

 그래서 저자는 말한다.

 무엇보다도 나쁜 것은 여성들 자신이 날씬함의 망상에서 가장 못된 적이라는 사실이다.

여성들은 자신을 구속하는 외적인 사슬을 벗은 뒤 스스로 내적으로 포박되고 있다.

여성해방이 너무 빨리 이루어진 것일까?


여성들은 외적인 해방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스스로 결정할 힘을 갖고 있지 않은게 확실하다.

패션과 광고, 그리고 영화처럼 남자들이 지배하는 업계로부터 여성에게 파괴적인 이상이 요구되고, 다수의 여성들이 그것을 실행한다.

"너 뚱뚱해졌구나!" 라고 몸매를 거론하는 것은 도리어 여성들이다!

 어느새 몸매, 외모가 경쟁력이고 능력이 되어버린 사회에서

나또한 뒤질세라 '다이어트'를 통한 경쟁력을 갖추고자 하는 건 아닌지...

한번쯤 진지하게 고민해봐야 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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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과 연애의 달인, 호모 에로스 - 내 몸을 바꾸는 에로스혁명 인문학 인생역전 프로젝트 6
고미숙 지음 / 그린비 / 200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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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내가 일하는 여성단체에서 비혼여성들과, 부부들을 대상으로 하는 성과 사랑, 연애에 대한 강의를 한적이 있었다.

특히 비혼들을 위한 강의 부탁을 하면서

' 꼭! 반드시 내가 있는 연애' 를 해야 한다는 걸  심어주세요'라는 부탁을 강사님께 했었다.

그리고 나서는 강사님이 이 강의를 위해 읽었다는 바로 그책 '사랑과 연애의 달인 호모에로스' 의 영향인지, 아무튼 그날의 강의는 참가한 비혼 남녀들의 가슴을 치고, 울리고..  아무튼 훌륭했다.

사실 아이가 이제 여섯살인 나도 가끔(?)은  '모든것을 다바치는 그런 강렬한 연애'를 해보고 싶다는 꿈(?)을 꾼다.

물론 사람들은 '너 같은 사람때문에 이렇게 솔로인 우리들이 기회가 없는거야'라며 비난아닌 비난을 하지만, 누구에게나, 한번쯤은 드라마같은 그런 운명적인 사랑과 연애는 로망이지 않은가?

 하지만 이 책은 이런 로망을 여지없이 날려버린다.

그리고 '사랑'뿐만 아니라, 관계에 대해, 인생에 대해 '나'에 대해 근본적으로 성찰하게 만든다....

 "부숴 버릴 거야!"라는 대사를 한동안 유행시켰던 sbs드라마 '청춘의 덫에서 여주인공 심은하는  극중에서 남자주인공(갑자기 이름이 생각안난다...)과 열렬히 사랑하고 온갖 뒷바라지를 다하지만 결국은  남자주인공이 부잣집 딸과 눈이 맞아 자신을 헌신짝처럼 버리고 떠나자 복수를 꿈꾼다는 지극히 통속적인 멜로드라마를 기억할 것이다.

 그 런데 이 복수혈전의 멜로적 공식구에는 치명적인 함정이 있는데 바로 복수혈전이 펼쳐진다는 건 그 사랑의 원인이 내가 아니라, 상대로부터 비롯되었음을 전제하고 있는 셈...

그런데 만약 그렇게 모든 원인이 상대한테 있다면, 그걸 사랑이라고 이름할 수 있을까? 그건 사랑이기보다 노동이나 거래라고 해야 맞지 않을까?  이렇듯 사람들은 사랑을 언제나 대상의 문제로 환원한다.

상대를 잘못 만나 인생을 망쳤다면, 그런 상대를 선택한 '나'라는 존재는 대체 뭔가?

 사랑 따로 대상 따로 나 따로가 아니라, 나와 사랑과 대상이 하나로 어우러질 때  '사랑'이라는 사건이 발생한다.  제대로 된 사랑을 꿈군다면, 반드시 환기해야 한다. 사랑과 대상과 나 사이는 결코 분리될 수 없다는 것.

나아가 사랑하는 대상, 그것은 바로 '나'자신이라는 것을....

 그리고 덧붙이자면, 사랑은 절대 사적인 것이 아니다. 흔히 평생 가슴속에 은밀히 담아 두는 것이라 생각하지만, 그거야말로 무지의 소치다. 사랑을 이야기하고 실천하는 욕망자체가 사회적 배치의 산물이자 우주적 본능의 발현인데, 어찌 그럴 수 있단 말인가. 그렇게 협소한 영역에 가둬 두는 한 절대 상처와 연민, 동정 등의 미망에서 해어날 수 없다.

 사랑 혹은 에로스적 본능이란 단지 둘 사이의 문제가 아니라, 존재가 외부와 맺는 모든 관계를 포함한다!

 여기까지가 대충 이 책의 머리말에 나온 핵심내용이다.

 지금 이순간 간절히 '사랑'하고 싶은가?

그렇다면 망설이지 말고, 이 책을 읽으라고 권하고 싶다.  그리고 쉼없이 공부하라.

 그렇다면 사랑하게 될 것이다. 그것도 두려움 없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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