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연구5>에서는 ‘문명의 해체’와 관련하여 ‘해체의 성질’과 ‘사회체 분열’을 논한
전편에 이어 ‘영혼의 분열’과 ‘해체기 사회와 개인의 관계’에 대하여 논하고 있습니다. 특히 문명의 해체기에 등장하는 종교에 관한 내용이 주를
이루고 있습니다.
‘영혼의 분열’에서는 사회가 분열하기 시작할 때 구성원들은 다양한 감정과 행동, 삶의 방식을
보여주는데 저자는 두 가지 양식을 두고 양자택일적 양상, 즉 두 피동적집단과 능동적집단으로 나뉜다고 보았습니다. 피동적 방종과 능동적 자제,
피동적 표류의식과 능동적 죄의식 등 대립되는 개념으로 설명하는 것입니다. 삶의 방식은 외부세계에서 저변에 깔린 내면세계로 이동하는 움직임에 두
쌍의 양자택일적 반응이 작용한다는 것입니다. 그 첫 번째는 복고주의와 미래주의이며, 두 번째는 초월과 변모라고
보았습니다.
첫 단락에 나오는 다음 구절을 읽으면서 우리 사회가 바로 이런 모습이 아닐까 생각하면서 심각한 고민에
빠지게 됩니다. “사회는 행동하는 각 인간이 활동하는 분야의 공통된 기반이다. 이 사회의 표면에 분열이 나타나면 그 밑바닥에는 반드시 인간
영혼의 분열이 숨어 있게 마련이다. (…) 해체기에 들어서면 사람들의 행동 방향이 모두 하나뿐이던 것에서 서로 대립적이고 서로 모순되는 한 쌍의
변형이나 대체물로 분열하게 된다. 따라서 도전과 응전은 양자택일의 두 가지 극으로 변한다.(17-18쪽)” 최근 10여년 동안 우리 사회에서
나타나고 있는 현상을 아주 정확하게 표현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게다가 ‘한쪽은 피동적으로, 다른 한쪽은 능동적으로 변한다’라는 대목까지도
일치합니다. 보수는 피동적으로 진보는 능동적으로 변하고 있는 우리 사회의 속살을 제대로 짚었습니다. 문제는 그 다음입니다. ‘이 둘은 다
창조적이지 못하다’라는 대목까지도 어쩌면 그리도 닮았는지 말입니다.
저자는 해체기의 사람들의 영혼에 나타나는 행동, 감정, 생활의 양자택일적 양식으로, 방종과 자제,
일탈과 순교, 표류의식과 죄의식 등 여섯 가지를 들었습니다. 아마도 문명의 해체기에 나타나는 사회현상 가운데 종교와 관련된 것들을 짚어가기 위한
접근이 아니었을까 생각합니다. 종교에 관한 내용이라서 종교인이 아닌 저로서는 이해하는 것이 쉽지는 않았습니다만, 유라시아 여러 지역에서 등장했던
다양한 종교의 근본원리 및 변화까지도 상당한 수준으로 논하는 것을 보면서 대단하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고대 사회의 다원화된 신을 숭상하던 것이 유일신을 숭배하는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 조로아스터교는
물론 중국의 도교와 유교 심지어는 일본의 신도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종교들이 어떤 연관을 맺어왔는가를 이야기하는데, 중요한 점은 관용을 보이는
종교는 세가 약해지고 공격적인 종교가 세를 얻어 확산되었다고 설명합니다. 특히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의 뿌리가 되는 야훼의 시원에 대한 설명이
눈길을 끌었습니다. “야훼는 당초 서북아라비아의 한 화산에 살며 그 화산을 다스리는 신령으로서 비로서 이스라엘 민족의 시야에 들어왔다고 한다.
만약 그런 얘기가 신빙성 있는 것이라면 야훼는 그 기원으로 보아 말 그대로 토지에 귀속되는 지상신이었다. 어쨌든 그느느 기원전 14세기에 이집트
‘신제국’의 영토였던 팔레스타인에 침입한 야만족 집단의 수호신이었다. 그 후 에브라임 및 유대의 산악지대로 옮겨졌다가 특정한 지방과 특정한
지방공동체 사람들의 마음속에 뿌리를 내리게 된 것이다.(163쪽)”
지방적이던 야훼가 점차 세력을 얻어간 것은 ‘그는 홀로 숨 쉬고 나머지는 그림자였다’라는 오딧세이의
구절대로 배타성이라는 특징이 커다란 역할을 했다는 것입니다. 야훼는 맹렬한 질투심을 바탕으로 로마제국의 국교였던 다신들과의 경쟁에서 승리를
거머쥔 것도 가차 없는 불관용 덕분이었다는 것인데, 시리아 문명의 미트라나 이집트 문명의 이시스, 히타이트 문명의 키벨레가 관용과 타협적이었기
때문에 결국은 야훼에게 밀려나고 말았다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