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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논어 - 논어에서 찾은 열 가지 정의의 길
박영규 지음, 임자헌 감수 / 한빛비즈 / 2017년 5월
평점 :
절판
<다시, 논어>라는 제목을 받아들고 “왜 ‘다시’일까?”하고 생각해봅니다. “<논어>에는 오묘함이 깃들어 있다. 보는 방향에 따라 달라지는 맛과 향기가 <논어>의 얼굴을 천변만화하게 만든다. 그래서 어제 읽은 <논어> 다르고 오늘 읽은 <논어> 다르다”라고 말머리를 뗀 <다시, 논어>의 저자의 생각에 공감하게됩니다. 어쩌면 주해서보다는 <논어>를 원전으로 읽어야 이런 느낌이 더 진해질 것이라는 생각도 해봅니다. 주해서는 저자의 시각으로 한번 걸러진다는 한계가 있기 때문입니다.
<다시, 논어>의 표지에 <논어> ‘안연’ 편에 나오는 “君君、臣臣、父父、子子”, 즉 “임금은 임금다워야 하고, 신하는 신하다워야 하며, 아버지는 아버지다워야 하고, 자식은 자식다워야 한다.”라는 대목을 끌어온 것을 보니, 우리나라의 답답했던 정치현실에 청량한 무엇을 찾아볼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를 품게 하는 무엇을 기대하게 만듭니다만, 대선이 끝나도 답답한 정치현실을 크게 달라지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저자가 다시 논어를 끄집어낸 것은 마이클 센델의 <정의란 무엇인가>가 꼬투리가 되었다고 했습니다만, 사실 저는 <정의란 무엇인가>를 읽으면서 정의에 대한 생각이 더욱 꼬이기만 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논어를 통하여 ‘정의’를 다시 정의하고, 공자적 관점에서 ‘부의 고른 분배’가 정의의 구현이라고 파악한 것을 대학에서 학생들에게 가르친다면 혹여 편향된 시각일 수도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세상을 움직이는 기본은 변하지 않는다고는 하지만 공자의 세상과 지금의 세상은 분명 다를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중립적 시각을 견지하려는 노력을 곳곳에서 엿볼 수 있어 다행이란 생각을 하게 됩니다. 예를 들면, 극기복례(克己復禮)의 중요함을 언급한 부분입니다. 카프카의 <심판>을 인용하여 설명하고 있는데, 우리나라의 현실은 “잘되면 제 탓이고 잘못되면 남 탓으로 돌린다”라고 꼬집고 있습니다. 결국은 그놈이 그놈이고, 오십보백보에 불과한 것 아닌가 하는 걱정이 앞서게 됩니다. “보수와 진보가 서로의 생각의 차이를 인정하지 않으면 정치적 공존은 성립하지 않는다(33쪽)”라고 한 저자의 걱정에 공감을 하지만, 우리의 정치적 현실은 크게 바뀌지 않은 모양새 같습니다. ‘민의(民意)’라는 허울로 본질이 가려지는 것은 아닌가하는 우려가 더해지는 것 같습니다.
“일본은 자신이 저지른 역사적 만행에 단 한 번도 진심으로 사과하지 않았다(106쪽)”라는 비판에 대하여, 과거는 과거일 뿐 자신이 저지른 것이 아니라는 현실의 일본인들의 시각은 우리나라가 아무리 목청을 돋우어도 바뀔 것 같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과거에 매달리다가 앞으로 나아가야 할 시기를 놓치는 우를 범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걱정이 들었습니다.
여름휴가를 이용하여 영국과 아일랜드를 돌아보면서 영국을 뛰어넘은 아일랜드의 저력이 어디에서 나온 것인가를 생각해보았습니다. 그들은 영국이 아일랜드를 수백 년 식민지배하면서 저지른 끔찍한 일들을 결코 잊지 않았습니다만, 그에 대하여 사과하라고 주장한 적이나, 영국여왕이나 영국 정보 역시 그에 대하여 사과했다는 것을 들어본 바가 없는 것 같습니다. 역사의 수레바퀴는 멈추지 않으니 한 때, 잘 나갈 수는 있지만, 언제까지나 잘 나가는 나라는 역사상 없었던 것 같습니다. 즉 잘 나갈 때 중심을 잘 잡아야 한다는 것인데, 일본은 중심을 잘 잡아가고 있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의 전쟁을 일으킨 당사국이면서 패전국인 독일과 일본은 승전국의 도움으로 다시 일어섰다는 공통점이 있지만 전쟁의 책임에 대한 인식에서는 커다란 차이가 있습니다. 그것은 고전적 전투방식으로 항복을 이끌어낸 독일과는 달리 ‘원자폭탄’이라는 초유의 방식으로 압박한 끝에 어쩔 수 없이 항복한 일본은 스스로를 피해자라고 인식이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합니다. 그래서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는 미래가 없다(119쪽)’라고 한 저자의 말이 일본사람들은 역사의 심판에 맡겨두는 편이 낫겠다는 저자의 생각에 공감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