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르메르의 모자 - 베르메르의 그림을 통해 본 17세기 동서문명교류사
티모시 브룩 지음, 박인균 옮김 / 추수밭(청림출판) / 200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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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만으로 ‘생뚱맞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표지에 있는 <장교와 웃는 소녀>라는 그림을 보면서 17세기 네덜란드 화가 얀 베르메르(Jan Vermeer)를 떠올리게 됩니다. 베르메르하면 흔히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를 떠올리는 분들이 많을 듯합니다. 하지만 저는 <델프트 풍경 View of Delft>이 우선 생각납니다. 마르셀 프루스트가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갇힌 여인>에서 읽은 기억 때문입니다.


소설에서는 <델프트의 풍경>을 매우 좋아할 뿐만 아니라 구석구석까지도 잘 안다고 여기고 있는 작가 베르고트에 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베르고트는 <델프트의 풍경>에 그려진 ‘황색의 작은 벽’이 귀중한 중국의 미술품처럼 알찬 아름다움을 갖추고 있다고 쓴 비평가의 글을 읽었지만, ‘황색의 작은 벽’이 기억나지 않아서 그림을 다시 보러갑니다. 그리고 그림 앞에 섰을 때 “황색인 작은 벽면의 값진 마티에르(matière)를 발견했다”고 하였습니다. 마티에르는 작품 표면의 울퉁불퉁한 질감 자체나 회화기법필치, 혹은 물감에 따라 야기되는 화면의 표면 효과를 의미합니다. ‘황색의 작은 벽’의 질감을 새겨 본 베르고트는 ‘나도 이처럼 글을 썼어야 옳았지’하고 생각합니다. 최근 발표한 작품들이 건조하다는 생각을 가졌던 참이라서, ‘황색의 작은 벽’처럼 ‘채색감을 거듭 덧칠해서 문장 자체를 값진 것으로 했어야 옳았다’라고 자책하게 된 것입니다.(마르셀 프루스트 지음,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갇힌 여인 245쪽, 국일미디어 1998년) 유예진교수의 <프루스트의 화가들; http://blog.joins.com/yang412/13484901>에서 <델프트의 풍경> 이외에도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 등장하는 베르메르의 여러 작품들에 관한 이야기를 읽을 수 있습니다.


같은 작품을 두고서도 참 다양한 시선이 있는 것 같습니다. <베르메르의 모자>를 읽으면서도 같은 생각을 합니다. 특히 캐나다출신으로 중국학을 전공하는 작가의 배경을 알고 나면, 17세기에 활동한 베르메르의 그림들에서 당시 동서문명의 흐름을 읽어낼 수도 있었겠다 싶습니다. 표제를 <베르메르의 모자>라고 한 것은 <장교와 웃는 소녀>라는 그림의 배경에 걸려있는 지도가 이 책의 기획을 잘 담고 있다고 보았거나 혹은 작가가 캐나다 출신임을 암시합니다. 이 책의 저자인 티머시 브룩교수는 캐나다출신으로 1973년 토론토대학교를 졸업하고, 2년 동안 상하이의 푸단대학교에서 공부를 했습니다. 하버드대학교 동아시아연구소에서 석사와 박사학위를 받은 뒤 여러 대학을 거쳐 지금은 옥스퍼드대학교 중국학과장을 맡고 있습니다. 저서들을 보면 특히 중국 명대의 역사에 관심이 많은 것으로 보입니다.


<베르메르의 모자>에는 제목과는 달리 <델프트의 풍경>, <장교와 웃는 소녀>, <열린 창가에서 편지를 읽는 젊은 여인>, <지리학자>, <저울을 든 여인> 등 5개의 베르메르의 작품 이외에도 헨드리크 반 데르 부르흐의 <카드놀이>, 레오나르트 브라메르의 <베들레헴으로 여행하는 세 동방박사>, 그리고 중국화원의 풍경이 그려진 17세기 말경의 접시 하나를 다루었습니다. 이들 작품들은 네덜란드의 ‘델프트’라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영국의 일기작가 새뮤얼 피프스는 1660년 5월 델프트를 방문하고서 ‘가는 거리마다 강과 다리가 있는 무척이나 사랑스러운 도시’라고 묘사했다고 합니다. 브룩교수가 델프트, 나아가 베르메르와 인연을 맺게 된 것은 스무 살 때였다고 합니다. 크로아티아의 두브로브니크에서 스코틀랜드의 벤네비스까지 가는 여행의 마지막 여정에 자전거로 암스테르담에서 북해연안을 달리게 되었는데, 델프트에서 비를 만나는 바람에 도로에서 미끄러지고 말았습니다. 그때 식사와 잠자리를 제공해준 아주머니가 건네준 그림엽서에 담긴 델프트의 풍경을 구경하러 나섰다가 얀 베르메르의 무덤을 발견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베르메르의 작품들은 그가 사물에 대하여 가지고 있는 매우 섬세하고 과학적인 지식을 반영하고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즉 물체에 대한 현미경적 관찰과 빛의 영향을 다양하게 분석한 결과가 그림에 담겼다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대상을 화폭에 그대로 옮긴 것이 아니라 아주 신중하게 의도적으로 구성하였던 것입니다. 여기에서 저자는 베르메르의 회화작품에 등장하는 다양한 사물들을 통하여 17세기의 세계를 읽어보려 했고, 그의 작품에 흔히 등장하는 창문처럼 17세기로 통하는 통로가 될 만한 장소를 찾아 나섰다고 합니다. 그 첫 번째 문은 <델프트의 풍경>을 그린 장소로 지금은 작은 공원의 둔덕인데, 이 장소에 있었을 건물의 2층 높이가 딱 화가의 눈높이였을 것이라고 합니다. 두 번째 문은 <델프트의 풍경>의 오른쪽 아래 묶여 있는 두 척의 배, 그리고 중앙 구교회의 첨탑 왼쪽으로 죽 이어지는 붉은 지붕의 건물이 세 번째 문입니다. 두 척의 배는 청어잡이 배인데, 1550년 무렵부터 1700년까지 전 세계에 몰아닥친 추위 덕분에 북해의 노르웨이연안의 청어떼가 발트해 남쪽으로 내려오면서 네덜란드 어부들 차지가 되면서 네덜란드의 번영을 가져왔다고 합니다. 그리고 붉은 지붕의 건물들은 동인도회사의 창고였다고 합니다.


16세기 말, 에스파냐의 탄압적 지배로부터 독립을 이룬 네덜란드는 곧 해외 무역의 황금시대를 맞았습니다. 1492년 레콩키스타(국토회복운동)를 통하여 이슬람세력을 몰아낸 에스파냐는 곧이어 이교도들을 추방하였는데, 당시 에스파냐에 거주하던 유대인들이 대거 네덜란드로 이주하였고, 상거래에 밝은 유대인들이 네덜란드 무역의 중심역할을 했습니다. 영국이 동인도회사를 만들어 동방무역에 나서자 네덜란드 상인들은 2년 뒤인 1602년 네덜란드 동인도회사(Vereenigde Oost-Indische Compagnie, VOC)를 설립하여 해외무역에 나섰습니다. 네덜란드상인들의 발길은 남아프리카와 동남아시아, 북아메리카 등지에까지 식민지를 건설하였습니다. VOC는 세계최초의 주식회사이자 다국적기업이었으며 17세기 세계 최대의 회사였습니다. VOC는 암스테르담을 비롯하여 모두 여섯 곳에 지부를 두었는데, 그 가운데 하나가 델프트에 위치했습니다. VOC의 여섯 지부는 단일화된 정책과 지침에 따라 각자의 자본과 사업을 자율적으로 운영함으로써 유연함과 강함을 결합하여 아시아와의 해상 무역을 지배할 수 있었습니다.


네덜란드가 주도한 17세기 동서양의 교류는 발견의 시대에서 소통의 시대로의 전환을 모색하던 시기라고 평가받습니다. ‘완전한 변형이나 치명적인 충돌 대신 협상과 차용을 선택했고, 승리 아니면 패배라는 태도보다는 주고받는 방식을 선택했으며, 문화를 바꾸기보다는 상호 교류를 택했다는 것입니다. 처음 도래한 포르투갈이 가져온 기독교가 순식간에 확산되는 것에 놀란 일본은 쇄국정책으로 전환하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기독교를 내세우지 않은 네덜란드만은 예외로 나가사키에 만든 축구장 2개 크기의 데지마라는 인공섬을 통하여 무역과 교류를 허용했습니다. 데지마는 난학(蘭學)이라는 이름의 서양학문이 일본에 소개되는 ‘숨구멍’이었다고도 말합니다.


한편 저자는 베르메르의 그림 속에서 숨어 있는 17세기의 흔적을 찾아 과거를 재발견하는 정도에 머물지 않고, 과거와 현재를 만들어낸 다양한 원인과 결과를 반영하는 거울로 보았습니다. 예를 들면 베르메르가 구체 유리, 황동기구, 진주 등과 같은 사물의 표면에 주변의 모든 사물을 비추는 표현양식을 즐겨한 것을 저자는 ‘인드라의 그물’과 연관을 지었습니다. 인드라는 인도신화에 나오는 천신(天神)으로 그가 거처하는 수미산의 궁전에는 인드라의 그물이라고 하는 커다란 그물이 걸려있고, 그 그물코마다 구슬들이 매달려 서로를 비추게 되어있다고 합니다. 구슬들은 세상을 구성하는 각각의 존재를 의미하고 서로 인연이라는 고리로 연결되어 있는데, 하나의 구슬이 변하면 다른 구슬에 비친 모습도 변할 뿐 아니라 다른 구슬의 모습도 변해 보이게 된다는 것입니다. 화엄경에서는 이를 ‘모든 존재는 서로간의 상호작용을 통해 의존관계에 있다“라고 설명합니다.


<델프트의 풍경>에서 17세기에 델프트를 중심으로 아시아, 아프리카, 남북 아메리카대륙이 서로 연결되었던 사정을 개괄한 저자는 이어서 등장하는 작품들을 통하여 각론에 해당하는 세계문명의 교류상황을 짚어냈습니다. <장교와 웃는 소녀>에서는 장교가 쓴 비버 펠트모자를 둘러싼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당시 유럽에서는 비버의 모피로 만든 모자는 부의 상징이었습니다. 그러다보니 16세기 유럽에서는 이미 남획과 서식지 파괴로 비버가 멸종되고 말았던 것입니다, 하지만 16세기말 들어 시베리아와 캐나다가 새로운 비버 모피의 공급지로 부상하게 되었습니다. 공급선이 불안정했던 시베리아보다는 캐나다가 더 각광을 받았습니다. 캐나다산 비버모피를 구하려면 서로 입장이 다른 아메리카 원주민들과의 협상이 필요했던 것 같습니다. 캐나다 동부를 차지한 프랑스가 적대적인 모호크족을 제압하기 위하여 휴런족을 비롯한 다른 이로쿼이족을 연합시켜 모호크족에 대항하게 만든 역사적 사실 등을 소개합니다.


<열린 창가에서 편지를 읽는 젊은 여인>에 등장하는 중국산 과일접시를 두고는 VOC가 동방무역을 주도하던 포르투갈 등과 벌인 주도면밀한 싸움 과정을 소개합니다. 처음에는 포르투갈과 스페인의 무역선을 약탈하다가 교역은 어느 나라가 독점할 권리가 없다는 주장을 펼쳤다고 합니다. 초기에는 중국에서 만든 자기가 유럽으로 건너가다가 점차 유럽 사람들의 취향을 맞춘 자기를 대량생산해서 보내는 유연성을 보였다니 중국인들의 유연성이 놀랍기만 합니다.


<지리학자>에서는 당시 네덜란드에서 중요시하던 세계지도의 필요성을 설명합니다. 1569년 자신의 이름을 붙인 ‘메르카토르 도법’을 이용한 세계지도를 발표하여 장거리항해에 크게 도움을 준 메르카토르가 네덜란드의 루벵 출신인 것도 참고가 되겠습니다. <지리학자>편에서는 아시아지역의 바다를 주름잡던 유럽 배의 활약이 그려지기도 합니다. 크게 주목을 받지 못한 것 같습니다만, 이 무렵 우리나라에도 표류해온 외국인들이 적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중국인이나 일본인의 경우는 해당국가로 송환토록 조처하였지만, 기타 외국인의 경우는 별도 조처가 없었던 모양입니다. 인조 5년(1627년)에 제주도에 표류해왔다가 귀화하여 박연이라는 이름으로 살았던 온 얀 야너스 벨테브레이(Jan Jansz Weltevree)나 효종4년(1653년)에 표류해왔다가 탈출한 하멜 등이 네덜란드 출신으로 일찍이 우리나라가 네덜란드와 인연을 맺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나가사키의 데지마를 열어 네덜란드와 교역을 했던 일본과는 달리 청나라의 엄중한 감시를 받고 있던 우리나라의 경우는 쇄국정책을 폐할 수가 없었던 것 같습니다. 벨테브레이에 관한 이야기는 흑인소년의 모습을 담은 헨드리크 반 데르 부르흐의 <카드놀이>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작가미상의 접시는 중국화원의 풍경을 담고 있는데, 이 접시는 중국에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델프트에서 생산된 것이라고 합니다. 비싼 중국자기의 대체상품으로 인기를 끌었다고 하는데, 이런 사실에 더하여 담배가 확산된 흐름을 뒤쫓고 있습니다. 아메리카대륙에서 건너온 담배는 생각보다 빠르게 전 세계로 퍼져나갔던 모양입니다. 아메리카 원주민이 현실세계에서 초현실세계로 이동해 영혼과 대화하기 위한 목적으로 피우던 담배가 유럽대륙으로 건너간 것은 1550년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1596년 중국의 지방관청의 구매목록에 등장하고, 일본에는 1605년에, 조선에는 그 이후에 들어온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고 합니다. <저울을 든 여인>에서는 은을 주제로 하여 페루의 포토시광산과 일본에서 생산된 은을 매개로 중국산 상품을 구입해 유럽으로 보내던 17세기 무역의 구조를 읽을 수 있습니다.


정리를 해보면, 베르메르의 작품에 대한 이해를 높이고, 왜란과 호란으로 피폐했던 17세기 무렵 조선의 강역을 조금 벗어난 동아시아에서는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알게 해준 책읽기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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