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라하 거리에서 울고 다니는 여자
실비 제르맹 지음, 김화영 옮김 / 문학동네 / 200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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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프라하를 다녀온 탓도 있지만, <프라하 거리에서 울고 다니는 여자>라는 제목이 주는 묘한 분위기 때문에 읽게 되었습니다. 도대체 그녀는 누구이고, 왜 울면서 거리를 누비고 다니는지 궁금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프롤로그를 열면 ‘그 여자가 책 속으로 들어왔다.’라고 시작합니다. 마찬가지로 ‘에필로그’ 역시 ‘그 여자는 책에서 밖으로 나갔다.’라고 적었습니다. 그렇다면 그녀는 누구인가? 엄청나게 크고, 심하게 다리를 절며, 거친 천을 아무렇게나 재단한 옷을 걸치고 다니는 그녀는 누구인가 궁금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프라하의 곳곳에서 열두 번에 걸쳐 나타나 울고 다닌 ‘그녀의 나타남의 연대기’를 통하여 그녀의 실체에 접근해갑니다. 그러니까 이 책은 그녀의 발자국들로만 이루어진 것인데, ‘그녀의 발걸음 속에 부는 잉크의 바람에 불려 낱말들이 허리를 구부리며 간신히 균형을 잡고, 망각의 경계에 이른 기억 속에 깊이 파묻혀 있던 이미지들의 뿌리가 뽑힌(17쪽)’ 결과인 것입니다.


두 번째 만남에서 작가는 그녀의 정체를 드러냅니다. ‘걸음걸이가 보기 흉하고 어깨가 엄청나게 떡 벌어진 그 여자는 살과 피가 아니라, 눈물로, 오직 눈물만으로 된 존재였다. 그녀는 한 여자에게서가 아니라 모든 남자 모든 여자의 고통에서 태어났다.(36쪽)’ 그렇다면 그녀가 존재하게 한 모든 사람들의 고통은 어디로부터 기인한 것일까? 백주 대낮에 등에 총알을 맞고 죽은 브루노 슐츠라는 사람이 일생 동안 수백통의 편지를 쓰고, 그림을 그리고 데생과 판화를 하고 여러 권의 책을 썼던 것인데, 갑자기 사라진 수백 통의 편지들이 갑자기 중얼거리기 시작하여 편지를 쓴 사람의 목소리가, 그리고 그 편지들을 읽은 모든 남자 여자들이 침묵과 망각으로부터 벗어나도록 한 것입니다. 그 오래된 목소리들, 부서진 말들의 생명을 되살려놓은 것이 바로 그 여자입니다.


브루노 슐츠는 노란별을 달지 않고 거리고 나갔기 때문에 총알을 맞았던 것이고, 그 여자는 슐츠가 옆구리에 끼고 있던 빵덩어리, 아니 빵덩어리의 먼지와 피의 맛을 긁어모았다고 하는 것을 보면 슐츠의 어머니가 아닐까 싶습니다. 그리고 나 슬로바네흐 수도원의 담장 아래 피어나는 꽃을 노래하던 프란타 바스의 시를 살려낸 것도 그녀입니다.


프라하의 돌틈에서 태어난 그녀는 도시의 기억, 특히 어두운 쪽의 기억이며,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의 기억, 역사가 그 이름을 기억하지 못하고 그 고통을 잊어버린 남자 여자들의 기억이라고 작가는 정리합니다. 그렇기에 그녀는 도시를 떠날 수 없었고 영원히 버리지 않을 것 같았는데, 열두 번의 등장을 끝으로 사라졌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 여자는 도시가 아니라 가시적인 것을 떠났을 뿐이라고 말합니다. 그녀는 다시금 나무껍질 속우로, 나무뿌리 속으로, 포도의 아스팔트 밑으로 스며들어갔던 것입니다.


이번에 프라하를 찾았을 때 유대교의 교회당 시나고그와 그들을 모아 살게 했던 게토지역을 찾아 나섰던 것인데, 자유시간, 아니 천문시계가 울리는 시간에 쫓겨 광장으로 되돌아와야 했기에 중간에서 포기한 것이 안타깝습니다. 핀카소바 시나고그에는 2차 세계대전 중 나치의 손에 죽은 7만7297명의 체코계 유대인들의 이름이 벽면 가득 적혀있고, 클라우소바 시나고그에는 나치의 테레진 수용소에 강제 수용되었던 어린아이들의 그림과 글들, 장난감, 책가방과 도시락 가방 등을 전시하고 있다고 합니다. 아무래도 다음에 프라하를 다시 찾게 되면 그녀를 찾아보게 될 것 같습니다.


작가인 실비 제르맹은 독특하고 아름다운 문체로, 역사에 뿌리를 둔 구체적이면서도 상상력 가득한 작품 세계를 구축해왔다고 소개되었는데, 옮긴이는 ‘그의 소설에서는 가족과 마을과 나라의 집단적 기억, 몽환적인 이미지들로 점철된 기억이 작가의 깊이를 알 수 없는 무의식으로부터 솟아오르곤 하는 것 같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녀의 작품은 소리를 내어 시를 읽듯 읽어야 제 맛이 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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