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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의 위안부 - 식민지지배와 기억의 투쟁, 제2판 34곳 삭제판
박유하 지음 / 뿌리와이파리 / 2015년 6월
평점 :
품절
최근 일본이 지나치게 우경화하는 경향이 있다고들 합니다. 세상에는 절로 되는 일도 있지만 대체적으로는 무언가 꼬투리가 있어서 일어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작용 반작용의 법칙’은 ‘모든 작용에 대하여 항상 방향이 반대이고 크기가 같은 반작용이 따른다’라는 뉴턴의 3번째 운동법칙, ‘작용 반작용의 법칙’은 물리학의 범주를 뛰어넘어 인간사에도 적용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드는 이유입니다.
일본의 우익들의 주장 가운데 우리나라와 관련된 독도 문제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군 위안부 문제가 두 나라 관계를 어렵게 만들고 있는 것 같습니다. 독도문제는 이미 우리나라의 영토라서 공개적으로 논쟁하는 것 자체로서 분쟁지역임을 인정하는 꼴이 된다는 주장이 있었던 것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부의 대응이 미온적이라는 목소리가 높아지면서 점점 일본의 꼼수에 말려드는 것 같다는 생각입니다.
일본군 위안부 문제의 핵심은 ‘일본군이 강제 동원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일본 정부의 공식적인 사과와 적절한 배상을 요구한다’라고 알고 있습니다. 일본군이 강제동원했다면 일본 군인들이 조선여성들을 강제로 연행하여 전선에 있는 일본군 위안소로 끌고 갔다는 이야기가 되는데 그런 일이 가능할까 하는 의문이 들기도 합니다.
연초에 [북소리]에서 페루 작가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의 <판탈레온과 특별봉사대; http://blog.joins.com/yang412/13829357>를 소개한 적이 있습니다. 아마존 지역에 주둔한 페루 군인들이 민간여성들을 성폭행하는 일이 잦아지면서 페루 육군이 위안소를 직접 운영하면서 벌어진 사건의 전말을 담은 고발적 성격을 띤 작품입니다. 그때 일본군이 운영한 위안소의 실태를 조금 살펴볼 기회가 있었던 것입니다. 페루 육군이 직영했다는 군 위안부 문제를 우리나라에서 인용하지 못하는 이유가 어디에 있는지 생각하게 만드는 점도 있었습니다. 일본군 위안부다루었다는 박유하교수의 <제국의 위안부>를 읽고 [북소리]에서 소개하게 된 것은 장정일 작가의 책 <장정일, 작가; http://blog.joins.com/yang412/13836270> 덕분입니다. 제가 가끔씩 내세우는 꼬리를 무는 책읽기의 좋은 사례인 셈입니다.
<장정일, 작가>에서는 43편의 다양한 분야의 책을 낸 저자들을 직접 인터뷰하고, 저자가 책에 담아내고자 했던 생각의 바탕을 정리하고 있습니다. 작가 나름대로 작품의 순서를 골랐겠지만, 아무래도 중요한 작품들을 앞에 두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그런 점에서 <제국의 위안부>는 두 번째로 소개되어 있고, 특히 「‘진실’에는 ‘진실’이라는 값어치가 있다」라는 글제목이 마음이 와 닿았기에 읽어보았고, 나아가 [북소리]에서도 소개하게 된 것입니다. 마중물을 너무 부었나 봅니다. 그러면 장정일 작가가 인터뷰한 내용을 포함해서 <제국의 위안부>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작가를 소개하면, 세종대학에서 일문학을 가르치는 박유하교수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일본에 가서 게이오대학과 와세다대학 대학원에서 일본문학을 전공하였습니다. 귀국하여 세종대학에서 재직하면서 근현대 일본 문학과 사상을 소개하는 한편, 일본 근대문학을 비판적으로 재해석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한일 양국이 참된 화해를 통하여 진정한 관계를 맺기 위한 활동을 펼치고 있다고 합니다.
제가 읽은 <제국의 위안부>는 2015년에 나온 개정판입니다. 책을 읽다보면 곳곳에서 OOOO으로 표기된 부분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서문을 읽어 그 이유를 알고는 있습니다만, 공연히 짜증이 치밀었던 것 같습니다. 표현의 자유를 주장하면서도 타인의 자유는 제한하려는 우리네 속된 욕망에 법이 장단을 맞추고 있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서입니다.
사정은 이렇습니다. <제국의 위안부> 초판은 2013년 8월에 나왔던 것인데, 열 달 뒤에 위안부 할머니 아홉 분의 이름으로 책의 판매 금지, 위안부 할머니들에 대한 접근 금지를 요구하는 가처분신청이 제기되었습니다. ‘허위’ 사실을 적시하여 위안부 할머니들의 ‘명예를 훼손’했다는 것입니다. 다시 여덟 달 뒤 재판부는 가처분신청을 ‘일부 인용’하여, 원고 측에서 수정 신청한 53곳 가운데 34곳을 “삭제하지 아니하고는 출판…해서는 아니 된다”는 결정을 내렸습니다. 이에 지은이와 출판사는 재판부의 결정에 승복할 수 없어 이의신청을 내고, ‘자유로운 토론과 비판’이 있는 공론의 장을 위해 우선 삭제판을 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OOOO으로 표기된 부분에 대한 표현의 자유에 대하여 추가로 논의될 것으로 보입니다만, 책을 읽는 입장에서는 우선 궁금해지는 것도 사실입니다. 초판을 구해서 읽고 [북소리]에서 소개함이 옳겠지만, 그 부분에 대하여는 장정일 작가가 말하는 “‘진실’에는 ‘진실’이라는 값어치가 있다”라는 생각에 무게를 두었다고 말씀드리겠습니다. 물론 장정일 작가의 경우도 표현과 관련하여 사법적 판단을 받은 적이 있어서 일종의 편견 같은 것이 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제국의 위안부>에 이의를 제기하는 측에서 ‘박유하의 논리를 일본 우익이 좋아한다!’라는 감정이 논리보다는 앞세우는 것 아닌가 하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일본군의 위안소 운영은 1932년 상하이 사변(上海事變) 무렵으로 거슬러 올라간다고 합니다. 당시 일본군이 민간여성을 강간하는 일이 잦아지면서 오카무라 야스지(岡村) 중장은 나가사키(長崎)의 지사에게 군대위안부 유치를 요청하였다고 합니다. 점령지 민간인의 반발을 잠재울 뿐만 아니라 성병의 위험을 방지하는 이중의 효과를 노린 셈입니다. 여기에서 나가사키지사에게 요청했다는 점이 눈에 띄는 점입니다. 일본은 일찍부터 공창제도를 인정해왔기 때문에 이를 전선으로 차출한다는 개념을 가졌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전선이 확대되면서 자국 여성의 동원이 한계에 부딪혔고, 이미 한일합병 이후 조선의 여성을 일본으로 팔아넘겨 매춘행위를 시키는 일이 흔했다는 사실을 고려해보면 조선여성으로 부족한 위안부 소요를 채운다는 생각을 쉽게 할 수 있었으리라 짐작됩니다. 전쟁 중에 내선일체라는 허울 좋은 명목으로 조선의 모든 자원을 총동원하고 있었으니 말입니다.
여기에서 문제의 핵심이 되는 ‘일본군이 위안부를 강제로 동원했는가?’하는 점에 관해서는 저자는 구조적 강제성은 분명 있었다고 보지만 물리적 강제연행은 흔치 않았을 것이라는 입장을 취하고 있습니다. 일본인 업자가 조선인 모집책을 내세워서 순진한 조선 여성들을 속여서 전선으로 끌고 갔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라고 합니다. 저자의 주장이 위안부 지원 단체의 반발을 불러온 근본적인 이유는 일본군과 조선인 위안부가 ‘동지적 관계’였다고 적은 데 있다고 합니다. 저자가 굳이 이 용어를 사용한 것은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당시 국제법상 조선과 일본은 합병된 상태였다는 점과 그렇다면 위안부의 보상 요구가 가능할 수 있을 것이라는 점입니다.
한국과 일본 사이에 개인 보상에 관한 문제가 거론될 때 걸림돌이 되는 것은 한일수교와 관련한 대일청구권은 일괄 타결된 것으로 본다는 국제규약입니다. 대일청구권은 샌프란시스코 조약에 기반을 둔 전쟁보상금의 성격을 띠고 있는 것이라고 저자는 보고 있습니다. 당시 우리나라는 상해임시정부가 있었다고는 하지만, 승전국의 일원으로 샌프란시스코회담에 참여하지 못했기 때문에 전쟁보상금을 청구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따라서 샌프란시스코조약에 기반을 둔 대일청구권의 범위는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는 점입니다. 그리고 일제의 식민지배에 대한 배상문제에 관해서는 근세에 식민지를 경영한 제국주의 국가들이 식민지배에 대하여 배상한 바가 없다는 국제적인 통례에 따라 언급하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일본정부가 전쟁기간 중에 일본국민이 받은 피해를 구제하는 방식으로 접근하는 것이 오히려 가능할 수 있겠다는 생각으로 보입니다.
지원단체가 반발하게 된 배경에 대한 설명도 충분한 것 같습니다. 한국이나 일본에서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지원 단체는 주로 진보적 경향을 띄고 있다는 것입니다. 특히 일본의 경우에는 조선인 위안부 문제를 ‘제국 일본’이 국민동원의 연장선상에서 발생한 것으로 보고 비판에 나선 것이고, 뒤늦게 문제화된 것은 ‘전후 일본’의 문제라고 인식한 것입니다. 즉, ‘제국 일본’의 비판이 ‘전후 일본’의 비판으로 선회하면서 ‘현대 일본’을 살아온 일본 국민의 가치관을 다시 묻고 확인하고자 하는 운동으로 확산되면서 천황제도에 대한 문제제기에 이르게 되면서 우익의 반발을 불러온 것이라는 주장입니다.
한국의 위안부 지원활동에 있어서 드러나지 않은 문제도 지적하고 있습니다. 우선은 일본군 위안부와 근로정신대를 혼동한 정황이 드러나고 있다는 것입니다. 조선여자근로정신대(朝鮮女子勤勞挺身隊)는 일제 강점기 말인 1944년 8월 23일에 공포된 여자정신근로령에 근거하여 조직된 태평양 전쟁 지원 조직으로 일본은 물론 식민지 조선과 대만에도 적용되었던 것입니다. 근로정신대로 동원된 여성은 20만 명으로 그 가운데 조선여성은 5만에서 7만 명에 달한다고 합니다. 조선여자근로정신대는 관청의 알선, 공개 모집, 자발적인 지원, 학교나 단체를 통한 선전 등 다양한 방식을 통하여 12세 이상 40세 미만의 배우자가 없는 조선 여성을 모집하여 주로 군수공장 등에 투입되었지만, 임금을 전혀 주지 않고 강제로 노동을 시킨 경우도 허다했던 모양입니다. 이 분들은 일본군 위안부 경력자로 오해받을까봐서 쉬쉬하면서 살아왔고, 훗날 보상청구마저도 기피하였다고 합니다.(위키 백과, ‘조선여자근로정신대’ 참조; https://ko.wikipedia.org/wiki/조선여자근로정신대) 일제 강점기의 사정에 밝지 못한 세대에서 문제를 제기하려다 보니 개념을 혼동한 바 있고, 이런 사실이 알려진 다음에도 바로 잡으려는 노력에 소홀한 점이 있었다고 합니다.
일본군 위안부의 지원 단체는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정대협)만 있는 줄 알았는데, 부산에도 비슷한 성격의 단체가 있다고 합니다. 뿐만 아니라 부산 정대협의 입장은 서울 정대협의 입장과는 차이가 있다고 합니다. 서울 정대협에서는 “일본 정부는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에게 공식 사죄하고 법적 배상하라!!”라고 주장해오고 있으며, 최근 세계 1억인 서명운동을 전개하였다고 합니다. 1995년 일본은 중의원 본회의에서 「역사를 교훈 삼아 새로운 평화를 위한 결의를 다지는 결의」를 채택하고 일본 정부의 주도로 ‘여성을 위한 아시아 평화 국민기금’을 발족하였습니다. 우리나라의 지원 단체는 이 기금이 민간기금이라는 이유로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만, 기금의 상당부분은 정부가 제공한 것이라고 합니다. 어떻든 ‘기금’은 한 사람당 200만엔의 보상금과 총리의 편지 그리고 한 사람당 300만엔에 달하는 의료복지사업을 실시하기로 하였습니다. 기금은 2002년까지 필리핀, 대만 그리고 한국의 위안부 피해자 285명에 대하여 보상금 지급을 완료하고 해산하였다고 합니다. 우리나라에서도 모두 61명이 보상을 받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런 정황은 제대로 알려지지 않고 보상거부 운동만이 주목받고 있는 실정입니다.
이런 과정이 진행되는 동안 일부 위안부 피해자는 지원단체가 피해자를 이용해서 권력을 얻으려는 속셈이 아니냐는 반발도 있다고 합니다. 실제로 위안부 지원활동을 했던 이들 중에 상을 받거나, 장관이 되거나 국회의원이 된 경우가 많다고 합니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피해자들은 자신들이 이런 사람들을 위한 ‘앵벌이’로 전락하여 두 번 피해를 입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습니다.
저자는 이제는 위안부 피해여성들이 노령화되어 숫자도 빠르게 줄어들고 있으며, 이들의 기억도 쇠잔해지는 상황을 걱정하며, 지원 단체의 외골수적인 주장이 오히려 일본 국민들은 물론 세계인들이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왜곡되게 받아들이는 것 아닌가 우려하고 있습니다. 궁극적으로는 문제를 해결하고 두 나라가 발전적인 미래를 지향하는 것이 이 시점에서의 옳은 선택이 아닐까 싶습니다. 사실을 사실로 인식하고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노력을 기울여야 하겠습니다. 그런 점에서 문제를 바로 보게 하는 계기를 만들기 위하여 쉽지 않은 용기를 낸 저자에게 박수를 보냅니다.
[매주 월요일 인터넷 신문 라포르시안의 [양기화의 북소리]에서 소개하고자 하였지만, 불행하게도 기사화되지 못한 리뷰입니다. 데스크의 결정에 따르면서도 개운하지만은 않습니다.]